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에서 나돌고 있는 유언비어들과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댓글을 통한 지적은 환영합니다만 근거 없는 비방이나 욕설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모든 분들이 헌법 정신의 함양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길 기대합니다.
그 전에,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폭도는 전두환입니다.
폭도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이 폭도라는 주장만큼 황당한 주장이 어딨습니까.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 습격을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이를 증명하는 영상이 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1.08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중화기와 무전기로 중무장했던 것은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1.13 시민군이 버스로 경찰을 압사하는 영상이 있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2.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전옥주 및 차명숙).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08 5·18민주화운동 당시 배후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신군부가 발표한 바 있다.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2.10 (1.10) 시민군은 당시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2.1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2.12 1985년 북한에서 발행된 '광주의 분노'라는 서적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
2.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의 존재를 아는 시민들은 극소수였다.
3.01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가 아닌 김대중의 석방에 불과했다.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5 고등법원 및 대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3.06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절도를 자행했다.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3.09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에 대한 공로가 없으므로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3.10 5·18민주화운동 당시에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3.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무력을 사용한 건 사실이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3.14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김대중 정부가 내린 편파적인 명칭이다.
3.15 5·18민주화운동 당시 최초 사망자는 시민(김경철)이 아닌 경찰이다.
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이같은 유언비어의 퍼져나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역사학도라는 한 극우인사의 황당한 주장에 있습니다.
역사학도에 따르면, 위 사진은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날인 20일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촬영한 영상(http://www.youtube.com/watch?v=Rq_qa1HhnBo)에서 가져온 캡쳐 사진입니다. 사실 역사학도는 힌츠페터가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들어 조총련 충복 노룻"을 했다며 영상 촬영 날짜의 신뢰성을 스스로 비하하고 있지만, 이를 떠나서 영상 어디에도 해당 영상이 20일에 촬영됐다는 코멘트는 보이지 않습니다. 힌츠페터는 5월 19일에 광주로 내려갔다가, 도쿄에 돌아간 뒤 5월 23일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 광주 시민들을 촬영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34715).
즉, 해당 영상은 광주시민들이 무장한 뒤인 23일 이후, 그리고 21일 (오후)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20일에 촬영됐다는 주장은 단순히 그가 19일에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세우는 황당한 추측일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상에서는 시민군이 발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역사학도가 올린 영상에 나와있는 총을 든 시위대의 모습은 21일 도청 발포 이후의 모습입니다. 다큐멘터리를 악의적으로 편집한 결과입니다. 이는 원본영상 (http://purmeice.tistory.com/175)의 3번 필름에 해당하는 영상으로, 원본 다큐멘터리에서도 21일 계엄군의 발포 이후에 "총기를 든 시민들이 나타났다."라며 총을 든 시민군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원본 영상을 그대로 짜깁기해서 진실을 왜곡하려는 저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할 때입니다.
또한 역사학도는 위 사진이 5월 19~20일 사이의 사진이라는 단서가 "[광주 시민]이 이미 5월 19일에 나주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에 따르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서 나주 경찰소의 무기 가져간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발포 다음입니다.
5월 21일 새벽 시민군이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했다는 점을 들어 시민군이 먼저 총기를 발포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자」에 시민군이 21일 새벽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한 기록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허나 「2군 계엄상황일지」에는 "실탄은 31사단에 보관"이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시민들은 단지 빈 총을 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총을 먼저 발사한 건 계엄군입니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를 보고 군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5월 20일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계엄군이 또다시 발포를 했습니다. 이 때 비무장 시민 두 명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계엄군의 총기 사용이 정당방위로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5월 21일 13시 공수부대가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이 시점 이후로 광주 시민들은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총기 사용 이전에, 청각 장애인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해 5월 19일 사망한 사례가 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73631).
즉, 최초의 사망자는 시민입니다. 경찰이 최초 사망자라 생각하는 분들은 이 글의 3.15를 읽어주세요.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를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습격을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만원에 의해 퍼지게 된 해괴한 논리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이 파출소들과 방위 상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려는 것은 시민군을 어떻게든 불순세력과 연관하려고 하는 비열한 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군부는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5·18민주화운동 이후 "간첩죄"나 "반공법"에 의한 죄목이 아닌 "내란죄"로 처벌했습니다. 신군부 입장에서도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간첩"으로 몰았을 때 진압의 정당성을 얻었을텐데 스스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불순분자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광주 내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는데 그 때 사용한 장갑차는 바로 시가전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KM900 장갑차입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닌 장륜(차륜형) 장갑차이죠. 이 차륜형 장갑차의 운전 방식은 일반적인 자동차의 운전 방식과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 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광주 시민들을 어떻게든 북한과 관련지으려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황당한 논리입니다.
