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일본의 역사컴플렉스 해부

lionet 2012. 12. 15. 21:36

서론

 

컴플렉스(Complex)는 정신분석학 용어로 강한 반응을 일으키는 관념이나 기억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현상에서 일어나는 복합 감정을 의미하는데 열등감이 크게 작용한다. 누구나 컴플렉스를 갖고 있으며,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이 있는데 무의식화될수록 병적 상태가 된다고 한다.


내가 일본의 ‘역사 컴플렉스’를 의심한 것은 20여년 전이다. 우연히 메이지유신 이후 1945년 전후 패망까지의 과정을 기술한 책이었는데, 거기에서 19세기말 전후 일본이 한국에 대해 취한 정책에서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역사와 관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한일 고대사를 집중적으로 알아보았다. 생업에 바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연구하진 못했지만 세월과 함께 지식이 쌓이면서 역사 컴플렉스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한국 컴플렉스의 이면에는 한국의 일본 컴플렉스가 있다.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일본은 있다, 없다’논란으로 모 국회의원이 저작권 논란에 휘말린 사건을 보면서 양국이 가진 컴플렉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역사가 오래됐고 인접한 나라들은 대개 관계가 안 좋다. 서로 붙어 있다보니 오랫동안 접촉하면서 영향도 받고 전쟁도 겪으면서 미운정 고운정이 쌓이는 게 당연하다.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과 시리아, 독일과 폴란드, 이란과 이라크, 미국과 멕시코, 이집트와 리비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나라들은 드러내놓고 싸우는가 하면 뭔가 잘 협조되는 듯 하다가도 뒤틀어지곤 한다.


그리 나쁜 이웃으로 보이지 않는 미국과 카나다는 예외이다. 아마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고 라이벌이 되기에는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수백년이 지나고 나서 카나다의 인구가 늘어나서 힘이 세지면 미국과 카나다도 국제사회의 앙숙으로 되어 있을 수 있다.


일본이 가진 한국 컴플렉스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일본 아스카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가 가진 일본 컴플렉스는 20세기 초반 식민지배 시절에 유래되었다. 한국의 일본 컴플렉스는 일본의 한국 컴플렉스에 대한 반작용까지 더해져 있다. 양국이 갖고 있는 감정은  상호작용하여 서로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일본에서 한류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치와 막걸리의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향상되고 최근 뉴스를 보니 일본인이 방문하고 싶은 도시 1위는 서울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의 인식이 이렇게 나아진다고 해서 한국 컴플렉스가 치유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일본인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이지만 집단적으로는 철면피라는 점이다. 일부 개인들이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는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국의 컴플렉스를 상징하는 단어로 각각 ‘쪽바리’와 ‘조센징’을 선택했다.


(1) 일본의 한국 컴플렉스, 조센징

“우리는 조센징보다 인종적으로 우수하며 문화민족이다. 20세기 초 우리가 지배했던 조센징의 역사가 우리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더구나 우리의 뿌리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이 한국 컴플렉스가 깊어지면서 악화되어 아시아 컴플렉스로 고착되었다. 한국 컴플렉스의 본질은 열등감이며 이것이 도를 넘어 아시아 전체에 대한 우월감으로 변질된 게 일본의 아시아 컴플렉스이다. 일본은 외친다.

“16세기부터 서구와 교류했던 일본은 땅만 아시아에 있을 뿐, 실질적으로 서구 나라이다. 너희 아시아 국가는 우리가 지도해야 한다.”



(2) 한국 컴플렉스로 인해 나타난 현상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약점을 어떻게든 감추려하고 억지를 부리거나 엉뚱하게 과장하게 된다. 약점을 지적하면 벌컥 화를 내며 아니라고 우긴다. 일본의 태도가 이와 같다.

일본은 한국 컴플렉스를 감추려 애를 쓰다 못해 역사를 거꾸로 왜곡한다. 임나일본부, 구석기 유적 날조,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은 그 결과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일본이 갖고 있는 한국 컴플렉스의 실체를 알 수 있다.



(3) 한국의 일본 컴플렉스, 쪽바리

그렇다면 한국이 갖고 있는 일본 컴플렉스는 어떤가. 근거 없이 일본을 무시하며 쪽바리라고 치부하는 태도이다. 우리 역사가 오래 되었다는 자만심으로 일본에 대해 분석하지 않고 일본의 엉뚱한 논리를 대처할 방안을 찾지 않는다.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우리나라 고대역사 연구는 우리보다 일본학자들이 훨씬 많이 했다. 우리나라 학자가 쓴 우리의 역사 논문에 일본학자의 글을 인용하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한심한 학자들이 대한민국 사학자들이다.


그 결과 제3국이 볼 때는 한국이 도리어 억지를 부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미국사람들은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맞는데 한국이 아니라고 우긴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 한국남부를 일본영토처럼 표시하기도 했다. 독도와 동해표기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억지를 부리는 듯한 시각이 널리 퍼져 있어 국제적으로는 독도라는 표기를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일본 측 주장이 굳어져 있으며 한국 측 주장은 부분적으로 제기된다. 한국에 유리한 부분적 시각이 뉴스에 자랑스럽게 보도될 정도로 서글픈 현실이다. 왜 지극히 당연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까?



(4)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일본의 한국 컴플렉스

이 같은 양국의 감정적 대립은 일단 일본에 원인이 있다. 결자해지. 일본이 태도를 반성하고 올바른 관계를 지향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일본도 일본이지만 우리 역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주장에 대해 확실하게 반박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우리 정부에게 이런 일을 기대하긴 힘들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자존심이라곤 낙제점인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제대로 대응할 의지도 역량도 없다.


이런 근본적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거의 무능한 수준이다. 먼저 정부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 우리나라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가해자 일본이나 제삼자인 국제사회에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근본적으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민간단체, 학계가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다. 점점 심해질 뿐이다. 일본은 역사 교과서에서 점점 더 많은 거짓을 가르치고 있으며 독도 영유권 주장은 민간, 지방정부를 거쳐 이제는 중앙정부까지 가세했다.


아마 일본은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독도 문제, 교과서 극우화 등 단골 아이템의 ‘약빨’이 떨어지면 색다른 ‘껀수’를 만들어 컴플렉스를 더욱 고착시킬 것이다. ‘포스트 독도’ 이후 일본의 새로운 ‘컴플렉스 은폐 아이템’ 은 무력 또는 경제 침략일 수 있다. 일본의 속성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래서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5) 일본의 한계

컴플렉스의 주요 인자는 열등감인데 일본이 가진 한국에 대한 역사 컴플렉스 역시 열등감에서 출발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억지로 부인하려는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은 미국, 중국과 더불어 세계경제의 빅쓰리이다. 중국이 급성장하기 전까지는 미국에 이어 부동의 2위로 보였다. 한국의 경제력은 일본에 비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큰 격차를 보였으며 일본경제를 추격할 가능성도 없어보였다. 그런데 일본이 20세기 후반부터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으로 헤매는 사이 중국이 2위로 올라섰고 한국과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한국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생겨났고 수십년 세계 1등을 구가하던 조선, 반도체 등 일부 분야에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한국에 넘겨주었다. 일본에서 볼 때 한국의 위협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중국에게 내준 세계2위의 아쉬움은 한국 컴플렉스를 더욱 자극할 것이다.


무력 지배보다는 경제적 지배가, 경제적 지배보다는 문화적 지배가 확실하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아시아의 절반 이상을 무력으로 지배했었다. 패전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자 현지에 남겨진 것은 원한 뿐, 일본에 유리한 점이라고 없었다.


