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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필독] 김치는 중국절임의 짝퉁이 아니라 독자적인 우리 고유의 음식

lionet 2011. 7. 14. 22:57

 

짝퉁의 나라 중국, 스스로를 일류국가라 자뻑하지만, 실상은 삼류국가도 못되는 미개한 국가 중국... 이 중국이 동북공정, 탐원공정을 비롯한 역사왜곡을 하고, 휴대폰의 한글입력방식을 중국식으로 국제표준화하여우리의 한글을 노리는 한글공정에 이어 이젠 우리 고유의 음식인 김치마저 자신들의 절임채소 파오차이(泡菜)의 짝퉁이라는 소위 김치공정마저 시작했다.

(자세한 건 여기를 참고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03/31/4939689.html?cloc=nnc)

 

남의 나라 역사, 문자, 음식을 자기네 꺼라 우기는 이들이 무슨 일류국가요, 강대국이란 말인가? 이건 깡패국가, 삼류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주장대로 한국의 김치는 중국의 포차(파오차이)의 짝퉁이요, 김치의 발효법은 중국의 것일까?

그건 아니다. 김치는 한국 고유의 음식이고, 김치의 발효법 역시 중국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독자적인 것이다.

 

인류가 이 땅에 지배자가 되면서 인류는 식량 보존을 위해 많은 방법을 강구했다. 발효는 식품저장을 위해 탄생한 기술이다. 맨처음 인류는 식량을 말려 식품을 보존했다. 곡식과 열매와 달리 수분이 많은 고기, 생선, 채소류는 보존을 위해 건조나 염장처리가 필요했다.

 

 

소금이나 식초를 절임 매개물로 하여 채소를 절인 음식의 대표가 우리의 김치다. 김치 말고도 산발효채소에속하는 것은 중국의 채(지방에 따라 산채, 포채, 장유채, 함채로 나뉨), 몽골의 건함채, 일본의 지물(漬物), 서양의 피클, 오스트리아의 사우어크라우트나 바이스크라우트 등 양배추로 담근 발효채소식품 등이 있다.

 

김치와 젓갈은 젖산발효식품이다. 김치에 젓갈을 첨가하고 거기에 각종 향신료 및 조미료를 배합해 부패와 변질을 조절하고 막은 것은 뛰어난 한국 고유의 식품 저장 지혜다. 중국과 일본에도 채소의 소금절임이나 된장, 간장에 담근 장아찌식 절임과 젖산발효 초기에 머무른 담백한 채소절임류가 많다. 그러나 식품의 다섯가지 기본 맛에다 젓갈로 인한 단백(蛋白)맛과 발효의 훈향을 더하는 일곱가지 독특한 풍미를 갖춘 발효채소식품은 한국의 김치가 유일하다. 김치의 발효법은 중국, 일본과 구별되는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김치의 발효법이 중국의 것이라는 중국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채소절임에 관한 첫 기록은 2600~3000년 전에 쓰여진 중국 최초의 시집인 『시경』에 보인다.

 

밭 두둑에 외가 열렸다. 이 외를 깎아 저(菹)를 담가 조상께 바치면 자손이 오래 살고 하늘이 내린 복을 받는다.

『시경』소야 초자조

 

이 외에도 채소절임에 관한 기록은 더 있다.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었다.   『여씨춘추』

 

한나라 말기에 저술된 『석명』에는 저가 채소를 젖산발효시켜 저장한 산미가공식품이었다 기록하고 있다.

 

채소를 소금에 발효시키면 젖산이 생성되고, 이 젖산이 소금과 더불어 채소의 짓무름과 부패를 막는다.

