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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 임진왜란, 조총" <딴지>

lionet 2012. 7. 8. 00:00

사회적으로 확고한 두려움의 대상이 있으면 지배층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피지배층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지배층의 과실을 무마할 수 있다. 조총으로 인한 충격은 조선의 지배층에게 무척이나 유용한 것이어서 어쩌면 그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된 것인지도 모른다.

 

훗날 무기체계가 발전하고, 조총이 더 이상 의미있는 전쟁무기가 아니게 됐어도 조총충격만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구체적인 대상이 조총에서 이양선으로, 이양선에서 소련제 탱크로, 소련제 탱크에서 대포동미사일로 끊임없이 대체되었을 뿐이다. 조선인들이 받았던 조총충격은 그런 의미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 사회가 조선보다 발전했다고 착각하지만, 지배의 구조와 거기에 따르는 불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쩌면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딴지 펌>

 

[역사고증] 조선, 임진왜란, 조총


2010. 08. 13. 금요일

아외로워

 

 

. 머리말

 

조선에게 조총은 어떤 의미였을까. 조선인들은 왜군이 임진년에 들고 온 낯선 무기를 조총(鳥銃)’이라고 불렀다. 조총통(鳥銃筒)도 아니요, 텟포(鐵砲)도 아닌 조총이었다. 그만큼 이 무기는 조선인들에게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조총은 전쟁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조선에서 공포의 전쟁무기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현대에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참고한 징비록은 곳곳에 삽화와 설명글이 들어가 있는데, 조총 삽화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조총 : 임진왜란 발발시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연패를 거듭했다. 이에 당시 이순신, 김시민 등이 조총을 만들었다.

조총에 대한 현대 역사가의 인식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게 분명하다. 그 강렬하고도 여운이 긴 충격은 서구인의 몽골쇼크와 비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 초기에 탄금대와 용인 등지에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조선군은 스페인에게 정복당하는 잉카제국 전사나, 영국군에게 패하는 줄루족 전사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조총의 위력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다. 조선은 고려말 이후로 독자적인 화약 무기체계를 꾸준히 발전시켰다. 특히 세종(世宗)대에 화약무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최근에 영화로 까지 제작된 세계 최초의 다연장로켓포 신기전(神機箭)도 발명되었다. 당시 조선이 보유했던 무기들이 정말 조총 앞에 그토록 무기력 했을까?

 

조선은 잉카제국이나 줄루족과는 달랐다. 화약에 익숙했고, 화약을 만들고 운용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화약으로 무장한 군대를 조직적으로 운용 할 수 있는 통치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이런 나라가 조총이라는 단일한 무기체계 때문에 그토록 쉽게 무너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조총을 그토록 무서운 무기로 만들었을까. 그 공포가 조총의 우월한 성능 때문일까 아니면 조선인의 공포가 만들어낸 환영일까. 이 글에서는 조총에 대한 평가와 그것에 관한 공포를 엄밀하게 다시 고찰해 볼 것이다.

 

 

 

. 조선의 조총충격

 

조선군이 조총을 가진 군대와 처음 마주쳤을 때의 충격을 묘사하려 했을 때, 가장 먼저 부딪친 문제는 조선군이 조총에 받은 충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조총을 충격적으로 묘사한 사료가 많을 줄 알았던 터라 적잖이 당황했다. 그렇다고 조선군이 조총으로 충격을 아주 안 받은 것도 아니고, 관련 사료가 없는 것도 아니긴 하다. 다만 어떠어떠한 충격과 피해를 받았다 는 식이 아니라 조총도 알고 보니 별거 아니더라 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당대 조선인들에게 조총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료를 짜 맞춰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날짜로 볼 때 실록에 조총(鳥銃)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선조 22 7 1일이다. 실록에는 그 이전의 기록이 없다.

