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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중근의사도 살인자로 규정한 `밀고자` 이승만

lionet 2011. 8. 15. 06:06

안중근의사도 살인자로 규정한 '밀고자' 이승만


 
이승만은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1/07/08 [13:59]





이 자료는 kbs가 방송한 자료도 포함해서 구성한 내용 이다. kbs 기자들은 반민족 독재자 이승만 찬양 방송을 제작하기 전에 과거 자신들의 선배가 제작한 "이승만 과연 누구인가?"를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     ⓒ 서울의소리
 
 
1904 년 민영환 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이승만은, 1905년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의 포부는 남달라 미국사회에 유명인사들과 교류를 위해 틈나는대로 편지와 메모로 자신의 입지를 폭넓게 굳힌 것 같다. 그것은 루즈벨트대통령을 조그만 동양의 고학생이 만났다는 사실에서 입증되며, 후에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를 만난 사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가 5년 만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함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한 그가 천재적 기질을 갖고 애국을 한 사실은 1904년 이전 1898년 정부전복을 꾀한 죄목으로 투옥됐다가 민영환에 의해 미국으로 유학 온 것 외엔 뚜렷한 것이 없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의사가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슨을 살해했을 때 이승만은 이들의 법정통역을 "살인재판"으로 명명하고 무참히 거절해 버렸다. 그리고 "안중근의사의 의거도 테러"로 간주하고 맹비난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일까?

1.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그는 교육과 선교활동에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 종교적 문제로 거절했을 수 있고,

2.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곤란하게 하므로 통역을 거절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던 거절을 함으로써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자신과 테러를 차별화시키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그 럼, 그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서 어떤 외교활동을 펼쳤을까? 미국 외에 접촉한나라는 몇나라나 될까? 전혀 소득의 결과가 없자 그는 하와이로 건너와 박용만이 이끄는 국민회를 장악하고 법정투쟁을 벌리는데 이는 나라를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든든한 친위대를 양성시키는 수순이었을 뿐이었다.















▲     ⓒ 서울의소리

 
$$ 이 승만 의 야심 과 비열한 욕망 $$
그 의 야심이 드러난 것은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3. 1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교민들을 규합하여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한인대회의 발언이었다. 그는"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 청원서를 내고 위임통치를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다."라고 역설을 하며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3일간 미국 각지에서 몰린 교민들을 기만하며 치렀다. 이날 이승만은 미국의 신화 같은 초대 대통령 워싱톤이 앉았다는 의자에 앉아 건방을 떨며 새 한국의 초대대통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대통령 취임식까지 했다.
 
이때는 이미 임시정부의 직함인 국무총리직을 박탈당하고 퇴출당한 아무것도 아닌 신분인데도 "임정의 대통령" 직함을 그냥 사용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기인 것이다. 마치 그의 행위는 그리 스신화의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연상 시켰다.














▲ 1919년 3.1절을 기화로 미국"필라델피아"에서 열린"한인대회"의 이승만 과 그가 규합한 순진한 교민들. 몇 안 되는 이들을 모아놓고"대통령' 취임식을 했다.     ⓒ 서울의소리













▲ 죠지 워싱톤의 의자와 그 의자에 앉은 이승만     ⓒ 서울의소리
 
$$1918 년"국민군단"과 박용만 사건 $$

박 용만은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일본 동경으로 유학, 1904년 "보안회"에 입회하여 일본의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는 운동에 참여, 한성감옥에 투옥됐는데 그는 그 감옥 안에서 이승만과 운명적으로 만나 결의 형제가 되었다. 1904년 출옥한 박용만은 이승만과 동일시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1906년 헤이팅스 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 네브라스카에서 "한인소년병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의 주필을 거쳐, 1913년 하와이로 와서 "신한국보"의 주필이 되었다.
 
