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관심분/종교이야기

[스크랩] 우리는 개신교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lionet 2010. 12. 24. 01:30

  

개신교의 길...친일에서 친미로..그리고 그들의 한국인 학살..

 

1950년 황해도 신천에서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간에 벌어진 양민 대학살 사건. 세계는 경악했고, 그 당시 프랑스 파리에 있었던 파블로 피카소는 이를 소재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대형 그림을 그려 발표하게 된다. 그로부터 반백년을 넘어선 2001년 리얼리즘의 거장 황석영은 장편 '손님'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사건을 조망하여 민족 내부에서 벌어진 참극을 씻고자 한다.

북한의 공식 통계로는 10만의 주민 중에서 3분의 1을 넘어서는 3만 5천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 통계에 따르면(통계가 과장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주민 셋 중의 하나가 학살된 것이다. 이 학살의 이유는 당시 황해도 신천의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중농 이상의 부농이었던 바, 북한이 사회주의적 토지 개혁을 실시함에 따라, 이들 기독교인들은 완강하게 저항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 당했으며, 이들은 50년 10월 13일 유엔군이 이북을 넘어서자, 봉기를 감행했고ㅡ 그에 따라 무참한 학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과거 십자군 원정 때 희생된 아랍인들의 피가 십자군의 발목까지 차올랐듯 이 때 희생된 양민의 피는 학살자들의 발목까지 차서 넘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학살이 이른바 하나님 수호라는 기독교적 명분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 아이러니이고, 그 기독인들의 거의 전부가 남한으로 넘어와 이른바 보수적 기독교 단체가 된 것이라는 점이 더욱더 아이러니하다. 나아가 그런 뿌리를 가진 한기총이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 하나님 수호라른 명분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반하는 기도회로 하나님의 자식들을 반하나님적으로 이끌어가는 점은 아이러니를 넘어서는 비극이다.

자기 가족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자기 가족을 죽인 자들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 더욱 잔혹하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들은 한계와 오류에 가득 찬 인간이기에,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듯이, 복수를 위하여 상대를 처참히 죽이기도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당시는 광기의 시대였고, 가장 반종교적인 상황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으므로, 나는 신천 양민 학살의 책임을 그 누구에게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이 시도하듯
외국에서 들어온 '마마손님'과 같은 이데올로기에 당시 '무식'했던 우리가 저지른 참극이었던 것이고ㅡ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참회하고 화해하는 사랑의 정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뿌리를 가진 보수적 기독교 단체들이 궐기를 호소한다. 아마, 보수 권력이 다시 들어서고ㅡ 최악의 경우 미국이 북을 공격하는 전시 상황이라도 온다면, 신천 양민 학살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이른바 한기총이라 하는 이들의 국보법 사수를 위한 기도회(?)를 보는 마음은 씁쓸함을 넘어서서 두렵기까지하다
.

하나님이시여.
제발 이 땅에 그런 참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당신을 이름을 부르는
저들의 마음을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소서.
그리고 그들이 당신의 뜻에 따라 먼저 반성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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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국의 근현대사

서북 청년단을 아시나요 ?

조선의 에루살렘은 아시나요 ?
평양을 말합니다

개신교는 한일 합방후 일제치하에 초기에 3.1운동을 하고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대 앞장서고 주도적 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거듭된 핍박과 회유에 굴복하고
친일파로 변절을 한다

일제는 그러한 그들의 편의 를 봐주고
개신교는 북한지역에서 교세를 넓히고
사회적 으로 높은 지휘에 오르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제때 고위 관직을 지넨 개신교 신자들 이 다수 생긴다
그들은 2차 대전에는 모금하여 전투기를 일제에 헌납 하기도 하엿다
그리고 신사참배와 황국 군대에 지원을 선동을 한다

그리고 일본은 패망을 한다

북한 지역은 소련이 점령 하여 공산 정권이 들어 서게 돼고
개신교 신자는 심각 신변에 위협을 받는다
그들은 친일파에 지주에 예수쟁이로 목숨을 보장 받기 힘들게 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정리하고 버리고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 온다


그런한 그들이 결성한 단체가 서북청년단 이다

서북청년단 결성에 주도적 역활을
서울 금란 교회에 김홍도 목사 부친이 수행한다
그리고 서북청년단은
해방후 조직 폭력배 계보에 명함을 올리게 됀다

종로파 = 김두환 = 대한 청년단

동대문파 = 이정재 = 화랑 동지회

명동파 = 이화룡 = 서북 청년단

서북 청년단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시녀로 경찰이나 군대가 할수 업는
범죄적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들은 제주 4.3 사대 양민 학살 사건에 투입되
3만 여명의 목숨을 빼앗는다

그리고 각종 좌익 집회에 테러를 가하고
이승만의 반대파 에게 테러를 자행한다

파업 현장에도 투입해 폭력으로 제압하고 그후 경찰은 뒷정리를 하엿다

안두희

서북청년단 간부로 김구 암살

그리고 625 전쟁후 서북 청년단은 특수 임무를 하게 된다

북파 임무

서북청년단은 우리 근현대사 에서 폭력으로 각종 이권과 정치에 계입한다

시라소니 이성순 서북청년단 간부

후일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에는 서북 청년단 출신이 많고

그들이 만든 교회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서 유난희 보안법에 민감하고 반공을 강조 한다