 

평의지 등이 공작(孔雀) 1쌍과 조총 수삼 정을 바쳤는데, 공작은 남양(南陽) 해도(海島)로 놓아 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평의지는 당시 대마도의 영주로, 선조 22~25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개전 전까지 대체로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조선 조정에 가끔 보내던 선물 중에 조총 수 정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들은 대마도주가 보내온 조총을 완전히 새로운 무기로 인식한 게 틀림없다. 조선에는 왕조의 초기부터 세총통(細銃筒)이나 승자총통(勝字銃筒)과 같은 개인화기가 널리 쓰이고 있었음에도, 조선인들은 왜의 새로운 무기를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이것은 훗날 고종대에 평안도에 나타난 이양선에서 발견한 화포를 조선인에게 익숙한 완구(碗口)의 일종으로 인식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새로운 문물인 조총을 기존 개념에 포함시키지 않고 새로운 개념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것은 당대의 조선인들이 조총을 화약과 철환을 쏘는 총통의 일종 그 이상으로 인식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조총에 대한 이 기록은 왜란 후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니까 실록에 등재된 순서로 볼 때 조총(鳥銃) 등장한 진짜 최초의 기록은 선조 25 11 30일의 다음 기사일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조총(鳥銃)이 추운 겨울에는 맹렬하지 않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하니, 유희서 가 아뢰기를, “기후가 차면 약 기운이 더욱 세지는 데 어찌 맹렬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선조가 도무지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 명나라 군대와 왜적의 동향을 묻고, 거기에 대한 우리 군의 대응방안을 놓고 유희서, 심유경 등 대신들과 건설적인 논의를 하는 참으로 보기 드문 장면이다. 정황상 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조총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거나 그게 무슨 물건인지 모른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거기에 관한 풍문과 논의가 맞건 틀리건 간에 이것저것 떠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선조의 말에서 우리는 맹렬한 무기 조총에 대한 모종의 경계심을 읽을 수 있다.

 

이후에도 선조는 수차례 조총을 언급한다. 개전 초기, 선조실록에는 뜻밖에도 조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가끔 등장하는 것은 주로 선조의 입을 통해서이다. 이를 통해 선조가 조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적의 장기(長技)는 조총(鳥銃)뿐인데, 이것을 막을 물건이 없는가?”

 

선조는 조총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했다. 적의 장기가 조총뿐이니 조총을 막으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지금 곡림(哭臨) 중에 있으므로 직접 만나보지 못한다.” 하고, 이어 환도(環刀) 하나, 조총(鳥銃) 하나,() 1봉을 하사하였다. ’

 

하사품 목록에 조총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무과(武科)에 조총이 도입된다. 좋은 시도이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조총의 표준화된 대량생산이나 전군보급 같은 일은, 생각이 없었던 건지 기록만 없는 건지는 몰라도 기록에는 확실히 없다.

 

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내가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드디어 선조가 직접 조총을 설계하기에 이른다. 조총을 천하의 신기한 무기 라고 부른 것도 비단 수사적인 표현만은 아닌 것 같다. 전쟁에 진 것이 조총 때문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견고했으면 왕께서 직접 조총의 구조 개선에 골몰했던 것이다.

 

전란 이후 실록을 살펴보면 선조는 자신의 존호 삭제나 요동망명 같은 사안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막상 전황에 개입하거나 반격 방안을 마련하는 데는 소홀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국정 전권을 세자(광해군)에게 위임해 버린다. 그 와중에 느닷없이 조총 시제품을 만드는 선조의 모습은 일면 황당해 보인다. 이런 인식이 후대인들만의 편견은 아니었는지 당대의 사관은 다음과 같이 덧붙여 놓았다.