그 는 "군대를 양성해 일본 본토를 공격해 독립을 이룩하자 !" 고 외쳐 교포사회에 감동을 일으켰다. 교포들의 감동으로 그는 1913년 6월11일 하와이 호놀룰루시의 큰 산너머 코올라우(Koolau)구역 아후이마누에 위치한 파인애플 농장(1360에이커)에 "대조선군단"이라는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그는 생도들에게 낮에는 일을,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애국심에 독립이란 감동이 더해져 교포사회의 지원은 상상 이상이었다. 박용만은 1차적으로 하와이 항에 정박 중인 일본함정 츌운호를 격침시키는 목표를 세웠는데, 때를 같이해 이승만은 하와이의 독립운동 자금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인 우월주의에 돈 없는 황색 인종이 무슨 방법으로 외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돈의 힘이었다.
 
그는 미국본토에서 박용만의 대의에 참여와 협조를 빙자해 하와이로 건너 와, 그곳에서 교육 사업으로 학교를 세워 역사와 세계사를 가르치고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를 기억하는 교포들의 증언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분열과 대립의 상징이었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증언했다.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이 믿고 만든 교회와 감리교 중 하나만 선택하라며 교회를 분열 시켰으며, 이것은 자신이 세운 자신의 우상화 종교를 믿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제가 되라고 강압적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는 박용만과 "대조선국민군단"의 와해를 획책키 위한 고도로 기획된 야비한 이승만식의 전략이었다. 급기야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갈리어 분열 됐는데,














▲ 이승만은 하와이교포들사이에 반목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서로 앙숙이 되게 철저히 양극화 시켰다.     ⓒ 서울의소리

 
하와이 교민 1세대들은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의 상처로 남게 되었고 이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 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KBS에서 어렵잖게 취재한 증언을 들어보자.
 













▲     ⓒ 서울의소리

 
 
$$ 밀고성 증인이 된 이승만 $$

이 승만 ! 이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평화를 빙자해 동족의 피의 대가를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하는 비열하고 악랄한  무뢰한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와 외교를 지향한 그가 하나님을 앞세워 행한 일은 종교와 동족분열, 그리고 그토록 증오하던  "테러리즘"을 손수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또, 그는 증인이 아닌 밀고자로 전락하는데........
 
국 민군단의 위용이 나날이 높아지자, 주미 일본영사관에선 어찌 알았는지?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국인의 군사훈련에 항의를 하여 무기 불법소지 문제로 교민의 대표인 박용만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이승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박용만이 미국 영토에 군사학교를 설립한 것은 하와이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 츌운호를 격침시키기 위함이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사변을 일으켜 양국 간 외교를 깨려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그로 인해 박용만은 유죄판결을 받아 몰락하고 "대조선 국민군단"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눈엣가시 같은 박용만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하와이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박용만을 추종하던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동조를 거부하자, 본격적인 테러와 폭행을 감행했으며 총기난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의 증언은 밀고성 고발이며 결의형제의 결속을 배반하고, 교포사회의 애국심을 무참히 짓밟은 반역행위였다. 어떠한 변명과 구실도 대신할 수 없는 선택이었으므로, 굳이 변명을 한다면 이는 마치 씨저를 살해한 브루터스의 웅변과 같을 것이다. 하와이와 같은 좁은 땅에서 외교를 위한 동족을 범법자로 만든 파렴치한 짓이었고, 개인의 야심에 애국심을 뭉개버린 그의 독선적인 욕망의 극치였다.
 
그의 테러행각은 오늘날 잘 포장되어 애국과 한국의 국조로, 모래위에 누각처럼 서게 됐다. 그를 옹립한 "뉴라이트"의 공로다.

















▲     ⓒ 서울의소리













▲ 사진에 보이는 빽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기념촬영"을 한껏 같다.     ⓒ 서울의소리
 
동 시대에 시카고에서 악명을 높이던 이태리계 깽 두목 알 카포네와 다를 게 무엇인가? 사진에 보이는 빽속에 야구배트가 있는걸 보아 폭행직후 기념촬영을 한 것 같다. 누굴 해한 것인지? 기념사진을 찍은걸 보면 대단한 인물에게 폭력을 가한 것 같다.  대한민국 국부의 경력치곤 너무 소름끼치게 비열하다.













