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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대 한류로서 `갑옷 문화`의 국제적 위상

lionet 2011. 12. 31. 20:36

 브레이크뉴스  2011-12-31 10:05 작성 | 생활/문화

 

1. 고조선복식과 갑옷을 보는 주체적인 시각

 
일반적으로 한류는 한국의 드라마, 대중음악, 영화 등의 대중문화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로 수출되고 인기를 얻는 문화현상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한류의 시작 시기는 1997년경으로 잡는다. 그러나 우리문화가 이웃나라에 영향을 준 것을 한류라고 일컫는다면, 역사적으로 한류현상은 지금 우리시대에 비로소 나타난 일이 아니라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문화현상이었다.

 

▲ 박선희   교수©브레이크뉴스
특히 고조선의 복식분야는 높은 수준을 이루어서 이웃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고조선은 가죽과 모피, 모직물, 실크, 마직물, 면직물 등의 복식재료들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독자적으로 생산하여 복식문화의 우수성을 뒷받침했다. 고조선의 복식재료들은 품질이 우수하여 주변나라와 중요한 교역상품 구실을 했다. 고조선의 우수한 복식재료들이 중국에서는 지배계층에서만 주로 사용되었으나 고조선에서는 이미 대중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직물재료를 기초로 한 고조선의 복식은 화려한 장신구들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자연히 고조선 복식은 한류를 형성하고 이웃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고조선 복식 가운데도 갑옷의 품질은 특히 우뚝하다. 이웃나라에 미친 갑옷의 영향은 오늘의 한류 못지않았다. 고조선의 갑옷은 여러 모로 우수하고 이웃나라에 비해 기술적으로 앞섰을 뿐 아니라 그 전통이 계속 이어져 고대 우리 민족 갑옷의 전형을 이루었다. 그런데도 마치 고대의 우리 갑옷은 중국에 뒤떨어진 것처럼 인식되고 아예 중국 갑옷 기술을 수입해서 만든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역사 드라마에는 그러한 왜곡이 심각하다. 복식연구의 해석과 고증이 잘못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고대에 존재했던 복식분야의 한류현상 가운데 고조선의 갑옷을 중심으로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밝혀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고조선의 갑옷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고조선의 복식 수준이 매우 높았는데도, 고조선에서 훌륭하고 다양한 종류의 갑옷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생산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편견 때문에 갑옷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에나 생산되었던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이전에는 고대 한민족이 북방지역으로부터 문화를 수입해 발전했던 것으로 믿어왔다. 따라서 사국시대에 착용한 갑옷들은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된 것이 아니라, 그 원류가 북방유목민의 무장형태에 있다거나, 중국문물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보는가 하면 북방계통의 무장모습을 기본으로 하고 중국계통의 무장방법을 들여와 복합적으로 형성시킨 것으로 보기도 했다. 더구나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들을 그들의 문화적 소산이며 나아가 한반도 남부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 또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일본학계의 통설로 되어 있으며‘任那日本府’설을 방증하려는 하나의 근거로 삼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미 한국과 중국 및 북방지역의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강역으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 지역에서 출토된 고조선의 갑옷 조각이나 투구 등의 유물들을 북방민족이나 중국의 것으로 고정관념처럼 인식해 왔기 때문에 고조선 갑옷의 실체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문헌자료와 고조선의 강역에서 출토된 갑옷과 관련된 유물자료를 중국 및 북방지역의 것들과 비교분석하여 한민족 갑옷의 원형을 제시하고 그 독창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글의 후속으로 이어지는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2)(3)(4)를 통해 고조선 갑옷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여러나라시대의 갑옷을 중국 및 북방지역의 것과 비교해서 상대적 우수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나라시대 갑옷의 기원에 대한 종래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을 것이며, 아울러 중국과 북방지역 및 일본의 갑옷생산이 고조선시대부터 한민족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새로 밝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학계의 통설도 비판적으로 극복될 것이다.

