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 1501~2000년 ] 1502년 - 하삼도(下三道)의 주민 1,600호를 평안˙함경˙황해도에 이주시킴. 1503년 - 김감불(金甘佛)˙김검동(金儉同) 등이 연철(鉛鐵)에서 은(銀)을 분리하는 제련법을 발명. 1504년 - 갑자사화(甲子士禍). 1506년 - 중종반정(中宗反正).
1507년 - 이과(李顆) 등이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옥사.
1510년 - 삼포왜란(三浦倭亂), 황형(黃衡)˙유담년(柳聃年) 등이 이를 평정. 1512년 - 일본과 임신조약(壬申條約) 체결하여 세견선(歲遣船) 및 세사미(歲賜米)를 반감함. 1515년 - 을해동활자(乙現活字) 주조.
1517년 - 김안국(金安國)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반포. 1518년 -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고, 소장한 그림을 도화서(圖畵署)에 이장(移藏). 1519년 - 기묘사화(己卯士禍) 1520년 - 제주의 한지(閑地)에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둔전(屯田)을 설치. 1527년 - 동궁에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남. 4월, 최세진(崔世珍)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지음. 1530년 - 이행(李荇) 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
1532년 - 조정관리의 녹봉을 감하여 구황(救荒)에 충당. 1538년 -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는 사찰을 폐지함. 1543년 -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건립. 1544년 - 4월, 사량진왜란(蛇梁鎭倭亂). 1545년 - 조광조 복관(復官)되고, 현량과 다시 실시. 왕대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섭정. 1547년 - 정미사화(丁未士禍). 대마도주(對馬島主)와 정미약조 체결(수호조약을 개정). 1549년 - 이홍윤(李洪胤)의 옥 일어남.
1550년 -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편액을 하사함(사액서원의 시초). 1551년 - 양종선과(兩宗禪科)를 설치하고 시경승(試經僧)에게 도첩(度牒)을 발급. 1555년 - 을묘왜변(乙卯倭變). 1559년 - 황해도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 일어남(~1562).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1560년 - 이황, 예안(禮安)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움(75년에 사액). 1561년 - 10월, 이정(李楨)이 경주에 서악서원(西岳書院)을 세우고 설총(薛聰)˙김유신˙최치원을 향사(享社). 1562년 - 임꺽정의 난을 평정.
1567년 - 명종 죽고(1534~), 선조(宣祖) 즉위(~1608). 1572년 -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사이에 사단칠정론에 관하여 서신 왕래 시작(~1578). 1574년 - 안동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우고 이황을 향사(75년에 사액). 1575년 -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왜국이 조선침략을 위해 전선을 건조하고 있음을 통지. 1577년 - 이이, 《격몽요결(擊蒙要訣)》 간행. 1583년 - 이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건의함. 1589년 -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일어남.
1592년 -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작. 일본침략군 21만이 부산포에 상륙. 옥포해전에서 왜선 26척을 대파. 1593년 -왜군이 철수 시작. 선조가 한성으로 귀환. 1597년 - 정유재란(丁酉再亂), 약 20만의 왜군 상륙. 원균(元均) 휘하의 수군이 칠천(漆川)˙고성(固城)에서 1598년 - 이순신(李舜臣)이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 왜군 철수. 1601년 - 한성에 동묘(東廟) 건립.
1603년 -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가 연경에서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1604년 - 유정(惟政)을 쓰시마섬과 일본에 보내어 그곳 사정을 알아보게 함. 1605년 - 유정이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일본에서 귀국. 1608년 - 선조 죽고, 왕세자 즉위(광해군). 1610년 - 허준(許浚)이 《동의보감》 25권 찬진.
1613년 - 영창대군의 관작을 삭탈하고 서인으로 함. 폐모론 일어남. 1614년 -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영창대군을 죽임. 1618년 -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서궁(西宮)이라 칭함. 대북파 정권 장악. 1619년 - 명나라에 1만 명의 원군 파견.
1623년 - 김류 등이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綾陽君) 추대, 정권을 잡음(인조반정). 1624년 -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킴.
