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일제시대 친일과 고종의 저항에 대해서

lionet 2014. 3. 18. 16:42

 

개인 블로그에서 긁어온 글이기에 반말투입니다


이점은 양해부탁드립니다.







 

 잘 생각보라 


전제군주제하에서 이 백성이라는 개념이 무엇이냐 

그야말로 당시 백성이란 것은 왕이나 황제에 물건, 즉 object인 거임 ,  그 당시 백성이 언제 투표권을 행사해 왕을 선출하고 국가 중요행사에 참정권이 있던 그야말로 citizen이었씀? 

그러니깐 무슨 말인고 하니 친일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국가 결정권을 쥐고 있던 군주를 기준으로 해야지 백성을 기준으로 하니깐 논리에 파탄이 온다 이 말씀인 거임 , 

생각해 보라 
적어도 일제시대 조선인 모두가 친일파였다고 용감하게 주장할 수 있으면 적어도 조선백성 모두에게 참정권, 투표권을 주고 그들의 자유의지와 결정으로 친일을 선택했다고 말할수 있어야 댄다 


백성들이야  이성계가 왕이었다가 정조로 바뀌고 세종이 왕이 되고 이거 백성들하고 하등에 상관이 없다 이거지  그냥 오늘에 백성은 내일의 백성이다 이말씀인거임 
일제때 백성들이야 당장 목구녕이 포도청이고 먹고살기도 바빠 죽겄는데 
친일이 뭐든 반일이 뭐든 당장 남들보다 더 잘살고 싶고 뻐기고 싶고 그런 거임  구한말지식인들이 
이렇게 무식한 백성들이 하루빨리 깨우쳐야 나라을 보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강운동을 한 거시가 다 그런 거임 

그러니깐 당시 조선인은 전부다 친일파였다 라고 말해져도 이게 무슨 상관인 거임 그거는 어디까지나 절대군주였던 고종이하 왕들의 처신과 태도와 그들이 결국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었냐 아니냐 이런걸루 다가  한일합방과 일제시대의 조선과 일본의 개념을 잡아야 한다 이 말씀인 거임

고종이 편하게 살다 죽었다는 허황된 논리와 조선왕실이 완전히 무능하고 편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 

고종이 집권하여 균세정책과 무기자강책을 추진했을때, 대원군을 간접적 명성황후를 내세워 아버지인 대원군을 축출하고 자신이 일면에 등장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둘의 정치적 상황을 내세워서 마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정치적 암투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 고종황제. 이세사람의 정치적 지향점은 천향지차였다. 고종황제는 개화된 세력 . 즉 왕권을 중심으로 한급속한 개혁을 원했던 사람이다. 고종이 추진했던 광무개혁의 내용만 보더라도 프러시아 . 즉 독일을 이상적 모델로 생각하고 급속한 경제개혁과 군제개혁을 추진했었다 .물론 고종의 경제정책인 지계의 발급과 상공업의 진흥은 많은 성과를 보았지만 군제개혁에 있어서는 일본의 압력에 부딪혀야 햇지. 특히 군함구입때 일본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이때문에 정부예산을 엄청나게 썼지만 다시 고물로 팔려야 했어 

일본이 대 조선침략에 엄청난 공을 들인건 너무 알려진 사실이야 . 각종 사건들을 생각해보자 .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남한대토벌작전 을사조약 헤이그밀사 고종의 해외망명계획까지 . 

이 모든 것에 고종이 직간접적으로 계획되어있었어다 . 고종은 조선민중을 이끄는 구심점이었던것이다.  조선성리학적 사회를 조금만 이해하면 되는데 고종은 명성황후를 내세워서 대원군이 이끄는 보수파의 공세를 이겨내고 싶었던 것이다. 고종은 개화정책를 내세우는데 그 얼굴마담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세력을 이용하고 싶어했어 . 고종 자신을 받드는 친위세력이 양성할 시간이 필요했기때문이지 . 물론 고종자신의 능력치는 너무 자명했던것도 사실이다.

고종은 남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자신의 목숨을 잘지켜냈어. 그덕에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시해당했고, (아관파천) 아버지인 대원군은 청나라에 이끌려가게햇지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즉 동학혁명 당시에는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도움까지 한것은 자신의 정치적 철학에 위해되는 무리수 였어.

그러나 고종은 말처럼 편하게 살다 죽지 않았거든 .많은 왕실인사들이 편하게 살았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편하게 살지 못했어 . 고종황제는 일본에 무수한 죽음의 위협속에서 살았거든 .일례로 고종 독살사건에 보면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커피를 같이 마시다가 고종황제는 맛이 이상하도 뱉어냈고 순종은 다 틀이켜서 순종황제는 머리가 이상해졌다지 

헤이그 밀사사건에서도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퇴위 당해야 했고 고종은 그 수많은 압박 속에서도 옥쇄를 찍지 않았어 .( 을사보호조약) 그뿐만 아니라 고종황제는 만주로 망명할 계획까지 세우지 . 당시 아나키스트 였던 이시영이 여기에 깊게 관여했었지 . 

