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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성황후 (明成皇后) ... 閔妃

lionet 2012. 9. 15. 21:37

 

 

명성황후 明成皇后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시해(弑害)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그녀가 망국(亡國)의 왕비(王妃)로서 나라를 망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가부터 구국(救國)을 위해 몸을 바친 시대의 여걸(女傑)이었다는 평가까지 참으로 극단적으로 다양하다. 이것은 아마도 19세기 말 시대적 혼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정국운영의 다양한 측면 때문일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치(鎖國政治)에 반대하여 미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나라를 열었지만 급진적 개혁은 원하지 않아 개화파(開化派)의 불만을 샀고, 일본을 물리치려고 외세(外勢)를 끌어들였으며, 그녀의 친정이 새로운 외척(外戚)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등 시대를 역행(逆行)했다는 것이 주된 비판의 이유이다.

 

한편에서는, 똑같은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명성황후가 지나친 쇄국(鎖國)과 급진적(急進的) 개혁(改革)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자 노력하였고, 열강(列强)들을 이용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외교술을 펼쳤으며, 그녀가 의도적으로 키운 외척(外戚)들이 훗날 고종(高宗)의 측근이 되어 고종(高宗)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하였고, 이것이 독립운동(獨立運動)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본관은 여흥(驪興) , 성은 민(閔)씨이며, 아명(兒名)은 자영(玆映)이다. 1851년(철종 2)에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8세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가난하게 성장하였다.

 

1866년 (고종 3) 그 女가 16세 되던 해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부대부인(府大夫人)의 먼 친척으로 외척(外戚)정치를 배제하고자 하는 대원군의 뜻에 따라 부모가 없고, 가난한 그녀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의도는 벗어나게 되는데, 민씨일족은 권력을 쥐락펴락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흥망은 있었지만.. 부대부인(府大夫人)이란, 조선시대 임금의 생부(生父)인 대원군(大院君)의 정부인(正婦人)에 대한 작호(爵號)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는 조선시대 역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王妃)이었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지아비인 왕(王)이 죽고 난 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라든가, 아니면 명문가인 친정(親庭)을 등에 업고 왕의 배후에서 조종하는 방법을 통해서이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이전이 왕비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지아비인 고종(高種)이 국정(國政)을 논하는 가장 가까운상대이었으며,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高宗)보다도 더 예의주시하였던 권력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명문가(名門家)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왕비가 되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정세력을 키웠다. 살아 있는 왕보다도 더 주목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고도 보이는 명성황후의 존재는 당시 망국(亡國)으로 치닫는 조선의 특수상황을 고려하고 생각하여도 매우 특이하고도 경이로운 존재이었다.

 

                                 출생과 왕비                       出生과 王妃

 

명성황후는 여흥민씨(驪興閔씨)로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숙종(肅宗)을 두고 장희빈(張禧嬪)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배출한 민씨 집안이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었던 민유중(閔維重)의 5대손이었다. 이런 가계(家系)를 통해 볼 때 명성황후의 집안은 당색(黨色)으로는 서인(西人) 계이었고,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이 세도정치 시절인 철종(哲宗) 때 음서(陰署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오름)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노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은 음서(陰敍)로 관직에 올라 지방관과 중앙의 중간관리 벼슬을 했으며, 훗날 명성황후가 되는 딸아이 하나만 남긴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8살에 아버지응 여윈 이후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驪州)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감고당(感古堂... 6대조 민유중의 집으로 당시 민치록이 소유하고 있었다. 감고당이라는 이름은 英祖가 지어주었다)에서 기거하였다.

 

당시 서울에 집을 소유한 것을 볼 때 집안 형편은 꽤 넉넉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대(代)를 이을 사내 아이가 없는 집안은 이미 몰락을 예정한 것과 마찬가지이었다. 12촌(村)인 민승호(閔升鎬)가 양자(養子)로 들어와 집안의 제사를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명성황후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특히 훗날 왕비 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척 아주머니 '민씨부인'의 마음에 퍽 들었다. 이 '민씨부인'은 바로 당시 고종(高宗)을 앞세워 조선의 실권(實權)을 장악하고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아내,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이었다.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는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의 양자(養子)로 들어간 민승호(閔升鎬)의 누나이었다. 그녀는 둘째아들 고종(高宗)의 왕비(王妃)로 자신과 친인척관계이던 명성황후를 적극적으로 남편인 흥선대원군에게 추천하였다. 부대부인(府大夫人)이란 조선시대 임금의 생부(生父)인 대원군의 정부인에 대한 작호(爵號)이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친정이 단출한 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왕비를 내세운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외척(外戚)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무척이나 경계하던 대원군은 가문적(家門的)으로는 그리 빠지지 않으나 주변에 힘이 될 사람은 별로 없는 명성황후를 전격적으로 왕비로 간택하였다. 물론 제대로 된 왕비 간택(揀擇) 절차는 거쳤지만, 이 간택(揀擇) 절차 이전에 대원군은 이미 아비 없고 남자 형제가 없는 민씨가(閔氏價)의 외로운 처녀를 며느리로 점찍고 있었다. 몰락한 친정을 둔 왕비가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생가                    明成皇后 生家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생가(生家)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유형문화제 제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평 30여 평의 목조 기와집 건물이다. 이 건물은 본래 숙종(肅宗)의 장인(丈人)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墓幕)으로 1688년에 처음 축조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쳐 현재는 목조 와가(瓦家) 14칸과 맞배지붕 1동(棟)과 부속건물 1동만이 남아 있다.

 

 

 

 

 

 

 

 

 

 

 

 

 

 

생가(生家)는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숙종 13)에 부원군 민유중(閔有重)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뿐인데, 1975년과 1976년에 한번 중수(重修)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수리하면서 행랑과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넓은 바깥마당에서 솟을대문을 지나 '일'자형 행랑채가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어 있는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옆으로 독립된 '일'자형 별당(별당)이 있다.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있는 안채는 14칸짜리 민도리집이고 8칸짜리 팔작지붕인 본채 한쪽에 6칸짜리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본채는 전면에 툇간이 있는 5량구조로 안방(2칸)과 대청(4칸), 건넌방(1칸 반), 부엌(2칸)이 '일'자로 배치되어 있고, 날개채는 3량구조로 안방 앞쪽에서 꺽어져 방, 부엌, 광으로 이루어졌다. 그리 크지 않은 재목을 사용하고 있는 아담한 규모이지만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結構法) 등에서 조선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모여주고 있다.   

 

                                             탄강구리비                         誕降舊里

 

 

명성왕후 민씨(閔氏)의 생가(生家)에 남아 있는 비(비)로, 비(비)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명성황후가 어렸을적 그녀의 공부방이 있었던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그러나 흥선대원군과의 불화(不和)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 녀가 1871년에  낳은 자식은 5일만에 죽었고, 반면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宮人 李氏)가 완화군(完和君)을 낳으면서 대원군은 이를 크게 기뻐하고 세자(世子)로 책봉하려 하였다. 두 사람의 대립(對立)은 여기서 부터 시작한다.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閔升鎬) 등 여흥민씨(驪興閔氏) 삼방파(三房派)를 비롯하여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괄시받던 대원군 문중(門中)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서원(書院)철폐 등에 반대하는 유림(儒林)세력 등 노론(老論)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황려민씨(黃驪閔氏)라고도 부르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이후 관료를 많이 배출하여 거성(巨姓)의 대열에 올라섰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 여흥민씨 ' 중에서 소위 ' 삼방파(三房派) '로 알려진 세 집안이 당시 집권당인 노론(老論) 계열의 핵심으로 자리하면서 그 위상을 떨쳤다. 여흥민씨 중에서도 삼방파(三房派)란 20세(世) 민광훈(閔光勳)의 세 아들 시중(蒔重), 정중(鼎重), 유중(維重) 등 삼형제의 자손들을 말한다.

 

1873년(고종 10), 反대원군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로 삼고, 그 해 10월28일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高宗)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 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崔益鉉)을 감싸고, 그를 호조판서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양주(楊州)  곧은골(直谷)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탄강구리비                   誕降舊里碑 

 

 

명성황후의 생가(生家)에 남아있는 비(碑)로, 이 자리는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에 공부방이 있던 터라고 한다. 탄강(誕降)은 왕이나 성인(聖人)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의미하며, 구리(舊里)는 고향을 뜻하므로, 이 곳이 명성황후가 태어난 곳을 기억하기 위하여 1904년에 세운 비(碑)이다. 

 

 

 비(碑)의 뒷면에는 "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경서 (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 "라고 써있는데, 광무 8년 갑진년 5월 어느 날에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는 뜻이다. 확실치는 않으나 명성황후의 아들인 순종(純宗)이 황태자시절에 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04년에 세웠다.