1626년 - 호패법시행. 남한산성을 쌓고 수어청을 둠. 1627년 - 후금이 조선에 침입(정묘호란). 인조가 강화로 피신. 1628년 - 2월, 명나라의 숭정연호(崇禎年號)를 사용. 1630년 - 무감(武監) 설치. 1633년 - 척화(斥和)의 교를 내리고, 후금의 침략에 대비케 함. 임경업(林慶業)을 1635년 - 금나라 사신 마부대(馬夫大)가 국서를 전함. 1636년 - 후금의 국서를 거절. 금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 옴. 청군 침입(병자호란). 1637년 - 강화도 함락됨. 인조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 인조 환궁. 1640년 - 세자 선양에서 돌아옴. 1645년 - 소현세자, 독일인 신부 아담 샬(湯苦望)로부터 천문˙산학(算學)˙천주교에 관한 서적 등을 받아 1649년 - 인조 죽음. 세자 봉림대군 즉위(효종). 관상감 청나라 역서에 따라 역법(曆法)을 고침. 1652년 - 연경에 천문학관을 보내어 시헌력법(時憲曆法)을 배워오게 함. 어영청(御營廳)을 설치. 1653년 - 제주목사,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의 화순포(和順浦) 표착을 보고. 1655년 - 추쇄도감을 두고 전국의 노비를 추쇄, 강화(江華)방비에 임하게 함. 일본통신사 조형(趙珩) 일행 1657년 - 최유지(崔攸之) 천문관측기구를 제작. 1658년 - 청나라가 러시아정벌에 원군을 요청해 옴. 1659년 - 효종 죽음. 왕세자 즉위(현종). 1660년 - 남인˙서인 간에 예론시비(禮論是非) 시작됨. 전라도 산간군(山間郡)에 대동법 실시. 1662년 - 현종 창덕궁으로 옮김. 고려조의 능침(陵寢)을 봉식(封植). 1671년 - 현종 경덕궁으로 옮김. 전국적으로 대기근. 경기˙충청도에서 민란 일어남. 1674년 - 현종 죽음. 세자 즉위(숙종). 북한산성을 수축함. 1679년 - 강화에 돈대(燉臺) 축조함. 1682년 -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 설치. 1687년 - 금위영(禁衛營) 폐지. 숙종 탕평책(蕩平策)을 유시함.
1688년 - 창덕궁 금호문 밖에 관천대(觀天臺) 축조. 1689년 - 세자책봉문제로 노론(老論)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기사환국). 왕비 인현왕후 민씨 폐출됨. 1690년 -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함. 1692년 - 숙종 창덕궁으로 돌아옴. 북경에서 동을 수입, 화폐 주조.
1694년 - 노론에 의해 남인 몰락(갑술옥사). 4월, 폐비 민씨를 복위하고 왕후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
1697년 - 장길산(張吉山)이 이끈 농민군 봉기. 도성안의 거지들을 각 섬으로 보냄. 1698년 - 숙종 탕평책을 지시. 1702년 - 백두산 화산 폭발. 이준명(李浚明) 울릉도를 답사, 지도 작성. 1711년 - 평양성과 안주성을 개축케 함. 북한산성 축성 시작. 조태억(趙泰億) 등을 일본에 통신사로 보냄. 1712년 - 청나라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정계비를 세움. 북한산성 역사를 끝냄. 1713년 - 중인˙서얼 출신에게 죽은 뒤 벼슬을 주는 규정 제정. 1714년 - 8도에 지진 발생. 1720년 - 숙종 죽고, 세자 즉위(경종). 1723년 -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만들게 함. 10월, 관상감에서 서양의 문진종(서양식 시계)을 만들게 함. 1724년 - 경종 죽고, 왕세제 연잉군 즉위(영조). 서얼 200여 명이 차별대우 철폐를 요구. 1725년 - 화폐주조를 중지하고 무기 제작. 1728년 - 이인좌(李麟佐) 등 밀풍군(密豊君) 추대, 반란을 일으킴. 1729년 - 사형수에 대하여 삼복(三覆)을 시행함. 1732년 - 관상감 관원 청나라에서 《만년력(萬年曆)》을 가져옴. 1736년 - 원자를 세자로 책봉함(사도세자). 