『석명』

 

남북조시대 북위의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에는 30여 종의 저를 만드는 법이 소개되어 있고, 재료로 쓰인 것은 배추, 무, 순무, 아욱, 외 달래, 죽순, 동아, 목이버섯 등이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일산에 기원전 2000년대 유물 중 볍씨와 함께 박씨, 오이씨 등이 출토되었다. 후한의 허신이 쓴 『설문해자』를 보면 "저는 신맛의 채소로 오이를 초에 절인 것"이라는 기사가 있다. 우리나라에 오이씨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기원전 2000년대 우리 조상들이 채소절임음식을 먹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원삼국시대(폐기되어야 하는 용어)의 큰 항아리들에 김장의 흔적이 보이는 걸로 보아 우리의 김장의 역사가 고조선시대까지 소급될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이소박이

 

일본의 식품학자 전전안언(前田安彥)은 채소절임음식의 기원을 중국으로 보고, 중국에서 시작된 채소절임음식인 북경산채와 사천포채가 실크로드를 경유해 서쪽으로 전파되어 유럽의 피클과 사우어크라우트가 되었고, 동쪽으로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한국의 김치와 일본의 지물이 되었다는 중국 기원 및 전파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채소절임음식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재료인 오이의 원산지는 서북인도나 히말라야 산맥지역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오이의 전파길을 따라 오이 절임류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채소절임의 기원은 중국이 아니라 인도가 될 수 있다.

 

아래 표는 세계의 채소절임음식을 비교한 것이다.

(이 표는 주영하, 「김치문화의 기원과 변화연구」란 논문에서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유럽 

 명칭

 침채(沈菜),김치

저(菹),포채(泡菜) 

 저(菹),지물(漬物)

아차르(acar)

마니산(manisan) 

피클(pickle)

사우어크라우트 

 초기문헌

 『동국이상국집』

『시경』

『제민요술』

정창원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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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연대

 13세기

8세기 

8세기 

 - 

 -

 문헌등장지역

 개성

山東

奈良 

-

 -

 주식

 곡물

 곡물

곡물 

곡물 

곡물 

 쓰임새

반찬 

반찬/조미 

반찬 

 반찬

 반찬/조미

 주재료

 무/배추/오이

무/오이/배추 

무/오이/배추 

오이 

오이 

 기본제법

 소금/양념

식초/소금 

소금/장(醬) 

식초/소금 

식초/소금 

 주요생업양식

 농업

농업

농업 

농업 

농업 

 

위 표에서 알 수 있듯 절임 매개물은 소금과 식초로 나뉘어진다. 소금이나 식초의 개발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자생적으로 인간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소금과 식초 그 기술의 정도만 제외한다면 특정지역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 존재했던 식품임에 틀림없다. 각 지역의 채소절임음식은 하나같이 소금을 이용하였다. 이는 각 지역의 채소절임음식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우리의 채소절임음식이 자생적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자생적으로 나타난 우리의 채소절임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층 발달한 것 같다.  일본의 역사서『고사기』를 보면 응신왕 때 백제인 수수보리가 왜(일본)로 건너와 일본의 채소절임 35종 중 하나인 수수보리지를 전했다고 한다. 고구려인 역시 채소절임음식을 먹은 듯 싶다. 당시 고구려가 재배한 채소 중에 부루와 아욱이 있다. 부루는 천금채라 하며, 수나라에서 그 종자를 얻으려 했을 정도로 고구려의 부루는 우수한 품질을 가졌던 듯 싶다. 문헌에는 없지만 고구려인들 역시 소금에 절인 김치를 먹었으리라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식초와 소금을 절이던 방법에서 지게미, 누룩, 곡물 껍질류에 채소를 발효시키는 방법과 장(醬)에 절이는 방법 등이 발달했다. 이런 발효의 지혜는 곡물, 채소, 생선을 버무려 삭힌 오늘날의 함경도지방의 가자미식해와 안동식해, 북어식해 등에 잘 남아있다.

 

가자미식해

 

고려시대에는 6대 성종이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 음식 중에 미나리, 죽순, 무, 부추 등으로 담근 김치 무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김치에 관한 우리의 최초 기록은 고려 중기 문인인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보인다.

