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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과 쿠란 ㅡ 같은 점과 다른 점

lionet 2013. 7. 17. 02:45

 

 

 

  이슬람은 지중해 지역과는 다른 그 나름대로의  합법칙성과 관습적인 성향들 -

 

이러한 성향들이 나중에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

 

을 가진 특수한 문화공간에서 탄생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의 탄생과 기독교를

 

둘러싼 지중해 지역에서의 그리이스-로마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라비아 특히 아라비아의 북서쪽(메디나의 야트립)에는 유태인 공동체들이 있었다.

 

기독교 공동체들도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으며, 그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거의 알기 힘든다.

 

 

   나사렛 예수와 무함마드의 삶을 비교하여 보면 무함마드는 그들에 의하여 세워진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결정적인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예수는 현실적으로 거부되어

 

십자가에 매달렸다. 반면에 무함마드는 초기에는 배척과 저항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성공한 입법자이자 정치가 그리고 군인이 되었다.

 

 

   성경과 코란을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 비교하여 보면 이 둘이 대단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쿠란에는 구약성서의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모세오경에

 

한정되어 있다.  쿠란에 수용된  신약성서의 내용은 공관복음서의 전승들이다. 성서가

 

쿠란 내에서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은

 

무함마드의 인격과 소명과 전언을 기준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밖에도 교훈적인 관심사들도 그런 해석을 하는 데 하나의 역활을 하고 잇다.

 

코란이 성경의 내용을 받아드리기는 하였으나, 무함마드의 입장은 성경이 쿠란으로 대체되었으며,

 

성경은 하나의 역사적인 문서로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견해를 도처에서 보인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성서에 대하여 관심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과 쿠란, 또는 쿠란과 성서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사한 구절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공통점과 서로 다른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한다.

 

 

 

 성경과 쿠란의 공통점

 

 

1. 성경과 쿠란은 유일신을 믿는 두 계시종교를 대표하는 경전이고,

 

  오늘날도 서구 제국, 동남아시아 제국, 아프리카 제국, 북남미 제국의 국민 등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암송하는 경전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계시를 하고 알렸다는 사실 즉 당신이 인간에게

 

말씀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뜻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동양의 다신교인 힌두교나 불교, 도교에서는 인간 내면의 자기성찰이나 수련을 통하여

 

깨달음의 과정과 우화(羽化) 과정을 통하여 모두 신(神)이나 부처나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는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앞에서 독일의 사제인

 

요아힘 그닐카가 분석한 바 대로 지역별 합법칙성과 관습적인 성향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성경과 쿠란에서 나타나는 계시에 의한 선지자 또는 예언자의 개념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 점토판(구약의 모태)과  조로아스터교(짜라투스트라교)의 경전인 <아베스타> (신약의

 

가본틀 : , 동정녀 잉태, 동박박사의 경배, 산상수훈, 십자가에 매달림, 부활 등등)에서 일찍이

 

나타나는 것을 시대와 지역적 관습과 문화 특성에 따라 변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근본주의성서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2.  성경과 쿠란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를 대표하는 경전이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분이다

 

라는 것을 뜻한다.성경과 쿠란은 다신론을 거부하며, 이교도들의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쿠란에서는 성경에서의 하나님을 그대로 이어 받고자 하는 여러가지 표현들이 나타나며, 쿠란의 알라신은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다.이러한 것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설화에 대한 성경과 쿠란의 서술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경의 하나님인 "엘"(EL)과 쿠란의 하나님

 

이름인 "알라"" 사이에 있는 어원적 유사성에서도 알 수 있다.

 

 

  3.   쿠란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본다. 알라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알라는 많은 선한 창조의 행위를 하셨기 때문에 찬양하여야 하고, 우리들은 피조물에서당신의 흔적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으며, 이리하여 알라는 당신의 창조로 인하여 신으로 경배된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창조의 신(브라마), 유지신(維持神 : 비쉬뉴), 그리고 

 

파괴의 신(쉬바)이 서로 대립하고 있어, 겉으로는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로 보여지지만, 사실상

 

이 세분의 신들이 삼신일체로 통합되어 최고의 신이 현현(顯顯)한다  라는 점에서는 유일신을

 

믿고 있슴에 가까운 종교 교리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인도의 성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쿠란에서

 

힌두교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생전에 주장하기도 하였다. 