 

 

                                       명성황후, 사진 (寫眞)에 대한 논란

                                      

 

위 사진은 지금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많이 인용되었던 사진이다. 그러나 물론 이 사진에 대하여도 그 진위(眞僞) 여부에 논란이 많았었다. 당시 고종(高宗), 순종(純宗), 대원군(大院君) 그리고 그들의 가족사진 기타 왕족들의 사진은 많이 남아있지만, 명성황후가 포함된 가족사진은 하나도 없다.비녀를 두개 꽂았다는 점으로 명성황후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궁녀(宮女)로 보는 견해가 더 많다. 그동안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거론되었던 사진들을 정리해보자.

 

                                                                                   사진.  1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에서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평민이 입는 적삼(赤衫 .. 윗도리에 입는 홑옷을 말하며, 單衫이라고도 한다) 을 입고 있다는 점에서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사진은 駐프랑스공사와 육군참장(陸軍參將)을 지낸 민영찬(閔永瓚. 1873~1948 ... 민영환의 동생)이 1930년 1월21일자 동아일보에 명성황후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함께 실리기도 하였다.

 

민영찬(閔永瓚)은 명성황후의 친척으로, 그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할 만큼 각별한 사이이었는데, 만약 동아일보(東亞日報)에서 잘못된 사진을 인용하였다면 분명히 이의(異議)를 제기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며, 이 사진은 1933년 동아일보에 다시 게재되기도 하였다.

 

                                                       사진.  2

                                                      

이 사진은 그동안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많이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한(駐韓) 이탈리아 공사를 지냈던 카를로 로제티의 " 꼬레아 꼬레아나. 1904년 "라는 책과 우리나라에서 오래 활동하였던 미국 선교사 헐버트의 " 대한제국 멸망사"에 실린 사진이다.

 

비녀를 두개 꽂았고, 옷도 화려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복식사(服飾史)를 전공하는 전문가들은 .. 이 사진 속의 여인이 "독립정신"의 그 것보다 화려하기는 하지만 왕비(王妃)의 의복으로는 오히려 초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머리도 어느 정도 장식은 하였지만 왕비(王妃)의 그것은 아래 사진과 같이 이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는 것이다.

 

              

                평상 시                        의식 (儀式) 시                      중요한 의식(儀式) 시

                                                                                   사진.  3

최근 독일사진작가의 사진첩에서 발견된 사진이다. 그는 1894 ~1895년에 한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사진에는 필기체로 " Die Ermodete Konigin .. 시해(屍害)된 왕비 "라는 소개가 되어 있다. 그동안의 유순한 모습과는 달리 차가운 눈빛에 예지력(豫知力)을 갖춘 느낌이 명성황후의 인상(印像)에 대한 기록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특히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이 대원군과 같은 배경(背景) 하에 촬영한 사진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점이 명성황후의 사진일 가능성으로 보는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청(淸)나라의 옷을 입고 있었고, 이 사진은 대원군이 淸나라에 인질(人質)로 잡혀 갔다가 귀국한 후에 찍은 사진인데...당시 대원군은 임오군란 시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거짓 국상(國喪)을 치른 인물인데, 청나라에서 갓 돌아와서 같은 곳에서 명성황후와 같이 사진을 찍을 리가 없다는 점 등에서 역시 아니라는 주장이 많다.

 

특히 이 사진은 미국국립박물관에는 조선 궁녀(宮女)의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대원군에게는 초선(椒璇)이라는 기생이 첩(妾)으로 있었는데, 대원군의 복장, 그리고 뒷 배경이 같으며 바닥 또한 동일하다는 점 등으로 보아 초선(椒璇)의 사진일 가능성이 많다.

 

 

                                                                                사진.  4

 

 1894년 12월. 고종과 함께 일본공사 이노우에를 접견하고 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을 그린 일본 신문의 삽화이다. 명성황후를 본 후의 모습을 스케치한 최초의 그림이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에도 발을 쳐놓고 그 뒤에서 대화를 하였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과연 사진을 찍었을까 ?

 

고종(高宗)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刺客)에 의하여 시해(弑害)되기 전에 궁중에서 사진을 촬영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진을 얻기 위하여 수만원의 현상금(懸賞金)을 걸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명성황후의 사진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그때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명성황후의 사진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 고종, 대원군, 순종 등의 사진자료는 충분히 많다. 즉 명성황후는 사진 촬영이 가능하였던 시기에 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종, 대원군 등의 사진은 대한제국이 성립한 1897년 이후의 것으로 명성황후가 숨진 1895년 이전의 것은 없다.

 

전문가의 대부분은 명성황후가 사진 찍기를 거부(拒否)하였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 당시의 한국인 의식구조(意識構造)에는 사진을 찍으면 혼(魂 ..넋)이 나간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선교사들이 아이들 사진을 찍다 몰매를 맞는 일도 자주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친정부모가 암살된 뒤 대인공포증(對人恐怖症)에 시달리며 암살(暗殺)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고, 그로 인해 궁중을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을 정도로 신분의 노출을 꺼렸던 만큼 사진 촬영에 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어의(御醫)로서 왕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던 언더우드여사 조차도 수 차례 사진촬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누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명성황후는 언더우드여사나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같은 외국 여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겨 했다고 한다. 이사벨라 비솝도 결국 사진을 남기지 못하고, 명성황후에 대한 느낌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눈매가 날카롭고 이지적이며 창백하였다고 표현하였다. 독일작가의 사진이 이 모습에 가장 가까운 사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진위(眞僞) 여부를 떠나서...

 

                                         외국 여인들이 본 명성항후 

 

1883년 서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명성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의 부인 "로즈 푸트"는 그 녀를

" 뛰어난 침착성(mastert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 "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명성황후를 만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이렇게 썼다. " 당시 왕후는 40세가 넘은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美人)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가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기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런 여인이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명성황후를 어의(御醫)로서 자주 만났던 선교사 언더우드부인의 기록은 좀 더 분석적이다. "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虛)를 찌르는데 매우 능했다.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도 항상 그 분의 기지(機智)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명성황후는 1851년 여흥민씨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고, 어릴적 이름은 자영(玆瑛)이었다.여흥민씨는 태종(太宗)의 왕비 원경왕후와 숙종(肅宗)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名門家)이었지만 당시는 몰락한 상태이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8살에 부모를 여의고, 고향 여주(驪州)를 떠나 서울 친척 집에서 자랐으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1864년 고종(高宗)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李夏應)은 부패의 온상이었던 안동김씨(安東金氏) 일족의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뿌리 뽑고, 이름뿐인 왕권을 강화하여 쇠락해진 봉건왕조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대원군은 외척(外戚)의 세도정치를 원천 봉쇄할 계산으로 가난한 집안의 고아(孤兒) 소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기로 한다. 고아(孤兒)이었던 점이 오히려 왕비로 간택(揀擇)되게 하였던 것이다. 1867년 고종(高宗)의 나이 15세, 민자영(명성황후)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대원군과의 갈등 그리고 집권 

 

그러나 대원군의 의도(意圖)와 예상(豫想)은 보기 좋게 뒤집어졌다. 총명했던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사람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양 오빠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의 처남(妻男)인 민승호(閔升浩)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고, 대원군의 친형인 이최응(李最應),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李載勉... 고종의 맏형)까지도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고 고종(高宗)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친인척을 모두 끌어들인 후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의하여 정계(政界)에서 밀려난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력과 대원군이 권력을 잡게 해주었지만, 결국 반복(反目)하게 된 풍양조씨(豊讓趙氏) 세력까지 모두 끌어들였다. 사방에서 대원군이 운신(運身)할 범위를 점차로 좁혀나갔던 것이다.

 

명성황후가 처음부터 대원군에 맞서는 지략적인 정치가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감정적인 대립(對立)도 한몫하였다. 