현재 5·18묘지에 5구의 신원미상의 시체가 묻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하지만 그것이 북한 개입설을 정당화하지는 못 합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직후에는 무려 30명에 달하는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3/2012110300062.html)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중 6명도 아직 신원 미상입니다(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8/2008021801357.html). 신원 미상자가 있다해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대구 지하철 참사가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듯, 근거가 없으므로 신원미상의 시체가 북한군의 시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우선 시민군이 도청에 TNT를 설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이상한 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 2. TNT 설치는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다.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따르면(http://cafe.naver.com/enatur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1), 당시 다이너마이트 설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 씨 등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광업소에서 근무하던 분에게 다이너마이트 설치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TNT 설치가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라는 논리를 살펴봅시다. 위에서 언급했던 5.18 正史에 기록된 신만식 씨의 증언입니다. 신만식 씨 역시 화순 광업소 다이너마이트 유출 작업에 참여한 분입니다.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는 단순한 위협용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전남도청을 폭파할 의도가 있었다면 도화선을 연결했을텐데 시민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화선 자체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로는 온건파의 요청에 의해 폭약 제거를 시도한 배승일 씨에 대한 명예회복 판결이 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116104502&Section=03). 뉴스 기사에 따르면, 배승일 씨는 당시 뇌관을 제거했습니다(아래에 신관을 제거했다는 내용은 신관을 뇌관과 혼용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시민군에서 폭약을 관리했던 양홍범 씨 역시 뇌관 작업을 먼저 실시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52):
"5월 25일경 문영동씨의 지원요청을 받은 상무대에서는 문관 한 명을 폭약담당반으로 보내왔다. 지하실에는 상당량의 TNT 뇌관이 있었는데 25일 하루 동안 나를 제외한 4명은 문관과 함께 뇌관분리를 했다.
5월 26일 역시 나는 수문장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고, 나의 동료들은 문관과 함께 뇌관분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젊은이 한 사람이 지하실로 왔다. 그 젊은이는 내가 처음 이곳을 들어올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 엿보였다. 그래서 나는 안에서 뇌관분리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사람은 뭔가 하려고 하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안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밖에서 일을 돕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하여 모두 그렇게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나는 그 젊은이와 함께 보초를 섰다."
만약 도화선이 있었더라면 도화선을 먼저 제거했을텐데 뇌관 제거 작업을 먼저 실시했다는 것은 시민군이 TNT를 실제 폭발용으로 사용했다고 보기 힘든 이유입니다. 실제로 도화선 제거 작업을 먼저 시작했다 하더라도, 첫째, TNT 8톤이 가지는 폭발력을 생각해보면 당시 광주 전체를 폭발 시킬만큼의 위력을 가졌다고 보기도 힘들며, 둘째, 무엇보다도 이들이 TNT를 설치함으로써 "광주를 전복하려" 시도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신만식 씨가 언급했듯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에 불과하였습니다.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이를 증명하는 영상이 있다.
말도 안 되는 거짓입니다.
우선, 먼저 사망한 쪽은 시민 측입니다. 목차 1.01를 봐주세요.
경찰이 시민 측에서 온 버스에 의해 사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http://cafe.daum.net/80518/N8mQ/40?docid=DKjbN8mQ4020031117052216)
"한편 이날 차량시위는 금남로에 이어 노동청 앞에서도 계속된다. 소위 노동청 전투라고 불리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는 9시20분께 광주고속 차량 10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함평경찰서 소속 경관4명이 사망하기도 한다. 당시 광주∼남원간 정기노선을 운행하던 광주고속 운전기사 배용주씨 (당시나이 34세)는 정기노선운행을 마치고 본사에 도착, 이소식을 듣자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노동청과 도청사이로 들어온 배씨는 다른 차량들과 함께 맨앞으로 차를 운전, 도청을 향해나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공수대로부터 발사된 최루탄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차내에서 터지자 엉겹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대로 시동이 걸린 차량은 계속 앞으로 돌진, 경찰들을 깔아버린 것. 배씨는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기에 이른다. 또 차량시위는 현대교통기사 김복만씨 (당시 29세)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한다."
