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단체인 광주 무등공부방의 마한 답사에 참여한 시민·학생들이 지난 5일 전남 나주시 반남면 덕산리 3호 고분에서 임영진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적 513호 나주 반남고분군에는 마한의 고분 34기가 밀집해 있고 지난해 11월엔 국립나주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
[현장 쏙]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 ‘시간여행’
1500여년 전 영산강 유역 ‘마한’이 시민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백제 무령왕릉보다 큰 무덤, 대형 옹관묘, 금동관, 10현금…. 친숙한 내 고장의 역사는 지역민들의 상상력을 북돋운다. 너른 들판에 불쑥 솟은 전남 나주시 반남면 ‘덕산리 3호 고분’ 위에서 지난 5일 오후 마한 역사문화권 답사를 이끈 임영진(57) 전남대 교수(인류학)가 질문을 던졌다.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축조된 이 고분은 지름이 40m입니다. 백제의 무령왕릉보다 18m가 더 크지요. 마한이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한테 병합됐다면, 과연 백제 왕보다 큰 고분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10대부터 60대까지 답사 참가자 60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할 실마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봤다. 시야에 언덕 같은 대형 고분 8개가 들어왔다. 대학생 김대완(26·전남대 경영3)씨는 ‘마한판 수수께끼’를 태블릿피시에 입력하느라 빠르게 손을 놀렸다. 김씨는 “마한은 삼한의 하나이고, 백제에 통합된 소국으로 알았는데,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장고분’에서 시작된 답사는 전남 함평군 월야면 ‘만가촌 고분군’과 나주 반남고분군을 거쳐,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3호분’으로 하루 내내 이어졌다. 해가 기울 무렵 참가자들은 너비 40m, 높이 6m인 복암리 3호분에서 토론을 벌였다. 3~7세기에 축조된 이 고분은 1500여년 전 마한 사회를 상상하는 데 더없이 좋은 현장이었다. 이 고분에서 목관~옹관~석실로 이어지는 400년의 묘제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무덤 41기가 1996년 발굴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답사에 참가한 김건영(10·광주 불로초4)군은 “무덤에도 주검이 층층으로 누워 있는 아파트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방학이 끝나면 큼지막한 항아리 안에 금동관을 쓰고 누워 있는 수장(首長)을 친구들한테 소개하겠다”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마한 전도사’로 불리는 임 교수는 “백제가 통상 지하에 숨진 사람 한명을 묻었다면, 마한은 지상에 분묘를 만들어 다장(多葬)을 했다. 복암리 3호분은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묘제가 동시에 출토돼 마한 특유의 옹관이 백제 방식인 석실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비교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성낙준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최근 논문에서 “왕릉을 능가하는 마한의 고분은 백제 중앙으로부터 강력하고 직접적인 지방통치체제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538년 사비(현재 충남 부여) 천도 이후 백제의 국력이 회복되자 지방의 고분들은 급격하게 왜소해졌다”고 주장했다.옹관고분·금동관 등 유물 통해
고대 찬란한 예술문화 뽐내 잊혀진 마한 역사알기 바람 불며
답사 참가자 늘고 역사관 북적
“마한인 개방성·예술성 뛰어나…
그 시대 예인 다룬 소설 쓰고파”
전남도, 마한기행·축제 준비중 마한은 기원전 2세기부터 경기·충청·전라 지방에 분포한 54개 소국을 가리킨다. 한강 유역의 백제가 성장하면서 대부분 병합됐으나,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은 장기간 독자적 세력을 유지했다.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옹관고분을 발달시키고 해양교류를 확대하는 등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고대 항해는 바람에 의존했기 때문에, 서남해안은 일본·중국 등으로 가려고 바람을 기다리는 포구가 들어서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백제 지배 아래 놓이면서 ‘역사의 패자’, ‘변방의 역사’로 전락했고 기록들이 사라져 실체를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20여년 축적된 연구 성과로 마한의 공간적 범위, 성립·소멸 시기, 사회 특성, 대외 교류 등은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졌다. 하지만 장고분(일본식 전방후원형 고분) 14기에 묻힌 주검의 출신 등 풀리지 않은 의문도 적지 않다. 이런 가운데 통설인 ‘백제의 4세기 마한 병합’에 맞서는 ‘6세기 병합설’의 도전은 만만치 않다. 6세기 병합설을 펴는 연구자들은 4세기 이후에도 백제와 다른 옹관묘를 발달시킨 영산강 유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는 마한이 남긴 고분군이 480여개나 분포하고 있다. 고분은 묻힌 이의 정치적 세력과 후계자의 사회적 위세를 상징하는 유적이다. 금동관(국보 295호)이 출토된 나주시 ‘신촌리 9호분’을 만들려면 연인원 5000명 이상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력들은 고대국가 체계에 근접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결정적 증거가 될 성곽 등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마한 유물들(왼쪽부터), 마한을 대표하는 토기인 구멍도기,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의 금동관(국보 295호, 높이 25.5㎝), 금동신발(길이 29.7㎝), 세잎무늬고리자루칼(자루 길이 24.8㎝), 그리고 거대한 항아리 2개를 붙여서 만든 옹관(독널)들. 국립나주박물관 제공(※ 클릭하면 이미지가 크게 보입니다.) |
나주/글·사진 안관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