집요한 일본인들은 그 대신 경제적 지배권을 넓혔다.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메이드인 재팬 상품을 앞세워 경제력을 키워나갔다.


그런데 문화적 지배는 어느 나라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인 스타에 지속적으로 열광하는 나라가 없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일본문화 자체에 추진력이 없기 때문이다. 즉 저력이 없다는 말이다. 일본은 창조적 능력보다 모방으로 성공한 나라인데, 모방은 모방일 뿐 무한한 증폭을 위한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한 것, 오리지날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문화는 잠깐 반짝했다가 조루증을 보이며 신나게 달리지만 연료 게이지는 ‘Empty'에 가까워진다. 문화를 앞세운 세계 진출은 그나마 일식요리 외에는 달리 힘줄 게 없는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풍부하게 갖고 있다.



(6) 대한(對韓) 컴플렉스의 전개

19세기 중엽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은 한국에 대해 심각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다. 석기시대 이래 수천년 동안 한국이 선진국임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팔만대장경을 달라고 애걸하고 도자기를 달라고 복걸하다가 양에 차지 않자 아예 전쟁을 일으켜 도공을 잡아갔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렇듯 한국 문물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다. 우리가 주지 않으면 쳐들어 와서 약탈했다. 고려시대 이전 우리의 유물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많다.


19세기말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뒤늦게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세계화를 이루었다. 유럽과 본격적으로 접촉한 일본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군국주의국가가 되었다. 봉건제와 사무라이정신에 익숙했던 일본이 중앙집권을 이루자 저들끼리 들이대던 총뿌리를 외국으로 돌렸다. 그리고 조선을 병합하려는 야망,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환상을 갖기 시작했다.


(7) 외과치료 메스만이 유일한 치료방안

일본인 스스로는 한국 컴플렉스를 결코 극복할 수 없고 점점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우리가 그 컴플렉스를 치료해줄 수 있다. 한국 컴플렉스 증후군은 환자 스스로 고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으므로 우리가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 그 방법은 우리가 일본보다 강해지는 것이다. 일본인 속성은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거만하다. 물론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거만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일본은 특히 심하다. 우리가 강해지면 저들 스스로 무릎 꿇고 잘못을 빌게 될 것이다. 미국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01.컴플렉스의 기원

 

한국과 중국, 일본 열도는 15,000년 전 마지막 빙하시대까지 육지로 연결되었다가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자 분리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대형 구석기 유적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데 일본은 구석기 유적이 별로 없다. 이런 점을 볼 때 일본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변방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건국신화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고대 일본의 역사서로 우리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해당한다. 이 두 책의 첫 부분은 천지창조로 시작된다. 많은 신의 이름이 나열되는 지루한 신대(神代)가 일본역사의 첫 부분이다. 그런데 이 지루하기만 한 신대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어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의 뿌리가 한국임이 밝혀진다.


그들 역사책 첫 부분. 천손이 강림하기 전 살던 천상세계 ‘고천원, 소시모리’는 한국에 있다. 소시모리는 현재 지명으로 우두산이다. 우두산은 여러 개 있는데 춘천에도 있다. 그래서 일본학자 중에 춘천이 일왕가의 고향이라는 황당한 가설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두산은 한국 남부에서 찾아야 하는데 느닷없이 춘천이라니! 일본학자들의 전형적인 속임수이다.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대화국이 백제 자체인 것을 감추고 백제의 문화를 수입했다고 은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사기를 보면 신대에 이어 천손(天孫) 니니기노미꼬토가 지금의 규수지방에 강림하면서 왈, “이곳은 한국(韓國)을 바라보고 있고 카사사의 곶과도 바로 통하여 있어 아침 해가 바로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다”라고 말한다.


최초로 나라의 터를 잡으면서 한국과 카사사라는 지명을 운운했다. 이 두 지명의 의미를 살피자.


첫째, 나라의 터를 잡으면서 첫 마디에 한국을 바라보고 있어 좋다고 한 것은 한국에서 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이 통일전망대에서 북쪽 고향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다. 실제로 고향 땅이 보이지 않아도 고향땅이 있는 방향을 동경하게 된다.


둘째, 카사사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황을 보면 한국을 떠난 곳 또는 일본에 상륙한 지점이다. 한국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열도에 발을 디딘 것이다. 지명이 일본어라고 해서 일본땅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일본서기는 곳곳에서 전혀 의미가 다른 한자를 똑같이 읽으면서 바꿔치기하여 사실을 은폐한다.


한(韓), 신(神), 당(唐)을 모두 ‘가라’로 읽으면서 韓을 神 또는 唐으로 바꾼다. 그렇게 되면 한국이 ‘신들의 나라’나 중국 당나라로 바뀐다. 그래서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이 신들의 나라에서 온 천손(天孫)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한국인이 일본으로 가지고 간 문물이 200년 후 건국한 당나라에서 수입한 것으로 원산지가 바뀐다. 일본의 학자들은 200년 후에 건국될 나라이름을 사용한 것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섬세하고 정확한 일본인들이 이런 간단한 논리적 허구를 당연시하는지 모르겠다.


당나라가 건국된 것은 7세기 초인데 일본 역사책은 5세기부터 당나라와 교류했다고 쓰고 있다. 일본 역사책 저자들은 대단한 점쟁이로 200년 후 건국될 이웃나라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학문은 탐구심과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법인데 이런 황당한 기록까지 사실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일본의 학자들이다. 그래서 고대한일관계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일본학자들은 양심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대 신화는 은유가 심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황당한 전설에 불과하지만 내면에 담긴 의미를 들여다보면 역사적 사실인 경우가 많다. 동아시아 고대건국신화는 두 가지 유형인데 천손설화와 난생설화이다. 일본의 천손강림설화는 한국 사람이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한 역사적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2) 신궁과 신사

일본에는 무수한 신궁과 신사가 있고 전국민이 찾아가서 온갖 신을 섬기는데 그것을 종교로 보아 ‘신도’라고 부른다.


이 신궁과 신사는 고대에 우리나라에 있었다. 우리나라 고대에 신사 중에서 격이 높은 왕실 신사를 신궁이라 부른 듯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9층 목탑이 있던 황룡사는 원래 신궁을 지으려다 절로 바뀌었다고 나와 있다. 우리나라는 유교사상이 삼국시대부터 뿌리내리면서 조상숭배의 폭이 좁아졌고 신사가 사당으로 바뀌었다.


일본에 오래된 신사에 섬기는 대상인 신체가 모셔져 있다. 신체는 신사의 기원과 관계있다. 그런데 유서 깊은 신사의 신체는 한국 인물이거나 한국에서 전래된 물건이다. 그것은 그 지역 최초의 큰인물이 한국사람이며 그를 기리기 위해 신사를 건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큰 인물이 어느 지역에 정착해서 살면 ‘입향조’또는 ‘중시조’라 하여 본관을 삼는다. 일본의 일부 신사에 모셔진 신체가 사람일 경우 우리의 입향조 역할을 한 인물이다.


(3) 일본 지배계층과 국왕

일본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것은 국왕이다. 일본은 세계에 유래가 없는 만세일계 왕조를 갖고 있다고 자랑한다. 유사 이래 왕조가 한번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기원전 660년 등극했다는 전설의 진무왕부터 시작해서 현재 아키히토왕까지 한 핏줄이다.