 

옛부터 중흥(中興)한 임금들은 영웅(英雄)을 맞아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 쓰지 않았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本末)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조의 본말이 어두웠는지 밝았는지 확신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그가 조총을 끊임없이 신경 쓰고 두려워했던 것만은 확신 할 수 있다. 이후에 끝없이 조총을 연구하고 만들게 했던 선조의 행적은 이를 대변한다. 조총이 전쟁의 자웅을 결정짓는 열쇠라는 인식은 당대인들에게 널리 퍼져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개전 전, 신립과 유성룡의 대화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그래 적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당대의 사람들만이 아니다. 현대인들도 조선군이 임진왜란초기에 패배한 주요한 이유로 조총을 꼽는다.징비록에서 유성용의 논조가 초지일관하게 결과적으로 내가 했던 말이 다 옳았다 인 것을 고려하면 저 대화를 삽입한 의도는 결과적으로 조총에 철저히 대비하는 게 옳았다 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고 추정 할 수 있다. 유성룡도 조총이 조선군이 고전한 원인의 일부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총은 당대의 조선인들과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만큼 상대하기 어려운 무기였을까? 조총이 전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조선군이 전쟁에서 자주적으로 승리 할 수 있는 방안은 없었을지 살펴보자.

 

 

 

. 임진왜란의 전개

 

1. 해전의 전개

 

조선군은 육지에서 연전연패 하지만 바다에서는 승리한다. 조선 해군에게는 왜군의 것보다 훨씬 뛰어난 함재화기와 전선(戰船)이 있었다. 조선군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은 화포운용에 최적화된 배였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화포의 구사가 매우 편리한 선형을 하고 있었다. 포격에 아주 유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원래 조선처럼 화포를 선호하지 않고 소총만을 애호하였으므로  화포를 별로 이용하지 못하였고, 그들의 군선들도 포술에는 아주 약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군이 사용한 천자포,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 등은 철환이나 커다란 나무화살을 발사하는 무기이기 때문에 보병을 상대하기에 용이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선박간의 전투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16세기말 일본에 살았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 해군의 화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들의 선박은 강하고 크며 위로 뚜껑이 있다. 화약솥과 화기들을 사용하며,구형탄환을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에 거의 남자 넓적다리 굵기의 화살 모양의 나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쇠를 박아서 집어넣는데, 부딪치는 것은 다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격렬하다.’

 

뿐만 아니라 삼포왜란과 을묘왜변 등으로 전라도 연해의 동원체제는 강하고 효과적이었다. 이것은 왜의 해군이 주로 육상병력과 보급, 수송 등의 기능을 가진, 해전에 어울리지 않는 전력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원거리 무기라고는 조총 이외에 이렇다 할 것이 없는데다, 접근 후에 육박전을 벌이는 고전적인 전투방식을 채택한 왜군이 제해권을 잃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조선군은 이렇게 획득한 바다에서의 우세를 바탕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2. 지상전의 전개

 

임진왜란 초기에 있었던 몇몇 전투에 대한 기록으로 당대인들이 가진 조총에 대한 인식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탄금대 전투는 조선 조정이 왜군에게 가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유성룡은 이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적군이 단월역으로부터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공격하는 모습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한 무리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 패는 강을 따라 내려왔다. 총 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땅을 뒤흔들었다. 이 모습을 본 신립(申砬)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말을 돌려 적진으로 돌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말머리를 강물 속으로 돌려 죽고 말았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의 패배 원인을 두 가지로 생각한다. 우선 위치 선정 잘못이다. 탄금대에 도달한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1 8천이며 신립이 충청도에서 소집한 병력은 약 8천명으로 왜군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수적 열세에도 신립은 자연의 요새인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에 진을 쳤다.

 

또 하나는 조총이다. ‘조총 때문에 졌다 는 언급은 없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총 소리는 왜군의 우세를 보여주는 중요한 수사적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이 논문의 4쪽에 인용한 유성용과 신립의 대화는 유성룡이 신립의 패배를 곧 조총에 대한 패배로 인식했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조총은 정말 조선군이 대적 할 수 없는 무기였을까. 만약에 조선군이 신립과 달리 유리한 지형에서 싸웠다면 어땠을까.

 

임진년 6 24, 임실 운암에서는 양대박(梁大樸)이 이끄는 소수의 의병이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세를 끼고 왜군의 대부대를 섬멸했다. 이후 웅치, 이치, 금산 등지에서 조선군이 선전하면서 마침내 왜군은 전라도 공격을 포기하게 된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보여준 전공은 조총이 조선의 승리를 허락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무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재미있는 기록은 실록에도 있다.