많은 고위급 왕실인사들이 일본에 적극협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친왕의 경우만 하더라도 24시간 감시체제와 억압을 당해야 했지. 일본에 정한 상대와 정략결혼을 하게됐고 .덕혜옹주을 보면 정말 비참의 그 자체지 . 덕혜옹주의 경우 딸은 자살하고 자신은 이혼당했으며 낙선재에서 쓸쓸히 지내다가 최후를 맞아 . 정말 최고위급 인사들은 정말 비운의 왕실이었어 . 죽기전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영친왕은 귀국을 할수 있었어. 의친왕의 경우 정말 많은수의 자녀들을 가지고 됐지만 의친왕역시 고종의 망명게획에 일조햇고 의친왕 자신도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잡히게 돼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최고위급 사대부들도 독립운동에 헌신했어. 특히 이회영 일가와 안동김씨일분의 김좌진의 경우 . 정말 당상관을 역임하고 영의정을 지낸 인물들이 많은 집안에서 그많던 재산 다 독립운동에 써가면서 구국운동에 앞장섰어 .  이회영 일가의 경우 그많던 형제들이 독립이 될때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과 한사람만이 경우 살아돌아왔어.  일반 사대부 계층들도 임정요인에 많은 사람들이 섞여있었고 

민중들도 말할 나위 없었지. 혹자는 말하지 조선은 전쟁한번 없이 일본에 먹혔다고 정말 머저리 같은 소리 골라하고 있지. 조선이 일본에 대항했던 준전쟁급의 전투가 얼마나 많았는 지 아니 
동학농민운동의 우금치 전투 , 을미의병 을사의병 13도 창의군 진공작전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 
전국에서 유생과 일반민중의 봉기가 극에 달했고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해산시에 대대장이 이에 항거해서 자살하여 순국하자 진위대와 시위대 등이 집단으로 반발 시가전을 하다가 의병으로 들어갔어 . 독립운동때에도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나라를 떠나 임정으로, 중국의 화북지방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했는 지 몰라. 

조선이 일본에 멸망당했을때 얼마나 많은 저항을 했는지 .그리고 독립을 공인받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2차세계대전중에 포츠담 회의 , 얄타회담에서 조선민족이 독립할 역량이 있다고 공인받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을사보호조약에 부당함을 만천하에 공인받기 위해서,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이나 임정의 외교적 활동 , 그뿐만 아니라 화북에서 중국에서 치열하게 전투 했던 것은 아시는 지 . 

조선이 일본에 먹힌 이유는 왕실과 사대부와 민중이 한마음으로 뭉치지 못하고 각자 개인플레이 하다가 망한거야 . 숱한 지배자들이 화합과 단결을 주장한 것도 여기에 있어 . 고구려가 수나라 100만 대군을 막고, 지금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완전한 지배를 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어.  그나라 국민의식이 하나로 결집되어있고 지도층 인사들이 의견을 하나로 모으면 외세의 침입을 충분히 극복할수 잇었어 . 우리의 대몽항쟁기를 보면 40년동안 준 전쟁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버틸수가 있었거든 . 그러나 조선개화기에 왕실따로 . 왕실내부에서 조차 다른 생각을 가진 정치인들 .사대부에 내에서 조차 위정척사파 변법개화파 시무개화파. 민중내부에서는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농민운동 , 유생과 결합하여 하는 의병활동에 있어서도 신분과 계급에 얼매여서 분화되는 현상을 촉진시켜 . 의병장 신돌석의 경우 평민의병장이라고 해서 유생의병장들이 무시하는 경향이 커서 전국의 의병이 서울에 진공했을때에 평민이라고 해서 빠지지 . 

우리의 독립이 거저 얻어진것도 아니고 우리의 독립역량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어. 역사에 만약이라는건 존재하지 않지만 극우와 극좌가 배제된 중도우파 김구와 중도좌파 여운형의 좌우합작 시도가 성공했다면 우리는 분단된 조국을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 

그리고 고종황제가 작위받고 평생을 편히 지냈다고 하는애들 좀 봐봐 . 고종황제는 작위를 받을 필요도 없는 조선의 제 1일인자 였어. 최고위급중에서 최고위급이라고 일제가 이태왕으로 격하시킨것 자체만 하더라도 큰 모험이었어. 3.1 운동날에 왜 고종의 인산일이었는 지 그 이유를 생각해봐 . 고종자체가 그당시 조선에서 가장큰 정치적 영향력과 민중에게 있어서 모셔야 할 임금이었어 고종이 일본에 협조적 이었다면, 명성황후가 비명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 자기 자신조차도 독살되어서 안죽었을지 모르지 또 아관파천 당시 을미사변때에 세자와 같이 폭행당하지 않았을지 모르지 고종은 완벽하게 무능한 인물은 아니지만 명백히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야 

만약 1945년에 일본에게 독립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과 기술교육을 받은 남성들이 주를 이루고 일본의 성씨를 쓰고 있어야 하겠지. 그 모든 노력을 숱한 희생을 해서 독립을 할수 있다는 역량을 강제조선합병 당시와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의 노력과 희생이 커서 독립할수 있었던 것이야. 만약 조선백성과 조선왕실 조선 사대부 들이 이렇게 극렬하게 저항하지 않앗다면 미국은 베트남 침공과 같은 그렇게 조선을 쉽게 봤을지도 모르지 . 그러나 수많은 희생과 외교적 노력을 미국과 영국등 여러나라에서 공인받아서 독립에 이르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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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서태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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