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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황제 폭살에 실패한 비운의 항일투사 이봉창
일본 황제 폭살에 실패한 비운의 항일투사 이봉창(李奉昌) [2]
움직이고 활동하라 (gkmtv99****)
한국 역사 5천년에서 가장 치명적인 상처와 피해를 감내해야 했던 기간은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아 일본의 노예로 지내야 했던 일제강점기였다. 우리는 일제(日帝)의 침략 통치가 1910년 경술병합(庚戌倂合)에서부터 1945년 일본 황제의 항복 선언까지 36년 동안 이어졌다고 배웠으나 실상은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때부터 일본이 조선을 잠식하고 서서히 조선 반도를 자기네 영토로 만들기 위해 침략의 발톱을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의병항쟁(義兵抗爭), 반일언론활동(反日言論活動),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 무력대일항전(武力對日抗戰), 민족교육사업(民族敎育事業),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 등 다양한 방면의 반일독립운동(反日獨立運動)을 통해 조국의 영토와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저항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가운데 일제(日帝) 침략자들을 가장 긴장시킨 반일독립운동(反日獨立運動)이 바로 일본의 주요 행정기관을 폭파하고 일본의 고관(高官)들을 암살하는 의열투쟁(義烈鬪爭)이었는데, 이봉창(李奉昌) 열사도 비밀결사단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단원으로서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에 투신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이봉창(李奉昌)은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격,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1932년 일본 황제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사변(上海事變)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 많은 일본 군인과 정치인들을 즉사시킨 윤봉길(尹奉吉), 1928년 타이완[臺灣] 타이중시[臺中市]에서 일본의 황족이자 육군특명검열사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 대장을 살해한 조명하(趙明河) 등에 비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연구조차 미미한 실정이다. 그것은 일본 황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암살을 기도하는 의거(義擧)에 실패했다는 이유 때문인데, 안중근과 윤봉길이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은 반면, 이봉창은 한 등급 낮은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아 다른 항일투사들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일본 황제 암살에 실패한 데 따른 영향력일 것이다.
하지만 비록 일본 황제를 암살하는데 실패했다고 해도 이봉창(李奉昌) 열사의 의거(義擧)가 결코 안중근(安重根), 윤봉길(尹奉吉), 조명하(趙明河) 의사(義士)의 의거보다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 부여되는 의미가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이봉창의 의거는 그 대상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천황(天皇)이었고, 거사 장소가 일본의 수도인 도쿄[東京], 그것도 도쿄의 치안을 총책임지고 있는 경시청(警視廳)의 정(正) 현관 앞이었다는 점에서 비록 일본 황제 살해에는 실패했으나, 안중근(安重根)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반일의거(反日義擧)보다 훨씬 빛나고 값진 의거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이봉창의 일본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 뒤 일제(日帝) 침략자들은 안으로는 한국인의 대일적개심(對日敵愾心)을 강하게 불러일으켜 한국 식민지 통치에 악영행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고, 밖으로는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 는 허위선전이 탄로나지 않을까 두려워 이 사건에 대한 신문보도를 강하게 통제하였다. 이것은 이봉창 열사의 반일의거(反日義擧)가 다른 어떤 거사(擧事)보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크게 긴장시켰다는 반증이 된다.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을지 모르지만 수험문제의 난이도와 합격여부를 예로 든다면 이봉창 열사의 의거(義擧)는 다른 항일투사들보다 난도(難度)가 훨씬 높은 시험을 친 데 반해 다른 의사(義士)들은 비교적 쉬운 시험을 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정부의 의거에 대한 평가느 물론 사회의 일반적 인식에서도 그 의거가 당초의 목표를 달성했는가 달성하지 못했는가만을 따졌을 뿐 그 의거의 난이도는 물론, 의거의 정치적 사회적 반향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참작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성공여부에 의한 판가름이 아니라 성패에 이르는 전과정은 물론 의거(義擧) 후에 나타난 모든 영향과 현상까지를 종합하여 검토하고 판단할 때 공정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모르던 근로자 시절
이봉창(李奉昌) 열사는 1901년 8월 10일 지금의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이진구(李鎭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봉창의 가정은 처음에는 여유 있고 유복했으나 아버지의 지병과 사기피해 등으로 이봉창이 13세 때부터 어려워졌다. 그런데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쓴 '동경작안(東京炸案)의 진상'에 따르면 이봉창의 원래 거주지는 수원이었고 아버지 이진규는 광대한 조종(祖宗)의 유토(遺土)를 갖고 있었는데 이 땅을 철도 부속지라는 명복으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리에게 강점당해 생계가 어려워져 부득이 온 식구를 거느리고 경성부(京城府) 용산으로 이주했으며 이봉창이 태어났을 때는 가세(家勢)가 기울어져 "연학(硏學)의 도(道)까지 잃었다" 는 것으로 이봉창의 집안이 기운 이유를 '일본의 토지수탈'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김구의 기술은 이봉창에게서 들은 바를 그대로 옮겼을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신빙성이 인정되고 있다.
