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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옛날 한반도 사람들은 왜이렇게 밥을 많이 먹었을까?

lionet 2012. 6. 10. 20:08





한국은 옛날 부터 대식국이었다는 주장이 많다. 현재 쓰이고 있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690g, 고려시대에는 1040g, 고구려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 그릇이 발굴되었다. [1] 게다가 삼국유사에서 김춘추가 하루에 처묵처묵한 양이 엄청나긴 하다.[2]

왕은 하루에 드시길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어째 더 늘었다!)[3]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 [http]삼국유사

한민족은 현대인과 같이 쌀을 일반적인 밥으로 먹듯이 곡물을 주식으로 섭취를 했는데,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쌀밥을 원없이 즐겨 먹는 건 주로 높은 신분에 한정되었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귀족 계층은 쌀밥을 먹었지만 평민들은 잡곡 밥을 먹었다고 한다.

게다가 쌀이 많이 보급된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도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의 기록에 의하면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나마 수전이 먼저 보급되고 기후 조건상 벼농사가 활성화된 남부 지방은 경제 조건만 되면 쌀밥을 먹었다는 말인데, 그러나 이 말은 거꾸로 돌리면 경제 사정이 안되서 쌀이 없으면 잡곡 밥을 곁들여 지어 먹어야 했다는 소리다. 헌데 이런 잡곡 밥은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다. 이걸 봤을 때 큰 그릇에다가 엄청난 양의 밥을 먹는 것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소리.(힘이 많이 들어가는 농사 일을 한다면 더더욱) 정리를 하자면 한민족이 옛부터 밥을 많이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다 쌀밥이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현재 먹는 흰쌀은 옛날에 먹던 쌀도 아니었다.[4] 이 말인즉 옛날 조상들이 대식을 했다는 것을 지금 먹는 하얀 쌀밥이 꾹꾹 담겨진 밥 공기로 환산하는 건 오류라는 소리다. 또한 조선은 농업 국가였고, 주식도 곡물이었기에 탄수화물 섭취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다른 영양소에 비해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복날에 고기를 구할 수 없으면 개를 즐겨 잡아먹었다든가, 고기 음식 중에 내장을 비롯한 안 버리는 부위가 없을 정도라는 걸 보면 나름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이렇듯 고기가 부족하다 보니 채소나 나물 외에 밥이라도 한 가득 담아놓고 먹었다는 것.[5] 심지어 한국의 과식 현상은 결코 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 많아 기회가 되면 잔뜩 먹었던 것이라는 어찌보면 서글픈 주장도 있다.

어찌됐든 한민족이 대식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보인다.

  1.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는 게 평상시의 식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사람들은 하루 두 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세 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말이 하루 두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세넷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0~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

  1.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라는 책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술을 마신다' 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2.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 사람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3.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일본(유구국 - 지금의 오키나와)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비웃었다'

  4. 임진왜란때 기록된 '쇄미록'이란 책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에 대해 설명이 나와있다. 쇄미록에서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한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현재 먹는 한공기의 5배는 되는 양의 밥이 된다.[6]

  5.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것과 관련된 비화가 있었는데,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을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하니 한달치 정도, 당연히 조정에서는 한달만 버티면 왜구들이 물러갈거라 생각했는데 고니시부대의 식사량을 본 밀정이 왜구들의 식사량이 조선군의 1/3정도 라는 것을 보고하자, "헐, 역시 쪽바리들은 승리를 위해선 밥도 굶는 독한 민족이구나 ㅎㄷㄷ."란 결론을 내려버렸다.