그들의 본바탕은 깡패 집단이고 폭력을 주업으로 하던 사람이다

이쯤 돼면 우리 나라 개신교 교회의 정체가 의심 된다

 

 

서북 청년단을 아시나요

 

개신교 조직 폭력배로 해방이후 북한에서 쫒겨온 감리교가 주축이되고 남한의 개신교가

 

가담하고 ymca 에서 창단식을 가진 전국을 무대로한 거대 폭력 조직으로

 

정치적 태러행위를 일삼고  김구 암살 제주 4.3사태 3만명 살해 여순사태 학살행위등

 

잔인한 태러행위를 일삼고 방화 강도 절도 등등의 패륜적 행위를 하였고

 

이승만 초상화와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강매를 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공산당 빨갱이로 누명을 쒸어 고문 폭행 살해등을 일삼고

 

가족들을 상대로 협박 금품 갈취 성상납 강제결혼 등을 하였다

 

박정희 의 5.16 군사 혁명 이후 해체 되어

 

전국 각처에 교회를 만들고 목회 활동을 하였고

 

그들은 자신을 반공 용사라 칭하고 사람 죽인일을 공산당 때려 잡는 일로 미화 시키고

 

목회 활동을 하였다

 

지금 현재는 현직에서 물러 나고

 

서북 노회라는 조직을 통하여   배후에서 압력을 행사하고 우리나라 개신교를

 

배후에서 조정을하고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게다가 친일은 좀 많은가??

 

 

 

▲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잡은 종교교회. 종교교회 전면에는 양주삼 총리사 기념교회라는 돌 기념비가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감리교를 빛낸 인물로 회자되는 양주삼 목사(1897-?).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솟은 웅장한 석조건물과 10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교회(최이우 목사)는 다름아닌 '양주삼 목사 기념교회'로 명명되고 있다.

그러나 기념 교회가 설만큼 극도의 추앙을 받고 있는 양 목사는 실제 대표적인 친일 기독교 인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9일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 양 목사는 종교와 전쟁협력 양 부분에 이름이 올라 있다.

양 목사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찬성한 것은 물론 1938년 12월 국내 기독교를 대표해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했으며, 일본의 태평양전쟁 찬양과 학도병 모집에 적극 나섰던 부끄러운 전력도 갖고 있다.

1943년 11월 8일 매일신보는 양 목사가 "드디어 반도 청년학도 제군에게도 무인으로서 출전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한없이 기뻐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양 목사는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열린 '미,영 타도' 좌담회에 참가해 일제 태평양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양 목사는 물론 일제말 감리교단의 정필순 정춘수, 복음교단의 최태용 성결교 이명직, 장로교단의 한경직 홍택기 등 각 교단의 요직에 있었던 인물들 모두 우리 민족과 교회 앞에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당사자들이다.

특히 당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일제 신사참배 정책에 순종하기 위해 일본 신 '미스 기바라'의 이름으로 한강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주의 종으로 헌신을 맹세한 성직자로써는 생각할 수 없는 신앙적 회절이었다.

또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교단 차원의 각종 행사는 1937년 이후 숱하게 이뤄졌다. 장로회는 1937~39년 동안 전승축하회 5백 94회,무운장구기도회 9천53회,국방헌금 1백58만여원,시국강연 1천3백여회 등을 개최해 일본을 도왔다.감리회도 교회 종 헌납과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 개소 등으로 일제를 지원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친일의 잔재는 기독교라고 해서 결코 예외는 아니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교회가 대표적 친일 인사인 '양주삼 목사 기념교회'라는 사실은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상징한다.

친일 기독교 인사들은 해방 후에도 교단과 각종 기독교 기관에서 실권을 유지하는 등 여전히 기독교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성결교단의 친일 인사인 이명직 목사는 해방 후 서울신학교 학장으로 추대됐고 성결교 교단가를 작사할 정도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1959년 44회 장로회 총회 분열 후 예장통합측은 역시 친일 인사인 전필순 목사를 용납하고 그를 총회장에 추대했다.

양주삼 목사가 감리교에서 추앙되듯 이명직 전필순 목사 등은 성결교나 장로교단의 대부와 같은 위치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교단 내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광복 60년을 맞았지만 기독교의 오욕과 굴욕의 역사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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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개신교는 역사와 민족에게 사죄로 용서를 구해야 되지 않을까?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이익 집단 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족을 서슴없이 학살하고 국가를 팔아 먹는짓도

서슴없이 할 집단이지요..

그들이 저지른 악행은 하늘도 노할 것이며 진정한 사죄가 없는 반성은 아무리 기도를 한들 죄는 사라지지 않고 죽어서 천벌을 받을 것 입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 난다면 우리 국민은 저들에의해 빨갱이로 몰려 학살 당할지도 모릅니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모두사랑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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