1740년 - 각 지방의 도량형기를 통일시키도록 함. 1745년 - 예각(藝閣)에서 《경국대전》 《속대전》을 1책으로 간행. 1746년 -《속대전》이 활자본으로 간행됨. 1750년 - 균역청 설치. 1752년 - 새돈 44만 4000냥 주조. 1756년 - 금주령 선포, 밀주를 엄히 단속함. 11월, 흉년으로 기아민 다수가 도성에 들어옴. 1758년 - 해서˙관동 지방에 천주교가 크게 보급 됨. 1759년 - 원손을 왕세손으로 책봉함(정조). 1761년 - 노비에 대한 상전의 사형(私刑) 금지. 1762년 - 왕세자, 궤 속에 갇혀 굶어 죽음. 금주령을 엄수케 하고 범법자는 사형에 처함. 1763년 - 김수장(金壽長)이 《해동가요》 편찬. 장안의 승려들을 추방함.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1764년 - 장례원(掌隷院)을 혁파. 1765년 - 홍계희(洪啓禧) 등 《해동악장》을 편찬. 10월, 장례원에서 맡았던 노비관계 사무를 형조에 이관. 1768년 - 각도의 성곽시설과 장비를 수리토록 함. 1769년 - 청천강을 따라 남당성(토성)을 쌓음. 1770년 - 전국의 제언(堤堰)을 수축. 《동국문헌비고》 100권 40책을 완성. 1772년 - 갑인자(甲寅字)를 개수하여 활자 15만 자를 주조(임진자). 1773년 - 한성 청계천의 뚝을 돌로 쌓기 시작함. 11월, 총융청에서 조회포˙일화봉 등 새로운 포탄을 만들어 1774년 - 종1품에서 당상 정3품을 대상으로 등준시(登俊試)를 실시(15인 급제). 1776년 - 영조 죽고, 왕세손 즉위(정조). 《열성어제(列聖御製)》 간행. 경모궁(景慕宮)을 다시 세움. 1777년 - 고쳐 주조한 갑인자 15만자를 주조(점유자). 1779년 - 처음으로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을 설치. 1780년 -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수정에 착수(1796년에 완성). 창덕궁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1783년 - 승려의 장안 입성을 금함. 이승훈(李承薰)이 동지겸사은사 일행을 따라 연경으로 떠남. 1784년 - 이승훈이 연경 남천주당에서 그라몽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음. 이승훈,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가지고 1785년 - 한성에 천주교교회가 생김(진고개 김범우의 집). 해시계 간평일귀(簡平日晷)˙혼개일구(渾蓋日`&`) 1786년 - 연경에서 서양서적의 구입을 금함. 검서시예(檢書試藝)의 규정을 정함. 1787년 - 프랑스함대 페루즈 일행 제주도를 측량하고 울릉도에 접근함. 동 5월 책문후시(柵門後市)를 금지함. 1788년 - 서학관계 서적을 대량 불태움. 1791년 - 박필관(朴弼寬)의 격고(擊鼓) 사건 일어남. 신해교난(辛亥敎難) 일어남. 1792년 - 북경 주교 구베아가 교황 비오 6세에게 조선교회 창립을 보고. 1794년 - 수원성[華城]을 쌓기 시작함. 울릉도 지도를 제작케 하고 토산물을 조사함. 12월, 청나라 신부 1795년 - 천주교도 김시삼(金始三)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포교사실을 밀고. 1797년 - 영국제독 브로우튼의 북태평양 탐험선 프로비던스호 동래 용당포(龍塘浦)에 표착. 1800년 - 원자를 세자로 책봉(순조). 정조 죽고, 세자 즉위(순조).
1801년 - 정순왕후(貞純王后) 대왕대비 김씨(金氏)의 명에 따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실시. 서얼소통 시행, 내사노비(內寺奴婢) 폐지 등 제도 개혁.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등 30여명의 교도가 처형되는 ‘신유교난(辛酉敎難)’ 일어남.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 일어남.