당시 경찰들을 사망하게 한 건 버스 기사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제대로 된 운전이 가능했을까요. 버스 기사가 당시 불가항적인 상황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버스 기사가 의도적으로 경찰을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조차 없고, 정황 상 그것이 고의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역사학자라는 극우 인사가 20일 당시에 촬영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이지만,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이 사진은 실제로는 19일 자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원본 자료의 촬영일자까지 악의적이게 왜곡하여 극단적인 주장을 유포하는 이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버스 영상은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영상이 아닌 5월 15일, 서울에서 촬영된 영상입니다. 아래의 1.13을 확인해주세요.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신군부의 나팔수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계시다니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이같은 유언비어가 원천이 된 두 가지 서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제5공화국은 1982년 신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서적 『계엄사』에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117명이 시민군이 사용한 칼빈 소총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해주십시오. 인터넷에서 떠도는 아래와 같은 도표도 같은 서적에서 나온 도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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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1980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에 광주 지방검찰청에 의해 작성된「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에서 따르면 사망자 1백65명의 사인은 총상이 전체 79.4%인 1백31명(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9명)으로 가장 많고, 개머리판. 곤봉 등에 의한 타박사가 18명, 차량사 12명,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이 4명인 것이라고 합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가 26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검찰청 입장에서 카빈 소청에 의한 사망자 숫자를 축소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82년 후에 군에서 나온 출처 없는 주장과는 많이 다른 내용입니다. 즉, 1982년 발표된 군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보안사에서 발간한 5.18 자료를 인용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칼빈 및 기타 총상 사망자는 94명, M16 사망자는 38명이지만, 이 역시 거짓입니다. 당시 보안사는 505보안부대에서 파악한 사체 검안 자료를 가지고 167명에 대해 양민과 난동자(원문에는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진행했습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이 분류 과정에 참여한 의사 2명과 목사는 사망자가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때, 분류 과정이 불확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는 마지막 사망자의 분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5월 27일 YWCA 안에서 사망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학생은 경기도 출신으로 그 안에서 저항했다는 이유로 군측에서는 계속 ‘폭도’라고 주장했고, 세 사람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폭도가 될 수 있냐며 시민들은 비폭도로 분류할 것을 주장해 결국 ‘비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료의 원본이 됐던 505보안부대의 검시자료에 따르면(이 문서는 최근 공개되었습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20명입니다. 즉, 보안사에서 원본 자료를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1.08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중화기와 무전기로 중무장했던 것은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까.
1.02에서 언급했듯, 5월 21일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일제히 총을 발사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파출소와 방위산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습니다. 중화기와 무전기가 북한군에게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당시 일부 시민군이 중무장했던 중화기와 무전기는 바로 그 파출소와 방위산업체에서 탈취된 것입니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굉장히 황당한 주장이니,
6월 항쟁에 참여한 자랑스러운 시민들의 사진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이들도 남파 간첩인가요.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둘 다 유언비어입니다.
AK 소총 사용에 대한 근거는 정말 정사갤/일베 등 모든 사이트를 뒤져봐도 아무데도 없군요.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시민군의 파파샤 사용을 증명한다며 제기한 재밌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들은 해당 사진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물전에 있었던 사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로 바로 옆의 확성기에 부착되어 있는 Q마크를 보십시오. Q마크 보증제는 82년에 도입된 건데 어떻게 80년에 이게 있었을까요. 사실 이 사진은 한 시민이 "오월 판화체험전 시민군 현장 체험전"에 참석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시민군 소품을 어떻게 실제 총기로 과장할 수 있을까요. 모조품에 지나지 않다는 거죠. 그래도 이게 진짜 같다면 다른 각도에서 찍은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장전 손잡이도 없고, 방아쇠울도 저런 모양인 파파샤 총기가 어딨습니까.. 원래 총기의 사진과 직접 비교해봅시다(https://www.google.ca/search?q=PPSH-4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조잡한 합성입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입니다. 출처가 있다면 제보해주십시오.
대신, 이와 상반되는 증언이 있습니다. 아래의 증언은 20일부터 시위에 참여해, 21일 이후 일행 6명과 총을 들고 외곽경비를 맡았고 도청을 드나들었던 시민군 이관택 씨의 구술을 1989년에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시 차를 타고 광주에 왔을 땐 시외곽에서 가져온 총이 일반시민들에게 나누어지고 있었다. 학동과 광주공원에서 총을 나눠준다는 말이 들렸다. 우리들은 학동으로 갔다. 시민군 몇이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을 확인한 다음 총을 나눠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각각 카빈 1자루씩을 받았다. 도중에 총이 떨어져 늦게 온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총을 손에 쥔 우리들은 이번에는 광주공원으로 가보았다. 총을 든 시민 몇백 명이 각각 동별로 분류되어 줄 서 있었다. 지역방위를 담당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우리들은 도청으로 향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85)
실제로 당시 시민군을 대표한 수습대책위에서는 총기 사용을 통제하기 위해 유인물에 시민들의 총기 반납을 촉구하는 내용을 유인물에 담아 배포한 바 있습니다. 그 외, 시민들이 정기적으로 배포한 투사회보에서도 중고교생들의 무기 소유를 금하는 내용과 시민군의 무기 회수에 따르라는 요청을 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시민군은 총기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 광주에서도 총기를 이용한 범죄 사건이 가끔 일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그 사실은 당시 총기가 일부 의도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배포가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지, 시민군이 무작위로 총기를 배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는 못 합니다. 이는 총기 배포 상에서 있었던 실수에 책임을 묻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1.13 시민군이 버스로 경찰을 압사하는 영상이 있다.