 

 

16세의 나이에 왕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신혼 초부터 여성으로서는 쓰디쓴 질투의 감정을 맛보았으며, 이를 시아비저 대원군이 부추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명성황후와 혼례를 치를 무렵 고종(高宗)은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상궁 출신의 궁인이씨(宮人李氏)를 매우 총애하여 가까이 두고 정작 정식(正式) 왕비는 냉대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인이씨'가 아들 완화군(完化君)을 낳자, 궁중의 관심은 모두 '궁인이씨'에게로 집중되었다. 완화군(完化君)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완화군을 세자(世子)로 책봉하려고까지 했다. 대원군은 배경이 없는 왕비를 며느리로 들인 것도 모자라 혹시나 외척(外戚)이 발호하는 것이 두려워 신분적으로나 가문(家門)적으로 아무 것도 기댈 데 없는 궁인(宮人)의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외척(外戚)에게 시달리지 않고 왕권(王權)을 더욱 강화(强化)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대언군의 완화군(完化君)에 대한 성급한 세자책봉(世子冊封) 시도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대원군의 의중(意中)을 알아보았고 자칫 자신은 허울만 좋은 찬밥 신세 왕비로 전락할 수 있음을 간파하였다. 이후 고종(高宗)의 사랑을 회복한 명성황후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요절(夭絶)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원군의 원자(元子)에 대한 무리한 약처방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국정(國政)부터 왕가의 가정생활까지 모두 간섭하여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 했던 대원군의 독단적인 태도는 결국 명성황후를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즈음 왕위에 오른지 10여 년이 되어 성인(成人)이 된 고종(高宗)도  더 이상 전제적(專制的)인 아버지 대원군의 간섭없이 자신이 왕인 나라를 자기 스스로 다스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종(高宗)과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꼼짝할 수 없도록 자신들의 세력을 서서히 형성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또한 외세(外勢)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나 경복궁 중건(重建) 등으로 인한 대원군의 거듭된 실정(失政)이 왕(王)의 친정(親政)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있었기에 이를 적극 이용하였다. 마침내 1873년 고종(高宗)과 명성황후는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실정(失政)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上疎)를 올리게 하여 이를 계기로 고종(高宗) 친정(親政)을 선포함으로써 대원군을 권력의 중심에서 축출하였다.     

 

1871년 11얼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으나 며칠 뒤에 죽고, 3년 뒤에 두번째 아들 척(拓 .. 뒤에 순종)이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시아버지 대원군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틈이 벌어졌고, 아들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여 무당(巫堂)을 가까이 하고, 전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에 아들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느라 엄청난 재물을 축내었다.

 

 

1873년 유생 최익현(崔益鉉)이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세금을 내게 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민비는 이를 빌미삼아 고종(高宗)으로 하여금 섭정(攝政)을 폐하고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였다. 그 후 민비는 민승호,민규호 등 민씨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요직에 앉힘으로써 고종(高宗)의 친정(親政)이 아니라 모든 권력이 민비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대원군의 세도정치 혁파정책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이후 을미사변(1895년)까지 약 20년 동안 조선은 민씨일족(閔氏一族)의 집권기를 맞게 되었다. 

 

                                     대외정책                      對外政策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명성황후(明成皇后)는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 대신 문호개방(門戶開放)정책을 택하였다. 1876년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수교(修交)를 맺었다. 조선에서의 전통적인 청(淸)나라의 기득권(旣得權)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일본(日本)의 독주(獨走)를 막아보자는 계산이었다.

 

이른바 오랑케를 오랑케로 물리 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이었다. 하지만 민비가 주도한 조약들은 명백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러한 민비의 행적을 두고 " 탁월하고 영민한 판단력으로 서양 여러 나라와 동등한 입장에서 보약을 맺어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했다 " 고 그의 외교력을 극찬하지만, 내 나라를 각축장으로 만드는 것은 '이이제이'의 본래 면목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비 및 민씨세력들은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하였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壬午軍亂)에 참여한 군중들은 민비를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개화파나 동학혁명군 모두 민씨일파의 타도를 외쳤다. 결국 어느 세력의 지지(支持)도 받지 못한 민비는 외부세력(外部勢力)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볼 때 민비의 개화정책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그 일족(一族)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참고로 동학혁명 때 민영준(閔泳駿)이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援兵)을 청하면서 보낸 편지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 저희 나라 전라도 관할에 있는 태인, 고부 등 고을에 사는 백성들은 습성이 사납고 성질이 교활해서 평소에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 백성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 군대를 끌어 들였는데 민비의 외교력을 칭찬해야 옳은가? 나라의 왕비가 이런 착각 속에서 외교정책을 펼쳤다면 어찌 그 것이 영민함인가? 결국 민비(閔妃)의 정치는 조선의 당면 과제인 자주적 근대화(自主的 近代化)를 지향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바람 그리고 시대적 사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비가 집착한 것은 오직 왕권 강화와 왕실의 보존이었는데, 이는 자신의 명예와 부(富)와 권력과 같은 세속적(世俗的)인 욕망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임오군란                     壬午軍亂

 

1882년(고종 19) 6월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과 민씨(閔氏)정권의 횡포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으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의 대립 심화 및 집권과 축출(逐出)이 반복되며,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의 개입이 확대되고, 일본과는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맺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당시의 역사적 환경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체결로 대원군의 통상수교(通商修交) 거부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조선은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정권은 대원군(大院君)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와 고종(高宗)과 명성황후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開化派)로 양분,대립하게 되고,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백성들은 도외시되어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개화파 세력은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新式) 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이듬해에는 종래의 훈련도감, 용호(龍虎), 금위(禁衛), 어영(御營), 총융(摠戎)을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의 2營으로 축소 개편하자 여기에 소속하게 된 구영문(舊營門)의 군대들은 자신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고 하며 증오하였다. 특히 별기군은 대부분 양반의 자제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신식 제복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구영문(舊營門)의 군인들에게는 13개월이나 군료(軍料)의 지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별기군(別技軍)의 초기 모습 ... 총을 들었다

                                                    임오군란의 발단

좋은 대우의 별기군(別技軍)과는 달리 구영문(舊軍營) 소속의 군인들에게는 13개월 동안 군료(軍料)가 밀려 불만은 고조되었고, 군인들은 그 원인을 민씨정권 이후의  궁중비용의 남용과 척신(戚臣)들의 탐오(貪汚)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군료관리의 책임자인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 겸 병조판서인 민겸호(閔謙鎬)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金輔鉉)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구식 군인                                           별기군

1982년 6월 초, 전라도에서 조미(漕米)가 도착하자, 6월5일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구(舊)훈련도감의 군인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宣惠廳) 관리들의 농간으로 모래와 겨가 섞였을 뿐만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군인들은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그 시비(是非)를 따지게 되었다.  

 

더욱이 군료의 지급 담당자가 민겸호(閔鎌鎬)의 하인(下人)이었고, 그의 언동(言動)이 불손(不遜)하여 군인들의 격분을 유발함으로써, 군료의 수령을 거부한 구(舊) 훈련도감의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 유복만(柳卜萬), 정의길(鄭義吉), 강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하여 선혜청 관리와 무위영 영관(營官)을 구타하고 투석(投石)하여 도봉소를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에 군인들의 주된 표적인 민겸호(閔謙鎬)는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조정은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하여 군변(軍變)을 진압할 것을 추진한다. 구(舊) 군인들은 더욱 흥분하며, 이에 도봉소의 군료시비사건은 정변(政變)으로 확산되었다. 이 후에는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동생인 유춘만(柳春萬)의 주도로 진행되며, 일반 백성들도 참여하게 된다.

 

 

                                            임오군란, 대원군과 명성황후

김장손과 유춘만 등의 주동세력은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운현궁(雲峴宮)에 물러나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찾아가서 진퇴를 결정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표면상으로는 밀린 군료를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해산을 권유하지만, 한편으로는 김장손과 유춘만 등 주동자를 불러 밀계(密啓)를 지령하고, 자신의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복으로 변장시켜 군민(軍民)들을 지휘토록 하였다.

 

                                 군민들과 일본군의 전투 ... 일장기가  보인다

 

대원군(大院君)과 연결된 군민(軍民)들은 더욱 대담해지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여 민씨일족 등 개화파의 집을 습격 파괴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일본 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자 공사(公使) 하나부사(花房) 등 공관원은 전부 인천(仁川)으로 피신하여 일본으로 도망갔다. 군민들은 일본군 교관을 비롯하여 순사, 일본 민간인 13명을 살해하였다.

 

                            도망하여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 기념사진을 찍은 일본 공사관 직원들

 

더욱 강력해진 군민(軍民)들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이최응(李最應 .. 흥선대원군의 형) 등을 살해하고,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하여 궐내로 난입하였다. 군민들은 궁궐 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명성황후와 민씨일족들을 수색하던 중,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金輔鉉)을 발견하여 살해하고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위급상황에서 궁녀(宮女)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등에 업혀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당황한 고종(高宗)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대원군의 입시(入侍)를 명하였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재집권하게 되며, 고종(高宗)은 " 자금(自今) 이후 대소 공무(公務)는 대원군 전에 품결(稟決)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李載冕)을 무위대장(武衛大將)에 임명하였다.