 상이 신립 은 어찌하여 패했는가?’ 하고 물으니, 종신 이 아뢰기를, “새재[烏嶺]를 미처 지키지 못하고 있다가 적이 새재를 넘어 와 밤중에 돌격해 왔으므로 패배한 것입니다.”

 

병가(兵家)는 제각기 장기(長技)가 있습니다. 왜적은 칼을 잘 쓰고 우리는 활을 잘 쏘는데 장기인 궁마(弓馬)로 하지 않고 지친 군졸만을 먼저 내보냈다가 한번 무너지고 나면 맹장(猛將)마저도 패합니다. 또 우리는 척후(斥候)를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매번 복병(伏兵)에게 패합니다.”

 

신립이 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무장들이 선조에게 자기들 나름대로 분석한 패배원인을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보고 어디에도 조총(鳥銃)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임진년 5 10일의 기사에서 종신은 진지의 위치를 패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23일 기사에서 최황(崔滉)은 일본군의 장기(長技)를 조총이 아니라 칼로 보고 있다.

 

조총이 조선에게 공포의 무기로 자리 잡은 것은 개전 이후 적어도 1~2달이 지나고 난 다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조총이 정말 그토록 무시무시한 무기였다면 조선이 조총을 가장 위협적인 무기로 인식하는데 왜 몇 달 씩이나 걸렸을까. 그리고 심지어 왜군의 장기(長技)가 조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도, 왜 그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3. 조선 육군의 고전 원인

 

조선군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주력군이 격파당하고, 온 나라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패배가 조총의 강력한 위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료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지상에서 강력한 원정군과, 제해권을 장악한 수비군이 대결한 좋은 예가 유럽에 있다. 기원전 216년에 로마군은 칸나에 평원에서 한니발의 원정군에게 집정관까지 전사하는 참패를 당한다. 그러나 로마는 한니발의 해상 보급을 저지하고 파비우스가 주창한 지구전을 펼치면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조선도 왜군의 해로를 차단하고 우수한 방어능력을 활용하여 지구전을 펼쳤다면 굳이 명군의 원조가 없었다 하더라도 능히 승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형과 성체를 이용한 방어전술은 공성을 위한 화약무기가 없던 왜군에게 효과적이었을 것이고, 본토로 부터의 보급이 끊긴 왜군은 쉽게 무력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왜군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당시 조선인들은 전쟁경험이 매우 부족했다. 관리와 백성이 달아나기 바빴다는 이야기는 어느 사료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상도의 백성은 무려 2백여 년이나 전쟁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반면에 수십년 전에 을묘왜변(乙卯倭變)을 겪은 전라도 지역은 비교적 훌륭하게 왜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또한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의 구조적 결함도 있었다. 제승방략은 진관제(鎭官制)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하였지만 전면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전혀 유용성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에 완전히 무능했던 조정이야말로 패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군포(軍布)의 폐단은 나날이 심각해져서 개전당시 조선군은 군역은 있으나 군사가 없는상황에 처해있었다. 사실상 팔도에 훈련된 병사가 전혀 없었고 이에 따라 불과 20일만에 도성이 함락되었다. 이와 같은 유명무실한 방어체계는 조정과 양반 기득권의 부패 없이 만들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요건들 사이에서 조총의 맹렬한 위력은 그저 매우 사소한 부수적 패배 원인으로 보인다. 조총은 제대로 된 방어체계가 있었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무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조총을 그토록 무서운 무기로 만들었을까.

 

 

 

. 조총충격의 본질

 

믿을 만한 소식통에서 나온 소식 하나에 따르면스탈린이 감동해서 그 옛날의 동맹 정신을 되찾았다고 했다.모든 시대의 전쟁사에서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시가 전투에서는 방어군이 공격군보다 월등히 유리하다고 했다. 그밖에도 뉴욕 시의 지반을 공격할 수 있다는 성층(成層) 총기를 탑제한 잠수함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안개를 담은 얼음 수류탄 소문도 있었다.