악의적이며 고의적인 유언비어입니다.
해당 영상(http://youtu.be/UjREo-yPXdI)은 영상 설명에도 적혀있듯 5.17불법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인 5월 15일 서울의 봄 당시 서울에서 촬영된 영상으로 5.18민주화운동과는 무관합니다. 5월 15일 서울에서 촬영한 영상을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영상으로 둔갑해서 유포하는 이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kagicstaton88/601, http://blog.naver.com/totoro890907/90146962497, http://blog.naver.com/totoro890907/90159970621
제일 황당한 논리입니다.
예,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http://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21228), 6월항쟁(http://www.ytn.co.kr/_ln/0101_200706102202527375
), 심지어 3·1운동(https://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68182)과 6·3항쟁(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30603173400596&p=yonhap)도 기념합니다. 이를 근거로 들어서 4·19혁명과 6월항쟁 그리고 6·3항쟁은 북한의 소행이고 3·1운동은 공산투쟁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명백한 어불성설입니다.
일부에서는 다른 민주화 운동과 달리 5·18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은 당시 남침한 북한군들을 추모하기 위함이라는 또다른 황당한 주장을 하곤 합니다(http://blog.naver.com/totoro890907/90159970621). 허나 북한은 4·19국립묘지 역시 참배한 바 있습니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19/2007051900194.html).
참고로 북한은 6월 항쟁의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 그리고 노태우 정권 때의 강경대 열사에게 명예 학생증을 수여한 바 있습니다 (http://news.donga.com/3//20001017/7595492/1).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혹시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열사들도 북한과 연관된 건 아닐까요.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북침설에 대한 증언은 대부분 임천용이라는 이 괴악한 사람한테서 나온 증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무려 북한에서 "암살용"으로 "휴대용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냐 하면 미국에서조차 이 사람을 난민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결정을 내렸죠(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94678). 이 분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물론, 정신상태가 멀쩡하지 않다고 해서 증언이 거짓이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증언들이 엇갈린다면 어떨까요? 임천용은 총 세 곳에서의 인터뷰에서, 침투 인원을 어떤 곳에서는 450명으로, 어떤 곳에서는 1개 대대로, 어떤 곳에서는 2개 대대로 증언했습니다. 이 분의 오락가락한 증언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http://asegaew.egloos.com/2269768). 심지어 귀환 인원에 대해서도 제각각 다르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더더욱 재밌는 건, 임천용은 스스로 기자회견 당시의 증인들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직접 투입된 군인 출신이 아니라고 실토를 한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자 회견 당시의 영상인 http://www.youtube.com/watch?v=1f4NlqAT1uQ 의 00:16경을 보십시오. "저희들이 광주에 내려 오지 못 했던 당사자들이지만 이제 우리가 북한에서 ??에 대해서 7명 내려 왔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같은 영상의 00:43경 부분에서 시민군이 총기를 겨누고 있는 사진에 대해서도 임천용은 "이건 이제 우리가 가상적으로 한 번 설명해보는 건데..."라며 사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어디까지나 "가상적"인 가설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3군 사령관 출신인 서종표 의원은 이에 대해 "600명이 침투해서 광주에서 어떻게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 해도 그 동안 정부와 군은 무엇을 했는가.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군 경험을 가진 보수단체장이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5238).
심지어 다른 탈북 군인 협회인 탈북군인협회의 대표는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협력해서 일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이들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또다른 근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친척이었던 강명도 씨는 자신의 저서 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북한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명도 씨가 당시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실토한 임천용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점을 유의하십시오:
"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황금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자간의 갈등 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라며, "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 응용·활용보다 사태 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 그 후 사태는 22일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받았을 때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의 얘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내렸다. 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소 (일명 121호 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 명령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 북한 최대의 대남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 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 명의 정예 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써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옮겨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돌연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공작원들은 무기를 내려야만 했다." (강명도 저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39-241p)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끔찍한 왜곡입니다.
1998년 11월 월간『말』에서는 이미 이창용과 인터뷰를 진행해 이창용이 광주에서 무장폭동을 유도하기 위해 급파되었다는 1980년 정부의 주장이 조작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인터뷰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chiyahn/20179336578
이같은 80년 당시 정부의 조작 사실을 현 정부 차원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준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간첩 이창용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창용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의하면 5. 16.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와는 상관 없이 남파됐다. 5․18과 관련한 임무나 광주로 잠입하기 위한 시도도 발견할 수 없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신군부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합니다.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뉴데일리라는 언론사의 신문사에서 나온 황색 유언비어입니다.