                                                                            임오군란의 수습

고종(高宗)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자책교지(自責敎旨)를 반포하여 군변(軍變)의 정당성이 합리화되었고,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군민을 무마시켜 사태의 수습에 나서, 우선 군민들의 요청에 따라 별기군을 혁파하고 5營을 복구시켰으며, 밀린 군료(軍料)를 지급하고, 민씨일족을 제거하기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하여, 자신의 큰아들인 이재면(李載冕)으로 하여금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하도록 조치하여 병(兵)과 재(財) .. 양권(兩權)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정개혁을 꾀하여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그러나 일부 군민들은 명성황후의 처단(處斷)을 주장하며 해산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실종(失踪)을 홍거(홍去 .. 왕족의 죽음)로 단정하고 명성황후의 상(喪)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대원군의 조치로 타격을 받은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자신의 생존(生存) 사실을 몰래 알리는 동시에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청나라는 이에 응하고, 일본과의 대항을 위하여 군대의 파견 필요성을 느끼고 오장경(吳長慶)을 대장으로 4,500명의 군사를 조선에 출동시켰다.

 

명성황후에 대한 국상(國喪)을 강제로 진행함에 따라 대원군의 정치적 입지는 다시 흔들린다. 淸나라는 종주국(宗主國)의 자격으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있어,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았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적(優越的) 기득권(旣得權)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입경한 청나라 오장경(吳長慶)은 서울 요소에 군사를 배치하고 조선의 내정(내정)에 직,간접적으로 간섭을 하며 군령(軍令)을 찾아온 대원군을 납치하여 중국 천진(天津)으로 호송함으로써 대원군은 다시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한편 일본으로 피신, 도착한 하나부사(花芳) 공사는 조선 군변(軍變)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나라의 신속한 군사행동에 대항하지 못하였고, 대원군이 제거되었음을 기화로 조선에 강력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은 군란(軍亂)의 주모자를 처단하고, 일본인 피해자 유족에게는 위문금을 지불할 것 그리고 일본정부에 손해배상금 50만원을 지불할 것, 일본공사관에 경비병(警備兵)을 주둔(駐屯)시킨다는 것 등이다.  이렇게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임오육월일기                  壬午六月日記

 

 

최근에 임오일기(壬午日記)가 발견되었다. 일기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6월9일의 5일 후인 6월13일부터 8월1일까지 .. 명성황후가 궁궐을 나와 서울, 여주, 장호원을 거쳐 충주(忠州)까지 피신하였던 51일간의 행적을 붓글씨로 기록한 일기이다.

 

그러나 이 일기는 명성황후가 직접 쓴 것은 아니며, 그를 호종(護從)하였던 어느 친족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이 일기에 대한 검토 결과, 새로운 사실이 밝혀 질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일례로 지금까지는 명성황후가 淸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고 알려져 있으었으나, 아닐지도 모른다는 등등...

 

 

                                    을미사변                    乙未事變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군대가 조선에 입국하여 청일전쟁(淸日戰爭)이일어나고 1895년 청나라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명성황후는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책 마련에 고심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이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三國) 곧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일본이 얻은 이권(利權)을 내놓게 하는데, 이것이 삼국간섭(三國干涉)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親西方) 정책을 강화하였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일존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서, 이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이라고도 불렸다.  명성황후는 삼국간섭 직후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유배당한 민씨 척족(戚族)들을 다시 결집시켜 친위세력을 형성코자 하였으며, 밖으로는 서양 세력 특히 러시아와 우호를 증진시키려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와 미국에 호감을 가진 정치집단인 정동파(貞洞派)가 탄생하게 된다.

 

                                             명성황후 제거 .. 1차 시도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세력이 친서방(親西方) 정책을 펴자 일본은 조선 내 친일(親日)세력을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이 음모가 미리 발각되자 그 주동자인 박영효(朴泳孝)가 1895년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드디어 명성황후를 직접 시해(弑害)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는데, 국내의 여론을 호도하기 위하여 명성황후와 갈등관계에 있는 반대 세력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훈련대(訓練隊) 군인들을 이 음모에 이용한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마포 공덕리 별장(我笑亭 ..현, 동도중고 자리)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서 공덕리는 매우 위험한 곳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었다. 일본도 흥선대원군을 그다지 좋아한 것은 아니었는데, 고종과 명성황후와의 불편한 관계를 이용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결국 을미사변 사건 당일 대원군을 궁궐에 들여보내 그가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듯이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죽이려 했다는 구체적 증거는 없다. 

 

훈련대(訓練隊)는 갑오경장(甲午庚張)이 진행되던 1895년 음력 5월 궁궐 수비를 위해 설치된 군대인데, 교관(敎官)이 일본인으로 실제로는 일본 공사관의 지휘를 받는 군대이었다. 제1대와 제2대로 나뉘었는데, 대장은 각각 이두황(李斗璜)과 우범선(禹範善)이었다. 고종과 명성화후는 훈련대를 의심하여 연대장으로 홍계훈(洪啓薰)을 임명했다. 또한 훈련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같은 해 미국인 다이(Dye)장군에게 시위대(侍衛隊)를 청설하여 훈련을 시켜 장차 훈련대를 대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의 견제를 받아 규모나 무기 면에서 훈련대보다 열등하였고, 이는 을미사변 때 시위대가 궁궐 수비에 실패한 원인이 된다.   

 

 

                                                  시해 계획 및 모의 

1895년의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이완용, 민영환, 윤치호 등을 앞세워 친미(親美), 친러(親露)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7월13일 이노누에(井上馨) 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三浦)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三浦)는 1895년 9월1일 공사(公使)로 부임한다. 전문외교관이 아닌 군인(軍人) 출신을 공사로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익(右翼) 군인 세력의 거두(巨頭)이었던 미우라공사는 조선에 부임한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 염불 공사(念佛公使) '이었고, '수도승 같다'는 평을 들었는데, 이는 경계심을 풀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을미사변은 미우라공사 일당이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공사에 앞서 공사(公使)를 지낸 정상형(井上馨.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한 일본정치의 최고 원로 및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이었다.

 

당시 을미사변 실행자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들인 원로(元老)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가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미우라(三浦)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명치(明治 ..메이지)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조선은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일군 장교(日軍 將校)가 훈련시키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미군장교 다이(Dye)가 훈련시킨 부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친일계(親日係)인 어윤중(魚允中)과 김가진(金嘉鎭)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시아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排日政策)을 더욱강화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러시아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방책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미우라(三浦)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관리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어윤중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李載冕)과 이준용(李埈鎔)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 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모의                 謀議

을미사변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근과 채찍을 준비하였다. 당근으로는 왕실을 회유 혹은 매수하여 반일감정(反日感情)을 누그러뜨리고 경계심을 풀게하려 했으며, 채찍은 바로 명성황후의 시해(弑害)이었다. 우선 이노우에(井上馨)공사는 을미사변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뒤 고종을 방문하여 조선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바쳤다. 당시 일본 내각에서 논의하고 있던 조선정부에 대한 차관(借款)을 지급하기로 이미 결정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한편 일본은 우익세력의 대표인 고무라(小村失)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養女)로 삼게 하였는데, 뒤에 그녀는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세운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으로 귀국한 때는 을미사변 불과 20일 전이었다. 새로 부임한 '미우라 공사(公使)'는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密室)에서 세부계획을 세운다. 그 당시 미우라의 참모는 시바시로(柴四郞)이었는데, 그는 하버드대학과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고급 지식인이었다. 그는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 낭인(浪人) 단체인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 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미우라공사를 보좌하였다. 

 

일본의 낭인(浪人)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특이하게도 고급 지식인 출신이 많았고, 심지어 동경제국대학 출신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직업적 정치 깡패가 아니라 고도(高度)로  의식화(意識化)된 지식인(知識人) 테러리스트이었다. 이날 모의 계획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부 계획 및 활동 지침을 세웠다. 

 

첫째, 시해(시해)의 주역은 일본 낭인(浪人)이 맡고, 외관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訓鍊隊)의 반란으로 꾸민다.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한 오카모토에게 맡겼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자객(浪人刺客),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巡査)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자객은 한양에서 발행하는 일본인 신문인(新聞人) 한성신보(漢城新報)의 사장  '아다치 갠조'가 맡았다. 규슈와 구마모토 출신 낭인(浪人) 30여 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야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등의 민간인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민간인(民間人) 참여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더라도 공사관(公使館)이나 일본정부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비중이 컸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으로 한다. 넷째, 거사일은 10월10일로 한다.         