이봉창은 8세 때부터 금정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운 뒤 11세 때인 천도교에서 세운 청엽정(靑葉酊)의 문창학교(文昌學敎)에 입학하여 15세에 졸업, 가정 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곧 일자리를 찾았다. 이봉창은 원정 2정목에 있는 와다세이도[和田衛生堂]이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에 들어가 17세 때가지 근무했는데 급료는 식사제공에 월 7~8원이었다. 이봉창은 이곳에서 일할 때 말라리아를 앓았고 관절염이 생겼는데 그후 환절기 때마다 몸의 관절이 아파 고생했다.
이봉창은 조금이라도 수입이 많은 곳을 찾아 지인의 도움으로 지금의 한강로 16번지에 있는 무라타 시게가쓰[村田柳一]이 경영하는 무라타 약국 점원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먹고 자고 월급 10월 외에 판매실적에 대한 배당이 있어 월수입은 13~14원이 됐다. 그러나 이 약국의 약품 매입방법이 좋지 않아 애써 주문을 받아와도 주문 품목이 없어 팔지 못하는 때가 많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세 되던 1919년 8월 약국에서 일하며 알게된 철도국 영업과 화물계 서기인 이노우에 사카이치[井上界一]의 도움으로 용산역의 시용부(試傭夫)로 자리를 옮겼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봉창 열사가 무라타 약국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봉창은 비폭력 평화적 반일시위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을 뿐 무엇 때문에 그러한 운동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 듯하다. 1932년 9월 16일 이봉창 열사에 대한 첫 공판 때 야마구치 사타마사[山口貞昌] 관선 변호사가 "반일시위가 벌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소감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이때까지는 반일의식(反日意識)과 독립사상에 대해 별다른 인식을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평범한 청년이 후일 목숨을 걸고 일본 황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는 항일투사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일본이 저지른 업보 탓이었다.
일본인의 차별대우와 불만.
이봉창은 이듬해인 1920년 1월 16일에 정식 역부(驛夫)가 됐으며 그해 2월 4일 전철수(轉撤手)를 거쳐 그해 10월 1일부로 연결수(連結手)가 됐다. 이 무렵 그의 형인 범태(範泰)는 함흥을 거쳐 청진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곧 아버지를 모셔가 이봉창의 집은 어머니 손씨, 조카 딸 은임(銀任) 등 세 식구였다. 이봉창의 월급이 47~48원, 조카 딸 은임도 철도국 수산부 공려사(授産部共勵舍) 양복부 직공을 있어 집안살림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이봉창 열사의 부모는 이봉창이 일본에 있을 때 사망했는데 아버지는 1930년에, 어머니는 그보다 3년 전에 각각 돌아가셨다.
이봉창이 용산역에 들어간 지 1년쯤 됐을 무렵부터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송급과 봉급, 상여금 등 모든 면에서 차별하는 것이었다. 이봉창 열사가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서 일곱번째 심문을 받은 후 쓴 수기형식의 자술서인 상신서(上申書)의 내용을 보자.