1802년 -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화를 입은 이들에게 증직(贈職). 1804년 - 순조의 친정시작, 김대왕대비 수렴정치 폐함. 평양에 대화재, 공해 여사 600여 호 소실. 1805년 - 정조실록(正祖實錄) 인간됨.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 시작.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1806년 - 전라도 영광(靈光) 등 40여 군현에 흉년. 기아자 약 50여만명 발생. 정부 2만 5000석의 구휼미를 배급. 1807년 - 황해안 대해일(大海溢)로 패해도 극심. 유구인 99명 제주도에 표착. 1808년 - 북청(北靑)˙단천(端川)에서 민란 발생. 《만기요람(萬機要覽)》 완성. 1809년 - 함흥에 대화재. 필리핀 루손섬의 원주민 3명, 제주도 표착 9년 만에 송환. 1811년 - 곡산 등 민란 일어남. 홍경래(洪景來)의 난(평안도 농민전쟁) 일어남. 역법(曆法)을 개정, 시행. 1812년 - 4월 19일, 홍경래 전사, 난이 평정됨. 왕자 호(昊), 왕세자에 책봉됨(훗날의 익종). 1813년 - 공충도(公忠道)를 다시 충청도로 개칭. 제주도 토호 양제해(梁濟海) 등의 민란 일어남. 1814년 - 함경도 일대, 경상도 지방에 대홍수. 1815년 - 경상도 함안(咸安) 등지에 대홍수. 을해교난(乙亥敎難).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 1816년 - 영국 군함 알세스토호˙리라호가 충청도 마량진(馬梁津)에 옴. 이로 인해 서양 해도(海圖)상에서 1817년 - 삼남지방에 대홍수. 김정희(金正喜),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 발견, 68자의 비문 판독. 1818년 - 경상도 유생(儒生)들, 상소(上疏)로 채제공(蔡濟恭)의 신원을 요구. 1819년 - 충청도 공주˙전라도 전주 등지에 대홍수. 전국적 호구˙인구조사 실시. 1821년 - 평양 지방에 괴질 유행, 10여만 명 사망. 국가재정 궁핍상태에 빠짐. 1822년 호적법을 강화함. 인삼밀수출 엄금, 위반자 사형에 처함. 1823년 - 충청도˙경상도 일부에 홍수. 경기˙충청˙황해도 등 5도 유생들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1824년 - 정하상(丁夏祥)이 베이징에 가 교황에게 사제 파송을 요청. 감자씨 전해짐. 1825년 - 무신의 승교(乘轎)를 금함. 정하상˙유진길(劉進吉) 등, 교황청에 서한 발송, 1826년 - 6월에 지진 발생. 1827년 - 왕세자(익종) 대리청정. 호적법 정비. 서울(한성)에서 야간통행금지 실시. 1828년 - 법사(法司)˙반족(班族)의 백성들에 대한 재산침해를 엄금. 삼남(三南)지방에 병충해 극심. 1829년 - 영종(英宗)˙진종(眞宗)˙정종(正宗) 3대 왕의 어필집(御筆集) 발간. 남공철, 영의정 사퇴. 1830년 - 선정비(善政碑) 남립(濫立) 금지. 효명세자(孝明世子) 병사, 왕세자 책봉. 1831년 - 경희궁 중건 완료. 로마 교황청이 천주교 조선교구 창설. 1832년 - 개성(開城)출신 무과 급제자의 임용 허용. 영국 상선 로도 아마스트호, 1833년 - 전국 각지의 제방 수축. 북한산성 수축 완료. 황해도 재령(載寧)지방 소작인들, 소작료 납부거부운동. 1834년 - 폐습˙사치를 금함. 창덕궁의 숭문당˙양화당 등 많은 전각들 준공. 순조 죽고 왕세손 즉위(현종), 1835년 - 전국에 전염병(大疫)유행. 《순조실록》 편찬 위해 실록청(實錄廳) 설치. 청주성 화약고에 낙뢰. 1836년 - 프랑스인 신부 모방, 의주(義州)를 거쳐 밀입국. 소의 밀도살, 금광(金鑛)의 잠채(潛採)를 금함. 1837년 - 충청도 대흥군(大興郡)에서 성국로(成國老) 등이 집권자들의 죄를 폭로한 괘서(掛書)사건 일어남. 1838년 - 지진발생. 