해당 뉴스 기사에 따르면, 10월 북한군 개입설을 증명하기 위해 김주호 박사가 공개한 자료는 바로 '인민군영웅렬사묘'를 촬영한 다음과 같은 사진 두 장 뿐입니다:
자, 김 박사는 이 묘에 있는 군인들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김 박사는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158명이 ‘남조선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 영웅들’이라는 사실을 각기 다른 문건에서 중복 확인했다,” “사망자의 ‘죽은 날’로 기록된 1980년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 종결일로, 사망일을 이 날짜에 맞췄다”라고 주장했지만 김 박사는 그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밌는 사실은, 해당 사진의 '인민군영웅렬사묘'가 김주호 박사가 지칭하는 묘라는 명확한 증거 역시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북한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사실을 밝히는 기사가 있었죠(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41153541&code=910303).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어버이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지칭)께서 월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 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 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하시였다.”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출처가 된 문건도 없고, 사진의 비석이 어떤 묘의 비석인지조차 밝히지 않으니, 김 박사의 주장은 근거없는 유언비어입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입니다. 무장간첩이 침투한 것은 3월 23일, 25일, 27일에 있었으며, 그마저도 모두 검거되었습니다(http://ehistory.korea.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10256&mediadtl=21480&gbn=DH&quality=H).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괴악한 논리적 비약이군요.
윤기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재학중인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간첩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더군다나, 윤기권이 북한으로 넘어갔다해서 5·18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시민들 대다수가 간첩이 된다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상식에서 벗어난 어불성설입니다.
역사학자라는 사람은 5월 28일자 대한뉴스가 당시 평양의 생중계 방송을 편집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합니다.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980년 당시 기술로 중계시설이나 송신소도 없이 광주에서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평양까지 어떻게 생중계를 했을까요. 동영상 후반에 나오는 북한 방송에서 나온 듯한 구호는, 5·18민주화운동 이후의 북한 방송의 보도일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탈북자가 북한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생중계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검시기록은 없습니다.
2.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의 존재를 아는 시민들은 극소수였다.
역사학자라는 극우 인사가 일부 시민들의 증언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어처구니 없는 주장입니다.
우선 역사학자라는 극우인사는 다음과 같은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http://study21.org/library/beef/tricky_slogans.htm):
"미개인들과 역사치매증 환자들과 518픽션소설가들이 사기치는 것처럼 광주사태가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총장 윤상원 등 주동자 몇몇을 제외한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으며,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 죽이자"고 외쳤을 때 그들은 전두환이 아마도 광주시청 공무원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그해 4월 보안사령관 임기가 끝난 전두환 장군이 중앙정보부서리로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두어줄 작게 실린 적은 있었으나, 0.000001 퍼센트 이하의 국민에게만 그 기사가 눈에 띄었고, 그나마 한자로 작게 실린 무명인사의 이름에 관심 가진 이들은 동교동의 소수를 제외하곤 없었다.)"
그가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두환은 12.12 쿠데타 당시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으로 신문에서 이미 수차례 이름이 드러난 상태였습니다. 주요 신문 1면에도 그 이름과 얼굴이 수차례 나타났죠(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4150032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4-15&officeId=00032&pageNo=1&printNo=10627&publishType=0002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028003201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9-10-28&officeId=00032&pageNo=1&printNo=s1&publishType=0003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1060032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1-06&officeId=00032&pageNo=1&printNo=10493&publishType=00020). 10.26 사건 자체가 대통령의 암살이라는 국가 주요 사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수사본부장의 이름과 얼굴이 전국에 알려졌다는 건 상식입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로 1980년 4월 15일 자 "신임정보부장서리 전두환 중장"이라는 동아일보 기사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10.26 사건 후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으로 朴대통령시해사건의 수사를 지휘했고 직접 수사전모를 발표, TV와 신문 등에 모습이 드러나 낯익은 얼굴이 되었다. 고 朴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었으며 「12. 12」후 군의 핵심인물로 부상한 全 장군은 12.12 사건 후 주위사람들에게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관여해서도 안 된다. 나 자신은 정치에 취미도 없을 뿐 아니라 정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정치하려 했다면 5.16 때 군복을 벗고 나가 무슨 청장이나 하나 하고 끝냈을 것'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41500209202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4-15&officeId=00020&pageNo=2&printNo=18007&publishType=00020)
또한, 4월 15일자 NYT에서는 전두환 중장이 군정보기관인 국군보안사령관임과 동시에 중앙정보부장직까지 맡게 된 사실을 보도하며 그를 "최고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논평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이 전두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의 4월 16일자 1면에도 인용되었습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41600329201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4-16&officeId=00032&pageNo=1&printNo=10628&publishType=0002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41600209201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4-16&officeId=00020&pageNo=1&printNo=18008&publishType=00020).