신화속의 진무왕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단군왕검이다. 일본 왕조의 역사는 5세기초부터 실재성이 나타난다. 그 이전의 족보는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3~4세기의 왕의 통치기록에서 신공(여)왕과 응신 두 왕의 섭정 운운하며 110년간, 그 다음 인덕왕의 87년 치세 등은 신화시대나 있을 법한 기록이다. 이런 것을 잘 아는 일본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4세기)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정하는 것은 고대 일본의 후진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일본학자들도 이 시기에 120년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더욱 이상한 점은 그 120년 동안 일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고 백제의 역사만 단편적으로 채워 넣었다. 필사본인 일본서기의 특징상 그 동안 많은 변조가 이루어졌을 것인데도 공백을 채워 넣을 자료가 없으니까 처음 기록자가 넣은 백제 기록을 바꾸지 못했다. 이런 점을 보면 일본서기는 변조되긴 했지만 꽤 순박한 책이다.


세계 어느나라 역사책도 무려 120년간이나 다른 나라 역사로 채워 넣은 예는 없을 것이다. 영국 역사에 120년간 프랑스 역사를 넣는다는 것이 상상이나 되겠는가! 우리나라 삼국사기 중간에 120년 동안 신라, 고구려, 백제 기록 없이 중국의 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만 써 놓았다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모양이다. 그걸 한점 틀림도 없는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본인들이다. 만약 일본학자가 이런 점에 대해 불합리성을 제기하다가는 일본 땅 안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게 되거나 비명횡사할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만계일가 그들 왕조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 때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돌아올 연료도 없이 폭탄만 싣고 날아가 미국 군함을 들이받던 가미가제가 생겨났던 것이다. 자살폭탄테러의 원조는 일본 가미가제이다.


언젠가 아키히토 국왕이 한국 대통령을 맞은 공식석상에서 자기의 조상이 한국인이었다고 밝혀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감무왕(781-806)의 생모가 한국인이었다는 내용인데 빙산의 일각이다.


4~6세기 일본서기를 보면 유력한 신하는 모두 한국출신이고 왕궁이나 절은 한국출신이 지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선진 문물이 한국에서 간 것이라고 나와 있다. 왜의 중심 기내지역은 ‘일본속의 한국’이었다. 그런데 왕이 “한국출신이다”란 말만 없다. 그래서 왕은 한국출신이 아니라 전설 속의 진무왕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마 학생들에게 일본서기를 주면서 그 당시 상황을 읽어보고 “왕은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문제를 낸다면 십중팔구 “한국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본서기 초기기록에서 왕의 출신지역을 감추기 시작한 것. 그것이 바로 한국 컴플렉스의 시작이었다.

 

 

02.일본의 독립과정

 

일본의 죠몽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 신석기 시대이고 야요이시대는 기원전후이다. 이 야요이시대에는 토기, 청동기, 철기가 한꺼번에 출토된다. 또한 5세기부터 갑자기 대형 고분이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고분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어 6세기말부터 백제문화가 아스카 지역에 대량유입되면서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아스카시대’에 접어든다. 이후 7세기 동아시아 전체에 대규모 국가적 충돌이 생기면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기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일본은 고분시대부터 역사의 실체성이 일부 드러나면서 고대국가의 모습을 보인다. 기록이나 유물로 볼 때 일본의 역사시대는 2~3세기부터 드러난다. 따라서 일본이 고대부터 한국보다 우월했다는 황국사관을 가진 일본학자들은 한국의 역사를 4세기 이후에 실체를 보인다고 주장하면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날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본은 앞으로도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1) 전방후원분

사학은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기록이 남지 않은 선사시대는 사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사료가 없다고 해서 역사를 파악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유적과 유물로 추정하게 되며 여기에 도움이 되는 학문은 고고학, 인류학 등이다.


유적, 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덤이다. 고대의 무덤은 단순히 사자(死者)를 묻는 게 아니다. 무덤은 신앙을 표현하는 결정체였으며 특히 귀족계층의 무덤은 생활할 때 모습을 재현했다. 북한의 고구려 무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는 당시의 주거, 음식, 복식 등 중요한 생활상을 뛰어난 기법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보존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무덤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보수성이다. 무덤의 형식은 먼 곳으로 이주해도 바뀌지 않고 상당기간 지속된다. 그래서 고대문화의 연결관계를 파악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묘제이다. 무덤의 축조방식, 벽화 등 장식, 매장방식, 매장물 등을 보면 상호관련성을 알 수 있다. 매장물 중에는 살아 생전 몇 대에 걸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소중한 물건도 있다.


5세기 전후 일본 왕가의 무덤은 전방후원분이다. 앞쪽은 네모 뒤쪽은 원형으로 통통한 열쇠구멍처럼 생겼다. 5~6세기에 걸쳐 축조됐던 전방후원분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인덕릉으로 (仁德, 서기 313~ 399으로 추정) 가장 긴 쪽의 길이가 486m로 이집트의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보다 크다. 앞쪽 길이가 300미터, 뒤쪽 원 직경은 245미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는 과거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최근 영산강과 한강에서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부, 특히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이 일본보다 축조시기가 늦다. 이부분은 일본인 학자의 연구결과가 지금까지 무작정 인용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의 전방후원분보다 한국의 전방후원분은 조잡한 형태이므로 모방한 것이라는 게 일본학자들의 주장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것은 초기형태이므로 조잡하고 일본 것은 이를 계승, 발전시켰기 때문에 크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방후원분이야말로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던 증거라고 주장하는 동안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과 서울 강동구 일대에 일본보다 빠른 전방후원분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지역은 백제와 마한이 있던 지역으로 이 지역 주민 중 일부가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묘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전방후원분이 과연 백제의 묘제인가 하는 점이다. 4세기부터 축조된 부여, 능산리 등 백제 고분은 적석총인데 그 이전 백제의 무덤형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4세기 이전 백제가 한강유역에 있던 시절의 묘제를 밝히는 것이 핵심이며, 기록이 부실한 마한의 실체가 이와 관련 있다. 전방후원분은 옹관묘와 함께 마한계열의 여러 고유묘제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한다.


(2) 왜국여왕 비미호와 신공왕후

기원전후 일본열도, 야요이시대는 발전된 형태의 토기 하니와와 청동기, 철기가 한꺼번에 출토된다.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순서로 발전돼 왔는데 유독 일본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가 거의 연이어 나타나면서 혼재되었다. 외부 문명이 단 기간에 유입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야요이시대 말기인 2~3세기에 초기 국가 형태를 갖춘 세력이 나타나 중국과 접촉했다가 사라졌는데 명칭은 야마도국(邪馬臺國)이다. 규슈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이는 야마도의 초기 역사는 분명하지 않으며 마지막왕은 여왕 비미호로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 이름을 남겼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가 이 비미호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일본은 신공왕후가 실존인물이고 비미호는 알 수 없다고 발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대 한국사가 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히 신공왕후가 4세기에 한국 남부를 정벌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개설자라고 주장하기 위한 술책이다. 2~3세기의 비미호와 4세기의 신공왕후가 같은 인물이라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던 비미호 사후 야마도는 곧 멸망(260년 이전)했고 이후 약 120년간 왕조가 단절되는데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신공왕후 전후의 왕력을 잡아 늘려 채워 넣고 역사적 사실은 백제기사로 채워 넣었다. 신공 전후에 비상식적으로 오래 재위한 왕들이 연이어 나타난 점은 조작임이 분명하다. 전쟁이 빈번했던 그 시절에 한 왕조의 왕이 서너 명이 계속해서 50~60년 이상 재위했던 사례는 전 세계에 없을 것이다.