 

미우라 공사는 명성황후 시해를 위한 음모를 ' 여우사냥 '으로고 불렀으며,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訓鍊隊)가 해산되자 거사(擧事)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계획도 차질이 생긴다. 새벽 4시에 작전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흉도(兇徒)들이 경복궁(景福宮)에 진입하여야 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마포 공덕리 별장을 출발한 때는 새벽 3시이었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는 새벽 5시가 넘어섰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때는 6시경이었다. 그래서 많은 목격자(目擊者)가 나타나게 된다.   한편 일본으로서도 흥선대원군의 정치참여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서기관 '스기무라'가 4개 항목의 약조문을 초안하고, 10월6일에 오카모토가 이를 가지고 마포 공덕리에 가서 대원군의 서약을 받았다. 주된 내용은 대원군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895년 (을미년) 10월8일 새벽 5시30분경..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으로 들이 닥쳤다. 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 괴한들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일행을 살해하고는 곧바로 근정전을 지나 건청궁(乾淸宮)으로 쳐들어 갔다.

  

 

이들은 고종의 침전(寢殿)인 곤령전(坤寧殿)에 난입,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종(高宗)은 옷이 찢겨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고, 또 왕세자(후일 순종)는 일본군 장교복장을 한  폭도에게 상투를 잡힌채 그가 휘두른 칼에 목을 맞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칼등으로 맞아 목숨을 건졌다.

 

이들 중 한 무리는 인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내달렸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稷)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고종(高宗)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 이어 왕비의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일제는 민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마져 부셔버렸다. 최근에 복원하였지만...

궁녀 3명과 왕비 (閔妃 .. 시해사건 발생 2년 후인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의 비명소리이었다. 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李拓 .. 純宗의 본명)를 통해 피살자 중 한 사람이 왕비임을 확인하고는 왕비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鹿園 .. 人工으로 만든 山, 지금의 청와대 춘추관 자리) 솔밭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워버렸다.

 

 

                                   시간과 윤간                        屍姦과 輪姦

일본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逸健太郞)은 당시 구(舊)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 이시즈카 에이조

(石塚英藏)"가 사건 직후 본국으로 보냈던 보고서 내용 ... " 왕비를 끌어내 2~3군데 도상(刀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했다. 이는 가소우가노(可笑又可怒 .. 웃을 일 또는 화날 일)이다 이는 차마 글로써 표현 못할 일이었다 ...을 인용하여 폭도들이 사체(死體)를 능욕(凌辱)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능욕(凌辱)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듯하다. 궁궐의 난입(亂入)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그들은 칼은 맞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민비를 강간(强姦)하였거나 또는 시간(屍姦 ..시체 강간)도 서슴치 않았음이 분명한 듯하다.

 

                                                              에조 보고서

                                     석총영장(石塚英藏)의 보고서 원문

 

일본에 '에조 보고서'라는 편지 형식으로 된 정식 보고서가 있는데,  당시 일본의 영사(領事)이었던 석총영장(石塚英藏)이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해 놓았다. 일본의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하고 수치스러워서 공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맞추어 일본TV에 공개가 되었다.  빙해(氷解)라는 명분 하에.....

 

 

 

먼저 낭인(浪人)들이 20명 정도 궁(宮)에 쳐들어와서 고종(高宗)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世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侍女)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强姦)을 하였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죽어있는 데도 계속 하였다. 명성황후는 그렇게 시간(屍姦)과 윤간(輪姦)을 다 당하였다.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들은 사지(四肢)를 다 잘라버렸다.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 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그리고 서민들이 다 보고 있는 길거리에서 가슴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하였다. 이후 명성황후의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로 태웠다.  

 

 

당시 일본의 낭인(浪人)들이 궁궐로 침입하자 명성황후는 궁녀(宮女)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 입고 궁녀처럼 변장을 하였다. 이에 일본의 낭인(浪人)들은 아이를 낳은 여자를 확인하기 위하여 궁녀들의 옷을 모두 벗겨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그렇게 명성황후가 누구인지 가려내는 행패를 저지른다. 

 

그 와중에 아들 순종(純宗)의 부인이었던 민씨비(閔氏妃) 역시 한쪽 가슴이 도려지는 일이 발생하였고, 드디어 명성황후를 찾아내자, 고종(高宗)과 아들 순종(純宗) 그리고 민씨비가 보는앞에서 명성황후의 배와 옆구리를 세 번 칼로 찌른다. 

그후 명성황후를 조용한 뒷뜰로 끌고가, 돌아가면서 일본특유의 변태짓을 명성황후에게 저지른다.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겨내어 국부(局部)를 확인한 후 20명이 돌아가며 윤간(輪姦)을 한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석총영장(石塚英藏)은 경악을 금치 못하여 차마 자신은 하지 않았을 정도로 참혹한고 끔찍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 뒤 명성황후 살해에 모두가 다 같이 책임을 지기 위하여 한 명씩 돌아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로 난도질하였고, 마지막으로 이마에 칼로 십자(十字)를 그었다고 한다. 그 후에 이 모든 일을 없애기 위하여 불로 태워버렸다.          

 

 

 

한국정부 고문(고문)으로 있던 석총영장(石塚英藏 ..이시즈까 에이조)가 '스에마쯔' 법제국장 앞으로 왕비 사건의 진상을 보고한 서간(書簡)입니다. 서간용 두루마리에 먹으로 썼읍니다. (메이지 28년 10월 9일부)이토 백작가(伊東伯爵家) 문서. 조선왕비사건관계자료 

 

 

안녕하십니까? 이 땅(當地)에서 어제 아침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는 벌써 대략 아시겠지요 ?왕비배제(王妃排提)의 건을 시기를 보고 결행하자는 것은 모두가 품고 있었던 생각이지만, 만일 잘못하면 바로 외국의 동정을 일으키고 영원히 여러 나라에서의 일본의 지위(地位)를 잃을 것이 당연한 것이므로 깊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저는 처음부터 모의(謀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만 어렴풋이 그 계획을 조선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어서 조금씩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국외자(局外者)로서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여 심지여는 낭인(浪人)들이 병대(兵隊)의 선봉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경솔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거의 아이들 장난(아희. 兒戱)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데, 다행히 그 가장 꺼림찍한 사항은 외국인들은 물론 조선인에게도 서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현 공사(公使)에 대해서는 조금 예의가 없는 느낌이 들지만 일단사실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고드리는 것이 직무 상의 책임일까 생각해서 아래와 같이 간단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왕비(王妃) 배제(排除)의 필요는 미우라공사(三浦公使)도 이미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필 오늘 이것을 결행한 이유는 ' 위급의 경우에 러시아의 원군(援軍)을 청해야 할 약속 ' 및 ' 훈련대를 해산한다는 계획 '을 궁내부(宮內府)에서 세웠기 때문인듯 합니다. 그래서 훈련대를 이용한 것입니다.   

 

 

훈련대 해산, 병기(兵器) 몰수의 의논을 듣자 부득이 대원군(大院君)을 앞세워 대내(對내)에 하소연하고자 해서 시위대(侍衛隊)에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왕성의 수비병은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4문(門)의 경비에 종사하였다고 말합니다.

 

모의자(謀議子)에 대해서는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오카모도(岡本)가 주모자인 것 같습니다. 대원군의 입궐(입궐)을 알선(알선)한 것은 바로 그사람입니다. 그 이외에 시바(柴), 크스세(楠瀨), 스기무라(杉村)가 비밀 모의(謀議)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기타는 적어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수비대장 마오하라(馬屋原) 같은사람은 명령으로 실행의 임무에 충당된 것 같습니다.  

 

 

이 막된 짓의 실행자는 훈련대 외에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습니다.(혹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습니다. 구마모토(熊本) 현 출신자가 다수를 점하며, 그들 중 신문기자(新聞記者) 몇 명과 의사(醫師), 상인(商人)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양식 옷을 입은 사람과 일본옷을 입은 사람이 서로 섞여 있었습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大院君)과 동시에 입성(入城)하여 실행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수비대의 장교와 병졸은 4문(四門)의 경위(四門警衛)에 그치지 않고 대문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특히 낭인들(野次馬達)은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고 두 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습니다 (處刀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웃을 일 또한 노할 일 .. 가소우가노(可笑又可怒)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 어렵습니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몹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하였습니다.