 고조선 갑옷의 독창성에 관한 연구결과는 복식 일반으로 확산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조선의 여러 문화 영역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일반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갑옷처럼 고조선 문화가 가장 발전하였던 까닭에 중국과 북방지역은 물론 일본에까지 여러 모로 영향을 미쳤다면, 이것이야말로 고대의 한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한민족 문화가 창출한 한류는 최근에 비로소 만들어진 새로운 흐름이 아니라, 이미 고조선시대부터 동아시아의 문화중심지로서 한류의 뿌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조선 갑옷문화의 우수성을 밝히는 이 글은‘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고 하는 실증적 연구의 한 사례일 따름이다. 앞으로 복식문화 일반으로 확장하는 후속 연구가 이어지면, 복식문화와 더불어 고대문화 일반의 우수성과 그 영향력을 입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고조선 갑옷이 중국에 준 영향

   고조선의 유적들 곳곳에서 청동이나 철로 만든 여러 종류의 공격무기와 방패 및  투구 등과 같은 방어무기와 함께 뼈나 청동 또는 철로 만든 갑옷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고조선이 발달된 무기와 방어 장비를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갑옷은 뼈와 가죽으로 만든 것이 가장 먼저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고조선의 영역에서 출토된 골갑편(骨甲片) 가운데 가장 이른 연대의 것은 신석기시대 후기유적들인 흑룡강성의 망해둔(望海屯)유적과 대모단둔(大牡丹屯)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그 형태는 긴네모모양이다. 고고발굴에 의해, 한반도와 만주에는 구석기시대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해왔다는 견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흑룡강성 지역은 한민족의 오랜 거주지였다고 하겠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경에 신석기시대가, 서기 전 2500년경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 후기에 속하는 위의 두 유적은 한민족이 적어도 서기 전 25세기보다 훨씬 앞서 뼈로 만든 갑옷을 생산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뼈갑옷은 이후 고조선의 대부분 지역에서 계속해서 생산되었음을 다음의 분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의 서기 전 2000년기 후반기 유적에 속하는 함경북도 무산 범의구석유적 40호 집자리에서는 동물의 뼈를 얇게 갈아 긴네모모양으로 만든 두 쪽의 뼈갑편이 발굴되었다. 문헌자료로는, 고조선의 영역에 있던 숙신(肅愼)에서 가죽과 뼈로 갑옷을 만들었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즉 󰡔晋書󰡕  「東夷列傳」의 肅愼氏傳에는 “(숙신에는)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布를 만들었다.…… 석노(石砮)와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이 있고, 단궁(檀弓)은 3자 5치이며, 고시(楛矢)의 길이는 1자가 조금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숙신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요녕성 접경인 적봉시(赤峰市)의 하가점(夏家店)상층유적에서는 2개의 긴네모모양 뼈갑편이 출토되었다. 이 뼈갑편이 출토된 하가점상층유적은 고조선문화의 특징인 비파형동검문화에 속한다. 그리고 서기 전 2500년경〜서기 전 1500년경에 속하는 고조선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하가점상층문화기는 서기 전 1500년 무렵에서 철기시대 이전에 속한다. 따라서 숙신이 뼈 갑옷을 생산한 시대는 하가점상층문화보다도 앞설 것이다. 또한 흑룡강성 경화(慶華)유적에서 긴네모모양의 뼈갑편 4점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전국초기에서 서한 말기(서기 전 9세기〜서기 3세기)에 속한다. 흑룡강성지역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 요서지역에 있었던 북부여가 서기 전 59년 지금의 길림성 부여현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동부여라는 새로운 국명을 사용하여 정착했던 곳이다.

 고조선문화권의 뼈갑편은 긴네모모양을 특징으로 했다. 이와 달리 중국에서는 뼈갑옷을 생산했다는 문헌 기록이 없고 아직까지 유물이 출토된 적도 없다. 따라서 이곳에서 발굴된 뼈갑편은 고조선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조선은 건국초기부터 여러 지역에서 뼈 갑옷을 만들었으며, 붕괴될 때까지 줄곧 생산했던 것이다.

