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태극기가 중국것이라고요?

lionet 2011. 10. 15. 15:27

중국 중앙정부의 파격적인 지원하에  진행해온 중국의 영토 및 역사왜곡 프로젝트 탐원공정!

이제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자기네 것이라 우기는 행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상징물인 태극기의 기원,유래등에 대해서

중국이 유투브를 통해 잘못된 정보를 알리고 있습니다.

 

 

 

   다음은 영상의 본문 내용과 그것을 반박하는 태극기의 진실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국인들은 어려서부터 국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교육을 받는다.

   1882년 박영효와 김옥균이 왕의 명령으로 일본에 담판을 하러 사신으로 가던 중,

   " 한 국가가 그 국가를 대표하는 국기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의견을 모으고

   한국 전통의 태극문양을 본 따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기지를 발휘했다." 고 하는 태극기 탄생에 얽힌 얘기로 한국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

  

   태극기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국기 문제가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 알고 있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부터였다. 조약을 맺기 1년 전에 일본은 우리에게 문화 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군함 운요호를 정박시켰다. 강화도를 지키던 우리

   수비병대가 즉각 대포를 쏘며 대항을 했고,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 버렸다.

   신무기로 대항하는 일본의 군사력에 우리 수비병대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우리 수비병대 35명이 죽고

   일본군은 2명이 죽었다. 그런데 일본은 오히려 우리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해 왔다.

 

   일본군은 나라를 표시하는 국기를 달고, 바다를 운항하는 모든 배들은 전쟁이나 약탈의 의사가 없는것으로

   약속되어 있는데 강화도 수비병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포격했고,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일본기를 고의적으로

   명중시켜 불태웠다며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에는 국기라는 말조차 없었고,

   무엇을 국기라고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우리 수비병태 35명의 목숨을 잃은 것보다 더 분노에 차 있는

   일본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일본기를 대포로 쏘아서 불태운 것에 대한 보상과 사과가 없으면 정식으로 선저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정당한 방어를 하다가 오히려 피해를 더 입은 우리 측이 일본기 하나를 잘못 건드려 낭패를 당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본이 요구하는 보상과 함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고,

   국기의 필요성을 수모와 함께 느끼게 되었다.

    

   실제로  중국 근대의 관련서적을 보면 한국 태극기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 아주 쉽게 찿아볼 수 있다.

    역사는 그 모든것을 아주 확실하게 보여준다.

    1882년 박영효와 김옥균이 일본에 사신으로 촐발하기 앞서 중국 청조 북양정부(위안스카이 정부)에

    중국의 용기를 국기로 써도 될런지 물었으나, 북양정부는 속국은 발톱이 다섯개인 용기를 쓸 수 없으니

    쓸려면 발톱이 네개인 용기를 쓰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은 날로 쇠퇴하고 있는 청조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하여 청조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 이홍장의 명을 받아 조선에 사절단을 이끌고 온 마건총(중국 근대**학자,당시 복단대학을 세운

    그의 형 ***와 함께 조선에 사신을 보내짐) 조선정부에 중국 전통의 태극팔괘를 따서 국기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고, 조선 정부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최초의 조선 국기는 흰 바탕에 흑색으로 그린 태극 팔괘기였음이 분명하다.

 

    후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조선에 머물렀던 한 영국인이 서양의 미학적 각도에서

    이 태극팔괘기를 손봤는데, 팔괘 중 사괘를 없애고 남은 사괘를 사방 대칭되는 방향으로 끌어다 놓고,

    음양어 도안(음양을 나타내는 고기모양의 도안?-태극을 뜻하는 듯)을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바꾸어

    현재 우리가 보는 한국의 국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는 고종황제가 직접 창안하였다.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가 창안, 도안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동경발행 시사신보(時事新報)가 발견됨으로써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황제가 직접 창안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청나라)의 마건충(청나라 덕종때 조정에 친청파를 구축하며 내정에 깊이 관여)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를 하교하였다고 한다.』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의 일기 [사화기략(史和記略)]에도

    '4각 형태의 흰색 바탕에 폭 부분 5분지를 중심 삼아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을 칠하고 네 귀퉁이에 4괘가 바라보도록  만든 새 국기를 임시 숙소 옥상에 휘날림으로써 국왕의 명령을 다 받들었노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82년 8월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갈 때에 제작하여 최초로 사용하였고,

    1883년 정식으로 태극기에 대한 조례를 제정,공포했다. 그러나 당시 태극기는 다만 태극을 한가운데 두고,

    네 모퉁이에 건곤감리 4괘를 배치한 것일 뿐, 확고한 규격과 도식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극의 음양이나 4괘의 배치가 통일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다음해에

    규격을 통일한 국기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여러분!

   뻔뻔하게도 우리의 모든 역사를 훔쳐가 자기네 것이라 주장하고 있는 중국의 이런 행태에

   감정적이 아닌 논리적 대응을 위해서 태극기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고 사랑해야 겠습니다.

출처 : 좋은글
글쓴이 : ♡참새♡(조성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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