《순조실록》 34권과 《정조실록》 15권 완성. 《만기요람(萬機要覽)》완성. 1839년 - 유진길˙정하상(丁夏祥) 등 교도 다수 처형됨(己亥敎難). 평안˙황해˙경상도에 홍수. 1840년 - 양반들의 상민(常民)착취 엄금. 영국선 2척, 제주도에서 소 등 가축을 약탈해 감. 1841년 - 전국에 전염병 유행. 1842년 - 순천부(順川府) 송광사(松廣寺)에 화재. 《천세력(千歲曆)》 발간. 1843년 - 송광사 중건. 공주(公州)의 대동미(大同米) 착복한 이양옥(李陽玉) 처형. 1844년 - 이원덕(李遠德) 등, 원경(元慶)을 받들고 모반을 획책하다 처형됨. 1845년 - 영국군함 사마랑호(號), 무단으로 제주도와 전라도 서남해안을 측량. 1846년 - 프랑스 세실 해군소장, 천주교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 끌고 충청도 외연도(外煙島) 정박, 1847년 - 프랑스 군함 글로아르호(號), 지난해 세실 소장이 전한 국서에 대한 해답을 받고자 서해안으로 1848년 - 정부, 아편흡연을 엄금.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재개. 1849년 - 헌종이 죽자 은언군(恩彦君) 인의 증손 원범(元範) 즉위(철종). 정학유(丁學游) 또는 1850년 - 개성에서 사적인 인삼재배 성행. 1851년 - 국가경상비 부족으로 비상대비용인 봉부동전(封不動錢)을 변통 사용. 1852년 - 김흥근(金興根), 영의정이 됨. 오위장(五衛將)의 임명을 엄정, 진장(鎭將)도 매관매직 엄금. 1853년 - 페레올 주교 사망. 왜관(倭館)을 다시 건립. 춘궁기에 전국적으로 많은 아사자 발생. 1854년 - 러시아 선박 함경도 덕원(德源)˙영흥(永興)해안에 침입, 어민들을 살상. 1855년 - 영남의 유생들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추존(追尊)을 상소. 1856년 - 가축의 무단도살 엄금.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중건을 위한 공명첩(空命帖) 300장, 1857년 - 최한기(崔漢綺), 세계지리서 《지구전요(地球典要)》 저술 완료. 1859년 -《대명률(大明律)》 《대전통편(大典通編)》 등 간행. 원자(元子) 죽음. 서울 근교 사찰들을 훼파. 1860년 - 경희궁으로 천궁(遷宮). 최제우(崔濟愚), 경주에서 동학(東學)을 창시. 1861년 - 창덕궁으로 환어.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완성˙간행. 1862년 - 충청˙전라˙경상도 곳곳에서 잇단 민란 일어남. 1850년 이후에 세운 서원을 모조리 철폐. 1863년 - 금위영(禁衛營)군졸들, 받은 녹미(祿米)의 질 문제로 소요. 동학 교조 최제우 체포되고, 남해에 민란. 1864년 - 북인(北人)˙남인(南人)을 등용하고, 비변사(備邊司)와 의정부(議政府)의 업무분장. 1865년 - 통제중군(統制中軍) 설치. 찬집소(纂輯所) 설치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 1866년 - 대왕대비의 수렴청정 끝내고 왕에게 환정(還政). 민치록(閔緇祿)의 딸이 왕비가 됨. 1867년 - 서울 각 성문에서 통과세(通過稅) 징수. 신관호(申觀浩)가 수뢰포(水雷砲)를 만듦. 1868년 - 당백전(當百錢)의 통용을 명령. 1869년 - 전라도 광양현(光陽縣)에서 민란 발생. 대원군의 명에 좇아 전국 8도(八道) 4도(四都)에 1870년 - 일본주재 독일공사 브란트, 일본 외무서기 하나부사[花房義質] 등 군함 헬타호(號)를 타고 1871년 - 사액(賜額) 서원 47곳만 남기고 전국의 서원을 철폐. 1873년 - 선혜청(宣惠廳) 별창(別倉)에 화재.최익현(崔益鉉), 대원군을 배척하고 시폐(時弊)를 논단하는 1874년 - 강화도 연안 포대 축조 완성. 