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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kbs역사스페셜] 잉글리시(English) 조선 상륙기 (부제: 왜놈들은 안 끼는 데가 없긔/스압)

lionet 2015. 11. 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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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영국의 함선이 부산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부터였긔.


당시 조선 기록에는 '그들의 말과 글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고 쓰여 있긔.
그 후 수십년동안 여러차례 이양선이 조선 근해에 출몰했지만
여전히 조선에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단 한명도 없었긔.


그러나 서구열강은 조선의 대문을 흔들었고
조선은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빗장을 열게 되오.


그리고 서구 국가 중에선 미국과 최초로 통상조약을 하는데
이것이 제물포 조약이긔.


 

화도진 언덕에 세워진 임시천막에

조선과 미국의 대표가 마주 앉았긔.

그런데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맺는 이 자리에

의외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통역이긔.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 일본, 몽골같은 나라 이외에

다른 서양나라와 소통하거나 교역하는 것은 나라에서 엄금했기 때문에

외국인을 접할 기회도 없었고

당연히 서양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긔.

그래서 청나라에서 파견된, 서양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마젠중이

조선을 대신해 통상조약 초안을 작성했긔.

 

 

영어를 모르니 중국인 통역을 가운데 두고 필담으로

간접적인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양국은 일단 조약을 체결하고

5년 뒤 말이 통하면 조약을 조정하기로 하긔.

그런데 당시 조선으로서는 영어 자체를 몰라서

청나라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큰 타격이었을거긔.

조선의 외교 조약을 맺으면서 스스로 교섭을 못했으니까...

이렇게 영어 교육의 필요성이 생겼긔.

 

 

조약이 체결된 뒤 고종은 미국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하긔.

최초의 미국 전문 사절단, 보빙사.

 

 

근현대사 시간에 졸지 않으신 분이라면 익숙한 이름들일거긔.ㅋㅋ

보빙사는 영어를 못했지만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한 최고의 엘리트들이었긔.

이들은 제물포(인천)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다시 기차로 대륙을 횡단해 2달만에 뉴옥에 도착하긔. 헥헥...

 

 

1800년대 이미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해 있었던 뉴욕.

 

 

당시 뉴욕은 다양한 인종과 최신식의 건물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인류문명의 전시장이었긔.

 

 

보빙사는 산업시찰을 하면서 신문물을 온몸으로 체험했는데

그 중에서도 그들의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전등이었긔.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한 것은 보빙사가 도착하기 4년 전..

당시는 미국 전역으로 전등이 확산될 때였긔.

 

 

맨해튼 거리에도 가로등이 세워져 뉴욕의 밤거리를 대낮처럼 밝혔고..

 

 

생전처음 휘황찬란한 밤거리를 본 보빙사는 당시의 놀라움을 이렇게 전합니다.

 

 

 

 

보빙사 활동이 끝나자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긔.

oh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 유학생 oh

미국에서 접한 신문물은 새로운 문명과 영어에 대한 각성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저서 '서유견문'에서 영어를 공부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혔긔.

 

 

신문물의 심장부 뉴욕에서 보빙사는 세상의 변화를 절감했고

하루빨리 서양문물을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각성을 하게 됐으며,

그를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긔.

 

실제로도 문이 열린 조선의 항구를 통해서

많은 서양인들과 서양 물건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영어가 필요했고

영어를 가르치고 배울 곳이 필요했긔.

이에 고종은 의욕적으로 국가적인 차원의 영어 교육기관을 만드는데

바로 최초의 왕립 영어학교, 육영공원이긔.

 

 

육영공원은 첫 해 35명으로 시작해

8년동안 112명의 학생을 입학시켰긔.

선발대상은 주로 관리와 명문가 집안의 선비들이었긔.

 

 

가마와 나귀를 타고 등교하는 양반집 출신의 학생들 ㅋㅋㅋㅋ^^

 

 

oh 폭풍맵시 oh

 

 

육영공원은 신식교육기관답게

최초로 교단과 학판(=칠판)이 설치되었긔.

 

 

고종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발탁해 보내준 교사 3명은

모두 일류대 출신의 엘리트였긔.

 

 

육영공원은 영어 외에도 사회, 지리, 과학 등 근대적 과목들을 가르쳤는데

교과서는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고

수업 역시 미국인 교사가 영어로 진행했긔.

이것은 당시로서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긔!

 

그렇다면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 했을까?

당시 육영공원 학생의 후손을 찾았긔.

 

 

장봉환이 육영공원에서 썼던 교과서, The citizen reader.

오늘날 사회 교과에 해당하는 책이긔.

 

 

곳곳에 연필로 적은 한자가 눈에 띄긔 ㅋㅋ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장봉환은 육영공원에 입학한지 5년 뒤

1893년 주미공사관으로 파견되긔.