(3) 일본에서 실재했음이 확실한 응신왕

한중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던 일본열도의 왕이 다시 등장한 건 4세기 말 응신왕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고분시대인데 갑자기 기내지역(오오사카)에 엄청난 크기의 고분이 나타났다. 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갑자기 점프하는 게 고대 일본열도의 특징이다. 청동기, 철기, 야마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외부에서 단기간에 문명이 들어간 게 아니라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일본왕조의 창시자는 기원전 660년 진무왕이 아니라 서기 4세기말 응신왕이다. 그래서 그나마 양심이 있는 일본학자들도 실재가 확실한 왕은 응신부터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이 응신왕의 재위년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앞의 신공왕후 전후로 120년이나 왕력을 잡아 늘렸기 때문이다.


이 응신왕 역시 다른 일본왕과 마찬가지로 한민족 핏줄인데 마한 또는 백제계로 보인다. 일본왕의 행적을 보면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가 뒤섞여 있는데 응신왕부터는 백제 색채가 강하다.


(4) 백제계의 등장과 대화국 탄생

응신 이후 아스카(오오사카 내륙 방향) 지역은 일본열도의 중심으로 급속도로 부상했다. 백제왕실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서적, 불교, 기술자들이 대거 파견되어 궁궐과 절을 지었다. 일본 원주민들에게는 불상, 서적, 말, 매, 기와집 등 처음 보는 최신 문물이 속속 등장했다. 정치할 능력이 없으니까 백제 관료까지 파견되었다. 특히 동성왕과 무령왕 같은 왕자들은 일본에 머물다가 백제로 복귀하여 왕위를 이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 시기에 정국을 주도한 가문은 소아(蘇我)씨이다. 536년~645년, 110년간 4대에 걸쳐 왜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의 권력은 왕을 능가하여 왕을 마음대로 갈아 치웠다. 백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소아씨는 백제의 문물이 일본에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편 5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공격에 밀리던 백제는 마침내 475년 수도 한성 전투에서 개로왕이 사로잡혀 죽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반란이 일어나고 여러 왕이 살해당하는 등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


5세기는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반면에 왜국은 백제계가 국정을 잡으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 정점에 소아씨의 독재가 있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라계가 주도한 대화개신(646)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라계 집권은 몇년만에 끝났고 백제계가 다시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660년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이때 일본서기에 왜국 관료들이 돌아갈 고향이 없어졌다고 개탄했다고 기록한 것만 봐도 왜국의 실체가 백제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왜국에서는 반대를 무릅쓰고 백제 구원군을 돕기 위해 3만 구원군이 출병했지만 663년 백촌강(금강 하구) 전투에서 패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비로소 왜국은 백제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변신했으며 670년 일본이라는 국호를 정했고 함량 미달의 역사책 ‘일본서기’를 급조해 나름대로 정통성 확보를 꾀했다.


(5) 종합

종합적으로 보건대 일본열도는 4세기까지 왕의 실체조차 불분명한 씨족, 부족 중심의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 등 각지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우리 선조들은 선진 문물로 일본 원주민을 몰아내고 세력집단을 형성했고 차츰 주변지역을 통합하면서 세력이 커졌다. 그들은 신사를 건립해 정신적 구심점을 삼았으며 그 지역의 중심이 된 사람이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 물건을 신체로 모셨다.


4세기 이전에는 이 땅에서 가장 먼저 밀려난 가야계 세력이 일본열도 각지에서 기반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4세기말 고구려 광개토대왕 등장 이후에는 백제계 세력이 대거 섬으로 건너가 기내(오오사카)와 아스카 지역에 집중 거주하며 강력하게 성장하다가 백제 멸망 이후 독자 노선을 걷게 되면서 국가의 모체가 되었다.


일본이란 독립국을 건설한 대화조정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일본열도 침공을 두려워하여 대마도, 후쿠오카 등 고대 한일 주요 교통로에 산성을 쌓아 대비하는 등 이전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독자정책을 취했다.


일본서기는 말미에 기록한 대로 백제의 사서를 기본으로 편찬했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각 지역 유력집단의 족보를 꿰맞추어 ‘만세일가’로 일컬어지는 일본국왕의 연보를 창작했다. 그 과정에서 전혀 관계없는 집단의 수장들이 아버지와 아들로 조작되어 왕통을 이은 것으로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건너간 선조들이 이 땅에 살 때 기록한 집단간의 전쟁을 그대로 실으면서, 주체를 바꾸어 마치 일본열도에서 이 땅으로 건너와 전쟁을 한 것처럼 썼다. 이런 태도가 바로 역사왜곡의 시작이고 한국 컴플렉스의 원초적 형태였다.

 

 

03.왜구의 클라이막스 토요토미히데요시

 

왜구(倭寇)란 일본열도를 근거로 활동한 도둑떼를 말한다. 작게는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우리나라 남부지역을 약탈했는가 하면 정규군 편제로 무장한 수천 명 이상 군대를 이루기도 했다. 일부는 동지나해와 황해를 건너 중국 해안까지 약탈하여 중국도 이들에게 시달렸다.


우리나라에 대한 왜구의 침략기록은 신라시조 박혁거세 8년(기원전 50년)부터이니 그 뿌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있다. 왜구의 형태는 집단의 속성과 규모로 보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타당할 듯하다.


첫째는 기원전후부터 6세기까지 일본열도에 제대로 된 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각 지역에 할거했던 집단이다. 이들은 쌀 등 기초 생필품을 약탈하기 위해 작은 규모로 우리나라 남해안에 출몰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마도가 이들의 근거지였다. 조선시대 대마도는 일본에 속해 있으면서도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일본의 정세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곤 했다. 세종대왕은 대마도 왜구를 정벌하고 남해안 침략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쌀을 매년 주는 유화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대마도는 산세가 험하고 평지가 적어 식량 자급이 불가능하다. 대마도 백성들은 유사 이래 1945년까지 약탈이든 구매든 원조든 공출이든 ‘한국산 쌀’로 연명했다.


둘째는 7세기 이후 독립국 일본이 등장한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했을 때 수백에서 수천 명 군대가 우리나라 남부지역을 약탈한 형태이다. 이때의 약탈물은 생필품뿐만 아니라 서적, 도자기, 기술자 등 다양했으며 국보급 문화재를 대량으로 약탈한 것도 이들이다. 대략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까지 이런 성격의 왜구가 출몰했다.


이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우리 측에서 보면 가장 피해가 컸던 때는 고려말 원나라 간섭기였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 3대에 걸친 고려 왕들의 교체과정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가 원나라 세력을 업은 아버지가 다시 왕이 되고 아들이 쫓겨나는 등 도저히 독립국다운 면모를 보이지 못했다.


왕이 이 모양들이니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지역의 치안은 팽개쳐 두었고 왜구의 활동무대가 되고 말았다. 이 무렵 왜구는 남해안뿐만 아니라 서해안을 통해 고려의 수도 개경 턱밑인 강화도, 예성강 하구까지 출몰했다. 이성계가 실력자로 부상한 계기는 아기발도가 이끄는 왜군을 남원 인근 황산에서 물리친 싸움이었다.


셋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이다. 히데요시는 잘 알다시피 16세기말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다음,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했는데 근본적으로 왜구의 행태를 보였다. 최신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육해군 정규군이었지만 약탈이라는 왜구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임진왜란 때 약탈은 장기간 동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은 왜군이 승승장구 북상하다가 명나라 원군에게 패전하여 후퇴할 때인 초기 몇 개월간까지는 전쟁의 속도가 빨랐다. 명군의 개입으로 지구전 형태로 바뀐 이후 히데요시 사망 시까지 대부분의 전쟁기간은 조선 각지에 머물면서 사람과 문화재를 약탈했다.