 

이와 같은일은사관(士官)도 도와주기는 하였지만 주로 병사(兵士)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습니다. 대략 세 시간여를 소비하여 위와 같이 막된짓을 저지른 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서서히 광화문(왕성)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갔습니다. 그때가 벌써 8시가 지났고, 왕성(王城) 앞 대로(大路 .. 광소로)는 사람으로 충새(充塞)하였습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두 공사(公使)는 궁궐 내에서도 대원군 및 미우라(三浦) 공사를 향하여 빈번하게 질문을 해 다시 동일 오후에는 각국의 사신들이 더불어 일본공사관에 와서 하나하나 증거를 들고 힐문하다가 밤이 되어 각각 귀관하였습니다. 미우라공사는 변명(辯解)를 하려고 아주 노력하여 결국 서로가 이치(理致)만 따져 끝이 안나는 논쟁이었지만 저(當方)는 너무나 아픔을 느끼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미국인이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하니, 보통 일반 조선인의 증언처럼 일방적으로 말살해 버릴 수도 없지만, 미우라공사의 변명 역시 아주 잘 한 것 같습니다. (공사의 담화에 의하면) 또한 대원군을 비롯한 각 대신(大臣)들은 굳게 약조하여 일본에 불리하지 않게 답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국제문제화를 막을 수 없을 것 입니다.    

 

 

이 사건의 영향에 대하여, 만일 이 땅에서 외국 사신들 사이의 담화로 마무리되어 국제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그 요동(遼東) 문제는 곧 영향을 미칠 것 입니다. 공사(公使)는 곤란한 경우에 면관(免官)되며, 공사의 사임은 아마 국제 분의(紛議)를 잘 풀 것입니다. 요컨데 왕비가 종래 개혁의 방해인 사실은 저도 밤낮으로 분개하고 있었던 만큼 그 단연한 처분을 기뻐함과 동시에 그 방법이 적당하지 않았음을 깊이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사(公使)는 위의 낭인(浪人)들에 대해서는 표면상 각자 처분하게 될 것 입니다. 그래도 모든 외국의 곤란을 배제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런 막된 짓인만큼 다소 실수를 하는 것은 면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번일은 너무나도 실수가 많지 않은가 합니다. 이 보고는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미우라공사에 대해서는 아주 불신실(不信實)의 극치이겠지만 직무상의 의무에 ?겨 부득이 보고드리는 바이니 부디 잘 봐 주십시요.    

 

                                                    시신의 처리

명성황후가 절명한 시각은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로 여겨지나, 절명한 곳이 어딘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여간 방 안에서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은 많이 있다. 낭인(浪人) 즉 흉도(兇徒)들은 황후를 죽인 뒤에도 그들이 죽인 사람이 황후임을 확신하지 못하여 용모가 비슷한 궁녀를 세 명 살해하였다. 흉도들은 그들이 살해한 네 여인 가운데 누가 황후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궁녀와 태자를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 황후 얼굴을 잘 아는 일본인 고무라의 딸을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 황후의 얼굴에 있는 마마자국을 확인했다는 설, 처음부터 초상화를 들고 들어왔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여러 방법을 섞어서 활용하였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미우라 공사(三浦公使)는 새벽에 고종(高宗)을 면담하기 위하여 궁에 들어간뒤 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고 나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흉도들에게 급히 화장(火葬)하라고 지시하였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로 덮고 건청궁(建淸宮) 동쪽 녹원(鹿園) 숲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遺骨)을 당시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禹範善)이 우연히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香園亭)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埋藏)하였다. 뒷날 친일내각(親日內閣)은 윤석우(尹錫禹)를 비롯한 법무협판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朴銑) 등을 무고하게 반역죄 또는 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장례(葬禮)를 치르기 위하여 유해(遺骸)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高陽郡)에 사는 환관(宦官)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관)에 넣었다.

 

                                  친일파의 협조                    親日派의 協助

이 치욕스러운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의 아버지 우범선(禹範善 .. 1857~1903)이었다.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포섭되어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왼쪽이 우범선, 가운데가 우장춘박사 그리고 일본인 아내

 

이 일에서 그가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의 동원이었다. 그는 당초의 임무대로 훈련대 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 명성황후의 시신(屍身) 처리도 그가 맡았다. 폭도(暴徒)들에 의하여 살해된 후 불태워진 시신(屍身)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의 일부는 우범선(禹範善)의 지시에 따라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 인멸을 위해서이었다. 

 

우범선 그는 누구인가 ? 그는 20세가 되던 해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황해도에서 근무하다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여기에 참여한다. 그의 친일(親日) 행각은 여기서 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친일 개화세력과 교류하면서 개화파에 가담한다.  그리고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포섭된다. 그는 미우라에게 "조선의 정치 개선은 당우(黨羽)를 일소하지 않으면 어렵다 "라고 하며 민비(명성황후) 시해(弑害)를 통한 친일정권의 수립을 역설하였다.

 

이어 우범선은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李斗璜),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등을 포섭하였고, 이에 미우라는 당초의 계획날짜를 앞당겨 민비를 시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 후 우범선은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亡命)하였다. 동경에서 망명생활 하는 도중 사카이(酒井)이라는 일본여자를 만나 결혼한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03년 구레市(吳市)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해 말 자객(刺客)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하였다.

 

 

우범선의 무덤은 그가 살해된 구레시와 동경 두군데에 있다. 도꾜 아오야마(靑山)묘지에 있는 묘는 일본인 후원자가 우범선의 유골을 분골(分骨)하여 그의 사후 1년 후에 다시 도꾜에 묻었다고 한다.우범선의 아들 우장춘박사는 6.25 와중에 귀국하여 일생을 조국의 농업발달을 위하여 전념하였다. 그 길이 아버지의 과오를 속죄라도 하듯이....

  

이두황

 

                                                 명성황후 죽음 이후

 

명성황후는 지나치게 총명하였고 정치에 적극적이었기에, 또 보기에 따라서는 시대를 앞선 매우 현대적인 자존감(自尊感)을 가진 여인이었기에 명성황후는 정적(政敵)들의 표적이 되었고 신변은 늘 불안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淸日戰爭)을 거치면서 조선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들어온 일본을 러시아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축출하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일본은 후안무치한  음모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명성황후의 시해(弑害) 시도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로 왕비인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建淸宮)의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浪人)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하였다. 그 시신(屍身)마저 향원정(香園亭)의 녹원(鹿園)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외세(外勢)에 의한 왕비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아바지이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 하였지만, 고종(高宗)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러시아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으로 조선은 국격(國格)을 훼손당하고 망국(亡國)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되었다. 

 

                                       사실 왜곡                       事實 歪曲

을미사변이 일어난 10월 8일 아침에 고종이 미우라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 공사는 서기관 스기무라 통역관을 데리고 으로 들어왔다. 고종은 아침 8시경 장안당(長安堂)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우라와 스기무라 그리고 자객(刺客)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국과 러시아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달려왔다.

 

미우라 공사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金弘集 內閣)을 성립시켰다. 김홍집(金弘集) 등이 연락을 받고 궁으로 들어올 때 미우라 공사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황후의 시신(弑身)을 직접 확인학 화장(火葬)을 명한다. 김홍집 내각은 세 가지 조칙(詔勅)을 기초하여 고종에게 서명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들은 서로 서명을 마치고 나갔으며, 일본인들도 궁궐에서 철수하였다. 

 

이날 군부 대신은 '안경수'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은 '조희연'으로 바뀌고, 권형진이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사, 유길준이 서리 내무대신, 어윤중이 탁지부 대신, 장박이 법무대신, 서광범이 학부 대신, 정병하가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황후의 시해사건에 대하여 방조 또는 묵인한 인물들 이었다.

 

사건 직후 미우라 공사는 황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朝鮮人)의 반란(叛亂)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펼쳤다. 미우라 공사는 이튿날인 10월 9일과 그 다음날인 10월 10일 외부에 공문을 보내었다. 그 와중에 군부대신 조희연이 일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미우라 공사는 조선 외부와 군부(軍部)의 입을 통해 일본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명을 받아 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월9일에는 이 사건의 목격자인 '사바틴'의 입을 막기 위하여 친일내각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폐서인 조칙                    廢庶人 詔則

을미사변 직후, 고종(高宗)은 허수아비처럼 되었다.  ' 대군주폐하 (大君主陛下) '라는 존칭을 받고, 황제가 쓸 수 있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있지만,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내린 조칙은 없었다. 10월 10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하는 조서(詔書)를 김홍집내각이 스스로 서명하여 고종의 명의로 발표하였다. 

 

그 가짜 조서(詔書)에서 ' 그 옛날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와 마찬가지로 짐(朕)을 떠나 피난했다 '라는 거밋말을 하였다. 이 때 서명한 사람은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 등이었으며, 탁지부(度支部) 대신 심상훈(沈相薰)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황태자가 먼저 명성황후의 폐위(廢位)에 반발하면서 양위(讓位)하겠다고 저항하자, 다음날인 10월11일 '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하려던 조치를 후궁에 해당하는 '빈(嬪)'으로 승격시켰다. 10월14일에는 황후(皇后)를 새로 간택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고종의 의사와는 관계 없었고, 고종은 그 뒤로 1919년 죽을 때까지 황후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다.  