'그 당시 일본인은 정말로 행운아였다. 1년 내지 1년 반 만에 용인(傭人)에서 용원(傭員)으로 쉽게 승급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조선인은 아무리 일을 잘하고 착실하게 근무해도 1년이나 1년 반 만에 도저히 전철수(轉撤手)까지도 올라갈 수가 없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모두 유행어처럼 "하여간 倭놈의 남근에서 떨어져야 한다." 라는 말을 했다. 일본 말로 번역하면 "가령 저능아로 태어나도 일본인이기만 하면..." 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말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면 당시 일본인 연결수(連結手) 가운데 약간 저능에 가까운 남자가 2~3명 더 있었기 때문인데 이들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순서에 따라 승급했던 것이다.
...1년에 두 번의 상여금 또는 승급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조선인 연결수는 자포자기적인 근무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 나보다 1년 또는 1년 반 뒤에 채용돼 내가 일을 가르쳤고 내 밑에서 일했던 일본인들이 지금은 전철수가 되고 조차계(燥車係) 견습이 되어 거꾸로 내가 그들 밑에서 일하는 처지가 됐다.'
이러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처음에는 냉정한 자세로 대응했다. "상대는 일본인이다. 나는 내가 조선인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혹 억울하게 내던져지고 차인다 하더라도 말없이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다. 체념할 수밖에 없다." 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별받는 생활이 길어지면서 이봉창은 차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빠지게 되고 술 마시고 도박에도 손을 대는 도락(道樂)에 빠져 4~5백원의 빚까지 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봉창은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1924년 4월 14일에 사직원(辭職願)을 냈다.
이봉창은 용산역을 사직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조선에서는 차별대우를 받지만 일본에서는 차별이 없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기만을 의지하고 있는 어머니를 남겨놓고 혼자 떠나기가 어려워 꾸물거리며 1년 반 동안 별다른 직업 없이 지냈다. 그러는 동안 철도를 그만둔 후지하타라고 하는 일본인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인 식모를데리고 가고 싶다고 해서 이봉창은 조카 딸 은임을 식모로 보내며 그녀의 급료를 미리 가불받아 자신의 여비로 충당하여 일본으로 간다는 궁리를 짜냈다. 이봉창은 이러한 궁리를 어머니와 은임에게 의논하여 다행히 이들의 승낙을 받아냈다.
1925년 11월 이봉창은 은임을 데리고 후지하타씨와 함께 경성을 떠나 오사카[大阪]에 도착했다. 은임은 후지하타씨와 함께 가고 이봉창은 오사카에 남았다. 취직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봉창은 오사카 시의 고노하나구에 있는 백씨라는 한국인의 하숙집에 머물며 직업소개소 등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다. 직업소개소애 수수료를 내고 소개장을 받아 알지 못하는 지리를 여기저기 물어 겨우 찾아가면 2~3일 전에 고요됐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이곳 일에 적성이 맞지 않는다면서 모두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어느 곳이든 호적등본과 신원증명서를 내기만 하면 모두 안 되는 것이었다. 말로는 하지 않지만 이봉창은 자신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고용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일본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민족 차별을 겪다.
이봉창이 일본에서 구직(求職)을 위해 돌아다니다가 겪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이봉창이 우메타[梅田]역 앞의 시립 직업소개소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 고베[神戶] 철도우편국 열차계의 모집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바로 문의하니 신원증명서와 호적등본을 내라는 것이었다. 이봉창은 고향에 전보를 쳐가며 그 서류들을 마련하려 했으나 "히로시마[廣島] 서쪽 지역은 시모노세기[下關] 철도우체국에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곳에서는 채용하지 않는다." 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이봉창은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고용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국인은 처음부터 채용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일부러 고향에서 신원증명서와 호적등본을 전보까지 쳐가며 준비한 것이 쓸모 없게 된 것에 불만을 느낀 이봉차은 직업소개소에 가 분노를 터뜨릴까도 생각했으나 그만두었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을 당한 이봉창은 상신서(上申書)에서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결코 그쪽이 나쁜 것이 아니다. 부탁하는 쪽이 나쁜 것이다. 유치한 행동이었다. 내가 조선인임을 생각하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얼굴을 내미는 것이 잘못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같은 인간인데도 똑같이 대접해주지 않는다. 나도 일본 국민임에 틀림없을 터이다. 신일본인(新日本人)인 것이다.'