히데요시는 한일관계사 관점에서 볼 때에 역사적 흐름에서 벗어난 전쟁광이다. 내가 히데요시를 왜구로 보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왜구와 똑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규모가 크고 장기적이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이었다. 임진왜란에 몰려든 최대 규모의 왜구, 일본 전국시대의 찌거기 무력집단은 두목격인 그의 명령을 따르던 강도떼였다.


만약 그들의 실체가 왜구가 아니라 해외정벌을 위한 군대였다면 명나라 군대와 전면전을 벌였을 것이다. 청나라에 발목이 잡혀 소극적으로 출병한 명군이 주춤하자, 왜군도 협상을 내세워 지구전을 벌이면서 조선 전국토를 약탈했다. 그들은 사실상 조선을 점령할 의지도 명나라를 쳐들어갈 의지도 없었으며 장기간 해외에 주둔하면서 왜성을 쌓고 일대를 약탈하는데 만족했다가 두목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내전상태에 돌입했다.


물론 히데요시가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면서까지 조선땅 각지에 웅거한 왜군을 일본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이유는, 자기에게 위협만 되는 군대를 조선 땅에서 소멸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04.대항해시대의 일본과 임진왜란

 

15~16세기에 걸친 ‘대항해 시대’는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이 앞 다투어 세계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기였다. 인도, 인도차이나 지역의 여러 나라가 이때 식민지로 몰락했고 특히 포르투갈은 중국 남부 마카오까지 진출했다. 대항해 시대의 아시아에는 이들 제국주의 나라의 선교사가 먼저 발을 디디면, 뒤이어 총으로 무장한 군대가 들이닥쳐 수탈기지를 삼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일본이 최초로 서양과 접촉한 것은 바로 이때이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나가사키에 상륙했고 일부 영주들이 선교를 허락하여 서양 문물이 일부 일본에 유입되었다. 일본에 ‘카스텔라’, ‘빵’ 등의 단어가 생긴 게 바로 이때이다. 당시 봉건영주들이 세력을 나눠 갖고 있던 일본에 총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영화 ‘가케무사’로 유명한 일본의 軍神 다케다 신겐은 뛰어난 기병과 보병전략을 구사하여 일본의 절대강자로 부상했었다. 세력이 미약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16세기 중엽 대규모 소총부대를 육성하여 단번에 다케다 가문을 제압하고 패자로 등장했다가 요절했고, 그의 부하 풍신수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다.


히데요시는 통일 후 필요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위협만 되는 군대를 없앨 묘안을 찾았으니 임진왜란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가도입명(假道入明, 명나라를 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 구호를 앞세워 15만 왜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전국시대의 전투경험이 풍부한 왜군은 큰 어려움 없이 보름 뒤 충주를 점령했고 5월 2일 불타는 한양에 무혈입성했다.


나라를 지켜야할 만백성의 어버이 선조가 야밤에 비를 맞으며 도망가자 성난 백성들이 왕이 살던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이후 경복궁은 폐허로 남아 있다가 약 300년 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한편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다소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저들의 전투습성대로라면 왕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한양성에서 왜군과 결사항전 해야 했고 왜군이 승리한 다음에는 왕 이하 조선군 수뇌부가 자결하는 순서로 전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왕이 미리 도망쳐버렸으니 다소 맥 빠진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군은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평양까지 진군했다가 명나라 지원군에게 패전하여 한양으로 후퇴했다. 전쟁초기 약 6개월간은 왜군의 일방적 우세로 진행되다가 이후 조선 수군과 육군의 반격과 의병의 활약, 명나라 지원군 등으로 교착상태에 접어들자 왜군은 각지에 성을 쌓고 웅거하며 대치상태를 유지했다.


1597년 군세를 정비한 왜군이 다시 공세를 강화했다가(정유재란) 곧 교착상태에 접어들었고 이듬해인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투양상은 왜군과 명군의 협상국면이었다. 우리나라는 왜군과 명군 양쪽에 짓밟히고 약탈당하는 이중의 곤역을 치렀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사당이 우리나라 곳곳에 건립된 것도 이때였다.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하여 7년이나 별 전과 없이 놀고먹는 동안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청나라가 급성장하여 결국 중원을 차지했고 명나라를 지지하던 조선을 두 차례(1627 정묘호란, 1636 병자호란)에 걸쳐 침략하여 결국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고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 과정을 보면 대항해시대 이후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동시에 임진왜란을 일으켜 중국의 명청 왕조교체를 가속시켰다. 역사는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에서 철군한 다음 왜에는 다시 전쟁 분위기가 감돌았다. 히데요시가 죽자 다시 영주들이 고개를 든 것이다. 이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단숨에 히데요시 추종자 무리를 제압하고 일본열도를 지배하면서 에도막부를 개설한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온건파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부하가 된 척 엎드려 있다가 기회가 오자 패권을 잡았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국왕의 힘이 미약했고 군사정권인 막부가 다스렸다.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자 바로 조선과 화해하여 포로를 교환하는 등 조일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를 보면 임진왜란은 히데요시가 일으킨 돌발행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을 문화적 상국으로 받들던 일본은 이때 기술자와 문화재를 대량으로 약탈하여 일본화했고 조선이나 중국보다 서양 문물로 개화하는데 힘쓰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종착지는 일본이었고, 식민지화한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일본은 독립을 유지하며 근대화의 기초를 쌓기 시작했다.

 

 

05.명치유신과 컴플렉스의 대두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일본은 이미 서양과 접촉하긴 했지만 제한적이었다. 즉 정권을 잡고 있던 무인정권 에도막부가 일부 지방정권이 서양과 접촉하는 것을 묵인한 것이지 공식적으로 개항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중국이나 조선과의 교류에 의지했다.


한편 19세기 초 중국의 개항과정에서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1839~41)에서 패전하는 등 서구열강에게 잇달아 굴복하자 일본 내부에서는 서구 열강과 교류해야한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따라서 일본 사회는 전통적인 쇄국정책과 서구와 새로운 교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수구파 에도막부는 쇄국정책에 중심을 두었으며 이에 반대하는 개혁파 지방세력들은 왕정제 회복을 주장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향한 첫걸음은 미국 페리제독의 개항요구에 응한 것이다.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소지한 페리제독은 1853년 7월 6일 3,500톤급 증기선을 기함으로 한 4척의 통상사절단을 이끌고 도쿄만에 출현하여 개항을 요구했다. 논란 끝에 일본은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접수했으며 이듬해 8척의 함선을 이끌고 다시 나타난 페리제독과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체결하여 하코다테와 시모다를 개항했고 1854년은 일본이 쇄국을 포기한 근대 일본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15년간 일본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으니, 지방 실력자를 중심으로 왕정회복과 개항을 주장하는 측과 막부를 중심으로 쇄국을 주장하는 측의 정변이 연이어 일어나 거의 내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막부를 반대하는 측의 힘이 거세지자 1867년 일본국왕은 막부 타도를 은밀히 지시했고 막부정치의 종말을 고했다.