 

아래는 당시 발급된 여권인데

 

 

크고 신기하긔.

 

사실 당시 장봉환의 영어실력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저자인 영국인도 감탄했을 정도긔.

 

 

그러셨대요.....

그때나 지금이나 단어 외우는게 기본인가봐요.

그리고 그 시기는 원어민에게 직접 배우며

영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교육환경이었기 때문에

좋은 효과가 있었다고 하긔.

..

이렇게 영어 공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고종이 있어서 가능했긔.

고종은 육영공원 학생들의 시험을 2번이나 직접 감독할만큼

영어교육과 육영공원에 관심이 많았긔.

시험은 외국인 교사가 읽으면 받아적는 것이었는데

고종은 이 시험에서 성적이 좋으면 관리로 등용했긔.

이런 왕의 기대와 후원에 빠르게 영어를 습득하는 학생들이 생겨났긔.

 

 

한편, 육영공원과 비슷한 시기에 선교사들에 의해 사립학교들도 설립됐는데

대표적인게 배재학당이긔. (육영공원과 같은 해 세워짐)

 

당시 조선은 기독교의 포교를 엄금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미국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영어와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고종과 개화세력이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긔.

배재학당의 이름도 고종이 직접 지은건데

배재학당=영재를 길러내는 집이란 뜻이긔.

여러모로 당시 고종이 인재 육성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긔.

 

이러한 사학의 설립은 고위관리나 양반 자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영어교육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긔.

 

 

처음에는 서양인에게 배타적인 분위기때문에 학생 모집이 어려웠지만

2년 뒤에는 학생이 60명으로 늘었긔.

영어 효과였긔.

 

 

 

 

육영공원, 배재학당과 같은 해 문을 연 이화학당은

그동안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학교였긔.

 

 

 

이곳 역시 원어민 선교사들이 영어로 가르쳤긔.

 

 

어려운 학생들은 학교가 먹이고 재웠긔.

 

 

영어는 신분사회였던 조선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긔.

 

 

이렇게 영어교육에 대한 열망은 서민에게까지 옮겨 갔긔.

 

 

그 한 예가 '아학편'이긔.

이것은 원래 다산 정약용이 쓴 아동용 한자 학습서였는데

개화기 학자 지석영이 한자마다 그에 해당하는 영어발음이 한글로 적어

새롭게 펴낸 것이긔.

 

 

물론 표기된 영어발음은 부족한 수준이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영어 조기교육 열풍이 불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긔.

 

 

엄마미소가 지어지는건 왜일까요 ㅋㅋㅋ

왠지 귀엽긔. 우리 선조님들ㅠㅠ

으라이쓰~

 

 

 

 

영어에 관한 관심이 늘자 영어를 가르치는 곳도 늘었긔.

조선인들의 영어실력도 일취월장하기 시작했긔.

사람들은 성별, 신분, 나이에 상관없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영어는 순식간에 조선사회 전반에 번져나갔긔.

배재, 이화같은 정식학교 뿐만 아니라 곳곳에 사설영어강좌가 열렸고

강좌마다 모두 인산인해를 이루었긔.

 

 

그렇다면 과연 조선사람들은 왜 그토록 영어를 배우고자 했을까요?

조선사회의 영어열풍에는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긔.

그 이유를 차차 알아 보자긔.

 

 

미국 워싱턴 DC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공사관이었던 주미공사관이 있긔.

 

일제에 강제병합이 되면서 일제에 빼앗겼던 것을

얼마 전 거금을 주고 되찾아 온거긔. (이놈의 왜놈들....)

 

이 건물은 내탕금(일종의 통치자금) 2만 5천불

즉, 고종이 독립자금으로 마련했던 돈으로 구입한 건물이긔.

 

 

102년만에 되찾은 건물은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긔.(라고 나레이션에 나오는데

사실 대략적인 구조 빼고는 많은 변화가 있는 모습이죠)

한일 강제병합이 되기 전까지 이 곳 주미공사관은 자주외교의 본거지였긔.

 

 

이 공간은 이곳에 부임한 외교관들이

연회와 각종 행사를 개최했던 곳으로 보이긔.

 

 

초대 주미공사관에 파견된 이들인데 이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워싱턴 외교가를 주름잡았던 서기관 이하영이긔.

당시 주미공사관의 외교문서들을 살펴보면

외교문서의 상당량이 이하영 한 사람의 이름으로 작성돼있는 것을 알 수 있긔.

 

 

여기도 이하영..

 

 

여기도 이하영..

저기도 이하영..

그냥 다 이하영의 싸인..!!

당시 주미공사관에서 이화영의 활약이 독보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긔.