 이제 가죽갑옷에 대해서 살펴보자. 󰡔진서(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숙신씨전(肅愼氏傳)은 앞의 돌화살, 가죽과 뼈 갑옷, 단궁, 호시에 관한 내용에 이어 “주무왕때 그 고시(楛矢)와 석노를 바쳤다.…위 경원 말경에 고시‧석노‧궁·갑‧초피(貂皮) 등을 바쳤다”고 기재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부터 숙신은 서주 초와 조위(曹魏) 때에도 가죽 갑옷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교적 후대의 기록이다. 그러나 숙신은 중국의 동북쪽에 거주했던 종족 가운데 가장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를 가졌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 따르면, 중국의 제순(帝舜) 25년(서기 전 2209년)에 숙신의 사신이 중국을 방문했다. 그 후 서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자(서기 전 12세기〜서기 전 11세기 경) 숙신의 사신이 서주를 방문하면서 고(楛)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화살촉을 가져갔는데, 武王은 그의 딸이 우호공(虞胡公)과 결혼할 때 그 화살에 ‘숙신이 보낸 화살’이라는 글을 새겨 기념으로 준 바 있다. 이는 숙신이 만든 화살과 돌화살촉이 우수한 품질을 갖추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생산연대는 서기 전 11세기경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무기들과 함께 생산한 가죽갑옷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된다. 숙신에서 생산한 뼈갑옷의 생산시기가 신석기 후기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가죽갑옷의 생산시기도 매우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경우 가장 이른 연대의 것은 안양(安陽) 후가장(侯家莊) 서북강(西北岡) 1004호 상왕조의 묘에서 출토된 가죽갑옷이다. 1004호묘가 만들어진 시기는 서기 전 1300년경이며, 묘주는 무정(武丁)의 아들로 추정된다. 가죽갑옷의 모습은 앞가슴과 등 부분이 큰 조각의 두터운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어깨와 허리부분은 활동에 편리하도록 비교적 작은 긴네모모양의 갑편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필자는 이 갑옷의 형태와 문양 등을 분석하여 일찍부터 갑옷을 생산했던 고조선의 영향이거나 고조선으로부터의 수입품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밝힌바 있다. 고조선의 긴네모모양 갑편 형태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갑편 양식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고조선의 가죽갑편으로 만들어진 가죽갑옷은 고조선이 붕괴된 서기 전 1세기 이후에도 계속 생산되었으며 중국이 선호하는 귀중품이었다. 그 예로 숙신은 위(魏)나라 경원(景元) 말 경(서기 260〜263년)에도 고시(楛矢)‧석노(石砮)‧궁(弓)과 함께 갑옷을 중국에 예물로 보냈고, 대명(大明) 3년(서기 459년)에는 고구려가 중국에 숙신씨의 고시와 석노를 예물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고조선시대에 숙신이 생산한 무기와 방어 장비들이 그 뒤 오랫동안 계승되었으며 품질이 우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민족이 오랜 기간 동안 무기와 방어 장비들을 중국에 계속해서 수출하거나 예물로 보냈던 사실로 보아 중국의 무기와 갑옷생산에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은 언제부터 청동을 갑옷의 재료로 이용했을까? 1970년대 중국학자들은 서주시대 말기의 서기 전 9세기경의 유적인 위묘(衛墓)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크고 작은 청동장식단추를 방어용 갑옷에 달아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이를 중국 청동 갑옷의 기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이보다 앞선 시기의 여러 유적에서도 청동장식단추들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를 동포(銅泡)로 지칭했고, 이후 중국학자들은 이를 갑포(甲泡)로 분류했다. 이러한 출토 상황으로 보아 중국에서의 청동장식단추의 생산은 그 상한 연대를 상대 후기인 서기 전 11세기경으로 잡을 수 있다.