 

나찌독일은 패망 직전까지도 천재적 신무기에 힘입은 기적적 승리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신무기나 기적적 동맹자에 대한 공허한 환상은 패전으로 절망에 빠진 나라에서 생각보다 흔하게 나타난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적 방어기제의 일환이다.

 

임진년 4 30일 새벽에 선조는 서울을 떠났다. 불과 백여 명의 종친과 문무관이 동행하였고 궁인들은 통곡했다. 비참한 행로에 비까지 퍼부었다. 파천 바로 전날, 선조는 도성에 끝까지 남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만 호위군사가 모두 달아나 궁문이 열려있고 금루가 시간을 알리지도 않는 상황에서 도성에 남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버려졌으니 사실상 나라가 망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조가 찾아낸 최후의 방어기제가 바로 조총이다. 선조와 조선의 지배층에게 임진왜란 초기의 무기력한 패배는 조총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신무기에 의한 것이었다. 이 강력한 전제 위에서 조선왕조의 군사 운용과 방어시스템에 대한 체계적 취약점은 은폐될 수 있었다.

 

조총을 높임으로써, 선조를 비롯한 조선의 지배층들이 나라는 패망 직전까지 몰고 간 책임을,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벗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정은 조총이 꼭 불가항력인 것만은 아님을 증명한 장수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은 여섯 차례 고문을 받은 뒤에 형장에서 죽었고 이순신(李舜臣)도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들은 조선 지배층의 얄팍한 방어기제를 온 몸으로 깨부수는 위험분자여서, 선조의 콤플렉스와 열등감이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특히 이순신(李舜臣)에 대한 태도는 선조의 열등감을 온전하게 드러낸다. 사학자 Hulbert에 따르면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진다.

 

조선의 살라미스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히데요시(秀吉)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며그후 비록 수년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지만, 그것은 오직 히데요시의 실망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끝내 이순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조 31 11 24일에, 정원이 선조에게 이순신(李舜臣)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전하자 선조는 이렇게 말한다.

 

알았다. 오늘은 밤이 깊어 할 수가 없다. 내일 아침에 승지는 배첩(拜帖)을 가지고 나아가 치사(致謝)하라. 모든 일을 정원이 살펴서 시행하라.”’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선조가 엄청나게 피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나라를 구한 명장을 잃은 군주의 태도로는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만약에 선조가 이순신(李舜臣)을 좋아하거나, 적어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면 같은 반응이었을까? ‘늦었으니 나중에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 보다는 좀 더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이후 이덕형은 노량해전의 전공을 설명한다. 여기에 대한 선조의 반응은 가히 걸작이다.

 

이덕형 이 아뢰기를, “18일에 이순신(李舜臣) 나팔을 불며 배를 몰아가자 진인 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는데,등자룡(鄧子龍) 과 진인 두 사람이 판옥선(板屋船)을 타고 가서 싸웠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병이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된 말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전공을 과장된 것으로 보는 선조의 태도는 당대인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일까?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조선 해군의 활약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록의 사관마저도 이순신에 관한한 선조와는 다른 견해를 가졌던지, 이덕형이 올린 11 27일자 장계 아래에 거의 손색없는 이순신의 위인전기를 써놓았다. 최대한 축약하면 아래와 같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 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선조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서는 이순신이 아니라 조총부대와 명나라 군대가 왜군을 무찔러야 했다. 그리고 조선의 지배층에게 조총은 반드시 엄청난 무기여야 했다. 경세제민(經世濟民)하지 못하고 온 나라를 전화(戰火)에 빠뜨린 책임은 불합리한 병역제도와, 경험 없는 군대와, 전란에 대한 안이한 대응 때문이 아니어야 했다. 그들의 도피처는 신기한 무기 조총(鳥銃)과 소중화(小中華) 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조선 지배층의 이 편리한 방어기제는 임진왜란의 패인을 조총으로 한정지었고, 이에 따라 전쟁이 가져다주는 교훈의 범위도 조총으로 한정되었다. 7년간의 참혹한 전란의 대가로 얻은 국가 시스템 전반에 대한 혁신 기회는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 맺음말

