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천황(메이지유신)의 실체-북조천황가를 살해하고 가짜등장~
미나모토(源) 가문에서 파생된 오무로가문의 오무로 토라노스케(大室寅之祐) 명치천황에 올라 남조천황가를 탄생시키다~
미나모토(源) 가문은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원씨(밝달민족이란 뜻의 백민도 또한 으뜸민족이란 뜻이 있듯이,선비족의 으뜸이란 의미로 원씨)로 바꾼 탁발선비족의 북위황실의 일파인 독발씨가 북위황제에 의해 하사된 성씨인 (源)씨의 후예(또한 백제황실 부여씨의 후예라고도 함)
현 일본천황이 자신은 백제왕족의 후예라고 했음~
참고>탁발선비족-당항으로 불리는 고대티벳족으로 알려진 탕구트(동고트족)도,당도 탁발선비족으로 이들모두 이족(이민=동이남만)이란 뜻의 이씨로 바꿨음~~~
원씨의 북위를 재건한다는 의미에서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은 북위의 속민으로 사실상 같은 족속임~
탁발씨,단씨,우문씨,보육여(수나라 황실-부여씨란 뜻),모용씨등 선비족은 원래 모용씨가 주체로 된 주나라의 통치집단과 왕족(모용씨)이며 모용씨를 주체로 한 주와 연(주나라 희씨 왕족=모용씨)-후연-북연을 거쳐 신라의 통치집단이 되고,모용씨에서 갈라진 탁발,우문씨를 주축으로 현 중국사의 북위,후주-수-당이 됨~
이들의 파생은 부여(여씨들의 나라==>여=위(중국에서 위를 받는다,제위에 오르다는 사실은 이 부여를 의미함,부여는 조선천황의 계승자를 뜻하는 것이고~그래서 부여인것임)
한나라도 고구려도 다 여씨-위씨에서 갈라진 기록을 보여주고 있음(한족속)
1,원숭이 닮은 뻐드렁니,마마자국의 메이지천황(명치천황)
이제까지 명치천황으로 알려진 무츠히토(睦仁) 친왕과 고메이천황(아시카가 오사히토(足利統仁 : 1831~1867)을 살해한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지원을 받아 15세에 명치천황에 오른 오무로 토라노스케(大室寅之祐)
50세가 갓넘어 측실을 통해 히로히토를 낳음
메이지천황(명치천황)
2.지능에 문제가 있다는 다이쇼천황
3.지금의 천황 시마즈 아키히토(島津明仁 : 1933~)-오무로 가문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인물이었으며 미나모토(源) 장군가의 일부
지금 일본의 황태자-오무로 소우키치(大室庄吉)의 증손자 도쿠가와 츠네나리(德川恒孝 : 1940~)의 아들로 그 정식 이름이 도쿠가와 나루히토(德川德仁 : 1960~)
지금 일본의 공주-나루히토와 같은 소우키치의 후손으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 1937~)의 손녀로 그녀의 정식 이름이 하시모토 아이코(橋本愛子 : 2001~)
메이지 천황의 정체,,,무츠히토 친왕은 메이지 천황이 아니었고, 그는 고메이 천황과 함께 살해당했다.,,,오무로 토라노스케(大室寅之祐)는 메이지(明治) 천황의 실제 이름 <펌글>
오무로 토라노스케(大室寅之祐)는 메이지(明治) 천황의 실제 이름으로 지금까지 알려져왔던 무츠히토(睦仁) 친왕은 메이지 천황이 아니었고, 그는 고메이(孝明) 천황과 함께 살해당했다.
토라노스케의 가문인 오무로 가문은 미나모토(源) 가문에서 파생된 고다이고 겐지(源氏)로 남조(南朝) 모노노베(物部) 계통이다. 토라노스케를 앉히기 전에 고메이 천황과 무츠히토 친황을 시해하여 혁명을 일으킨 자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그들이 막부 타도의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시해한 것이라고 오무로 소우키치(大室庄吉)와 그 손자 오무로 킨스케(大室近祐)의 증언으로 전해진다.
오무로 토라노스케가 15세 때 혁명가 이토 히로부미의 지원을 받아 황위에 오르고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에도 막부(江戶幕府)를 토벌한 뒤 그곳으로 천도하여 동경(東京)으로 개칭했으며 연호를 메이지로 정하였으며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으며 조선에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물자를 약탈했다.
그리고 자신은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심으로 조선과 만주를 지배하려고 했으며 유신 때의 집권자들 또한 그러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그 공경들은 남조 혁명의 공신이자 북조(北朝)의 소가(蘇我) 황실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그 뒤 오무로 토라노스케가 1912년에 사망하고 그 아들 요시히토(嘉仁)가 그의 뒤를 이었다.
이 사실이 쇼와(昭和) 천황 치세 때 감추어졌으나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사실이 전해졌다.
메이지 천황 때부터 이어진 지금 일본 황실은 오무로 가문이었고 지금 천황도 그러했다.
이 증언은 아직도 역력했고 매우 사실적이었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이를 모르고 지내왔던 거였다.
왜 이를 알지 못하고 계속 방황했을까? 이 사실은 본인 또한 몰랐을 것이다.
이 글의 근거는 진정한 만엽집의 비밀 일본 사이트와 일본 역사학계의 주장과 증언들이다.
본인은 이를 토대로 이 글을 쓴 것으로 아직도 이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일본 천황가의 현황
일본 근현대 역사에 있어 천황가(天皇家)는 중요한 상징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전의 천황가는 북조 계통의 아시카가(足利) 가문으로 아무 존재감이 없었다. 그 이후 천황가는 남조 고다이고 천황의 후손인 오무로(大室) 가문으로 역사에 두각을 드러냈다. 오무로 가문의 첫 천황인 메이지(明治) 천황 오무로 토라노스케(大室寅之祐 : 1850~1912)는 고메이(孝明) 천황 아시카가 오사히토(足利統仁 : 1831~1867)를 시해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1841~1909)에 의해 옹립된 인물로 50을 갓넘은 나이에 히로히토(裕仁 : 1901~1989)라는 아들을 두었다.
지금 일본의 황태자는 사실 오무로 소우키치(大室庄吉)의 증손자 도쿠가와 츠네나리(德川恒孝 : 1940~)의 아들로 그 정식 이름이 도쿠가와 나루히토(德川德仁 : 1960~)라고 볼 수 있는 반면 공주는 나루히토와 같은 소우키치의 후손으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 1937~)의 손녀로 그녀의 정식 이름이 하시모토 아이코(橋本愛子 : 2001~)였다. 이렇듯이 오무로 가의 황족들이 제각각 다른 성으로 활동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이들 이외는 지금의 천황 시마즈 아키히토(島津明仁 : 1933~)로 오무로 가문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인물이었으며 미나모토(源) 장군가의 일부였다.
아키히토 천황을 제외한 동경의 황족들은 모두 오무로 가문에 속한 사람들로 남조 계통의 천황가 자손들이다. 아시카가 황실 이후 천황가는 제각기 다른 가문의 인물들로 뒤섞여 혼잡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금도 일본 인터넷 사이트나 언론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일었으며 화제도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왜 이를 계속 모르고 있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1302&docId=314303&qb=7Jik66y066GcIOyGjOyasO2CpOy5mA==&enc=utf8§ion=kin&rank=1&sort=0&spq=0&pid=gszbCv331x0ssZgK7U4ssv--461992&sid=TAyL2L6LDEwAAGV2C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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