이듬해인 1868년 일본엔 근대적 의미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어 여러가지 개혁조치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를 당시 왕 메이지(明治)의 이름을 따서 메이지 유신이라고 한다. 주요내용은 중앙집권제로 전환, 징병제도, 조세정비, 화폐개혁이었다. 일부 계층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무사들의 반란과 농민반란이 있어났는데 1880년대를 지나면서 메이지 유신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1885년 내각제도 창설, 1889년 헌법 공포, 1890년 첫 의회 소집 등 일본은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적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져 1872년 철도부설, 1882년 은행제도 도입 등과 함께 근대식 교육제도, 군사제도 등 전반적인 사회변화가 뒤따랐고, 짧은 기간에 근대국가로서의 힘을 축적하여 서구 국가와 대등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를 흉내 낸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고 정치에 개입하여 식민지화를 꾀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청나라 일부지역에 군사적, 정치적 거점까지 마련할 뻔했으나 러시아 등의 ‘3국간섭’에 굴복하여 후퇴의 분루를 삼켜야 했다.


국제질서와 한계를 깨달은 일본은 1902년 당시 세계 최강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어 서구에 파트너를 확보한 후 러일전쟁(1904~1905)을 일으켜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근대 세계사의 이변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10년 조선을 합병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확보했다는 것은 단순한 이웃나라 합병이란 의미를 넘어 국제사회에 제국주의 일본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은 메이지 유신이었다. 크게 보면 메이지 유신은 1868년부터 메이지왕이 죽은 1912년까지로 본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면에서 근대국가로 탈바꿈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협상이라는 두 가지 카드로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세계열강으로 도약한 계기인 메이지 유신은 한일관계를 왜곡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불과 40여년만에 근대화를 이루고 세계열강으로 도약한 일본으로서는 그 이전까지 내심 선진국으로 여기던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조선을 열등하게 여길 수 있는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한국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게 만들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고대에 한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를 조작한 이른바 ‘황국사관’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크게 왜곡되기 시작했고, 잘못된 선택을 연이어 하게 되었다.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바로 이 연장선에 있으며 앞으로 한일 양국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지난 150년 동안 4~5세대에 걸쳐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시켜왔으며 이것이 안타깝게도 일본인의 유전자 속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한때 자기들이 지배했던 한민족을 영원히 열등하게 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06.역사왜곡

 

19세기말 메이지 유신에 뿌리를 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컴플렉스는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 기원은 일본의 고대역사책 일본서기에 둔다.


신화시대부터 7세기말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에 비해 부실하여 역사책이 아니란 비판까지 받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18세기 중엽까지 모두 필사본이었는데 여러 가지 일본서기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 기간에 변조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네 역사는 거의 200년간 누락되는가 하면 일본과 관계없는 백제기록만 옮겨 썼고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적고 있다. 예를 들어 백제 성왕은 552년 관산성에서 신라와 전투에서 죽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왕이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그것을 참고하면 관산성 전투를 한편의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이다.


한 나라의 역사책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일본서기를 근거로 고대에 한국을 지배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즉, 고대 가야 연맹체간의 싸움을 일본서기에 그대로 옮겼다.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지명을 우리나라 남부 전역으로 비정한 다음, 고대 우리나라가 일본 왕가의 직할지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이다. 낙동강 하구의 한 지점에 불과한 임나를 우리나라 남부 전역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더구나 임나 자체도 일본땅이 아닌데도 말이다. 일본이라는 국호도 670년에 생겼고...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란 명칭 갖고 고민한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례를 보고 ‘일본기’ 또는 ‘일본서’가 맞다느니 아니니 하면서 왜 ‘일본서기’라고 했는지 의아해 한다. 나는 여기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리고자 한다. 백제의 역사책이 있었는데 고흥의 ‘서기’였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자들은 백제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학자들 또는 그들의 2세로 보인다. 백제의 역사책이 ‘서기’이고 일본에 대한 역사니까 ‘일본서기’라고 붙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일본서기의 저술 목적은 일본에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면서 필요한 국가적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역사서도 필요하니까 급조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족보, 신사, 유적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고대 일본에는 우리의 선조가 상당수 건너갔다. 그중 일부 집단은 전설이나 신화를 갖고 있었고 나름대로 가계를 기록한 사료가 있었을 것이다. 저들의 책에 써있는 대로 당시 존재했던 ‘백제3서’를 근간으로 각종 사료를 모아서 일본 고유의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 가야와 백제의 기록을 군데군데 인용하면서 만든 책이 일본서기이다.


그러다 보니 일관성이 없고 선후 관계가 뒤바뀌어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려 200년간 공백을 왕 이름만 몇 사람 나열해서 단절을 은폐했다. 왕조의 기록을 유심히 보면 이곳 저곳에 있던 유력한 지배자를 모아서 시대를 부여하고 배열해서 단일 왕조처럼 만들었다. 왕이 죽었는데 후임으로 수백리 떨어진, 교류가 전혀 없었으며, 아무 관련이 없는 지역에 살던 전 왕의 몇번째 왕자가 등극했다는 식이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도 있다. 왕의 출신 지역이 북구주, 기내, 전혀 관계없는 제3의 장소로 왔다갔다한다. 고대 왕위계승의 일반적 현상과 당시 일본열도의 사정을 알고 나면 말도 안 된다. 중학생 정도의 판단력만 있어도 알 수 있다.


일본서기를 읽을 때는 주체를 바꾸는 요령이 필요하다. 책 전체의 주체가 왜, 일본(Japan)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가야’나 ‘백제’로 바꾸어 생각하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빠진 사건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책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무 사전지식 없이 일본서기를 보면 울분을 자아낼 수 있다. 너무 황당한 내용과 용어가 많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조공을 바쳤다’, ‘신라왕이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누구누구를 백제왕에 봉했다’는 식의 표현이 수시로 나온다. 우리 고대국가들이 일본에 의식주에 관계된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법, 학문, 종교를 가르쳐주었다고 기록하면서 동시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지.


일본서기를 읽을 때는 수면에 있는 기름을 걷어내듯이 황당한 기사를 빼 내면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당시의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일본서기만 읽으면 일본은 고대부터 대단한 나라로 비치게 된다. 불행하게도 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일본을 먼저 연구했기 때문에 일본서기류의 시각이 굳어져 있다. 그래서 서구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지도에 기록하고, 독도는 일본땅인데 우리가 ‘침략군’을 보내서 강점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일본서기는 때로는 순박해 보인다. ‘아이들 그림조각 맞추기’ 식으로 사건에 시기를 부여하면서 꿰어 맞추었다. 전후 사정을 잘 알고 황당한 거짓을 들추고 나면 진실이 비교적 많은 책이다. 전체적으로는 부실하지만 부분적으로 보면 꽤 정확해 보이는 것이 많다. 그래서 사료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문제는 이후 개찬 과정과 학자들의 해석이 엉뚱하다는데 있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사례 하나만 보자. 일본의 건국설화 神代(신대)에는 지루하고 복잡한 신 이름을 많이 거론하면서 양신과 음신이 8명의 자식을 낳는 부분이 있는데 그 자식들의 이름은 일본 주요지역에 따라 붙여졌다. 그 첫 번째 자식의 이름이 淡路(담로)이다. 큰 다른 섬을 두고 ‘담로’(섬이름임)를 첫 번째로 꼽은 것은 ‘담로도’가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로는 백제가 해외에 파견한 제후의 칭호인 것이다. 그래서 ‘담로’를 ‘다무로’라는 일반적 발음이 아닌 엉뚱한 발음(‘아와지’로 기억한다)으로 바꾸어 버렸다.