▲ 좌측은 교민들에게 돈을 갈취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이다. 우측은 자랑스러운"박용만의"대 조선군단"의 훈련장면이다     ⓒ 서울의소리

이 분이 박용만씨 다. 님은 1928년 베이징에서 흉한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누가 살해했는지…? 명확치 않다. 1925년 베이징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직을 탄핵한 후 3년 뒤였다. 이들의 결의형제 맹세는 이렇게 끝났다.
 













▲ 이승만 과 그를 지지했던 어리석은 동지회다. 이들은 같은 동족에게"테러와 총기난사를 서슴지 않았다.     ⓒ 서울의소리

 
이승만은 자신의 욕망을 달성키 위해 전명운, 장인환의사  및 안중근의사까지 살인자로 규명하고 활동시킨 단체다.













▲     ⓒ 서울의소리

$$ 본격적인 하와이교민들을 갈취한 수단들 $$












▲ 이승만은 교민들에게 돈을 각출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하여 돈을 걷어 드렸다. 우측엔 우표     ⓒ 서울의소리

교 민들의 돈으로 귀족처럼 외교에 힘쓴다는 명목 하에 호의호식하며 직함(대통령)에 맞게 생활하는 이승만, 그러나 교민들은 사탕수수 밭이나 파인애플 공장에서 힘들게 벌어 기탁하고 강제로 채권과 공채를 사야만 했다. 그 돈은 몽땅 이승만의 주머니로 입금 됐으며 고생하는 교민들에 비해 아주"핸섬"한 젠틀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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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의 라디오 방송 의 효과 와 이용 $$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패망하자, 이승만에겐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라디오 방송이었다. 아무런 내막도 몰랐던 고국의 동포들에게 그의 일성은 희망을 넘은 열광의 기쁜 소리였다.  













▲     ⓒ서울의소리
 
하 와이의 사정을 알길 없는 고국의 동포들은 이승만의 라디오 소리에, 이승만은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할 구세주인양 대단한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의 외교능력이 포장된 라디오 방송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우매한 국민들은 이승만을  너무 몰랐었다. 예나 지금이나 매스컴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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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금도 이승만을 우상화 하며 행적을 포장하는데 열을 올리는 친일사관에 젖은 노예집단들이 우리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때 임정에선 총리와 대통령직을 박탈하고 주미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위촉했으나, 그는 "떠들지 말라"며 자칭 대통령직을  고수했다. 우리 헌법 전문에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기록됐는데, 이때는 상해임시정부의 법은 절대적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떠들지 말라"고 밀어 붙였다. 무법자의 일방적 추태인데도 오늘날 추종자들은 한술 더 떠 헌법 전문마저  고치려 한다.
 
그 첫 번째 행태가 1948년을 건국절로 명명하고 이승만을 국조로 옹립, 임시정부 역사를 대한민국과 별개의 고난의 항쟁사로 묶어,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과 동격으로 비하시킴을 당연하다고 외치고 있다. 고려대 한승조, 육사22기 紙 萬 圓, 박효성, 안병직, 류석춘, 복거일, 이명희 등 을사5적 과 같은 맥락의 인사들이다.















▲     ⓒ 서울의소리













▲     ⓒ 서울의소리
 
$$ 전쟁영웅"맥아더"의 후광 $$

해 방 후 이승만의 귀국은 글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해방 직후 신탁통치를 위해 미국에선 하지중장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이므로 제일 높은 사람이 하지 중장이었는데, 하지가 이승만에게 경례를 붙이자, 한국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 하지보다 더 높은 사람, 이승만 ! 그것은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 '에게 편지와 메모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위로 인간적 교우를 다졌던 터에, 맥아더의 배려로 하지에게 대통령의 예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와 이승만과 의 충분한 교감이 있은 직후의 일이라 이상할 것은 없는 사실이나 그때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리가 없었고, 다만 라디오를 통해 독립을 위해 미국에서 열심히 애국한 애국자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더욱 이승만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에 충분했다.
 