 

황후의 폐위 소식을 들은 외국 공사들은 고종이 직접 도장을 찍지않았다는이유로 인준을 거부하니, 일본은 제외한 모든 나라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 서울 주재(駐在)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는 을미사변 직후 서울 주재 외교대표단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 미우라공사에게 항의하였으며, 일본 공사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었음을 밝혀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조선인들의 소행으로 몰고가려던 미우라 공사(公使)의 흉계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관련자 47명을 본국으로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예심판사 요시오카(吉岡美秀)는 증거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다음해인 1896년 1월20일 이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일본과 김홍집 내각(金弘集 內閣)은 악화된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11월 26일 폐후(廢侯) 조칙(詔勅)을 취소하였다.       

 

                                        을미의병                      乙未義兵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분함을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한술 더 떠 친일내각(親日內閣)이 황후폐위(皇后廢位) 조치를 내리자 유생(儒生)들은 토역소(討逆疏)를 내는 것은 물론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였다. 11월에는 충청도의 제천과 유성에서 유인석(柳麟錫), 문석봉(文錫鳳) 등이 중심이 되어 거의토적(擧義討賊)의 기치를 들었다.

여기에 친일내각이 전국에 내린 단발령(斷髮令)은 전국적으로 반일감정(反日感情)을 확산키키는 한몫을 하였다. 1896년 경기 지역에서는 박준영(朴準英)이, 충청 지역에서는 김복한(김福漢), 유인석(柳麟錫) 등이, 강원도에서는 이소응(李昭應) 등이, 경상도 지역에서는 곽종석(郭鍾錫) 등이, 전라도 지역에서는 기우만(奇宇萬) 등이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官軍)의 공격을 받고 곧 흩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전국적인 의병(義兵)봉기에 놀란조정은 선부사(宣撫使)를 파견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혼란의 틈을 근왕세력(近王勢力)인 이범진(李範晉) 등의 정동파(貞洞派)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으로써 친러내각(親露內閣)이 등장하였다. 새 내각은 단발령의 철폐와 의병(義兵)의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이와 함께 각종 세금을 탕감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의병봉기의 명분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후부터 의병활동은 사그러들었다.     

 

                                             장례                      葬禮

 

페후(廢后) 조칙이 취소된 후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타도하고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한 고종(高宗)을 구출하여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던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발생하자,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만인 12월 1일에 그녀의 사망 소식을 공식 발표하고 국상(국상)을 치르려 했다. 이는 고종의 친위쿠데타 세력인 정동파(貞洞派)가 몰락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국상을 치르려 함이었다.

 

1896년 2월 11일 이관파천(아관파천)이 일어났으며, 그날 고종(高宗)은 조칙을 내려 김홍집 일파, 곧 김홍

집, 유길준, 정명하, 조희연을 을미사적(乙未四賊)이라고 밝히어 역도(逆盜)로 규정하고, 그들이 진행시키던 국모(國母) 재간택과 이미 내린 폐비(폐비)에 관한 조칙을 무효로 돌렸다. 그리고 3월 10일 김홍집 내각이 진행하던 국상(國喪) 절차를 중단시키고, 무기한 연기시켰다. 

 

그리고  1897년 10월2일, 고종(高宗)이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환구단(환丘壇)에 나아가 스스로 황제(황제)에 즉위하고, 낮 12시에 왕후를 '명성황후 (明成皇后)'로 책봉 추존(推尊)하였다. 이튿날인 10월13일 아침 고종황제는 황후의 빈전(嬪殿)에 제사를 드리고, 오전 8시에 태극전에 나아가 ' 대한(大韓) '이라는 국호(國號)를 반포하였다.  그녀의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 가서야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으며,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요절(夭絶)한 두 아들 다음에 낳은 셋째 아들이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純宗皇帝)이다.  

 

                                                  명성황후의 흔적들

  

 

편지,글씨 비녀 등

 

                                                         명성황후의 친필 편지 .. 오빠에게

 

 

명성황후가 1874년 오빠 민승호에게 보낸 2통의 한글편지이다. 당시 24세의 나이였던 명성황후는 정적이었던 시아버지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한 이후 어수선한 정세로 편치 않은 심경을 드러낸다. (오빠)의 편지에서 밤 사이 탈이 없다하니 다행이다. 주상과 동궁(훗날 순종)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니 좋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다.....................예쁜 색지와 깔끔한 글씨체로 눈길을 끌고 있다. 정갈한 궁서체로 씌어진 이 편지글은 색지에 그려진 대나무, 꽃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편지지는 수입품.. 청나라 것이라고 한다.

 

                                 명성황후의 친필  ... 최근 경매로 나왔다.

 

 

 

                                        시해 당시 지니고 있던 향주머니

 

명성황후의 시해에 가담한 폭도 한명이 시해 후 명성황후가 품에 지니고 있던 향주머니(香袋)를 기념으로 가지고 가서 후손에게 남겼다. 그 후손은 후에 그것을 잃어버리고 똑같은 향주머니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일본 방송에 소개되었다 . 

 

                                   부패의 中心  그리고  東學혁명

 

고순종실록(高純宗實錄)  고종32년(1895년) 8월20일 기록에 의하면 민비(閔妃)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세상을 떴다고 전하고, 그 다음날에는 " 내가 (고종) 왕위에 오른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데, 왕후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나의 주위에 배치하고 나의 총명을 가리우며 백성을 착취하고 나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고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고순종실록(高純宗實錄)이 일제에 의하여 왜곡되었을 기록이지만, 민비에 대한 부정적 행적은 놀랍게도 당시의 많은 야사(野史)들, 특히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이 쓴 " 매천야록(梅泉野錄) "과 너무나도 일치하고 있다. 곧 가까운 무리를 배치(민씨일족의 세도정치), 백성 착취(탐관오리), 벼슬을 팔고(매관매직),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民亂 및 동학혁명) 등 당시 역사적 상황과 일치한다. 

 

 

                                               동학혁명과 민비

 

우리 역사에 있어 동학혁명(1894)이란 " 백성(百姓) "이 " 민중(民衆)"으로 잠을 깬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홍경래의 난(1811)에서부터 민중봉기는 전국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같은 민란(民亂)은 그때마다 주모자의 처형(處刑)으로 막을 내리게 되니 민중들은 힘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처럼 안에서 봉건지배층이 민중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을 때 일본 및 서구열강의 침략은 민중을 한층 불안하게 하였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하여 淸나라 수도 북경(北京)이 함락되더니, 조선도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강화도늑약(1876)이 차례로 조인되어 본격적으로 淸, 러, 日, 美, 佛, 英 등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안팎으로 혼돈에 빠져 있을 때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에 의해 東學이 창도되자 민중들 속으로 들불처럼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동학은 민간신앙에 도교와 불교 나아가 천주교의 사상까지 함유하고 뿐만아니라 조선후기 몇차례에 거듭된 민란(民亂) 실패를 통해서 얻게된 현실적 요소들을 반영하면서 현실 변혁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1894년, 민씨일족의 부패정치로 인해 " 더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이르러 마침내 동학민중이 일어났다. 4월27일에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하고, 5월5일에 조선의 청병(請兵)에 따라 청나라군대가 아산에 상륙한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하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동학(東學)의 지도자들은 5월7일 서둘러 전주화약을 맺는다. 그러나 마침내 5월27일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하고, 6월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군사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전리품(戰利品)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한다.  이러한 회오리 속에  국권이 일본에 유린되니 나라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9월18일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명에 따라 조선팔도의 동학혁명군이 부패한 정권과 왜군(倭軍)에 대항하여 다시 일어난다.

 

 

이 같은 동학혁명의 전개 과정은 민씨일파의 부패한 정치 행로와 맞물려 있다.흔히 동학혁명의 불을 당겼다고 보는 고부군수 조병갑이나,고부 안핵사로 파견되어 동학군을 과잉 진압하므로써 새로운 불을 지핀 장흥부사 이용태는 모두 민비의 매직(賣職)에 의하여 임명된 인물들이다.

 

 

특히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 들임으로써 일본군대가 상륙하였고, 결국 청일전쟁은 온 국토가 유린되는 빌미가 되었다. 쇠약한 민씨정권(閔氏政權)은 동학혁명군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일본군에게 동학혁명군의 토벌을 맡기고, 일본은 그 전리품으로 조선의 민심 수습과 국권 탈취의 두 요건을 동시에 만족시켜 줄 " 민씨정권의 목 "을 요구하게 된다. 민비의 삶이 어찌 동학혁명과 무관하단 말인가.