또한, 5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 당시 시민들이 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이 집회는 광주에서도 5월 14일과 5월 15일에 걸쳐 진행된 집회입니다. 아래 사진은 5월 15일 당시의 광주 사진입니다.
3. 기타
3.01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가 아닌 김대중의 석방에 불과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어떻게든 폄훼하고자 하는 궤변입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시민들이 계엄 철폐와 독재 타도, 그리고 전두환 퇴진을 외쳤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해 보입니다. 하지만 일부 극우세력들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들을 무시하거나 조작으로 간주한 채 그 많은 시위 구호 중 하나인 "김대중 석방"을 외쳤다는 증언만을 전체인 것마냥 왜곡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증언은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믿음과 부합하는 증언만을 사실이라 한 뒤 그것을 왜곡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모순입니다.
증언 자체가 믿을 것이 되지 않는다고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유포됐던 유인물들을 살펴봅시다(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2권). 사실이 아닌 소문들도 언급된 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5월 19일, 최초로 배포된 유인물 세 장에는 다음과 같이 김대중과 관련한 내용은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약 김대중의 석방을 목표로 한 시위였다면, 최초로 배포된 유인물에는 다른 시민들의 요구나 유언비어들보다 김대중의 석방이 훨씬 더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했겠지요.
아래의 유인물들은 20일부터 26일까지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언급된 유인물들입니다(누락된 것이 있다면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볼 수 있듯 시민들이 김대중의 석방만을 요구했다고 주장하기에는 1. 시민들이 김대중의 석방보다는 계엄 철폐와 양민 학살 규탄, 그리고 전두환 퇴진을 외쳤고, 2. 김대중의 석방을 요구한 것은 민주 인사를 석방하라는 요구의 일환이었기에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유언비어가 아닌 사실입니다.
5월 21일에는 군인이 정조준한 총에 임신 8개월 된 최미애 씨가 맞아 쓰러졌고, 병원에 옮겼으나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5월 24일, 신군부의 공수여단은 달리는 차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나 집을 향해 M16을 마구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앞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중학교 1년 방광범 군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마을 어귀에서 놀던 초등학교 1학년 전재수 군이 벗어진 신발을 주우려는 순간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대검 사용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실제로 사망자 중 14세 이하의 사망자는 무려 8명에 이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59021).
다시 말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누가 폭도인지는 자명해 보입니다.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출처 : http://unifykorea.hosting.paran.com/xe/kwangjuinsurgence/23995,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신군부의 왜곡에 그대로 동조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기록(전교사 전투상보)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내용에서 시작된 유언비어입니다. 5·18기념재단의 설명대로, 시민군들은 광주의 고립과 봉쇄를 뚫고 담양과 장성에 광주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교도소 앞의 차단을 뚫어야 했고,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기 위해서 교도소 앞으로 출동했을 뿐입니다(http://www.518.org/ease/board.es?mid=a10501000000&bid=0006). 당시 시민군이 광주 외곽으로 진출하려던 것을, "교도소 습격"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총격전이 일어난 곳은 근처 호남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고, 교도소로 진출하려는 일부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해당 사건에 관련된 시민군은 4명, 6명으로 교도소 습격 자체가 목표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교도소를 함락할 수 있나요. 상식의 문제입니다. 이에 따라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위해 관련자를 조작했음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오히려 신군부는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신군부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asegaew.egloos.com/3653375를 참고해주십시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4. 19 혁명 때도 경찰서가 방화됐고, 6. 10 항쟁 때도 파출소와 버스가 방화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4. 19 혁명과 6. 10 항쟁이 폭동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대한국민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3.05 고등법원 및 대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괴악한 비약이군요.
5·18단체가 고소한 사건에서 지만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5·18민주화운동이 폭동이라는 지만원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지만원이 5·18단체 회원들을 직접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281626).
뿐만 아니라 원심에서는 오히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이미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지요. 원심을 확인해봅시다(http://pds25.egloos.com/pds/201212/30/07/2010____51.pdf).
"5.18 민주화운동은 이미 그 발생 배경과 경과, 계엄군과 광주시민 사이의 교전사태의 발생원인, 경과, 그 밖에 인명 발생 원인, 5.18민주유공자들의 지위와 그에 대한 보상, 예우 등에 관하여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이어서 이 사건 게시글을 통하여 5.18민주유공자나 참가자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게시물의 내용이 5.18민주유공자 등의 개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고 달리 위 공소사실을 유죄로 입증할 충분한 근거가 없다."