 

대중이 임진왜란의 승패원인을 이해할 때, 그 원인을 극도로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지상에서는 조총 때문에 지고, 바다에서는 거북선 때문에 이겼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울러 해전의 승패 요인을 분석함에 있어서 크게 잘못된 기존의 연구결과를 비판, 이를 바로잡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순신의 전략전술과 거북선에 의한 승리 라는 해전의 인식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 논리는 일부 해전과는 관계있었다 하더라도 전반적인 해전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조총보다 훨씬 복잡하다. 조총이 일부 전투와 관계있었다 하더라도 임진왜란의 양상이 끼친 영향은 몇몇 전장에서만 유의미할 것이다. 선조처럼 임진왜란초기의 패전이 조총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리한 발상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아주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조선일보 문화부 이한우기자가 쓴 글로, 그는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연패한 것은 오직 조총 때문이고, 선조(宣祖) 조총을 혼자 설계하기까지 하는 탐구심이 강하고 실천력 있는 군주였으며, 선조를 본말이 어둡다며 폄하한 사관은 실리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의 생각과는 놀라울 만큼 반대이다.

 

이처럼 난초(亂初) 조총의 위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선조에 대한 평가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리고 이한우기자의 글과 같이 임란초기 조선군 패배원인을, 덮어두고 조총에 뒤집어씌우는 태도야말로 선조가 진정 바랐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확고한 두려움의 대상이 있으면 지배층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피지배층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지배층의 과실을 무마할 수 있다. 조총으로 인한 충격은 조선의 지배층에게 무척이나 유용한 것이어서 어쩌면 그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된 것인지도 모른다.

 

훗날 무기체계가 발전하고, 조총이 더 이상 의미있는 전쟁무기가 아니게 됐어도 조총충격만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구체적인 대상이 조총에서 이양선으로, 이양선에서 소련제 탱크로, 소련제 탱크에서 대포동미사일로 끊임없이 대체되었을 뿐이다. 조선인들이 받았던 조총충격은 그런 의미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 사회가 조선보다 발전했다고 착각하지만, 지배의 구조와 거기에 따르는 불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쩌면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조원래, 새로운 觀點의 임진왜란사 硏究

유성룡, 징비록, 김흥식 옮김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김재근, 임진왜란중 ... 군선의 특성

요아힘 페스트히틀러 최후의 14안인희 옮김

박혜일외 3명, 『이순신의 일기

프리츠 하이켈하임로마사김덕수 옮김

 

 


 

<다음은 위 글을 쓰면서 모아 놓은 자료이다. 떡밥강화를 위해 덧붙인다.>

 

[조선군의 화약무기 및 활]

 

-       신기전 : 화약으로 추진되는 로켓 화살. 길게는 1000m 에서 짧게는 100m 정도의 사거리. 대 보병화기로 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n  문종 1 1 4‘….또 신기전(神機箭)의 수가 적으니, 청컨대 적당히 헤아려서 마땅히 더 보내소서. 또 의주(義州) 의 읍성(邑城)과 여러 성()은 무너진 곳이 많은데도 수축할 겨를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n  문종실록 바로 다음다음 기사 : ‘중 신기전(中神機箭) 3천과 소 신기전(小神機箭) 4천을 평안도 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n  세조 7 12 26 :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이제 신기전(神機箭)과 방사 기계(放射機械) 10()을 보내니, 도내(道內)의 성()이 있는 여러 고을[]과 여러 보()에 나누어 주어서 이 모양에 의하여 매() 1읍마다 1백 개를 제조하도록 하고, 만일 용이(容易)하다면 편의한 데에 따라서 더 제조하도록 하라.” 하였다.’

 

n  선조 26 2 5 : ‘먼저 신기전(神機箭)을 발하여 처음 1차 교전하니 적이 약간 물러갔으나 중국군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안 뒤에는 좌우로 흩어져서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며 곧바로 중앙을 향해 공격해 왔다.’

