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수업 중 "전라도는 배반의 땅".. 지역 편향 발언 듣던 여학생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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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십조 배역의 땅은 호남이 아니다
역사 | 2008/09/05 18:00
호남을 차별하고 자신들의 호남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 근거로 드는 것이 훈요십조다. 고려 태조 왕건이 유훈으로 전했다는 훈요십조에는 "호남이 배역의 땅이니 이곳의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호남은 고려시대부터 차별받아온 것이므로, 현대사에서 비극적으로 일어난 호남차별 역시 역사적 연장선상에 놓여있을 뿐, 의도적으로 조작되어진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는 호남차별의 원인이 호남차별을 조장해온 가해자에게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도록 차별을 받아온 호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결국 차별의 책임마저도 호남에 전가하게 되는 '피해자 탓하기'식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호남 = 배역의 땅'이라는 기존의 해석은 과연 올바르다고 볼 수 있는가? 만약 이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 해석을 전제로 삼아 파생된 결론 또한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부터 호남차별의 역사적 근거가 되어 왔던 훈요십조에 대해 그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1. 훈요십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호남지역을 가리킨다?
아래는 호남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는 훈요십조 제8조에 나오는 문제의 구절이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고려사절요』(1), 민족문화추진회,1968. pp.470-471)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에 있는 주나 군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국척과 혼인하여 권력에 결탁하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초래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이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중략)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권력의 길에 들지 말게 하라』
근대에 들어와 훈요십조를 처음 해석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 龍)라는 일인사학자였다. 이마니시는 '차현이남과 공주강외'이라는 문구를 호남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이 지금까지 정설처럼 굳어져 호남이 배역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어처구니없게도 명백한 오역이었다.
이마니시 류의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의 오류가 있다.
1) 첫째, '차현(車峴)'을 지금의 '차령산맥(車嶺山脈)'으로 해석한 점이다.
차령산맥은 지금까지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의 북방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뻗은 산맥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2005년에 실시한 국토연구원의 조사 결과 차령산맥은 실존하지 않는 산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니, 지금까지 우리가 사회과부도를 보면서 달달 암기해 왔던 그 차령산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국토연구원의 설명에 의하면, "차령산맥뿐 아니라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노령 등 여러 산맥도 구릉(언덕) 상태인 것으로 드러나 실제 산맥으로 분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차령산맥을 포함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산맥체계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일제시대 '고토분지'라는 일인 지질학자였는데, 1903년에 일꾼 6명과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그것도 단 14개월 동안 답사하는 것으로 산맥체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주먹구구 방식으로 측정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산맥체계였던 셈이다. 이것이 조선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나 산경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차령산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따라서, 1903년에 실수로 '만들어진' 차령산맥이 900년 무렵을 살던 왕건의 입을 통해 언급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왕건이 말했다는 '차현이남(車峴以南)'의 차현은 차령산맥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다는 뜻이다.
2) 둘째, '공주강외(公州江外)'를 금강 남쪽으로 해석한 점이다.
공주강은 지금의 금강(錦江)으로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경계로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인데, 대체로 차령산맥(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곳)과 비슷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마니시는 이 점에 착안하여 공주강 외(外)라는 표현을 금강 남쪽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이마니시의 해석에 대해 설성경은 "'외(外)'는 『한화사전(漢和辭典)』 등에서 「바깥」이라는 의미와 「위(上)」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공주강 외'는 '공주강 위'라는 뜻이며, 지리적으로 공주강 북쪽을 가리킨다"고 반박했다.
또 'OO以南 OOO外'라는 한문 표현은 '~에서 ~까지'라고 하는 지역적 범위를 설정하는 문구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주장도 있어 공주강 북쪽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공주강외를 단순히 금강 남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냐는 점에서 이마니시의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2. 고려시대 호남사람은 차별 받았나?
1) 호남세력은 배역이 아닌, 왕건의 친위 세력이었다.
왕건은 모두 알다시피 궁예를 왕으로 모신 후고구려의 신하였다. 왕건이 궁예 아래에서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 계기가 나주정벌이었는데, 이때 왕건은 나주호족의 딸인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 아내로 맞이하는 등 나주호족들과 굳건한 결속을 맺게 된다. 이후 나주세력은 왕건의 출신지인 개성세력과 함께 왕건을 후원하는 친위세력이 되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2) 오히려 왕건은 호남사람을 중용하였다.