 

 

   불교에서는 성문승(聲聞乘:소승)의 초기불교에서는 천지창조의 개념 자체가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나중에 보살승(菩薩乘)의 대승불교와 금강승(金剛乘)의 밀교 등으로 다양화되면서

 

도입된 여러 보살들이나 여래들 중에 천지창조의 원시개념들이 은연 중에 녹아들어 있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과거불의 하나인 비로자나불로써 빛과 광명을 뜻하는 과거불이다.  이 분은

 

당시 중앙아시아에 교세를 떨치고 있던 조로아스터교의 태양신을 불교가 수용한 것으로 많은

 

종교사학자나 대승불교연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이 태양신을 수용함으로서 명시적인

 

표현은 없지만, 은연 중에 배화교의 천지창조의 개념도 함께  받아들인 것으로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대일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의 수용도 마찬가지의 경우로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의 도교에서는 옥황상제와  하와와 여와의 설화를 통하여 천지창조의 개념이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은연 중에 이러한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슴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각 종교들 간의 수용과 포용 현상들은 역사기록 시대 이전에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

 

간에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문화의 교류가 계속되고 있었슴을 강하게 시사한다.

 

 

 

  4.  쿠란은 예수에 대하여 언제나 경외심을 가진 표현들을 사용하며 결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성령에 의해 강한 정신력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경전과 지혜와 율법과 복음을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또한 쿠란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하여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적인

 

존경심을 표한다. 마리아가 예수를 동정수태하였다는 데에 관하여 쿠란에서 어떠한 의심도 표현하지 않고 있고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5.   성경과 코란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종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종교들이 아브라함에

 

원천적으로 의존하고 있슴을 뜻한다.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불리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쿠란 22 : 78)

 

쿠란에서는 아브라함에 대한 의존성이 크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아브라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코란은 유태교에 훨씬 더 가까운 경전이 된다.

 

   이것은 유태교적인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브라함은 쿠란에서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렇게 된 연유는 아브라함이

 

유일신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이다. 

 

 

   6.   성경과 마찬가지로 쿠란은 모든 인간들이 아담 즉 인간의 창조에서 공통적으로 기원되었슴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인간의 속성을 알 수 있으며, 그는 흙에서 만들어졌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담과 이브는 유혹을 통하여 하나님께 불순종 하였고, 그러므로 아직도 인간들은 여전히 유혹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쿠란이 카인과 아벨의 설화를 성경을 통하여 받아들이므로서 쿠란은 선과 악에 대하여

 

모든 인간들이 연대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가르치고 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쿠란 5 : 32)

 

 

 

  7.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쿠란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동반되는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날이 가까이 와 있다.>라는 최후의 심판론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발단이 되었다.

 

심판의 날에 책들이 펼쳐진다고 하고, 그 시간은 하나님만이 아신다 한다. 종말이 오기 직전의 시대는

 

악이 극에 달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이런 표상들을 유태교의 묵시문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코란은 신약성서의 표현들 보다는 묵시문학적 자료에 더 의존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8.    쿠란은 십계명을 알고 있지만 많은 점들에서 독자적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특히 결혼과 가정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이슬람 이전의 사회구조와 관습들이 이러한 독자적인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코란의 윤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거지들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하며, 구제는 최고의 계명으로 나타난다.

 

 

 

 

     성경과 쿠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전반적으로 살펴 본다면, 그 공통점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슴이 특징이다. 예수는 별개의 장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부분들이 신약성서에서도

 

계속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쿠란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신약성서와 쿠란이

 

함께 구약성서와 관련이 크지만 구약성서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다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세계와 역사에 관한 새로운 기독교적인 해석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취된 하나님의

 

계시이고, 이슬람적인 해석의 핵심은 무함마드를 통하여 전달된 알라(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성경과 쿠란의 차이점

 

   

    !. 기독교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쿠란에서의 계시 이해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쿠란에 의하면 알라는 책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있어서  이슬람은 책의 종교인 셈이다. 무함마드는 환상 가운데 알라의 진리들이

 