무령왕릉의 발굴처럼 우리나라의 고대 유적을 발굴하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입증된다. 또한 이름 없는 고분에서 고대의 유물이 출토된다고 해서 사기의 기록이 허황된 것으로 바뀌지 않으며 도리의 빠진 부분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된다. 그런데 일본의 고분을 발굴하면 일본서기의 기록뿐만 아니라 이미 연구되어 있는 일본 고대사 전체가 모두 이상해진다. 다까마스총은 발굴하다가 고구려 벽화가 나오자 황급히 덮어버리고 공개하지 않았다.


저들의 기록에 따르면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 당시 왕이 있던 지역보다 큰 세력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만큼 큰 집단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특유의 단합정신으로 입을 닫아버린다. 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후벼파는 일본인들인데도!

 

 

07.구석기 유물 조작

 

1970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고고학적 연구와 발굴이 본격화되자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거주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과거에 상동, 석장리 등 일부 지역에서만 발굴되었던 구석기 유적이, 경기도 연천, 충북 제천, 단양 등에서 계속 발굴되면서 우리나라는 70만년전부터 인류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임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또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대규모 주거지가 속속 발굴되면서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에서 최근에 발견되는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은 일본의 초조감을 불러왔다. 즉 한국에는 구석기 시대 유적이 미미하고 신석기 문화도 발달하지 않았으며 청동기시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일본의 주장이 뒤집어진 것이다. 한국의 선사시대 유물은 일본으로부터 전파되었다는 이른바 ‘남방전래설’이 허구임이 드러났다.


이에 조급해진 일본은 세계 고고학계에 유례없는 국가적 사기극을 연출했다. 1970년대부터 후지무라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석기를 만들어 몰래 묻은 다음 발굴했다. 일본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고 교과서에 기술했다. 일본 내에서조차 후지무라의 구석기 유적발굴을 의심하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묵살 당했다.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지방자치단체는 앞 다투어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후지무라는 4만년전 구석기를 발견하더니 20만년, 40만년, 70만년 전 구석기 유적을 수십 곳에서 계속해서 발굴했고 그가 관여한 고고학 발굴이 130여건에 달했다. 그의 손은 파기만 하면 구석기 유물이 나오는 신의 손이었다. 일본의 역사 및 고고학계는 흥분했다. 구석기 시대가 한국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니 저들의 숙원사업이 달성된 것이다. 일본의 구석기 시대가 70만년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논문발표가 이어졌다.


그런데 2000년 마이니찌 신문은 후지무라의 구석기 유적 발굴이 자작극임을 밝혀냈다. 후지무라의 발굴이 고고학적 상식에 맞지 않고 그가 발굴한 것 이외에는 그 인근에서 구석기 유물이 전혀 발굴되지 않는 것을 수상하게 여기고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는데 후지무라가 가짜 석기를 묻는 모습이 촬영된 것이다.


후지무라는 처음에 한군데만 자기가 묻었고 나머지는 출토한 것이라고 말했다가 이어지는 추궁에 마침내 자기의 모든 발굴이 자작극이었다고 실토했다. 후지무라 발굴 이후 30년간 이뤄진 학술적 연구는 한 순간에 날아갔다. 그리고 이 같은 일본의 자작극은 국제 고고학계의 조롱을 받는 치명적 상처가 되고 말았다.


그는 석기가 나오는 꿈을 꾼 후에 그곳을 파보았더니 진짜로 석기가 나왔다고 황당한 발언을 하기도 했고, 사기극이 탄로 난 후에는 주위에서 더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었으면 좋겠다고 주문하여 그렇게 행동했으며 자기의 발굴로 사람들이 즐거워하길 원했기 때문에 자작극을 벌였다는 등 도저히 상식을 갖추지 못한 인간의 면모를 보였다. 그동안 의혹을 묵살하고 국가 사적 지정, 교과서 기술 등을 서슴없이 해온 일본정부가 세계 고고학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또한 2001년 7월에는 1950년대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가 발견한 구석기시대 인골도 사기임이 드러났다. 30만 년 전의 뼈로 추정돼 '구즈 원인(葛生原人)'으로 명명하여 일본인의 기원을 구석기 시대로 끌어올린 대발견이었다. 교과서에는 구석기 시대 인골 출토지를 기술했다. 그러나 그가 발굴한 8점의 유골을 분석한 결과 동물의 뼈와 15세기의 인골로 판명됐다.


이외에도 구석기인 뼈를 발굴한 벳푸대학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의 발굴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일본 전체가 추가 확인을 하지 않고 그대로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일본 학계는 이와 같은 날조 사건이 개인적인 실수라며 국가 사적을 취소하고 교과서 내용을 고치는 것으로 무마했다. 고고학계에서 가끔 가짜 발굴사건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일본처럼 아무 검증절차 없이, 의혹을 무시하면서 국가적으로 유적을 인정한 사례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그것은 일본이 갖고 있는 한국 컴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사례라고 모든 일본학계가 흥분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후지무라의 사기극이 탄로 난 후에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대응하는 방식을 보아도 학술적 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의 특성을 쉽게 살필 수 있다. 후지무라 발굴에는 대대적인 지원을 했다가 허구임이 밝혀지자 재검증을 한 곳이 단 한군데에 불과했다. 밝혀진 증거는 후지무라가 실수했다고 실토한 것밖에 없다며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선사유적이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해도 믿지 않을 만큼 불신이 커졌다. 한국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벌인 국가적 사기극. 그 예가 없는 국가적 역사조작으로 세계적 불신을 자초한 일본이 앞으로 또 어떤 악수, 자충수를 둘 것인지 지켜보자.

 

 

08.동해와 독도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공식화되고 있다. 이는 겉으로는 영토분쟁을 일으키려는 정치적 이슈로 보이지만 근저에는 한국 컴플렉스가 깔려 있다.


독도영유권 주장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극우단체가 주장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확산되다가 지방정부를 거쳐 정부 일부 관료도 합세하더니 급기야 일본 정부의 공식입장화 되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우리 정부가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지방정부 수준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다가 보수적인 이명박 정부 들어 일부 교과서에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이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일본정부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확고하지 않았다면 그런 교과서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웃 나라와 영토분쟁을 야기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넣을 수는 없으므로 당연히 일본정부가 제지했어야 한다.


일본은 경제가 위축되거나 집권당의 인기가 떨어질 때마다 독도영유권을 주장하여 낡은 애국심에 의존하여 인기를 만회하는 것이 상습 수법이다. 일본의 한 지방 정부가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고시했다면서 영토라고 주장했는 것은 일본 경제가 극도로 침체되었던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으로 일본 경제가 전후 최악상황에 놓였을 때였다.


최근 일본의 한 게임회사가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에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하여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바 있다. 그 게임회사는 게임의 시대적 배경인 중세 유럽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대로 했다며 일본해로 바꾸라는 요구에 불응했는데 전형적인 일본인 태도에서 벗어나는 사례도 가끔 있는 듯하다.


일본 정부가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때는 대개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였다. 집권당이나 수상의 지지도가 하락할 때 이의 돌파구로 낡은 애국심에 호소하고자 독도 카드를 꺼내곤 했다. 이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여론이 좋지 않을 때마다 “북한군이 휴전선에 집결했다”는 등 상투적인 위기감을 조성하여 여론을 억누르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문제는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기만 했지 역사적 타당성이나 한국 정부와 대화를 하려는 시도조차 없는 일본 정부의 태도이다. 일본 국민들이 은연 중 독도는 자기네 것인데 한국이 강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구나 일부이긴 하지만 교과서에까지 그렇게 기술했으므로 후세의 일본인들은 독도가 일본 것이라고 세뇌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가끔 일본 대사를 소환하여 항의하는 게 전부이다. 물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일본에 대고 강조할 필요는 없다. 당연히 우리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국민들이 독도에 군대를 보내자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절대 곤란하다. 군대를 보내면 외국에서 국경분쟁지역으로 오인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경찰이 지키게 하는 것이 낫다. 우리 땅이므로 군대가 아니라 경찰이 지키는 게 논리에 맞다.