 고조선의 영역에서 발굴된 청동장식단추로 가장 연대가 앞서는 것은 서기 전 25세기에 해당하는, 평양부근 강동군 룡곡리 4호 고인돌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같은 청동기 초기에 속하는 길림성 대가산(大架山)유적에서도 청동장식단추가 출토되었다. 고조선의 청동장식단추 생산연대는 중국보다 매우 이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중국의 청동장식단추는 고조선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중국 商시대의 청동기가 고조선 초기의 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하가점하층문화에 대해 중국의 고고학자 장광직(張光直)는 그의 저서 󰡔Shang Civilization󰡕에서“상(商)에 인접한 최초의 금속사용 문화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상(商)의 가장 중요한 혁신 가운데 하나 [청동기 주조]의 최초 기원을 동부해안 쪽에서 찾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가 말하는 동부해안은 발해만으로 고조선의 영역이다.

   청동기 문화는 황하유역에서 서기 전 2200년경에 시작되었고, 고조선지역과 문화적으로 관련이 있는 시베리아의 카라수크문화는 서기 전 1200년경에 시작되었으며, 고조선은 서기 전 2500년경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고조선이 가장 이르다. 이는 중국의 청동단추 생산이 고조선의 영향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고조선 청동장식단추가 갖는 다음과 같은 고유한 특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중국의 경우 청동장식단추의 출토지가 매우 적다. 그러나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청동기 유적에서 다양한 크기와 문양의 청동장식단추들이 발견되고 있다. 둘째로 중국 청동장식단추의 모양이나 문양은 중국의 청동기나 질그릇 및 가락바퀴 등에서 볼 수 있는 상문화의 특색을 나타내는 문양과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고조선의 청동장식단추와 같다. 더우기 신석기시대부터 고조선 영역의 가락바퀴와 청동기 및 질그릇 등에 특징적으로 보이는 새김무늬의 모양을 나타내거나 혹은 고조선의 청동거울이나 비파형동검 검집에 나타나는 문양과 같은 잔줄문양 등을 보임으로써 고조선의 유물이 갖는 특징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 같은 청동장식단추는 고조선에서 의복뿐만 아니라 모자나 신발 또는 활집 등 복식의 여러 부분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예(濊)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입는 웃옷에 청동장식단추 형태의 약 5cm 이상이나 되는 은화(銀花)를 꿰매어 장식했다. 이는 화려한 장식이 가능했던 고조선만이 갖는 복식의 특징으로 중국이나 호(胡)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여러나라시대와 삼국시대로 이어진다.

 고조선의 경우 청동장식단추가 복식의 여러 부분에 다양하게 사용되었던 경우를 보면 청동 단추는 종래의 일반화된 분류처럼 장식품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꼼꼼히 살펴보면 청동장식단추가 소량일 때는 청동구슬 등과 함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겠으나 그 수량이 많을 때는 방어용 전의(戰衣)의 구성물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조선의 유적으로 누상 1호묘의 경우 청동장식단추 41점이 출토되었는데, 이 1호묘는 서쪽 유물 절반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이므로 더욱 많은 량의 청동장식단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청동장식단추들의 모양은 대체로 원반형이고 크기는 직경이 3〜8cm 정도였다. 이 청동장식단추들을 가지고 남은 40여개 정도를 최소치로 하여 필자가 실험해본 결과, 이를 옷에 매달았을 때 옷 표면을 거의 덮을 수 있기 때문에 갑옷으로서의 역할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복장은 청동의 빛나는 색상으로 인하여 전쟁터에서 위엄을 보이기도 했을 것이고 방어용 복장으로도 사용될 수 있으므로 청동갑옷의 초기 형태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청동투구에도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에는 청동장식단추가 사용되어 있어, 중국의 짐승얼굴모양 등을 특징으로 한 투구와는 크게 구별된다.