확고부동하게 기록되어 있는 하늘의 책 - 원쿠란을 보았다고 한다. 이러항 확고부동성은 쿠란에도

 

해당되며, 알라 자신은 그 초월성으로 부터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 속에서 성취된다.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들 중 하나가 되셨으며,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안간들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직접 체험하셨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쿠란에서 계시는 문서화이며, 이 문서화는 기독교의 성육신(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하나가 되심)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

 

문서화와 성육신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전혀 다른 두길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는 결코 책의 종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쿠란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을 오해하고 있슴이 나타난다. 쿠란에서는 하나님과 예수와 마리아를 나란히 존재하는

 

세 신(神)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실상의 다신론을 의미하고 있다.

 

 

 

     성경과 쿠란의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해석의 차이는 마치 불교가 동전(東傳) 또는 남전(南傳)

 

함에 따라 나타나는 성문승(聲聞乘)의 소승불교와 보살승(菩薩乘)의 대승불교에서의 교리 해석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성문승인 소승은 석가모니를 유일한 깨달은 자로 여겨 부처로부터 직접 나는 이렇게

 

들었다하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고 재가신자들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반면에,  보살승(菩薩乘)인

 

대승불교는 과거불, 석가모니불 ,미래불을 인정하고 있고, 여기에다 석가모니불을 보좌하는 반야(지혜)의

 

문수보살,  행원(실천)의 보현보살, 자비의 관세음보살,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등 여러 불보살들을 포용하고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재가신도의 깨달음을 유마거사, 승만부인 등을 통하여 인정하고 있다.

 

다만 깨달음의 정도에 있어서는  불, 보살, 재가신도들 간에 다소 차이를 두고 있어 전혀 차별성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2.    기독교의 신앙에 의하면 예수는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의 계보에 속하는 한 선지자 이상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는 여러 형제들과 자매들 가운데서도 우리를 하나님게 인도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해주자고 하는 "맏아들" 격이다.

 

 

    쿠란은 이러한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심지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쿠란이 여기에서 공격하는 대상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경전에 빠진 사람들"이다.쿠란에 의하면 예수 자신은 결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런 주장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성경과 코란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 현재 기독교국의 대표격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속한 나라들인

 

미,영,불,독,이탈리아 등과 중동의 이슬람협의회 소속의 이슬람국가들과의 정치,군사,경제적인

 

대립관계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아가려면, 앞서 에를 든 불교의 동정과 남전에 따른 성문승,

 

보살승과 금강승의 자비와 이타정신(利他精神)을 원용하여야 할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다라는

 

판단이 든다.

 

    역사의 진행에 따라 소승과 대승,밀교를 대표종교로 하는 국가들 간에 다툼과 전쟁이

 

없지 않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차이에서 비롯된 종교전쟁이 아니라 영토확장정책이나

 

국가간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한 다툼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의 승려들은 종파

 

소속의 차이를 가리지 아니하고 불살생과 이타행으로 전쟁행위의 방지와 전후 복구에

 

서로 합심하여 협력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중세 십자군 원정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해묵은 종교전쟁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각국 정부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은 현재의 상황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신과 상대방에 대하여 서로 참회하고 다시 인류 번영을 위하여 반드시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통의 예지를 모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시점으로 판단된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반목과 질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테러행위나

 

새로이 개발되어 실전배치되고 있는 신형무기나 대량살상무기류에 의하여,

 

서로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 - 911테러나 최근의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등의 새로운 발전과 전개-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소승과 대승 그리고 밀교, 남전불교와 동전불교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해의 정신과 새로운 융합의 시도 등이 항구적인 인류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는 시금석이 되고, 기독교국가와 이슬람국가들은 이러한 화합과 융화의

 

정신들을 보고 배우고 익혀야 할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는 시점이다.

