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한국전쟁 당시 `인해전술`의 오해

lionet 2013. 9. 14. 02:54

1950년  10월 말쯤...  한국전쟁에  짱깨들이  개입했습니다.

한국전쟁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중공군 하면 연상되는것이 바로 <인해전술>인데...

실은 중공군이  처음 개입할당시..그리고  이 초반 공세때문에 UN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당시..

중공군의  병력 숫자는  UN군 보다 많지 않았다는게  사실입니다.

(나중엔  중공군 병력도 상당히 증강되긴 함 근데 그땐 UN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때가 아님..)

 

개떼처럼  돌격하는것 같긴 하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가 쓴 책 <중국이 본 한국전쟁>을  보면  당시  투입된 중공군은  20여만명 ..

보병은  박격포 몇문정도 보유한게 고작이고,  구경이 큰 야포는  노새가 끌고다니는 어처구니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몰골의 중공군을  본  북한군과  소련측 사람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저꼴로 전차,야포,공군을

중무장한  미군과 UN군을 상대한다는거야?"

 

 

징과  나발을 불며  돌격하는 짱깨군

 

 

 

당시 한국군+UN군 병력은  40만이 넘었고,   처음 개입한 중공군은 겨우 20여만명.. 거기다 장비 개판..

근데 왜 , 어째서,  와이...   한국군과 UN군은  개쪽을 팔며  속수무책 후퇴를 했을까요?

 

 

이건  중공군입장에선  신화에 가까운 전공이지만,  미군...  즉  미군 수뇌부에서  병림픽을 했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는  1950년 10월 24일  모든 군단과 사단에게  총진격하여  중국과의 국경선까지 진격하란 속도전 명령을

내리는데... 

이게  부대간  경쟁이되고,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고싶은 심리와 맞물려서

부대간  간격 유지가  개판이 되든 말든,  서로  먼저  국경지대에 도달하기 위해  마구 마구 부대간 간격이

벌어진  전선이  되어버리고,    부대와 부대 사이  엄청나게 큰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중공군은  아주 재수가 좋았던거죠...   맥아더가  아주  뻘짓을  크리티컬로  터트려줘버려서요...

부대와 부대간격이  크게 벌어져서  그 사이로 중공군이  돌파해버렸는데도  UN군은  모르는 지경이었습니다...

 

 

 

중공군이  수류탄을  던져대자  기겁하며  달아나는 UN군..

 

 

 

사실, <인해전술>이란 말도 이때 없었습니다.  그럼  이말이  어떻게 생겨난걸까요? 

 

당시 한국군 정보장교 김재영 중위(한국전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무 근무)가 중공군 개입초기에

중공군의 대령급인 소(邵)라는 자를 신문했는데 이때 소(邵)는 중공군의 전술은

월(越)국의 명장 범여를 손자가 격파한 휴이대첩전(携李大捷戰)의 전술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미군신문관이 김중위에게 현대 군사용어로 이 전술을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묻기에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고 답한 것이 오늘날의 관용어가 된거죠.......

 

중공군의  전술은 무대포 인해전술이 아니라,   사실은  손자병법이었던 겁니다....  -_-;;;; 

 

 

 

밤에는 징과,피리로 시끄럽게 떠들며 진격하고, 낮에는  되도록 많은 깃발을 흔들며 진격하라

이것도  손자병법에 나오는  병법중 하나입니다.

 

 

 

중공군은  맥아더의 뻘짓으로  부대가  넓게  퍼져있는  그 공간으로  들어와서 UN군의 후방에 위치하거나,

혹은  미군과 전투지경선을 이루는  한국군쪽을  맹렬히 공격하여  한국군을 돌파,  미군의 후방으로 가기도 했죠..

"약한곳부터  집중 공격하라"  이것 역시  전술의 상식입니다. 

 

한국군 사단장들이 겨우 20대 30대 신출내기 일본군 장교출신이란것도 알았고, 미군보다  훈련이나 장비가 떨어지는것도 알았죠

중공군은  되도록이면 미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고  미군과 연해잇는 한국군쪽을 집중 공격하여 돌파해버립니다.

 

전선의 한축이  돌파당하면  후방 포위를 우려한  다른 부대들도 덩달아  후퇴할 수 밖에 없는것이고 ,

이게  1.4후퇴라는...  서울을 다시 뺏기게 될만큼  초반에  정신 없이 밀린  이유지,  그냥  아무 전술도 없이

중공군이 머리숫자로만 밀어부친게  아니라는거죠..

 

 

<한국전 당시  중공군의 보병전술 4선12파 전법 >

이것은  전선의  약한곳이나, 혹은 부대와 부대사이 전투지경선에  병력을 집중하여

일렬로 차륜식 돌격, 돌파하는 전술... 일단 돌파하면

후방포위를 염려한 상대방 부대들은  후퇴할수밖에 없다.

요즘 장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적인 방법이다...

 

 

 

한국전 당시  중공군의 보병전술 <4선 12파 전술>이란?