신복룡은 "호남인들 중에는 당시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 살아서는 상주국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崔知夢)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妃)이자 2대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는 나주인이었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승주(昇州) 태생의 순천(順天) 박(朴)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곡성(谷城) 사람이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唐津) 사람(또한 광주지방에 근거를 둔 호남 호족 세력이기도 했다)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 사람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다."
3) 고려 전반에 걸쳐 호남출신이 공직에서 배제된 적이 없다.
설성경은 태조 사후 즉, 훈요십조의 유훈이 전해진 직후였던 4대 광종부터 8대 헌정 때까지 과거시험관인 지공거를 두 번이나 역임했던 전북 전주 출신의 유방헌을 예로 들며 "태조 사후 후대에도 후백제인이 관직임용에 제한받지 않았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4) 왕건은 분열주의자가 아닌 통합주의자였다.
왕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보더라도, 그는 통합을 강조한 통합주의자였지 분열을 획책하여 왕권을 도모하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다. 왕건은 신라의 항복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한때 자신의 라이벌이였던 견훤이 투항해 오자 백관 최상위의 벼슬을 내리며 크게 환대하였다. 그리고 공신과 호족은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들과의 혼약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 왕건은 거란이라는 강력한 외부의 적을 설정하여 호족들의 단결을 이끌어내었다. 굳이 내부의 적을 만들어 분열시키고 차별하는 방법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이 시도되는 4대 광종 이전까지 고려 왕권은 매우 미약하고 불안정했는데, 굳이 호남이라는 광범위한 지역을 배역의 땅으로 설정하여 호남 호족들의 반감을 자초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3. 풍수지리적으로 호남은 배역의 땅인가?
조선후기 유학자 성호 이익은 금강을 "반궁수"라 일컬으며 금강 유역 일대를 배역의 형으로 보았고,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지리'에서 훈요십조를 빗대어 전라도를 배역의 땅으로 몰았다.
이익의 주장에 대해 설성경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와 연루된 성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었던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금강은 경주를 중심으로 했을 때 배류수가 되고, 개경을 기준으로 하면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이 그것에 해당된다. 만약 개경을 기준으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배류수로 한다면 개경 가까이에 있는 임진강·한강 모두 배류수가 되고 만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리고 호남지역에 대해 독설에 가득 찬 이익의 지방 편견을 보아도 그의 풍수관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왜곡되어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이중환의 주장에 대해서 신복룡은 "호남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인물이라면서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있으면서 목호룡(睦虎龍)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告變)에 의한 것이어서 그(이중환)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며, "그는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遊離乞食)한 다음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이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2) 도선의 비보(裨補)사상이 태동한 호남은 배역지가 될 수 없다.
선각국사 도선은 신라말 풍수대가였다. 그는 '비보(裨補)사상'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비보사상이란 땅이 커 명당이 찾기 쉬운 중국과는 달리 국토가 좁아 명당이 부족한 한반도에서는 승탑과 사찰을 세워 지덕(地德)의 운기를 보강하는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명당을 만들 수 있다는 도선의 개성적인 풍수 사상이다.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도선은 옥룡사를 중창하고 35년간 전라도에 머물면서 인근에 미우사, 도선사, 운암사, 삼국사를 창건하고 많은 비를 건립했다. 따라서, 호남지역이 설령 배역지라고 하더라도 도선의 의해 명당지로 탈바꿈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도선은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전해주어 후삼국의 통일비법을 전수해주었다고 알려진 인물이 아닌가? 배역의 땅을 내버려 두어 왕건의 통일을 방해했을 리 없다.
물론, 왕건과 도선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신라말 명망이 높았던 도선의 이름을 왕건 측에서 왕조 개창의 명분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유력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의 고승이었던 도선을 왕건과 연결시킨 인물 역시 최지몽이라는 호남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전라도에 불리한 풍수지리사상은 후대에 와서 왜곡되었을 확률이 높다.
개인적으로 풍수지리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귀신 씨나락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맹신하고 호남차별의 근거로 삼는 부류가 꽤 있기에 부분적으로 반박하는 차원에서 논해 보았다.
4. 호남이 아니라면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어디를 가리킬까?
1) 왕건의 아킬레스건은 궁예
왕건은 후백제와 신라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인 온후한 왕이었지만 궁예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왕건으로서는 궁예 세력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궁예 세력의 존재는 곧 왕건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건에게 궁예라는 존재는 반드시 지워버려야 할, 그리고 지워져야할 역사의 어두운 과거였던 것이다. 500년 뒤에 고려를 뒤집고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를 모조리 배에 태워 수장시키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큼 정통성은 왕권의 명분이자 생명이었다.