 

 

   다만 여기에서 이들 두 종교가 유일신을 믿는 계시종교이고, 유일신 이외의 신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편협한 생각들은 종교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불살생과 이타행으로 서로

 

화합하고 융화하는 정신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므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원수를 네 이웃과 같이 사랑하여라.>라는 경전상의 계명은

 

가지고 있으나, 이를 실천하는 보현행을 행함에 소홀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평등심이 결여된 바르지 못한 보현행을 실천함으로써

 

수백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3.    쿠란은 기독교의 구원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쿠란의 경전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어쨋던 스스로 구원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교는 구원의 종교와 대립되는 율법의 종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알라에 의해 미리 정해진 사람들 즉 예정된 사람들만

 

영원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에게는 유혹자인

 

이블리스(마귀)가 아무런 해악도 끼칠 수 없고 단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즉 처음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치

 

르네상스 이후의 종교개혁에서 칼빈학파가 주장하였던 예정조화설과의

 

교리상의 유사성이 있다고 보인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자유로운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한다.

 

그러나 당신은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미치 불교에서 지장보살의

 

서원과 같다. 

 

   구원자는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었고 죽음에서 다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쿠란도 이 두 주제를 간단하게 다루기는 한다. 

 

 십자가는 잘못된 이해라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과 같이

 

마지막 날 일어날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무함마드가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이

 

예수의 주검을 옮김으로서 그를 적들의 손에서 해방시킨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4.   아브라함에 대한 공동의 의존성 면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된다. 유태인들에게는

 

아브라함은 민족의 시조이며, 무슬림에게는 그는 유일신 신앙의 교조이며, 기독교인들

 

에게서는  - 그리고 여기서는 특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 그는 신앙의 모범으로

 

간주된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하나님을 믿었다.(로마서 4장)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에게서 서로 다른 길들이 갈라지기도

 

한다.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약속의 계보는 정부인인 사라의 아들인 이삭으로

 

이어지는 데 반하여 무슬림들에게 있어서는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로 이어진다.

 

 

 

  5.  종말론에 있어서 신약성서와 쿠란은 그들의 기다림의 방식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둘다 묵시문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 재림과 예수와 함께하는

 

공동체와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를 기다리는 데에 비하여, 무슬림들에게 있어서는

 

낙원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약성서에서는 이미 궁극적인 것의 현재성(顯在性)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이미 인간성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중요시한다.

 

 

  6.    십계명이라는 공동의 뿌리에서 성경과 쿠란은 결합된다. 신약성서에서는

 

십계명이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해석되어 있다. 이 해석의 절정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쿠란에서는 이러한 해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 계명을 어느 정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며, 지금에도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것은 경전상의 교리 해석의 문제라기 보다 교리의

 

실천에 수반되는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과 추천 사항

 

 

   성경과 쿠란은 어떠한 관계에 있고, 우리들은 이러한 분석과 검토사항들을 가지고

 

무엇을 시작하여야 하겠는가?  협상의 과정을 통하여 통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그 통합의 방법이 두 종교간의 공통분모들을 강조하고, 차이점들은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대개의 종교다원론을 신봉하는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위의 방법대로의

 

방향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방법대로 두 종교를 통합하고자 시도한다면

 

그것은 이들 두 종교를 모두 부당하게 취급하게 되는 우를 범할 것이며,양 종교

 

모두에게 심각할 손상을 입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종교의 힘은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에 있으며, 성경과 쿠란을 전체로써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상황들을 고려할 때에만

 

우리들은 성경 - 여기서 다시 기독교와 유태교가 나누어 지고 있다 -과 쿠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된다. 현실 상황들과 역사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경전 본문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면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기 쉽고

 

그러한 잘못된 결론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지기 쉽게 된다.

 

 

   성경과 쿠란에 나타나 있는 신앙은 이러한 신앙을 위하여 살아가고,

 

그 신앙으로 삶을 채우고, 그 신앙을 지닌 채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공동체 즉 기독교 교회와 이슬람 신앙공동체인 움마(Umma)의 신앙의지의

 

표현이다.(국제신학자협의회의 문서인 <신앙의 통일성과 신학적 다원주의>

 

,1973년 32쪽, 의 4번과 5번 테제 참조)

 

 

    그러므로 한 종교를 받아드리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체제에 동조하는 것

 

이상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신학적 관심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를 특징짓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슬람과 갈리는

 

분명한 분기점이 된다. 그 고백은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

 

대한 고백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신약성서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완전히 일치하며, 우리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고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며 기도하였던 예수의

 

파송권위와도 완전히 일치한다.(Gnilka, <나사렛 예수> 251~256쪽 참조)

 

 

    무함마드는 이러한 신앙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 드리지 않았다.