 

 

 

 

                                         어느 환관 (宦官)이 본 명성황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명성황후에 대한 기록이 최근 발굴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신 환관(宦官)의 기록이니 더욱 절절하고 사실일 듯하다.

 

 상감(高宗)이 1864년 즉위한 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 곤궁(坤宮 .. 명성황후)는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 하시어 배우들을 궁중에 데려다 노래를 부르게 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묘기를 부리게 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 상(賞)으로 하사한 금품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극도로 곤궁해지고, 국고는 탕진되어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배우들은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었고, 군인들은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궁중에서는 비록 태평세월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민간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빈사세상이었다.

이 때를 당하여 천경(天警 .. 하늘의 경고)이 여러번 나타나고 인심(人心)이 흩어졌으니 무신(武臣)의 변란인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 한마리 개가 짖으면 두마리 개가 따라 짖는 법이고, 일시에 짖어대면 천마리의 개가 떼를 지어 짖어대는 법이다. 한 사람의 군졸이 주동하여 일어나면, 두 사람의 군졸이 주창하여 일어나고, 일시에 제창하여 일어난다면 5,000명의 군졸이 호응하여 일어나게 된다.

 

원래 5營의 군인은 5,772명이었다. 이와같은 다수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 군료(軍料 .. 급료)를 여덟달치 지급받지 못한 군사들의 분통과 원망이 쌓여 동심동력으로 일시에 들고 일어나니 고함지른 소리와 하나로 합친 형세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고, 비가 거꾸로 쏟아 붓는 것 같았으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것과 같았다.

 

이에 곤궁께서는 크게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어찌 해야랄 지를 몰랐다. 드디어 옷을 갈아입고 대궐을 빠져 나와 어둠컴컴한 마을로 달아났다.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워 어쩔 수 없는 이 때에 어디서인지 팔척장신의 사나이가 홀연 나타나더니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 위험이 눈 앞에 닥쳐 왔아오니 황송하오나 빨리 저의 등에 업히소서 ...하고 두세번 재촉하였다. 경황이 없는지라 곤궁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나이의 등에 업혀 수구문 밖으로 나갔다. 이 때는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가까스로 가마 한 대를 불러와서 숭례문을 빠져나가 곧바로 남태령고개를 향해 한강가로 나갔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는 몹시 가물어 논의 벼가 말라 죽고, 고을마다 화적떼가 들끌었다.그래서 이 것을 하늘의 경고 즉, 천경(天警)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섣부른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구군(舊軍) 병사들을 70%나 감축하여 실업자로 만들고, 더욱이 그들에게는 여덟달치의 봉급도 주지 않았다. 이러함에도 명성황후는 연일 풍악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 군인들은 궁궐을 향해 돌진하면서 곤궁(坤宮 ..민비)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임오군란의 책임소재가 민씨일족에게 있었음을 말해주는 형세이었다.

 

                       뮤지컬 "명성황후" ..  지나친 美化 그리고  냉정한 평가

 

뮤지컬 명성황후의 작품성(作品性)은 차치하고 거기에 " 역사(歷史) "는 없다. 민비의 죽음이라는 비극성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사실(史實)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지나친 미하(美化).. 가히 신드롬이다. 그저 픽션만 존재할 뿐, 아직까지 호칭마저도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 명성황후"로 미화되고 왜곡되고 있다.

 

그동안  민비 시해사건의 실상을 밝히는 일에  앞을 다투어 해왔지만, 그 죽음에 대한 비극성에만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민비가 집권한 20여년 동안에 일어난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과 같은 사건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살펴서 총체적 의미를 규명해야 한다.

 

민비는 누가 뭐래도 당시 부패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갑오일기"는 민씨정권 당시 충청도 청풍 북노리에 사는 이면재(李冕宰)라는 가난한 선비의 기록인데... 민비가 충북 제천의 월악산 골짜기에 벌인 어마어마하게 큰 피난 궁터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부패한 민씨일파의 실태와 동학혁명군의 움직임을 낱난히 밝히고 있다. 지금도 그 곳에는 월악궁터 주춧돌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이야기를 묵묵히 전해주고 있다.

 

또한 閔妃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왜(倭) 상인에게 돈을 빌려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제물(祭物)을 뿌려서 탕진하였으며, 모자라는 재물을 채우기 위해 매관매직(賣官買職)을 일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사(野史)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임오군란 때 난(亂)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궁중을 빠져나와 신행 행렬을 가장하여 한강을 건너 주막으로 숨어 들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가마를 들여다 보며 딱하게 여겨 " 새색씨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때문에 고생한다 "고 말을 했는데, 민비는 이에 앙심을 품고,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일제의 민비 시해사건에 국민적 공분(公憤)은 당연하지만, 민비에 대한 근거없는 미화는 안된다. 민비에 대한 미화는 구천을 떠도는 숱한 민중들의 원혼을 고려한, 역사의 총체적 의미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일순전광자노호                         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

 

 

 

 

일본의 호쿠오까의 쿠시다신사(神社)에 명성황후를 살해한 칼이 보관되어 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제거하려는 일제(日帝)의 작전명이 " 여우작전 "이었는데, 이 칼에는 "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전광석화로 일순간에 늙은 여우를 베다)라는 글귀가 써져 있다.토오 가쓰야키 (藤勝顯) ... 그는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하여 그녀의 침소에 최초로 난입한 세 낭인(浪人) 중의 한 사람이다. 나카무라 다테오, 데라사끼 그리고 토오 가쓰야키...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계획대로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풀려난 토오 가쓰야키는 가슴 속에 남아있는 양심의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듯하다. " 閔妃를 베는 순간, 그 눈길을 잊을 수 없다 "며 후회와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가 1908년 평소 할머니가 다니던 절신원(節信院)이라는 사찰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명성황후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불상(佛像)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많은 돈을 들여 구리로 만든 관음불상(觀音佛像)을 세워 바치고 " 세상에 다시 나와서는 안 될 물건이다 "라며 그 칼까지 절신원에 맡겼다고 한다. 그러나 절신원에서는 관음상은 모실 수 있으나, 살생의 무기인 칼은 사찰에서 보관할 수 없다고 하며, 근처의 쿠시다 신사(神社)를 소개시켜 주었고, 쿠시다 신사(神社)는 이를 승락하여 보관하게 되었다.

 

 

 

 

쿠시다 神社의 봉납부(奉納簿)에는 칼을 기증한 토오가쓰야키(藤勝顯)의 이름과 명성황후를 살해할 때 사용한 칼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쿠시다신사에는 이 칼의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쿠시다 신사(神社)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명성황후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바쳤다는 관음상이 있었다는 절신원(節信院)이 있는 성복사가 있다. 지금은 구리로 만든 관음상 대신에 돌로 만든 관음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관음상에 대한 사연도 구구절절하다.

 

절신원(節信院)에 바쳐진 청동관음상은 수년간 잘 모셔져 왔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또 한번 새로운 사연을 만들어 낸다. 전쟁말기 부족한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쇠붙이라면 모조리 징발해 가던 그 때 이 곳 절신원의 청동관음상도 몰수당하고 말았다. 후쿠오까도 미군이 대공습으로 초토화되고 절신원도 파괴되면서 관음상은 물론이고 절신원(絶信院)마져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이 되었다. 

 

 

 그런데 후쿠오까 대공습이 있던 다음 날, 어는 부부가 절신원(節信院)의 관음상이 있던 자리에서 홀로 버려진 여자아기를 발견하였다. 그 부부는 그 여자아기를 데려다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웠으나, 그 아이마져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부부는 안타까운 딸의 죽음에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불상을 세우기로 하였다. 딸을 주워 온 그 자리에 관음상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원래 관음상의 형상에 자기 딸을 형상화한 여자아기상을 함께 복원하여 석상(石像)으로 만들었다. 한 손에 여자아기를 안고, 한손에 연꽃을 들고 인자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고, 그 유래를 적은 비석이 서 있는데, 여기에 민비(閔妃)에 관련된 칼과 청동관음상에 대한 얘기가 소개되어 있다.

 

 

                                       민유중(閔維重)의 신도비 

 

민유중(閔維重)은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그의 묘소 앞에 서 있는 신도비로 이 곳에서 약150m올라가면 그의 묘가 나온다.

 

 

 

민유중(閔維重)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로 즉 숙종의 장인이다. 민유중은 1650년(효종 1)에 과거에 급제한 뒤 승문원과 예문관 등의 요직을 거쳐 충청도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신도비에는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를 찬냥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의 기단석의 몸통은 거북이 형상이며, 머리를 龍의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틀어져 묘소를 향하고 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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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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