  6.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다블뤼 주교의 이야기.[7]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소를 잡을 일이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여기까지 봤으면 알겠지만 이래저래 반론이 있긴 해도 대체적으로 한민족이 많이 먹긴 먹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기록들이 나올 수가 없지 한국의 역사가 못먹고 굶주린 가난의 역사라는 것은 일본 시대를 거쳐 경체 수탈, 1960년대 까지의 배고팠던 시기가 맞물려 생겨난 잘못된 인식이라는 주장이며, 실제로는 앞에서 열거한 대로 잘먹고 잘 살았다는 게 진짜다라는 주장이 요즘 대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민족을 섣불리 식충이로 몰아가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싶다. 현재 인터넷에 퍼져있는 근거 자료들 중에는 단순히 흥미를 돋우기 위한, 혹은 시선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성향의 것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보다 이것에 대한 정확한 검증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도 영웅호색이라는 말을 쓰지만 일본에서는 거기에 대식까지 첨가된다. 그래서 일본 대중매체에서도 주인공은 대식가인 경우가 많다. 영웅호색이라고 해도 대중매체에서 성인물이 아닌 이상 호색 부분은 묘사할 수 없으니 영웅적인 특성으로 대식 묘사를 하는거라고. 한국 역시 대식이 영웅호걸 정도는 아니지만, 장사의 징표 정도로는 여겨졌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밥 일곱 그릇(물론 조선시대 놋 밥 그릇 기준)을 먹고 장사 소리를 들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1] 다만 다른 시대는 그렇다 치고라도 고구려 밥 그릇 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당시의 농업 기술력이나 고구려의 영토 위치나 기후 상으로 쌀을 그렇게 먹을 만큼 생산이 따라주었는가 이다. 실제 그 그릇으로 쌀을 먹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백성이 그렇게 먹었다고 보는 건 단순 계산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 상에 위와 같은 밥 그릇에 대한 신문 기사가 나온 후에 고구려 사람들은 밥심이 대단했다고 여기저기 퍼지고 있는데, 그런데 저런 밥 그릇 하나 발견 됐다고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밥을 그렇게 많이 먹었다고 이해해 버리면 곤란하다. 게다가 쌀을 그렇게 먹었다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2] 훗날의 사례를 보면 그만큼 많이 남겼을지도 모른다. 윗사람이 남겨서 아랫사람이 그것을 나누어 먹는 것은 덕을 베푸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뒤에 물가와 태평성대 이야기가 이어지는 걸 보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이완용 항목 일부와 한국 근현대사 산책 참조.
[3] 때문에 앞의 기록을 '한 끼'에 쌀 서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은 이거다.
[4] 흔히 백미라 부르는 흰쌀은 일제시대 거치면서 한국에 완전 청작되었다고 한다
[5] 이걸 주장하는 사람은 꽤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대식하는 식사 사진에서 유독 밥은 어마어마한데 비해 반찬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근거로 삼곤 한다.
[6] 이 기록을 두고도 말이 많다. 일단 현대 상식으로는 한 끼에 밥 5그릇은 상상이 안 가기 때문에.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재 먹는 흰 쌀밥 한 공기와 당시의 밥을 동일시 하는 건 곤란하다. 인터넷 상에 앞에 명시한 쇄미록의 인용 부분에서는 쌀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다 똑같이 붙여넣기 한 글이 돌아다닐 뿐이고, 실제 쌀인지 잡곡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덧붙여 모내기가 보급된 시기라든가 당시의 정황을 볼 때 일반 백성이 한 끼에 쌀을 저렇게 먹는 게 가능했는지도 의문. 게다가 홉의 단위가 지금과 다르지 않냐는 의문 제기도 있다.
[7] 당시의 외국인 관점이라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자기네들 주관에 치우친 편견 가득한 기록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고려를 해야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에 머물었던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그들 만의 주관에 따른 편견과 과장으로 범벅되어 조선을 이상한 나라로 치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결론:

1960년대 까지의 배고팠던 시기가 맞물려 생겨난 잘못된 인식이라는 주장이며, 실제로는 앞에서 열거한 대로 잘먹고 잘 살았다는 게 진짜다라는 주장이 요즘 대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민족을 섣불리 식충이로 몰아가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싶다.

글 출처: 엔하위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고구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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