 

무슬림들과 대화할 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부각시켜서는 안되고,쿠란이

 

에수를 높이 평가하고 그를 선지자로 존중하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상의 다소 지루하기도 한 인용이 1953년에 사제서품된 독일의 성서해석학자인

 

요아힘 그닐카의 역저 <성경과 쿠란 - 무엇이 같으며 무엇이 다른가>의 요약부이다.

 

여기에 동양의 종교에 대한 부연 설명은 제가 아둔하기만 하고 모자라기도 한 소견을

 

덧붙힌 것이다. 이글은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는 옮긴이 오희천 박사의 번역본을 대본으로 하였다.

 

 

    요하힘 그닐카 신부는 이 책의 끝머리에서 성경과 쿠란에서 나타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두가지를 들었다.

 

그 중 하나는 두 종교다 아브라함에 대한 의존성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꼽았다.

 

    두 종교를 믿는 민족들 간에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왔지만 아브라함은 양 종교 모두의

 

신앙의 조상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비록 어머니는 달랐지만 아버지는 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의존성은 유태교와 이슬람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도 적합할 수

 

있다.  두번째의 측면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은 모두

 

자신을 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피조물이라는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에 대한 공동의 책임감을 가지게 한다.

 

 

   인간성이 크게 위협당하는 우리 시대에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함께 인간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필연성이 바로 피조물에 대한 이러한 공동의 책임의식에

 

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한 대전제로는 우리가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에 있다고 하고 그닐카 신부는 책을 마치었다.

 

 

  그닐카 신부의 이런 간절한 기도와 같은 두 종교간의 화합과 평화공존을 위한

 

그의 천진하고 순수하기만 한 소망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신앙의 통일성을 위하여 애쓰고 있는  다원주의 신학자들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일로써,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순수한 기대와는

 

달리 세계의 종교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계에 중차대한 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한시도 마음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그에 대한 예를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이들의 등장 이후에 나타난

 

전체주의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들어 보겠다. 독일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인 헤겔이 주장한 변증법과 니이체가 주장한 새로운 神과

 

영원회귀에 대한 그들의 실험적인 철학사상이 그들의 순수한 학문적 열망과는

 

달리 정치인들에게 악용되어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 등 전체주의의 탄생을 위한 이론적인 배경으로 잘못 쓰였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전체주의의 탄생에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는 당시에 새로운

 

사조였던 동양의 종교철학사상과 존재론 중심의 기존의 서양철학을 서투르고

 

조급하게 융합시키려고 하는 욕망이 작용하고 있슴에 일말의 책임이 느껴야 할 것이다.

 

 

   물론 니이체는 청년시절 한때의 실수로 인한 질병에 의하여 말년에는 정신이상이

 

발생하였다는 것이 정설화되어 있으나, 이는 동양종교철학 사상과 기존의 존재론적

 

서양철학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하고 중동지방과 인도에 전래되어 오던 배화교를

 

동양철학사상의 전부인 양 잘못 착각한 것을 나중에 스스로 깨닫고는 일으킨 정신적인

 

혼란과 학자적인 양심이 정신착란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니이체는 그의 저서<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두가지 서로 상반되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찬사 일색인 " 다섯번 째의 복음서", "새로운 성경"

 

등의 서평에 스스로 현혹되고 자아도취에 빠져 그의 총명함을 잃고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고 말았다. 이 니이체와 같은 말년의 정신이상 증세는 슈만, 반 고흐, 모파상 등

 

당시의 최고라는 지성들에게 유행병 처럼 나타난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니이체가 한 말이나 그의 글에서 대표적인 두가지만 인용하기로 한다.