 이상과 같이 한국은 중국보다 앞선 서기 전 25세기에 청동장식단추로 장식된 복식을 착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갑옷과 투구에 응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는 서기 전 1800년경에 시작되므로, 중국과 북방민족들보다 앞서 고조선이 가장 이른 시기에 청동장식단추로 장식한 갑옷을 생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춘추시대에 해당하는, 내몽고자치구 유가거촌(劉家渠村)에서 고조선의 청동갑편이 출토되었다. 또 다른 예는 내몽고의 장성지대에서 발굴된 고조선의 소형 청동갑편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전국 말기에서 서한 초기의 유적으로 분류된 운남성 이가산묘(李家山墓)에서 청동으로 만들어진 개갑이 발굴되었다. 하나는 전체가 큰 청동편으로 구성된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내몽고 장성지대에서 발굴된 고조선의 것과 같은 모양의 긴네모모양의 작은 청동갑편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같은 예로 보아 고조선은 긴네모모양의 갑편을 특색으로 하는 뼈갑옷과 가죽갑옷의 형식을 청동갑옷에서도 지속했으며, 여기에 청동장식단추가 독립적으로 혹은 청동갑편과 병용되어 갑옷의 구성물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중국 역시 청동 갑편의 양식은 고조선의 영향을 받아 생산했던 긴네모모양 갑편의 양식을 그대로 지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갑(鐵甲)의 경우도 고조선의 철갑생산연대가 중국보다 훨씬 앞서 중국 철갑생산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조선시대에 한(韓)의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지역에서는 철이 생산되어 예(濊)와 마한 및 왜(倭) 등에서 이것을 사갔으며, 모든 무역에서 철을 화폐로 사용했다. 이는 한(韓)에서 철의 생산이 풍부했음을 의미하는데, 이 같은 풍부한 철의 생산은 철제의 무기와 갑옷의 생산을 보다 활발하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서기 전 3세기경 고조선 후기유적으로 추정되는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묘에서 찰갑이 출토되었다. 이 찰갑은 기본적으로 긴네모모양이지만, 그 아래쪽을 둥글린 것 등도 있으며, 물고기비늘과 같은 인갑(鱗甲)이었다. 이를 통해 고조선에서는 적어도 서기 전 3세기 이전부터 철갑옷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몽고자치구에 위치한 고조선 후기의 조로고윤성(朝魯庫倫城) 유적에서도 3개의 철갑편과 2개의 철단추가 출토되었다. 철갑편으로 분류된 5편 가운데 2개는 장식단추의 양식을 띠고 있어, 고조선에서 줄곧 사용했던 청동장식단추를 철로 만들어 철갑편과 함께 갑옷의 구성부분으로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요령성 적탑보자촌(滴塔堡子村)유적에서도 비파형동검과 부채꼴모양의 철도끼 등과 함께 고조선 갑편의 양식의 철주편(鐵冑片)이 출토되었다.

 이와달리 중국은 춘추시대까지 철갑을 생산하지 못했고 서한(西漢)에 와서야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한 초기인 무제(武帝)이전까지의 군대는 여전히 보병이 위주였으며 철갑이 크게 보급되지 못했다.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와의 전쟁으로 기병이 크게 증가했으며, 동시에 부분적인 갑옷을 벗어나 철제의 개갑(鎧甲)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가죽갑옷이 철갑옷보다 많이 사용되었다.

 고조선 철갑옷의 전체모습을 알 수 없어 위에서 분석된 중국 철갑편의 생산시기와 형태만을 고조선의 것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로 고조선의 철장식단추는 고조선이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인 서기 전 12세기경부터 생산되어 갑옷의 구성물로 사용되었다. 철장식단추 역시 청동장식단추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조선 갑옷만이 갖는 특징이다. 둘째로 고조선의 경우 물고기 비늘모양의 갑편이 발굴된 정백동유적이 서기 전 3세기경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현재까지 출토된 자료에 의하면 고조선에서 물고기 비늘모양갑옷이 생산된 시기가 중국에서 물고기 비늘모양갑옷이 생산된 서한 초기보다 훨씬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고조선 물고기 비늘모양갑옷의 형태는 긴네모모양인 것과 아래쪽이 둥근 네모모양과 타원형인 것이 특징인데, 중국의 서한 초기 묘들에서 발굴된 찰갑편의 형태는 대체로 고조선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제시기에 오면 비교적 세밀하고 아래쪽이 긴 타원형의 찰갑이 사용된다. 넷째로 고조선의 철갑편과 중국의 철갑편은 그 연결구멍에 차이를 갖는다. 또한 고조선의 갑편은 연결구멍을 쇠줄로 연결시켰으나 중국의 갑편은 가죽끈이나 비단 끈으로 연결했다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중국은 무제시기에 와서 군대에서 철갑의 기병이 큰 비중을 차지했고 또한 찰갑편의 형태도 고조선의 것과 같이 비교적 세밀하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고조선이 붕괴되어가는 시기로서 이 같은 무제시기 군대장비의 변화는 위만조선과 고조선을 붕괴시킨 한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제는 위만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낙랑‧임둔‧진번의 세군을 설치한 후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변경을 침략하여 그곳에 현도군을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고조선은 중국과 큰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철갑기병이 없었던 무제 이전의 대중국 전쟁과는 달리 그 피해가 매우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3. 고조선 갑옷의 우수성 재인식

