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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순신 장군 신화의 주역 시스템화 된 무기체계

lionet 2017. 2. 8. 10:15

 

이순신 장군 신화의 주역 시스템화 된 무기체계

 

 

 

임진왜란을 화약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화약이 대량으로 사용된 첨단전쟁이었다. 전통적인 무기인 칼이나 창을 이용한 개인의 전투능력으로 전쟁을 치루던 원시적 전투 형태를 벗어나 원거리 타격이 주된 공격이 되는 새로운 전쟁양상을 보이게 된다. 조선 수군은 함포를 주력무기로, 일본 육군과 수군은 조총을 주력무기로 전쟁을 치루게 된다. 일본이 가진 조총의 위력은 대단했고 조선육군은 연전연패를 하며 백척간두의 위기까지 몰렸었다.

그러나 해전은 이순신 장군만 정한 게임의 룰에 지배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를 재현한 사극이나 드라마에 보면 조선수군이 쏘는 함포사격에 적선이 분멸하고, 포격에 의해 불길이 치솟고 작렬탄이 함선을 갈기 갈기 찢어 버리고, 수없이 파편이 날라다니며, 수 많은 왜적이 충격으로 바닷물로 날라가 떨어지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어 수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의 허구였다. 당시의 함포는 투석무기와 같이 쇠구슬을 날려 배를 파괴하는 돌팔매 수준을 넘어 서지 못하는 매우 둔한 무기였었다.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던 대완구는 돌을 장전하여 투석까지 했다.

 

16세기 세계의 모든 대포탄은 쇠공을 날려 충격으로 성벽이나 함선을 파괴하였다. 특히 해전에서는 함선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그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함포를 발사하여 소가 뒷걸음 치다 쥐 밟으면 적선에 구멍을 뚫는 정도였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캐논포와 15만발의 탄환을 퍼부었고, 영국도 수만발의 탄환을 퍼부었지만 함포 타격으로 격침에 성공한 스페인 함대의 전과는 전무했고 영국도 도주하는 스페인함대를 쫒아 수만발의 포탄을 쏟아 부어 겨우 몇 척 부순 것이 전부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16세기 적에게 유효한 타격을 가한 함포의 명중률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 되어 버린다. 임란 당시 유럽에서 함포 사용이란 큰소리로 적을 놀래키고, 화약연기 자욱하게 시위하며 기선이나 제압했던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하였다. 칼레해전은 스페인 함대가 도망다니는 영국함대를 쫒느라 지쳤고 영국함대가 불을 지른 화공선을 스페인 함대 진영에 투입하여 일부 타격을 주었고, 짜증난 스페인 함대가 작전상 후퇴 중에 태풍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영국에게는 행운의 승리 였을 뿐이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과 비교하여 전술적 상황을 놓고 본다면 이순신 장군의 시스템 화망에 의한 적 함대의 궤멸과는 차원이 다른 한참이나 수준 떨어지는 질 낮은 해전이었다.

 

 

당시 스페인 무적함대가 가진 캐논포나 영국함대가 가진 캘버린 포는 사거리도 조선함포보다 길었으며 대형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은 겨우 주조포를 생산하는 걸음마 단계였고 이전에는 망치로 두들겨 조립하는 조립포였다. 대포라는 것은 포신구경과 탄환구경의 간의 간격이 정밀해야 명중률 및 사거리가 늘어나지만 주조포 개발이 조선보다 한참이나 늦은 유럽의 함포는 같은 거리 명중률이나 정밀도는 조선함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사거리도 조선함대에 비해 수십배 화약을 쟁여넣어 발사를 했기에 가능했으며, 성능이 좋지 못한 주조포가 폭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거리나 파괴력에 있어서 함포 성능 자체가 떨어지는데도 이순신 함대가 출동했다 하면 단한번의 전투에서 수십적 완파, 항해불능은 기본이었고 노량대첩에서는 무려 200여척의 적선을 완파시켜 4만명을 수장시켜 버린다. 해전에서 4만명을 수장시킨 해전은 전무후무한 불멸의 기록이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개개의 화약무기 특성에 맞추어 전술을 운영했던 천재성에 기인할 수 밖에 없다.