 

<나누어 주는 사랑는 진실로 모든 삶의 가치의 척도이다.>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태어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그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

 

   첫번째 인용한 나누어 주는 사랑은 성서와 쿠란에서 나타나는 무한 사랑과 동양의 불교에서

 

나타나는 무외시(無畏施)를 융합한 것과 같은 종교철학의 보편적인 사랑 혹은 자비를 달리

 

철학적인 수사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번째에 인용한 새와 알 그리고 탄생을 위한 기존 세계의 파괴에 대한 철학적인 수사에서는

 

신은 죽었다고 하는 그의 주장과 새가 날아가는 대상으로서의  신인 아브라삭스라는 명제와의

 

논리적인 갈등과 충돌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철학사상을 조금이라도 접해본 서양의 철학자라면 아무리 철학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 저런 표현을 할 수도 없고, 또한 해서도 안된다. 새의 부화에는 즐탁동시(口+卒 琢同時)라는 명제가

 

적용된다는 것이 동양철학의 기본이다. 즉 어미새는 알을 품고 있다가 알속의 새끼새가 여린 부리로

 

알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쪼으는 기색이 느껴지면, 어미새도 알 바깥 쪽에서 동시에 쪼아서 새끼새가

 

알껍질을 뚫고 나오는 데에, 모자새가 서로 도우고 있다는 사실을 니이체는 미처 몰랐거나 간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 하듯이 세대간에도 단절됨이 없이 스승과 제자간에 또는 부모와 자식간에

 

아니면 선각자와 후발자 간에 서로 도우며 일과 학문을 성취하려는 공동 노력의 정신이 동양사상의

 

기저에 흐르고 있다.

 

    니이체가 책의 제목으로 인용한 배화교의 조로아스트(현지어로 짜라투스트라)도 자기보다

 

공부가 뛰어난 일곱명의 선인(仙人)들을 마치 스승 처럼 모시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과정을 거쳐서 배화교의 창시자로 활동하며, 인도의 초기불교인 성문승에서도 석가모니가

 

비구, 비구니 등 승단의 제자 집단에게 진리의 설파와 지도과정을 거쳐서 제자들의

 

공부 성취를 도우고 있슴이 불교 초기경전인 <니까야> 등에서 흔하게 나타나고 있다.

 

 

 

   두번째의 인용글에서 알 수 있듯이 니이체의 순수하고 철학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글이

 

헤겔의 변증법에 길들여진 세계제패를 꿈꾸는 야심적인 군사정치적인 전체주의자 집단과 결합하면

 

무서운 파괴력을 낳게되고 이러한 우려는 나중에 나치즘,파시즘,군국주의 등의 현실 상황으로 나타나며,

 

독일, 이탈리아.일본 들 3국이 군사동맹을 맺고 세계2차대전을 일으키는 인류역사상 가장 비참한

 

파괴행위로 까지 확대되고 있고, 전체주의자들의 전쟁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이론적인 뒷받침으로 악용된다.

 

 

 

   이러한 있어서는 안될 역사적인 파괴행위 - 1,2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국가집단간 전쟁행위-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중세 십자군 전쟁 이후로 수백년 동안 적대행위를 해오고 있는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간의

 

영구적인 평화구축과 공생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종교가 채택하고 있는 경전의 교리상의 공통점이나

 

탄생 배경에 대한 친연성에 의존하는 막연한 기대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현재 이 조그만 초록별에 의탁하여  다섯개 대륙에 터를 잡고 있는 각국들간에 국제 질서와 평화공존,

 

정의의 실현, 더 나은 환경에서의 생활 등을 위하여 설치되었고, 지금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각종 국제기구와 국제협약 - 예를 들어서 국제환경기구를 통한 국제환경협약, 생물 다양성을 위한 국제협약 등등

 

-을 본받아서 각종 종교간의 국제협의체와 국제협약을 만들고, 양 종교의 대표자들이 참석할 뿐만 아니라

 

아마존 원시 부족의 고유종교, 태평양 소제도의 원주민들의 원시종교,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믿고 있는  

 

일종의 샤마니즘적인 무속종교들에게 까지도 문호를 개방하는 등 기존 유명종교가 가지고 있는 각종 기득권들을

 

조금씩 양보하고,서로 전교에 대한 규범을 확립하여 종교간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서로의 현실 상황과 각 종교 간의

 

허심탄회한 토론을 통하여 새로운 해결책을 도모하는 길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해묵은 종교전쟁을 해소하는

 

지름길이 될 뿐만 아니라 양 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간에도 있을 수 있는 갈등과 경쟁을 방지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曇 閒 草 堂 에서   茶   宗  謹書

 

 

 

 

 

 

 

출처 : 그날에 솟아 오른 해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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