 

 

이하영은 외야문 주사라는 말단 벼슬에서 시작해

외부대신(오늘날 외무부장관)에 오르기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한 인물인데

정작 그의 출신 성분은 비천했긔.

먹고 살게 없어서 통도사에서 동자승을 했다, 찹쌀떡 장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입증할 수 없고,

확실한 것은 개항장에서 장사를 하는 평범한 장사꾼이었다는거긔.

 

지극히 평범한 이하영의 출세배경에는 영어가 있었긔.

 

 

이하영은 우연한 기회에 '알렌'을 만나 영어를 배워 알렌의 통역이 되었는데

알렌이 고종의 주치의가 되자 이하영도 궁궐에 출입하게 되었고

궁궐에 출입하자니 벼슬이 필요했긔.

그래서 고종은 이하영에게 외아문 주사라는 말단 벼슬을 내렸긔.

이것은 조선사회에서 보기 힘든 신분상승이었긔.

 

이하영은 뛰어난 영어실력 덕분에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주미공사관에 있을 때 미국과의 200만달러 차관 협상도 도맡아 했긔.

 

 

이게 포인트긔.

어느 고관의 '첩'도 영어를 배워 왕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며 이화학당을 찾을 정도로

조선사회에서 영어는 신분의 제약 없이 누구든 출세할 수 있는 도구로 여겨지기 시작했긔.

 

그 한 예가 당시 세관이었긔.

 

 

조선은 조미조약 이후 영국, 독일 등과도 조약을 체결했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물건이 오고 가면서 세관 업무가 시작됐긔.

 

 

세관에서 사용하는 공식 언어=영어였긔.

당시 통상 경험도 영어통역도 없던 조선은 외국 관리들을 초빙해 세관을 꾸릴 수 밖에 없었고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조선인들의 몸값은 그야말로 금값이었긔.

 

 

그렇게 하급 세관으로 근무하던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들은

일반인들의 5~10배에 달하는 봉급을 받았고,

또한 관세 수입에서 바로 봉급이 지급되다 보니 임금체불이 없어 인기가 엄청났긔.

 

요약하자면 영어=출세,

그래서 구한말에 영어열풍이 불었던 거긔.

 

하지만 영어를 배워 근대의 문물을 들여와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꿈은

곧 한일강제병합으로 무너지고 맙니다....(왜놈들.....파괴욕구가 샘솟는다.....)

이후 일제는 한반도의 영어교육에 찬 물을 끼얹긔!!!!!!!!!!!

식민지 국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영어열풍도 이와 함께 사그라 들었을까요??

 

 

1920년, 보성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수업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긔.

이유는..

발음이 엉터리인 일본인 교사를

발음이 좋은 조선인 교사로 바꿔달라는 것이었긔.

 

 

3년 뒤, 다른 학교에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긔.

일제강점기, 이런 일은 심심찮게 일어났는데

그 배경에는 일제의 교육정책이 있었긔.

 

 

일제는 영어수업을 대폭 줄이고

교사는 일본어에 능통한 자여야 한다고 못박았긔.

결국 영어 교사도 대부분 일본인으로 채워졌긔.

 

 

ㅇㅏ..............

그랬구나..............

오늘날 영어교육의 폐해마저 일본으로부터 기인한거구나......

왜놈들의 마수의 손길은 정말 안 뻗친 데가 없구나............

 

(여기서 끝이 아니긔. 뒤에 더 열뻗치는 내용이 있긔!!ㅠㅠ)

 

그렇다면 과연 일본인 영어교사들의 수업은 어땠을까요?

일제강점기때 학교를 다니셨던 분은 이렇게 회상하시긔.

 

 

아.........

홋또 이스 잣또.......?????왜죠ㅠㅠㅠ웃프긔ㅠㅠㅠ

 

 

이 분은 해방 후 미국에서 유학, 콜롬비아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으셨는데

일제강점기 때 잘 못 배운 발음을 고치느라 애를 먹으셨다고 하긔.ㅠ

 

 

1928년부터 2년간 조선에서 영어교사를 했던 드레이크의 수필집에는

당시의 영어수업 풍경이 적혀있긔.

 

 

칠판에 영어단어를 적고 학생들에게 읽어보라고 시켰는데

world = "와르도"

olympics="올림피꾸"

학생들....

그렇게 하는거 아니긔.......ㅠㅠ

 

드레이크는 학생들의 발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긔....ㅠ

 

[그들의 발음은 워낙 독특해서 나는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내가 "영국에선 그것을 이렇게 발음해요."라고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주면

그들에게는 너무 우스꽝스럽게 들렸기 때문에 폭소를 자아냈다. -드레이크]

 

 

 

그렇긔....