 

장에 담근 무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되네

『동국이상국집』「가포육영」

 

고려 고종연간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에는 숭(菘) 즉 배추는 줄기가짧고 잎은 넓고 두꺼우며 광대해 순무와 비슷하나 실털이 많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절임류가 오늘날의 김장김치, 동치미, 짠지 등의 형태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무와 배추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며, 고려시대 채소절임의 주 재료가 무, 배추, 순무였음을 알려준다.

 

현재 우리나라 김치는 세계 각국의 채소절임음식들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고추가 주 재료로 들어가고, 젓갈이 양념으로 들어가 독특한 맛을 낸다. 더군다나 김치의 종류도 상당히 많다.

 

 

깍두기

 

배추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오이소박이, 가지소박이, 나박김치, 생치김치, 산갓김치, 죽순식혜, 청포식혜, 동치미, 오이장아찌, 고추장아찌, 더덕장아찌, 짠지, 통김치, 장짠지, 배추장아찌, 가지소박이장아찌, 가지장아찌, 동아김치, 오이숙김치, 갓김치, 굴김치 등 우리의 김치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상대적으로 중국은 포채가 퇴보를 거듭하고, 일본은 고대의 조리법 그대로 이어간 것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채소절임문화는 상당히 진보를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역으로 보면 우리의 김치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우리의 김치는 매우 다양해진다. 1670년 안동 장씨가 지은 한글 요리서인 『음식다미방』을 보면 여러종류의 김치가 보인다. 동아를 절여 담그는 소금 절임 김치, 산갓을 단지에 담아 따뜻한 물을 부은 후 뜨거운 구들에 놓아 삭히는 김치가 보인다. 이는 무염침채(無鹽沈菜)로 소금 없이 채소 자체를 삭혀 숙성시키는 방법이다. '생치침채법(生雉沈菜法)'도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절인 오이의 껍질을 벗겨 소금 간을 한 따뜻한 물에 함께 넣어 나박김치처럼 삭혀서 먹는 것이다. 대표적인게 '생치짠지히', '생치치히'로 오이절임을 재료로 꿩고기와 함께 기름에 볶아 간장으로 조미한 것이다. 그 외 산갓김치, 나박김치류가 소개되어 있다.

 

나박김치

 

1665년 신속이 엮은 『농가집서』에는 침즙저(沈汁菹)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가지 장과 밀기울을 섞어 뜨거운 마분(馬糞)에 달포가량 묻어두었다가 먹는 것으로 오늘날의 간장지, 간장에 담근 가지장아찌의 일종이다.

 

『산림경제』는 김치 담그는 법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소금을 적게 넣는 담저법(淡菹法), 다른 하나는 짜게 담그는 함저법(鹹菹法)이다. 1766년에 나온 『증보산림경제』에는 고추가루를 사용한 김치가 나온다. 무짠지 담그는 '침나복함저법(沈蘿蔔鹹菹法)을 소개하고 있는데 "잎줄기가 달린 무에 청각,호박, 가지 등의 채소를 넣고 고추, 천초, 겨자를 향신료로 섞어 마늘즙에 듬뿍 넣어 담근다"고 쓰여있다. 오늘날의 총각김치와 비슷하다 『증보산림경제』는 김치의 양념으로 고추와 고춧가루를 사용했으며, 마늘, 파, 부추 등도 양념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총각김치

 

당시 우리의 김치는 이웃 청나라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귀화한 노파가 그 곳에서 김치를 담가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담근 동치미의 맛이 서울의 것과 똑같다

김창업의『연행일기』(1712)

 

통관(通官) 집의 김치는 우리나라의 김치 담그는 법을 모방해서 그 맛이 꽤 좋다

『계산기정』(1803)

 

동치미

 