 고대 한국 갑옷과 주변국의 비교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에 보이는 갑옷재료와 갑옷양식에서 동질성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동질성은 신석기시대부터 이어지는 고조선 지역의 토착문화로서,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의 갑옷 재료 및 양식과 구별된다. 따라서 갑옷만을 주목하더라도 고조선 시기의 한민족은 독자적 성격의 문화권을 형성한 사실을 포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고찰한 고조선의 갑옷양식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여러나라시대의 갑옷양식들은 고대 한민족에 의한 자생적 토착문화로서 자리 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고조선은 뼈갑옷·가죽갑옷·청동갑옷·철갑옷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한 나라일 뿐 아니라, 중국 갑옷에 영향을 준 나라이다. 여러나라시대의 갑옷과 말갑옷은 고조선의 갑옷양식을 계승하여 나라마다 다소 특징적으로 발전했으며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갑옷보다 훨씬 우수하였다. 따라서 중국과 북방지역은 물론 일본의 갑옷 생산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한 마디로 고대 갑옷은 모두 고조선 문화에서 확산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갑옷을 중심으로 복식사를 검토할 때, 고조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민족의 고대문화가 일정한 한류를 형성하며 동아시아 지역문화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론된다. 

 실제로 우리민족의 금속을 다루는 기술은 매우 발달하여, 청동기문화부터 주변국보다 훨씬 앞선 기술을 보여준다. 서기 전 2000년기에 속하는 중국의 청동유물과 같은 시기의 고조선의 청동유물을 비교한 결과, 서기 전 2000년기에 중국 청동기는 거의 자연동에 가까운 성분을 보이고 야련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으나, 고조선의 청동기들은 제각기 용도에 맞는 성분으로 석과 연의 함량이 배합되어 있었다.