이순신 함대의 함포와 서양의 함포를 비교하면 조선함대의 최대 사거리는 대장군전을 천자총통에 넣어 날리는 것이었는데 대략 1,000미터 정도였고 서양함포는 2,000미터에 이른다. 사거리나 파괴력을 따지면 조선함대는 유럽함대 만나면 그냥 끝장이다. 그러나 만약 이순신 함대와 유럽함대가 만난다면 유럽함대는 궤멸 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16세기 해전에서 함포에 조준장비나 유도장비 없이 해전을 치루어야 할 때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함포 명중률은 제곱에 제곱으로 떨어진다. 즉 거리가 멀면 멀수록 표적인 적함선은 제곱승수로 작게 보인다. 당연히 명중률은 제곱승수에 제곱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스페인이나 영국이 가졌던 함포의 유효사거리는 실제적으로 짧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16세기 함포해전을 치룰 수 있는 가능성 있는 거리는 포수의 가시권 감각적 조준 거리인 300미터로 본다. 이는 서양에서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15만발을 영국함대에 퍼 부었지만 단 한척도 격침시키지 못했다.

 

포의 무게나 최대 사정거리가 훨씬 높은 서양화포는 유효사거리가 조선화포보다보다 좀더 멀었지만 함포해전을 치룰 수 있는 적선파괴의 유효사거리는 조선과 서양 양쪽 다 300~500m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조선수군은 연안해군이고 서양수군은 대양해군이라서 전투를 치룰 수 없다는 견해를 내어 놓지만 서로가 싸우지 않겠다고 멀리 멀리 기동을 하면 영원히 해전은 벌어지지 않는 것이고 전체적인 해전을 치룰 능력과 함포전이 가능한 거리에서 전투를 벌린다면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시스템화망에 유럽함대가 궤멸 되었을 것이다. 목선이 아무리 강력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대포 포환을 견딜 장갑능력이나 내구력은 생길 수 없고, 이순신 장군의 일제방포의 시스템 화망에 커다란 서양 함대도 맥을 추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이 배수량 800톤에 이르는 대형 군함도 있었지만 함대내 몇척 되지 않는 소수였고 주력선은 판옥선보다 같거나 작은 수준이었다. 또한 아무리 배수량이 큰 전함이라 해도 당시 목선의 성능이나 선체 내구력과 강도로 보아 포탄에 견딜 수 없었고, 배에 구멍이 뚫리면 가라앉아 승조원은 생존자체가 불가능 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어차피 유효사거리 300-500미터를 두고 접전을 해야했을 해전에서 해전을 치루는 능력을 놓고 본다면 당시 학익진과 일시집중타법을 마스터한 조선함대는 유럽함대는 거덜이 났고 조선함대는 당시 세계 최강의 함대였었다.

 

이순신 함대는 사거리 별로 미리 화약의 양을 종이에 싸서 포격에 임했고 이는 현대전의 장약과 같은 개념이다. 더욱이 중거리 및 접근전은 조선함대가 넉넉하게 압도한다. 대완구로 발사하는 비격진천뇌는 세계 최초 작렬탄이다. 16세기 조준경 없는 쇠공을 날려 적의 배를 부수는 유럽함포와 달리 비격진천뢰는 100-200미터의 사거리에서 대완구로 발사하여 인명살상을 하게 된다.

 

명량대첩에서 마다시(구르지마 미치후사)함대를 초토화 시킨 조란환은 비격진천뢰의 수십배의 살상력을 가진다. 조란환은 접근전이든 중거리전이든 수백개의 파편이 전함대 선상을 파고 들며 사정없이 살상을 한다. 이정도의 중 단거리 화약무기를 체계적으로 다양하게 갖추고 시스템 공격을 할 수 있는 함대는 16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이순신 함대의 접근전 무기를 보면 신기전, 피령전, 편전, 질려포통, 주화, 화전, 수노기 등 수십 종류의 다양한 무기로 장, , 단거리의 무기를 시스템화 시켜 완벽하게 적을 제압하였고 적선을 격침시켰지만 이순신 함대는 단 한척의 전선도 잃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대한 완벽한 전술적 개념을 정립하여 전투단계마다 각기 다른 전술적 무기를 운용한다. 총통류 함포로 화망으로 구축하여 원거리 타격을 한 후 적 함대의 기동을 제압한 후, 중거리로 접근하여 조란환 및 비격진천뢰, 편전 등으로 선상의 전투원을 제거하고 조총유효사거리 밖인 50미터 밖에서 수노기, 화살등으로 잔적을 저격하과 화전을 쏘아 화공으로 마무리 지어 적군의 발악과 저항을 완벽하게 제압한 후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이러한 단계별 공격시스템을 달리하며 전투단계별 사용 무기체계를 갖춤으로서 생존자 없이 적함대는 궤멸되고 아군사상자가 거의 나지 않는 완벽한 승전을 올리게 된다.