다만 국제사회에는 독도가 우리 땅이고 동해는 동해임을 적극 홍보할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국제사회에서는 일본측 주장이 더 강하게 퍼져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위상을 정립한 것은 불과 30~40년밖에 안됐다. 그러나 일본은 16세기부터 서구에 진출하여 국제활동을 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는 일본이며 빈센트 반 고흐는 일본풍 그림을 그렸다. 또한 헐리우드 영화에 일본은 자주 등장한다. 지금이라도 국제적 홍보에 적극 나서서 한국을 좀더 어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09.일본인의 두 얼굴

 

연예계 스타가 이끄는 한류붐에 힘입어 일본인들이 한국을 점점 우호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과거 세대의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 우호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점은 한일 양국을 위해서 분명히 긍정적인 점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영원히 경계해야 할 불편한 이웃이다. 한일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뀌는 것은 양 국민이 근본적으로 상대국에 대한 이해심이 높아져서가 아니라 국민소득 증대에 따른 물질주의 팽배로 근본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현상 때문이다. 즉 정신적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이 물질주의에 파묻혀 완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일시적인 현상이 걷히고 나면 그 본질은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적인 일본인’은 양심적이지만 ‘집단적인 일본인’은 비양심적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학자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본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공식석상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부모가 한국사람임이 뻔한데도 그 아들인 국왕은 정통 일본인이 아니라는 식이다. 한자해석에 능통한 일본 학자에게 “일본문화의 원류는 한국이다”라는 내용의 한자 고문서를 해석하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발뺌한다.


물론 선진국일수록 개인은 문화시민이지만 집단은 제국주의적, 침략국가적 성격을 띠긴 한다. 개인인 미국인은 외국 장애 어린이를 입양해서 훌륭하게 키운다. 그러나 그런 개인들이 모인 패권국가 미국시민은 주권국을 함부로 침략하여 무고한 타 국민을 재미삼아 살상하는 군인으로 바뀐다. 일본도 선진국이므로 개인과 집단이 정반대의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본인은 근본적으로 서구 선진국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양심이 없다는 점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침략했던 나라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했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까지도 정신대 문제를 부인하고 있는데 심지어 미국에서 이를 문제삼기도 했다. 얼마 전 정신대 할머니 배상금을 60년전 금액 그대로 95엔으로 결정하여 국제적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 문제가 아닌 학문적 태도에까지 비양심적인 경우는 일본인 외에 없는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구석기 유적 조작사건에 대한 일본의 태도이다. 구석기 유적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하고 교과서에 기술하는 등 극성을 부렸는데, 막상 거짓임이 드러나자 처벌이나 시정은 커녕 아쉬운 듯 유야무야 처리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인사가 수상 등 관료가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예를 들어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땅이었음을 고증하여 발표한 일본 학자가 있다고 치자. 그가 교육관련부서 장관이 된 다음 교과서 왜곡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는가? 전혀 아니다. 도리어 극우경향으로 치닫는 일본의 현재상태를 볼 때 더 악화될 것이 뻔하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의견을 발표할 때는 그나마 학자적 양심이 있지만 일본정부의 구성원이 되고 나면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일본인 특유의 집단정신이 발휘되어 그 이전까지 주장했던 자기의 학설은 폐기할 것이다.


불과 20년전만 해도 한국이 세계2위의 경제대국 일본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우리가 10걸음 나가며 답보상태에 있던 서구의 주목을 받을 때 일본은 20걸음 앞서 나갔다. IMF는 그나마 희미하던 한국의 추격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게한 치유불가의 치명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순식간에 재기했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산업, 제품이 속속 등장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이후 탄력이 크게 떨어져 한국의 추격이 현실적인 위협이 되었다. 삼성전자 한 기업이 내는 이익이 일본 전자업계 상위 10걸 전체 기업의 이익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일본의 한국 컴플렉스는 이전보다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이다. 일본인들이 위기감을 가지면 가질수록 컴플렉스가 커질 것이다. 교과서 왜곡, 구석기 유적조작, 독도영유권 주장 등은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진 컴플렉스를 보여주고 있다.

 

 

10.한국의 일본 컴플렉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반면에 한국은 일본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


일본의 한국 컴플렉스는 유사 이래 19세기 중엽 메이지유신까지 한국이 그들의 문화적 젖줄이었음을 부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만세일가라고 주장하는 일본왕가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며 한국에서 건너간 우리의 조상들이 오늘날 일본 역사의 줄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감추는 것이 컴플렉스의 본질이다.


한국의 일본 컴플렉스는 이상과 같은 일본의 한국 컴플렉스에 대한 반작용과 20세기 초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복합된 것이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연로한 분들은 일본인을 ‘쪽바리’라고 서슴없이 일컬으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일본의 국력을 따라갈 수 없다는 일종의 좌절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일본 컴플렉스가 되었다.


다행인 점은 양국 신세대들은 서로 갖고 있는 컴플렉스가 다소 약화되고 호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한국의 젊은 세대는 일본의 문화를, 일본의 젊은 세대는 한국의 문화를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인정하는 분위기가 서서히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 조선 등 우리나라가 일본을 누르고 세계 1위를 차지하는 산업 및 제품이 늘어나면서 젊은이들은 이제 일본의 경제력을 오를 수 없는 절벽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젊은이들의 양국에 대한 이해는 한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기성세대가 잡아놓은 틀이 아직 견고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50년대 이후 무한질주를 하던 일본 경제의 성장은 20세기 후반부터 현저하게 둔화되자 극우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자국 군대의 외국진출에 서두르고 교과서를 점점 극우적으로 개편하며 전범을 국가영웅시하면서 신사참배를 강행하여 한국과 중국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사상 처음 자민당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서 다소 유화 제스처를 보이곤 있지만 근본적으로 노선이 바뀌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 한국 컴플렉스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한, 한국도 일본 컴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의 논지가 우리보다는 일본탓인 것처럼 흐르고 있어 우리보다는 일본의 반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들리겠지만, 양국 갈등의 원인이 일본 쪽에 크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한국의 일본 컴플렉스를 논함에 있어 ‘학술적 컴플렉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학술적 컴플렉스란 한국 사학자들의 친일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기존 ‘친일파’라는 용어를 ‘일본추종 민족반역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친일파는 그야말로 ‘일본에 친근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를 뜻한다.


불행하게도 한국 사학의 기반을 조성한 학자들은 일제 식민사관에 물든 친일파들이었다. 아무 근거 없이 삼국사기의 고대기록을 무시하면서 일본인들이 정립한 근대 사학 개념을 후배들에게 강요하던, 그들의 제자인 현재 사학자들까지도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일본인들의 연구를 인용한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일본학자의 연구내용을 논문에 싣지 않으면 수준 이하의 논문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것이 바로 학술적 컴플렉스이다. 우리 역사를 논하면서 일본인들의 연구에 의존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컴플렉스는 열등감에서 나온다. 열등감을 갖고 있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일본 컴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본보다 나아야 한다. 국민소득도, 관련연구도, 세계1위 산업도 일본을 능가해야만 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intocorea

 

출처 : 목련꽃이 질 때
글쓴이 : 거지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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