 

-       총통류 : 철환이나 대장군전 같은 화살을 쏜 것으로 추정

 

n  대 보병무기로도 쓰이지만 공성무기로 더 효과적이었을 듯.

 

n  숙종 7 6 21 : 강화유수 이선이 강화의 사정을 아뢴 내용 중 ‘…()에 임하여 적()을 방어(防禦)하는 것은 화포(火砲)와 불랑기(佛狼機) 보다 뛰어난 것이 없으나, 만약 적이 백보(百步) 가까운 곳에 있으면, 소환(小丸)을 많이 가지고 있다가 명중시키는 사람이 많으니, 마땅히 양남(兩南)의 병영(兵營수영(水營통영(統營) 및 양서(兩西)의 병영(兵營)으로 하여금 격년(隔年)으로 차례로 돌아가며 합구환(合九丸) 5백 개, 조란환(鳥卵丸) 5천 개를 갖추어 보내게 하소서….

 

n  선조 26 3 26 : ‘…낙 참장이 말하기를전번에 화구(火具)가 아직 오지 않았을 때 귀국의 천자총통(天字銃筒)을 썼는데, 성을 헐고 왜적을 죽이니 매우 통괘하였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우리 나라는 비록 화기가 있다 하여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       완구류 : 중국식 화포. 포열이 그릇모양으로 매우 짧다. , , 비격진천뢰 등을 발사하였다. 지상전에서 총통보다 널리, 유용하게 쓰인 듯. 사거리는 약 4~500m

 

n  순조 12 2 27평안감사 아뢰길 신의 영()의 중군(中軍) 이정회(李鼎會) 의 첩정(牒呈), ‘이 달 23일 아침 해가 뜰 때에 적도 수백 명이 남문으로부터 나오면서 총수(銃手)를 시켜 어지러이 총을 쏘게 하여 전진하였으므로, 즉시 총수·사수·창수(槍手)를 출동시켜 4, 50보 사이에서 접전하게 했더니, 적도들이 곡성(曲城) 으로 달아나 들어가서는 대완구(大碗口) 3()를 일시에 함께 발사했습니다만, 아군은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었습니다….”

 

n  선조 31 1 1토굴이 겹겹으로 되어 있고 석축(石築)이 견고하고 험하기가 비길 데 없어 격파하지 못했습니다. 시험삼아 대완구(大碗口)를 쏘아보았으나 산비탈이 가파르고 높아서 포석(砲石)이 장애를 받아 곧바로 쏠 수가 없어 종일토록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       : 조선의 활은 외형상 단궁이지만 성능이 무척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무인들은 활의 우수성에 근거해 개인화기를 무시하는 일이 있었다.

 

n  세종 27 3 30순몽 이 말하기를, 세화포는 한 사람이 가히 3,40개를 가질 수 있고, 비록 부인들이라도 쏠 수가 있어서, 그 이익됨이 가장 크다.’ 하매, 이천 이 말하기를, ‘편전(片箭)은 비록 약한 활이라도 가히 3백 보를 갈 수 있으되, 세화포는 2백 보도 가지 못하니, 무슨 이익됨이 있는가. 마땅히 깨뜨려 버려야 한다.’

 

n  징비록 ‘4 1,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와 임금께 보고했다. 그 무렵 집으로 찾아온 신립에게 내가 물었다……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왜군의 조총]

 

-       형태 : 서양식 아케버스(arquebus)

 

-       특징 : 조선의 승자총통에 비해 총열이 매우 길고, 구형의 탄알을 사용한다. 사거리는 당시 50보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길었다고 한다. 유럽 머스켓의 성능을 고려하면 100m~160m 정도의 사거리를 가지지 않았을까?

 

-       전술 : 오다 노부나가의 3열 사격술(픽션?)

 

-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장군이 조총을 모방한 화기를 만들고, 임란후에는 조정에서 정책적으로 조총을 제작하지만, 박연의 표류 이후에나 경쟁력있는 조총이 생산된 듯.

 

딴지국사학과장 아외로워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고구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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