즉, 사법부에서는 지만원의 황당한 주장이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뒤흔들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법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칭하며 허위사실을 유포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북한과 모의해 5·18광주시민학살을 저지른 사실이 없는데도 믿을 만한 객관적 근거 없이 추측으로 허위사실을 적시해 그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라며 유죄를 선고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0147127).
우선 극우세력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1985년에 작성된 것입니다. 우선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공화당 성향의 우파 싱크탱크라는 사실과, 전두환 정부의 비서실장인 허화평이 1983년 1월부터 1986년 6월까지 헤리티지 재단의 수석 연구위원을 지냈다는 사실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보기 힘든 까닭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87년 6월 항쟁에 의한 민주화 이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인사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고서에는 5월 18일 전남대에서의 시위부터 이틀 간 두 명의 사망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1.01을 참조하십시오).
"...There were many injuries on both sides, but only two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first two days of the confrontation." (http://www.heritage.org/research/reports/1985/09/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query=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
또한 이 보고서에서는 광주교도소에서 50명의 시민군이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실제로 교도소로 진출하려 했던 시민군은 총 10명에 그쳤습니다 (3.06을 참고하십시오).
"...At the Kwangju Prison, for example, more than 50 armed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numerous assaults against the government-held facility." (Ibid.)
이같이 왜곡된 정보만으로 헤리티지 재단이 당시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입니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 직후에 작성된 CIA의 기밀문서와 1980년 6월 25일에 발행된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는 어떨까요. 여기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을 광주 폭동(riot)으로 규정하지만 이 역시 당시 진상규명의 부족함과 신군부와의 공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당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그의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국 언론사가 촬영한 민간 시위에 대한 군인들 (대부분이 특전사)의 잔인한 대응을 상쇄시키려는 것이다. ...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
실제로 1989년 미 국무부는 5·18민주화운동을 "May 18th K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즉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했습니다(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전두환은 내란죄, "즉 국토의 참절 또는 국헌문란(國憲紊亂)의 목적으로 폭동하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폭도와 그 폭도에게 맞서 싸운 5·18민주화운동의 광주시민이 어떻게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습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부르시려면 우선 전두환이 일으킨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하지만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라는 명백한 사실은 위의 판결문에서 보시다시피 이미 90년대 재판에서 수차례 확인된 진실입니다.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목차의 3.12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어떻게 일제가 하는 말과 한결같이 똑같습니까.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5·17비상계엄전국확대가 이래도 정당화된다고 보이십니까? 5·17비상계엄전국확대는 강압적인 쿠데타입니다. 이를 두고 당시 최규하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상관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을사조약이 무효인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군부대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전화선을 끊어버린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미 국무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NO information indicating a North Korean intention to attack was received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period covered by this statement, nor did United States officials regard the domestic situation in the South as being so serious as to justify either Full Martial Law or harsh repressive measures."
"미국은 북한의 공격 의도가 있었다는 어떤 정보도 [1980년 당시] 받지 못 했고,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이 계엄령 또는 극심한 탄압을 정당화할만큼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General Wickham met Chun Doo Hwan on May 13. In contrast to what he had told Ambassador Gleysteen previously, General Chun now told General Wickham that North Korea was the hidden hand behind the student demonstrations and that the decisive moment for an attack on the South might be at hand. Wickham replied that the U.S. as always stood ready to defend Korea, but that there was no sign that a North Korean invasion was imminent. General Wickham asserted the U.S. view that movement toward political liberalization would bring stability to South Korea and that stability was the principal means of deterring North Korea. General Wickham reported that Chun's pessimistic assessment of the domestic situation and his stress on the North Korean threat seemed only a pretext for a move into the Blue House."
"위컴 장군은 5월 13일에 전두환을 만났다. 앞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말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두환은 북한이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하고 있다며 남침을 감행할 결정적인 시기가 임박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위컴 장군은 미국은 언제나처럼 한국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나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후를 찾을 수 없다고 답했다. 위컴 장군은 정치적 자유화가 한국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며, 그 안정이야말로 북한의 남침을 억지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미국 측의 견해를 피력했다. 위컴 장군은 전두환의 국내정세에 대해 비관적으로 평가와 북의 도발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 청와대에 입성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On May 13, Washington reacted to reports from Ambassador Gleysteen and General Wickham and to rumors of North Korean activity then circulating in Seoul. The State Department press spokesman stated:
'From our information we see no movement of troops in North Korea out of the usual and we see no movement which would lead us to believe that some sort of attack upon the South is imminent.'"
"5월 13일, 워싱턴은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의 보고와 당시 서울에서 나돌던 루머에 대응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북한에서 평소와 다른 부대이동을 볼 수 없으며, 한국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이 없다.'"