2)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친궁예 지역를 가리킨다.
설성경은 '차현이남 공주강외'의 유력한 장소로 친궁예 세력이 밀집해 있던 '홍성·공주·청주를 중심으로 한 그 인근 지역'을 꼽으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공주·홍성 지역의 반란 사건은 왕건이 즉위한 지 5일 만에 일어났다. 고려왕조를 창업하고 왕건이 즉위하는 데 공로가 컸던 공주 출신 환선길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 · · · · 이 사건이 일어난 후 9일째, 즉 태조 즉위 14일째 되던 날에는 공주를 장악하고 있던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또 모반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처형되었다. · · · · 2개월 뒤인 같은해 8월에 공주·홍성 등 10여 주·현이 함께 고려에 등을 돌리고 후백제로 투항해버린다.· · · · 청주 지역 출신 호족세력의 반역사건도 들여다보자. · · · · 이 지역 출신 호족세력은 궁예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일찍이 궁예는 효공왕 8년(904) 국호를 후고려에서 마진으로 고치고 그해 7월 그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던 청주의 민호 1천호, 즉 약 4천~5천명을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다음해인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철원은 청주인을 기반으로 한 궁예의 본거지였다.· · · · 918년 9월에는 왕건의 도읍지인 철원에서 청주인 임춘길이 같은 고향 사람 배총규와 매곡인 경종 등과 모반을 일으켜 임춘길 일당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0월에 임춘길·경종 등의 주살에 대한 여파로 청주의 민심이 더욱 동요되는 상황에서 청주 호족세력인 진선이 그의 동생 선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3) 친궁예세력에 대한 가혹한 응징
설성경은 연이은 반란이 왕건에게 '생애 최대의 시련'을 주었다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고려해볼 때 훈요십조 제8조는 이때 모반사건이 발생한 지역 혹은 반란 주모자의 출신지를 염두에 두고 그곳을 배역의 땅으로 지목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목천현의 경우를 보면 태조가 고려 건국 후 목천 사람이 자주 배반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우(牛)·상(象)·돈(豚)·장(獐)과 같은 짐승의 이름으로 성을 내렸다"며 이 지역에 대한 왕건의 실제적 응징이 뒤따른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4) '차현이남'의 차현은 차현(車峴)고개? 차령 고개?
한편, 차령산맥으로 오역되어 문제가 되었던 차현이남의 '차현'이 실제 어디인가 하는 점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궁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칠장사(七長寺) 부근의 차현고개(수레티고개)라는 설이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청주를 온전히 포함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차유령 고개라고도 불리는 차령 지역이다. 공주에 가까워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공주 근처의 유역이 설정된다
5) '차현이남 공주강외' 지역의 차별은 없었다.
배역의 땅으로 지목된 반란지역 주민들은 항상 불이익과 차별대우를 받았을까?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태조가 생각한 배역의 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성경의 말에 따르면 "태조는 홍성인 홍규의 딸을 12번째 부인, 즉 흥복원부인으로 삼았고 홍규를 삼중대광에 추증하였다. 또 견훤의 부하로 태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홍성의 성주 긍준은 중용되어 대상이란 관직의 등급에까지 올랐다. 태조의 손자인 현종은 거란 침입 때 공주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아 그의 맏딸을 원성왕후로 맞아들였으며, 후에 그녀의 동생 둘도 왕후인 원혜·원평으로 맞아들였다. 태조에 의해 짐승의 성을 부여받았던 목천 사람들은 문종 때 우(牛)는 우(于)로, 상(象)은 상(尙)으로, 돈(豚)은 돈(頓)으로, 장(獐)은 장(張)으로 복귀되었다."
5. 가해자의 알리바이
결과에 맞추어 원인을 찾으려는 결과론적 분석을 하게 보면 치명적인 오류가 생기게 된다. 훈요십조를 근거로 호남차별의 역사성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오류다. 역사적으로 호남이 차별받아왔다는 결론부터 짓고, 그에 걸맞는 자료들만 모아서 자신의 결론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현대에 영남 지역이 차별받았다면 영조시절의 영남 차별을 근거로 삼을 건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미처 이런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경우도 있다. 그들은 호남차별을 오래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다. 호남차별의 원인을 과거로 떠넘겨야 호남차별의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해자격의 지역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유혹에 더욱 쉽게 빠진다. 훈요십조의 호남차별이 가해자의 역사적 알리바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출처 : http://gamchoyung.tistory.com/entry/%ED%9B%88%EC%9A%94%EC%8B%AD%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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