이놈의 왜놈들은 진짜 안 끼는 데가 없어요.

참 대~~~단한 맥 끊기 일인자 납셨다~~~그졍????

 

아무튼 이제 영어열풍은 이전과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형태로 다시 일어나긔.

 

 

입시가 생기면서

영어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수단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긔.

 

 

일제강점기, 유일한 출세의 수단은 상급학교 진학이었고

초등학교까지 시험을 봐서 들어갈 정도로 입시경쟁이 치열해서

 

 

해마다 입시철이 지나면 불합격을 비관해 자살하는 수험생들의

기사가 빠지지 않고 보도될 정도였긔..

낯설지 않은 사회상황이죠ㅠ

그 시대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줄은 몰랐긔.ㅠ

 

 

이런 입시 과열의 정점에 경성제국대학이 있었긔.

경성제국대학은 당시 한반도 유일한 대학으로서 출세로 통하는 지름길이었긔.

 

 

경성제국대학의 입시과목은 일본어, 수학, 영어였는데

영어시험은 일본어를 영어로 작문하는 것과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전형적인 문법 번역식 문제였긔.

그렇긔...

여기서부터 시작된거긔...

 

경성제국대학에서 영어를 유일한 외국어 시험으로 두고

영어를 입시의 관문으로 두니까

그 밑에 있는 고등보통학교, 중학교들도 영어 위주로 교육을 하고

결국 영어에 따른 교육 위계질서가 확립되긔.

 

그렇다면 시험문제의 수준과 유형은 어땠을까요??

 

 

시험에 나온 지문들은 오늘날 번역을 하라고 해도 쉽지 않을

셰익스피어의 작품부터 시사를 주제로 하는 지문까지

다양한 장르와 수준으로 이루어져 있었긔.

 

전문가는 그 당시의 영어교육의 내용이

오늘날에 비해서 수준이 낮거나 막무가내식 문법 번역식 교육이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아주 우수한 학생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을 거라고 하긔.

 

 

당연히 입시를 위한 문법, 독해에 초점이 맞춰진 입시영어가 탄생했고

영문법 책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긔.

신문에는 영문법 책 광고가 넘쳐났고 말 그대로 입시영어 열풍이었긔.

 

 

책들은 하나같이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긔...

 

 

그러나 스스로를 국보급 천재라고 자칭하며

독학으로 영어에 입문했던 양주동 역시

문법책 하나에 매달려 영어를 독학하기란 쉽지 않았긔.

 

[3인칭, 세 사람이 일컫는다는 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밤낮 며칠동안 책을 보았으나 끝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양주동 회고록 중]

 

 

아무튼 입시영어시장은 금세 산업이 되었고

 

 

출세를 하려거든 영어를 배우라는 도발적 광고를 수시로 신문에 실은 이노우에 통신영어

이 회사는 정기적으로 신문 1면에 광고를 낼 수 있을만큼 규모가 커졌긔.

 

 

이노우에 통신영어는 영어학습지를 첨삭지도해 보내주는

일종의 우편학습지 회사였는데

 

 

축음기가 보급되자 빠르게 레코드를 영어교육교재로 활용했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이 학습법은 큰 인기를 끌었긔.

 

 

때문에 조선학교들마저 조선에서 나온 여러 교재들을 제치고

이 회사의 교재를 참고교재로 선택했긔.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1938년에는 회원수가 20만명을 돌파하긔.

 

영어산업은 번창했지만 학생들의 삶은 고달팠긔.

 

 

이렇게 영어에 매달리다 보니

 

 

입학시험에서 영어를 없애자는 의견이 나오는가 하면

 

 

학생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개탄까지 나왔긔.

 

 

*물신화: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품이나 화폐가 오히려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은 그것을 숭배하는 것

 

 

영어 한 마디를 몰라 영국 함선을 그냥 돌려보낸 지 100년...

 

 

영어는 격랑의 시대에 조선과 조선인들을 사로 잡았긔.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이 땅의 영어는 문법과 시험에 집착하는 기형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영어 열풍 시대에 살고 있긔.

개화의 도구로 시작한 영어는 출세의 도구가 됐고,

해방 후 미 군정의 통역정치 하에선 친일파들이 살아남기 위한 도구가 됐긔.

그로부터 1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영어열풍이 존재하고 있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영어에 매달리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영어공부방법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100년 전 조선사회를 휩쓸었던 영어열풍을 보면서

지난 100년의 역사속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음을 생각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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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하는 작업이라 그런지 밤새 7시간 내리 작성했긔.ㅠ

피곤하지만 소드님들이 흥미롭게 보신다면 피로 싹 가실거같긔.ㅋㅋ

재밌게 보셨길 바라긔!

 

문제시 수정하겠긔.

알려주시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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