위 기록은 우리의 김치가 중국에 건너가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중국의 유명한 채소절임인 사천포채(四川泡菜)는 우리의 동치미와 비슷하다. 아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참전한 병사가운데 사천성 병사들이 우리의 동치미를 먹고, 사천성에 전파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십육지』에는 젓갈 김치인 해저방(섞박지)이 나온다. 소금에 채소를 절인 우리의 김치가 젓갈에 버무린 젓갈김치로까지 진화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고추가 널리보급되면서 김치는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젓갈


 

그렇다면 왜 고추는 일본에 정착되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정착되었을까? 그건 소금과 관련이 있다. 18세기 이후 공인의 등장으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서 당시 조선에서는 소금의 수요가 늘어났다. 17세기 이후 관혼상제가 피지배층에까지 퍼지고 향교, 서원의 증가로제사가 확대되자, 제수용품으로 어물의 수요가 증가되었다.그런데 어물은 쉽게 부패하는 식품으로어물량의 20% 이상에 해당하는 소금으로 절여야 유통 및 보존이 가능한 까다로운 식품이었다.

 

이같은 어물 수요의 증가와 더불어 이모작의 확대 실시로 곡물의 생산이 증가되었다. 곡물 생산의 증가는 곡물 위주의 편식을 조장하여 소금의 수요가 늘어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곡류 편식 위주의 식생활 습관은 반찬을 짜게 먹는 소금 과잉 섭취의 식단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는 한랭기로 기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옛부터 소금과 장은 기근을 이기는 구황식품이었다.

 

만약 소금이 있으면 비록 곡식이 없더라도 나물에다 섞어 먹어 연명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권18  8년 8월 8일

 

소금의 갑작스런 수요 증가는 김치를 절이는데 쓰이는 소금의 양을 감소시켰을 것이다. 이 때 고추가 김치의 발효과정에서 미생물의 발육을 억제하고, 식염절약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발견하여 김치에 고추가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서유구가 『임원십육지』에서 고추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것을 보면 고추가 식염절약의 기능과 함께 김치를 맛있게 만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어물의 수요증가는 젓갈류를 일반화시켰을 가능성이크며, 이러한 현상이 김치에 적용되어 19세기에 김치를 절이는 주요 매개물로 젓갈을 사용하여 젓국지라는 젓갈 김치가 나온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다.

 

 

굴김치

 

우리민족은 고대로부터 산채나 기타 야생초를 절여 보존하면서, '담그고', '삭혀', '발효시키는' 자연식품의 저장 지혜를 터득했다. 여기에 여러 채소와 외래 약채나 향신초들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절임 저장식품들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과 같은 우리 김치의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결구배추와 같은 외래 채소들이 도입 재배되면서부터다. 종래의 산채나 야생초를 곁들어 절이는 개량 절임인 혼합김치, 석밖지, 별미김치, 외래 채소를 주 재료로 한 통배추 절임 등이 자연적으로 젖산발효를 유도하게 되었고, 여기에 갖은 향신료나 어패류의 발효액즙인 젓갈, 생산과 육류를 첨가해 뛰어난 효능을 경험함으로써 김치는 차츰 오늘날의 모습으로 진화하였다.

 

우리의 김치 역사는 유구하다. 게다가 우리의 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날이 발전하였다. 김치는 우리의 역사이자, 우리의 문화다. 한국인의 애환을 함께하고 독자적으로 진화한 김치가 어떻게 중국절임의 짝퉁이 될 수 있을까? 중국절임이 퇴화된데 비해, 우리의 김치가 진화를 거듭한 걸 보면 김치가 과연 중국절임의 짝퉁이라 할 수 있을까?

 

누가뭐래도 김치는 우리의 음식이다.

 

 

 

참고문헌

김만조 · 이규태, 『김치견문록』, design house, 2008

주영하, 「김치문화의 기원과 변화 연구」, 한양대학교 민족학연구소/『민족과 문화』, 1993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호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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