 서기 전 16세기부터 서기 전 13세기까지의 중국 청동 유물을 보면, 동과 석 및 연의 합금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나, 연과 석의 비율이 너무 높거나 낮고, 석이나 연이 전혀 섞이지 않는 등 합금의 비율이 너무 높거나 낮고, 석이나 연이 전혀 석이지 않는 등 합금의 성분이 기물의 용도에 적합하지 못했다. 고조선 초기의 청동기들은 석과 함께 합금의 기계적 성질과 강도 및 연신율을 제고시키는 아연을 사용했으나 중국에서는 상시대까지 아연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서주초기부터 비로소 소량이 사용되기 시작하지만 청동의 질을 높이는 그 밖의 성분들, 곧 비소·안티몬·비스무트·코발트·은 등의 성분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정은 서한시대에 만들어진 청동갑편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서한의 청동갑편은 석의 함유량이 부족하고 연 등의 기타 성분도 보이지 않아 청동 주조 수준이 고조선에 미치지 못한다. 이 같은 청동가공기술은 비소를 많이 사용한 시베리아지역이나 독립국가연합지역과도 큰 차이가 있으므로, 고대 한국의 청동 가공기술은 중국이나 북방지역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철기 생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조선의 유적인 평양지역의 강동군 송석리 1호묘에서 서기 전 12세기경의 강철로 만든 쇠거울이 출토되었다. 강철은 연철이나 선철의 생산 공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고조선의 철기 생산 시작연대는 이보다 몇 백 년 정도 앞설 것이다. 중국에서는 전국 초기까지 생철이 그대로 생산되어 제철제강 수준은 거의 발달되지 않았다. 생철에서 주철로의 발전은 전국 중후기에 와서야 보편적으로 나타나지만, 연강기술은 여전히 초기 단계에 속하여 농기구 등에 강철 제품이 사용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조선은 같은 시기인 서기 전 6세기경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철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주철로부터 연철·선철·강철을 만들어 무기와 공구 및 농기구 등에 널리 사용했다. 그런데 중국은 서한시대에 와서야 주철생산 기술이 비교적 발달 하지만, 그 수준은 여전히 고조선에 미치지 못했다. 철은 탄소 성분의 함유량 정도에 따라 굳기와 세기가 달라지는데, 고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서한에 이르기 까지 중국 철기제품의 탄소 함유량은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철기 제품이 용도에 맞게 제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동한 중기에 이르러 제철제강 기술이 비교적 발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학계의 연구는 여전히 중국과 북방복식의 영향론을 펼치는 전파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계의 이러한 한계는 방송극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는 여러 방송사들의 역사 드라마들을 보면, 이러한 갑옷문화의 독자성은 물론 한민족의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고대문화의 독창성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까닭에 상당한 오류를 빚고 있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우리 철기 생산기술이 앞서는 데도 오히려 중국의 철기 생산기술이 더 우수한 것으로 여기고 우리 병영에서 중국 기술을 배워오는 것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보이는가 하면, 동부여의 철기군보다 중국의 철기군 갑옷을 더 우수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도 드라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삼국시대의 철기군이 나온다. 철기군의 병사와 말이 모두 갑옷을 입었는데 삼국시대의 실제 갑옷보다도 훨씬 수준 낮은 갑옷으로 무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중에서도 적의 화살에 쉽게 뚫리는 갑옷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어서 실제 사실과 다르다. 또 다른 드라마에서 고구려의 장군은 중국의 갑옷인 양당개를 입고 병사들은 고구려의 특징이 있는 갑옷을 입고 있어 모순을 낳고 있다. 물론 드라마제작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만을 다루거나 고증을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방송사들이 역사적 사실이나 문화적 사실과 달리 근거 없는 내용을 드라마로 방영하는 것은 시청자들에게 우리 역사와 고대문화를 왜곡되게 인식시킬 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들이 중국에서 방영될 경우 오히려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에 이바지할 수도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사용하던 갑옷은 고조선의 발달된 금속가공기술을 토대로 주로 철로 만든 찰갑을 철징으로 고정시킨 물고기 비늘모양 갑옷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신축성이 크고 화살이나 창으로부터 몸을 잘 보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주변국의 갑옷보다 경갑과 투구가 발달했고 청동징이나 철징이 달린 신발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여러 모로 군사 장비가 앞섰다. 따라서 드라마에서처럼 병사들이 입은 갑옷에 화살이나 칼, 창 등의 무기가 잘 꽂히는 것은 실제 사실과 맞지 않는 상황이며, 우리 고대 갑옷의 수준이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가 미치는 대중적 영향을 생각하면 실제 사실과 달리 우리 고대사를 미화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우리 고대사를 폄하해서도 안 될 것이다. 식민사관에 뿌리를 둔 우리 고대사 연구의 오랜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새로운 시각의 연구가 그러한 한계를 여러 모로 극복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연구 성과를 적극 반영해야 할 것이다. 우리 드라마가 이제 극 내용이 아니라 해외로까지 진출하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나 문화적 가치를 실제와 다르게 뒤떨어진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여간 문제가 아니다. 방송사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역사드라마는 그 자체로 새로운 한류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극적인 흥미 중심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극적인 내용이 담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한국문화의 수준이 정확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학계의 새로운 연구 성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류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역사학의 새로운 연구 성과와 창조적인 역사드라마가 유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이 모색되기를 기대한다.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한류포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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