귀 국한 이승만에게 러브콜을 한 무리들은 친일파들이었다. 하지중장의 입장에서도 통치의경험이 있는 친일파들을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승승장구 남북단일 독립국이 아닌 남한단독정부에 열을 올려 장애물을 제거해 나갔다.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구도 제거하고, 동족상잔 의 비극 6.25, 장기집권에 최대 난적 신익희의 돌연사, 조병옥의 위수술중 사망, 죽산 조봉암의 빨갱이 죄목으로 사형집행, 3.15 부정선거, 4.19 혁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켰는가? 4.19혁명 중, 하와이로 도주 망명, 죽은 후 시체로 귀국, 이 분을 대한민국의 국조로 모신다니…….
 
국민이여, 지금은 눈을 부릅뜨고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 입니다. 자칫하면 맥아더도 제2의 국조로 섬겨질까 두려워 집니다. 이승만의 등장으로 이득을 본 집단은 친일파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1%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그들의 권력과 재력은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역사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쳐, 마치 자신들이 애국의 선봉에 희생자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믿는 기독교에 이런 무리들이 선발대라니…….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가룟유다"의 후예들이란 사실 앞에 어이없어 목 놓아 울분의 기도만 할 뿐입니다. 과연 이들의 행위가 성경적일까요? 의문 입니다.













▲     ⓒ 서울의소리

인 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훼손하려는 사람들, 이해가 갑니다. 맥아더가 없었다면…….이승만이 쉽게 또 빨리 귀국 할 수가 있었을까요? 또, 민족분단이 됐을까요? 친일파의 득세가 가능 했을까요? 그리고 독재가 계속 됐을까요? 두려운 것은 맥아더를  제 2의 국조로 섬길까 두렵습니다.  그는 한낱 전쟁광이었을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전쟁광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승만도 살아생전에 자신의  많은 동상을 세워 국민들에게 우상대접을 받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더더욱 성경적 이지 않습니다.
 












▲     ⓒ 서울의소리

하 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오는 걸 까요? 우리나라 역사에 3명의 장로 대통령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  섬기기에 실패한 대통령 같습니다. 이승만 때는 민족 분열로 동족상잔의 6.25, 김영삼 때는 I.M.F 재앙, 이번 이명박 장로는 어떻습니까? 강부자 내각, 광우병 소고기, 니므롯의 창조물 대운하 경제는 I M F 보다  더 심각합니다. 국가 분위기는 공안정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외교는 아부 자체입니다. 어찌 우리의 문제를 미국에 매달립니까? 회개가 필요합니다. 내재한 개인의 욕망과 우상을 떨어내십시오.













▲ (그리스 신화 의"제우스'의 아들"기회의신"카이로스)     ⓒ 서울의소리

앞 머리털 만 있는 카이로스, 뒷머리 털은 없습니다.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데 수평을 유지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등엔 균형에 마지않는 큰 날개와 양 발 뒤꿈치엔 조그만 날개가  있습니다. 커브나 턴을 할 때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까?  불안전한 기회는 기회가 아닙니다. 기회처럼 보이는  함정일 뿐 입니다.
 
$$ 오만과 독선의 독재와 종말 $$












▲     ⓒ 서울의소리

우 측 사진은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야당참관인을 내쫓고 투표함을 교체하여 개표를 하였는데, 여당 당선표가 유권자수보다 많아 표를 줄이는 촌극도 연출됐으며, 부정 선거가 극명해 지자 마산서 부정선거 반대운동이 벌어진 후 행방불명된 김주열군의 시신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발견됐다. 서울 종로에선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이 집단으로 폭행하여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동이 된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름하여 4.19혁명 이다.
 