 

  • 통상 증강된 1개 보병연대에 돌파정면은 100~200m 부여한다.
  • 1개 연대는 4개 대대(주 : 중공군은 삼각편제이나 주공연대에는 통상 1개 대대를 추가로 배속)전후 4개 조로 분 류하고 대대는 다시 3개 보병중대를 전후로 3개의 공격제대로 구분하며 소위 4선 12파의 공격대형을 취한다.
  • 공격시기는 야음과 악천후를 이용하며 각 제대간의 시간차는 10~20분 간격으로 계속적인 공격을 실시한다.
  • 공격시 지원화력으로는 박격포를 돌파정면에 집중, 짧은 시간에 집중사격을 하며 공격부대는 주공과 조공으로 구분, 상황에 따라 양공(陽攻)을 실시하여 적을 기만시키고 공격전에 심리전과 위계전술(僞計戰術)을 사용하여 적을 정신적으로 위축시킨다.
  •  

     

     

    그런데  중공군의  이런 전술도  알고보면  충분히 막을 방법이 있습니다....

    그 한가지 예가  바로  한국군6사단의  용문산 전투입니다.

     

     

     

     

    용문산전투를 이야기 하자면  여러가지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그냥 요약하자면,  중공군이 "약하게"보고  집중 공략한곳(6사단 2연대3대대)이 예상외로 안뚫리자,

    제풀에 지쳐서  퇴각.. 그 퇴각하는 중공군을  UN군과 6사단이 쫏아가서 패준거다...

    즉,  쉽게 말하자면,  중공군은  약한곳으로 보이는곳을  병력을 집중해서 뚫고나가는 전술을 쓰는데,

    "안뚫리면" 된다는  말은 쉬운 이야기 ㅎㅎㅎ

    개인적으로 용문산 전투는 한국군6사단장 장도영 장군의 전술이 아니라,

    걍 소발에 쥐잡기식으로  얼떨결에 얻어걸린 전술이라 생각함.

     

     

     

     

     

    이야기를 마치면서...  인해전술이란 ... 사실 오해에서 비롯된  단어이고

    중공군의 총병력이  한국군,UN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서도 아니며,(초반엔  오히려 중공군 총병력이 적었음)

    중공군의  전술...손자병법도 응용한...  그 전술이   약한곳에  몇배에 해당하는 병력을 집중하여 돌파하는 전술을 쓴것이며

    약한곳에 배치된  부대 입장에서는  자기들보다 몇배에 해당하는 중공군이  차륜전으로 돌격해오자 

    쪽수로 밀어부친다는  인식이 생겨난것임....

     

     

    역사는  부끄럽더라도 숨겨선 안되며,  사실대로 가르쳐야  후손들이  같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꼴보수들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맥아더 장군의 오점을 숨기기 위해  이런 실재 역사는 숨기고 안가르쳤고..

    (맥아더가  인천 상륙 작전이라는  회심의 카운터로  수도 서울을 탈환했던 전공까진 부정하진 않음)

    중공군에게 농락당했던  일본군 출신의 한국군  군단장,사단장들의 추태 역시  숨기고 안가르쳤죠...

     

    <부록>   짱깨들이  한국전때  징, 꽹가리,북,깃발,피리를 쓴  이유......

     

    손자병법 제7군쟁편 : 중공군이 징, 꽹가리, 북, 깃발, 피리 등을 사용하는 이유

      軍政(군정)에 曰 言不相聞故(왈 언불상문고)로 爲之金鼓(위지금고)하고 視不相見故(시불상견고)로 爲之旌旗(위지정기)니라 : 군정(兵書 이름)에서 말하기를, 말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징과 북을 사용하고, 신호가 서로 보이지 않으므로 깃발을 사용한다고 한다. 

      夫 金鼓旌旗者(부 금고정기자)는 所以一人之耳目也(소이일인지이목야)라 人旣專一(인기전일)이면 則勇者 不得獨進(즉용자 부득독진)하고 怯者 不得獨退(겁자 부득독퇴)하나니 此(차)는 用衆之法也(용중지법야)라 : 대체로 징, 북, 깃발 등은 사람들의 이목을 하나로 모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지면 용감한 자도 혼자만 나아갈 수는 없고, 비겁한 자도 혼자 물러설 수는 없으니, 이것이 병력 운용법이다. 

      故(고)로 夜戰(야전)에 多火鼓(다화고)하고 晝戰(주전)에 多旌旗(다정기)는 所以變人之耳目也(소이변인지이목야)라 : 그러나 야간전투에 불과 북소리를 많이 쓰고 주간전투에 깃발을 많이 쓰는 것은 적군의 귀와 눈을 현혹시키기 위함이다. 

      故(고)로 三軍(삼군)을 可奪氣(가탈기)며 將軍(장군)을 可奪心(가탈심)이니 : 그리고 적 부대는 가히 사기(기세)를 빼앗아야 하며, 적 장수는 가히 마음(자신감, 불안감)을 빼앗아야 하는 것이다.

     

     

     



    BGM정보: http://heartbrea.kr/1546809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센이고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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