도선을 통한 단병접전에 강하다는 왜적을 상대로 도주하는 왜적을 섬멸한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은 전투가 치열해지며 접근전과 난전으로 이어진다.. 그러함에도 강력하고 다양한 접근전 무기가 위력을 발휘하며 수십명의 사상자 밖에는 나지 않았지만 왜적은 4만명이 수장 되었다. 아군의 전선 피해는 판옥선한척(이 판옥선도 명군에게 빌려 주었는데 진린의 오른팔 동자룡이 전사하면서 격침된 것임, 명나라는 500여명이 사상됨)임에도 왜적은 200여 척 침몰, 아다케 100여척 조명 연합 수군에게 나포 당하고, 전선 150여척 파손 되었다.

    

 

 

왜적의 조총은 지향사격을 하던 당시 목표물을 정교하게 타격할 수 있게 조준 사격을 하는 신개념의 무기였다. 함포와 화살류의 지향조준을 하는 무기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차원의 무기 였었다. 만일 접근전이 벌어진다면 조총의 정교함에 조선수군은 궤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조총의 위력을 갈파한 이순신 장군은 일제방포, 일시집중타 사격을 통한 시스템화망을 구축하여 적이 정교하게 조준하며 저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화망 안에 갖힌 적함대를 생생한 지옥을 경험하여야 했다. 특히 조란환과 같이 수백개의 탄환이 날라다니고, 수백발의 화살이 일시에 발사되는 신기전이 접근전에서 우월한 살상력으로 적의 조총을 무력화 시켰다. 수노기 같은 화살 연속발사기는 접근전에서 순식간에 파괴력 강한 화살을 발사할 수 있어 왜적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무지한자들이 말을 하곤한다. 사거리가 긴 화포가 조총을 이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둔한 함포와 조총의 대결에서 조준사격이 가능한 조총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효종 때 청나라의 압력으로 흑룡강에 출몰하는 러시아군을 토벌하기 2차 나선정벌에 나서 조총부대를 파견한다. 원정군 사령관으로 1차 출병 때와 같이 함경북도 병영의 병마우후 신유장군을 임명했다.

 

총병력 265명으로 제2차 나선정벌에 나선 신유장군은 전투에 나서 조선군 전사자 8명에 부상자 25, 청군은 전사자 120여 명에 부상자 200여 명, 한편 러시아측은 사령관 스쩨빠노프와 병사 270명 전사, 국고 소유의 담비가죽 3천 장, 대포 6, 화약, 탄약, 군기 등이 연합군에 노획되었으며, 생존자 95명만이 배 1척에 타고 겨우 탈출하는 혁혁한 전공을 올린다.

전투는 양자간에 대포를 쏘는 포격전으로 시작하였지만 서로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고 양측의 조총부대가 충돌하게 된다. 조선의 조총부대의 활약은 눈부셨고 러시아 부대를 궤멸시키는데 결정적 전공을 세운다. 당시 청나라는 당시 최신 대포인 홍이포(블랑기포)로 무장하고 있었어도 지향사격을 하는 홍이포보다 조준사격이 가능한 조총이 위력을 떨쳤다. 육상은 은폐, 엄폐물이 많아 조총의 위력이 떨어진다. 이러한 조총이 은폐, 엄폐물이 없는 바다에서 수 없이 조준사격이 가해진다면 둔한 함포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함포의 이러한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원거리 타격이라는 함포의 장점을 극대화 하여 완승을 거두게 된다. 현대전의 무기는 파괴력을 높이고자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조준할 수 있는 조총의 사격의 정교함에 명중률의 개념을 정립할 수 없는 함포는 결코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정교함의 열세를 무기사용의 시스템화를 통하여 불패전의 신화를 쓴 것이다.

단 한명의 아군생명도 헛되게 희생치 않기 위하여, 열세에 놓인 병력손실을 극단적으로 피하고자 이순신 장군은 적의 수급도 취하지 못하게 엄명을 내린다. 난전 중 아군의 손실이 날 수도 있어 격침된 적선에서 빠져나와 육지로 도망가는 전투력 상실한 왜적들 뒤도 쫒지 못하게 했다. 간혹 이순신 장군이 당파전술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순신 함대는 충각전술도 거북선으로 제한적으로 사용했을 뿐 주력 전선인 판옥선에 적선이 도선이나 접선, 당파나 충각 등 맞부딪히는 전투상황은 애시당초 만들지 않았다. 그러지 않고도 완벽하게 승리하는데 아군피해를 늘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확고히 우월한 파괴력을 갖춘 함포로 15만발을 퍼부어 단 한척의 영국 전선을 격침하지 못한 아르마다(스페인 무적함대)의 소모전을 통하여 이순신 장군의 화약무기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한 완벽했던 전략 전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방증하고 있다. 강력한 이순신 장군의 시스템화 된 무기체계에 도전했던 쪽발이들이 불쌍할 뿐이다

출처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글쓴이 : 변강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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