일본의 ‘정한설(征韓說)’로 각 군영(軍營)에 엄중경계령 내림. 1875년 - 울산에서 민란 일어남(29일 진압). 왕이 경복궁으로 옮기고, 양주(楊州)에서 은거하던 대원군 1876년 - 최익현(崔益鉉), ‘척사소(斥邪疏)’로 일본과의 통상조약에 반대, 흑산도에 유배. 1877년 - 제생의원(濟生醫院), 종두(種痘) 실시. 천주교 조선교구 주교 리델(프랑스인) 및 두새˙로베르 신부 1878년 - 청의 요청으로 리델 등 프랑스 신부를 베이징으로 귀환 조처.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1879년 - 강수관(講修官) 홍우창(洪祐昌),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와 원산개항예약 의정서(議定書)에 조인. 1880년 -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수신사(日本修信使)에 임명. 원산에 일본 영사관 개관. 1881년 - 박정양(朴定陽) 등 10여 명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임명. 별기군(別技軍)을 두고 1882년 - 조미(朝美)수호조규˙조영(朝英)수호조규 조인. 원산˙부산˙인천 개항. 1883년 - 태극기를 국기로 정함. 당오전(當五錢)을 주조. 초대 미국공사로 푸트 착임, 수호조규(修好條規)를 1884년 - 부산~나가사키[長崎] 간 해저전선 개통. 우정총국(郵政總局) 개설. 1885년 - 광혜원(廣惠院)을 설립, 미국인 의사 알렌 진료 실시. 영국함대 거문도를 불법점령. 1886년 - 이헌영을 초대 주일공사에 임명. 서대문 밖에 수력화약공장(水力火藥工場) 건설. 1887년 - 거문도 점거했던 영국 함대 철수(1885~). 광무국(鑛務局) 설치. 최초의 감리교회 1888년 - 이화학당에서 최초로 주일학교(主日學校) 시작. 군제 개편, 삼남지방에 큰 흉년. 1889년 - 함북 길주(吉州)와 강원 정선군(旌善郡) 등지에서 민란 발생. 유길준(兪吉濬)의 1890년 - 부산˙인천의 25객주(客主)를 철폐. 침례교회 선교를 시작. 커피˙홍차 등이 소개되고 서양의 1891년 - 제주민란 발생. 1892년 - 일본 어선, 제주 성산포(城山浦)에 상륙, 민간인을 살해하고 부녀자 폭행. 1893년 - 동학교도 2만여 명, 충청도 보은군(報恩郡) 장내(帳內)에 모여 ‘척왜척양(斥倭斥洋)’ ‘창의(倡儀)’의 1894년 - 김옥균, 상하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함. 갑오경장(甲午更張)의 시작. 과거제도 1895년 - 동학운동 주모자 전봉준 등 사형. 을미개혁(乙未改革) 단행, 재판소(법원) 구성법 등 34건의 개혁안 1896년 - 연호 건양(建陽)˙태양력 사용(음력 1895.11.17).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 고종 및 왕세자를 1897년 -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침. 국호(國號)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왕의 호칭을 ‘황제’로 정함 |
'역사이야기 > 기타정치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왜구와 친일파들이 숨기고 있는 대한제국의 진실 (0) | 2014.01.14 |
---|---|
[스크랩] 박정희 드라마의 종말 (0) | 2013.12.21 |
[스크랩] 박정희와 장준하의 삶 비교.. (0) | 2013.11.27 |
[스크랩] NLL 이해를 돕기위한 글입니다. (0) | 2013.11.16 |
[스크랩]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0) | 2013.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