심지어 신군부는 일본 측으로부터의 정보를 악용해 북한의 위협을 날조하기도 했습니다(http://www.youtube.com/watch?v=AHb3VKmPWXU).
심지어 전두환을 위시로 한 신군부는 정치 활동을 금지한 계엄포고 10호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승인은 커녕 사전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5월 20일 계엄포고 10호에 따라 의원의 의사당 출입을 금지시킨 사실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100838). 이는 최광수 당시 비서실장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139680).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가소로운 말장난입니다. 사면은 "형벌의 면제"입니다.
3.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무력을 사용한 건 사실이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괴악한 주장입니다.
3.14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김대중 정부가 내린 편파적인 명칭이다.
사실과 역행하는 명백한 거짓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것은 1988년 노태우 정권 당시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와 노태우 본인에 의해서입니다. 같은 해,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위원회는 민정당 12, 평민당 7, 민주당 5, 공화당 3, 무소속 1명 등 28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http://archives.kdemo.or.kr/PhotoView?pPhotoId=00755073). 즉, 민주화합추진위원회와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구성원에서 볼 수 있 듯,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폭력에 책임이 있던 민정당도 5·18민주화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1988년에 노태우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명했으며(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12700289103001), 심지어 최근에도 노태우는 역시 5·18민주화운동이 민주화 노력의 일환임을 인정했습니다(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981643&ctg=1000).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은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정권을 잡았던 1990년에 제정되었으며,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은 김영삼 정부 하 1995년에 제정되었습니다.
3.15 5·18민주화운동 당시 최초 사망자는 시민(김경철)이 아닌 경찰이다.
상식에서 벗어난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유언비어가 있습니다. 1. 당시 공수부대가 없었다. 2. 공수부대에 의해 사망한 것이 아니다.
우선, 제가 출처로 제기했던 일간베스트저장소의 글(http://www.ilbe.com/568028483) 에 따르면,
"김경철이 5월 18일 공수부대원에게 맞았다고 주장하지만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11공수는 비행기로 5월 19일에 광주에 도착했다. 따라서 김경철이 5월 18일 점심시간대에 공수부대원에게 맞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첫째로 5월 18일 점심시간대에는 충정작전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등장하는 11공수는 19일에 광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눈여겨 봐라."
라고 하지만 이는 5월 18일 당시 공수부대가 이미 파견된 사실을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허나 공수부대(7공수)는 5월 18일에 이미 파견되었죠.
두번째, 공수부대에 의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18일에 7공수가 광주시에서 시민들을 진압했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 명백한 사실입니다. 18일 당시 김경철 씨 외에도 계엄군에 의해 타격을 받은 시민들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망에 이르기까지 구타할 주체가 계엄군 외에는 전무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김경철 씨는 7공수에 의해 사망했다는 게 정설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박인갑 씨의 증언)도 존재할 뿐더러, 무엇보다도 1996년 재판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주영복은 검찰의 "공수부대원들이 그날 금남로에서 시위를 해산하며 강경진압을 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있나요."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즉, 당시의 국방부 장관 역시 김경철 씨가 강경진압에 의해 무고하게 사망한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진으로 첨부된 사망 조서에서도 김경철 씨의 사망 경위가 "계엄군"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 정설이 틀렸다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다른 가설과 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김경철 씨가 조폭에게 맞았다라는 가설을 내고 있지만 그 근거도 없을 뿐더러 계엄군이 진주해있는 상황에서 길거리에 있는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할 조폭이 있을 거라는 것은 가능성 없는 추측입니다. 이 근거조차 전무한 무리한 가설이 검시조서, 박인갑 씨의 증언, 그리고 주영복 씨의 답변을 근거로 가지는 진실에 대응하기 힘들다는 것은 명약관화해 보입니다. 첨부된 사진에 있는 검시 조서를 보십시오.
작성 중인 글입니다. 지속적으로 추가될 예정입니다(항목에 있는 주장들이 모두 잘못됐다는 것은 인지해두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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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계속 부르고 싶으신 분들과 제 글에 의견을 달고 싶으신 분들은 http://www.youtube.com/watch?v=R23Aexnq48o를 한 번 보시고 http://blog.naver.com/chiyahn/20179126789를 한 번 읽어보시고 이 글을 다시 읽어주세요. 제 글을 읽지 않고 댓글을 남기는 분들이 몇몇 계시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본문에 있는 사항을 반복해서 질문하거나, 과도한 욕설 또는 지역 감정을 유도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들은 삭제 및 차단 조처의 대상입니다. 대부분의 삭제된 댓글들은 여기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chiyahn/20174188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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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 2013년 2월 27일 (EST)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Gothamit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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