오른쪽 사진은 경무대(청와대)에서 이화장으로 피신하는 이승만 일행의 사진이다. 당시 이 신문엔 4.19 혁명을 데모로 표기 했는데, 이때는 일시적 데모로 간주하고 기사를 올렸지만, 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성공적 혁명이 되었다. 그것도 자랑스러운, 독재를 몰아낸 민주혁명이었다. 그러나 2008년 현재엔 뉴라이트가 혁명이 아닌 데모라고 비하시킨다. 꼭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시 이시대로 회귀하겠단 것인가? 














▲     ⓒ 서울의소리

이 날의 혁명은 처절했다. 이때 본인은 학교를 땡땡이 치고 소공동 경남극장에서 죤 웨인, 스잔 헤아워드 주연의  징키스칸 영화를 1회 관람을 하고 시청 앞으로 나오다 혁명  대와 휩쓸려 전차를 타고 효자동 경무대 앞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경험을 했다. 6.25전쟁 때도 경험 못한 극한의 경험이었다. 총에 맞아 튀는 피 ! 비명조차 못 내며 쓰러지는 학생들 ! 당시 고교생이던 나와 친구는 너무 놀라 "눈알이 뒤집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현장의 참상이 여러 날 꿈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밑 에 사진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 리(이)기붕이 그의 장남 "육군소위 이강석'의 총에, 일가족 모두 사살되고 강석은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어찌 보면 이승만보다는 자신들의 만행을 일찌감치 깨닫고 선택한 용단이라 하겠다. 리기붕의 가족은 이랬다, 父 이기붕, 妻 박 마리아, 長男 이강석, 次男 이강욱 이었다. 원래 이기붕은 국일관 지배인 출신으로 부통령 재목이 아니었다. 항상 허약한 체질에 용기보다는'YES MAN'의 전형이었지만, 그의 妻 박마리아는 놀부 妻와 같은 기질의 여인으로 한때, 정계를 시끄럽게 한 그녀는 이승만에게 자신의 長男인 이강석을 養子로 입적시키고 李起鵬의 출세를 진두지휘한 여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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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에 사진은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다. 그는 경무대 곽영주에게 발탁되어 반공청년단, 화랑동지회 등 반공이 들어가는 단체는 모두 연관됐으며, 주로 야당탄압이 그 주 목적이었다. 마치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펼쳤던 폭력테러 집단을 그대로 계승한 것 같다. 옆의 사진은 경무대를 빠져나와 이화장에서 주위동정을 살피는 이승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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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의 검정뿔테 안경의"허정"(당시 국무총리)씨와"하와이"로 쫓겨 가는 이승만     ⓒ 서울의소리

그 러나 성난 학생과 국민들은 이승만의 동상을 두들겨 부숴 버렸다. 목이 떨어져 땅바닥에 뒹군다. 그런데 뉴라이트에선 다시 세종로 복판에 이 영감탱이 동상을 또 세운단다. 경제도 어려운데 그 돈을 헐벗은 서민들한테 사용할 것이지..., 옆의 사진은 사형직전의 경무대의 작은 왕 곽영주의 사진이다. 이정재, 임화수 등 깡패는 모두 사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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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붕의 집을 불태우는 학생과 국민들     ⓒ 서울의소리
 
그러나 국민이 쫓아낸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도 교민들에게 그리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하와이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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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소본능 이랄까? 온갖 만행을 저질렀어도 하와이는 그를 대통령의 발판을 만들어 준 곳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교민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것은 대통령이 된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 리고 기획없는 통치철학을 통해 동족분열과 정적 제거,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사건, 6.25 동란, 44,5입사건, 3.15부정선거, 12년간 그의 정치적 행태가 말해주듯 철권통치의 교훈이었다. 정권연장에 급급하여 온갖 해선 안 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군주식 독재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종당엔  하와이로 도망쳐 1962년 병속에서 자신의 왕국을 회상하며 1965년 시체가 된 뒤에야 조국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 그의 독재로  혼란에 빠졌던 우리 민족과 정치적 후퇴를 생각 안할 수 없다. 더욱이 이 분을 국조로 섬기기 위해 임정을 무시하고 법과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
 
각성하길 바란다.


기사입력: 2011/07/08 [13:59]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조작날조 조중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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