이봉창은 이처럼 일본인들의 한국인 차별에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이성적으로는 '차별의 현실'을 인정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시동인(一視同仁)한다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일본 제국의 같은 국민이며 따라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의 한 표현으로 '신일본인(新日本人)'이라는 새로운 낱말을 쓴 것 같다.
하지만 1926년 2월경에 행운으로 오사카의 가스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고, 회사의 경리와 직원들이 "당신의 이름은 발음하기 어려우니 우리가 부르기 쉬운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라." 라고 권유해 이봉창(李奉昌)이라는 이름 대른 기노시타 세이죠[木下昌藏]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객지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힘든 일만 해서 그랬는지 이봉창은 그 해 9월에 각기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으나 별 차도가 없자 12월 효고켄 기노사키군에 있는 고니시 쇼지로의 집에서 요양했다. 5개월 후에 오사카로 돌아와 가스회사에 복직했지만 경리 담당자가 사소한 일로 일거리를 잘 주지 않아 가스회사를 그만두고 부두노동자로 들어가 짐꾼 노동을 했다.
이곳에서는 매우 고된 근육노동을 해야 했지만 임금은 이봉창이 지금까지 받아본 것 가운데 최고로 많았다. 첫 날은 3월 20전이었으나 둘째 날은 3월 50전이었고 셋째 날도 3원 50전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부터는 2월 50전 내지 2원 70전으로 낮아지는 것이 아닌가. 일은 점점 익숙해지는데 임금은 오히려 낮아졌다. 선배와 하숙집 주인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기노시타 세이죠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일하니까 일본인으로 알고 일본인에게 주는 임금을 주었는데 나중에 한국인인 것을 알고 적게 준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은 이봉창은 또 한번 차별대우의 비애를 맛보며 다음과 같이 그 소회를 적고 있다.
'비통한 일이다. 이러한 하급 노동자 사회에서조차 일본인이다, 조선인이다 구별하여 차별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임금 차이, 민족 차별에 울분을 느낀 이봉창은 부두노동을 그만두고 친구의 도움으로 1928년 스미토모 신동소 아마가자키 출장소의 상용인부(常傭人夫)로 취직했다. 이봉창이 하숙한 다케무라의 집에서는 매일 20~30명 가량이 이 출장소 공작계의 상용인부로 일하러 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조선인은 이봉창밖에 없었으며 차별대우도 안 받고 오히려 야마노라는 조장의 신뢰를 사 매일 5~10명의 일본인 인부를 데리고 작업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 안에 직공 2~3명을 모집한다는 벽보가 붙어 이봉창은 서무계에 가 문의했다. 이봉창은 자기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혔으나 서무계는 한국인이라는 것은 상관없고 조장이나 그 이상 되는 사람의 보증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봉창은 곧 야마노 조장에게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보증을 청했으나 조장은 "보증인이 됐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는 이유로 이봉창의 청을 거절하였다. 이봉창은 '나를 귀여워해 주고 신용해주는 조장조차 보증해주지 않는 것은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다.
히로히토[裕仁] 황제의 즉위식과 경찰의 검속
아마가자키 출장소에서 일하고 있던 때인 1928년 11월 10일에 일본 황제 마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의 즉위식이 교토에서 거행됐다. 이봉창은 이 즉위식에 가 일본 황제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李泰王) 전하(殿下)의 옥안(玉顔)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병합(庚戌倂合) 후 신일본인(新日本人)이 되어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성안(聖顔)을 뵌 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 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聖顔)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봉창은 이처럼 순수한 마음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하숙집 앞 서양세탁소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 최순평(崔順平)과 아마가자키 출장소에서 함께 상용인부로 일하며 같은 하숙집에서 머물고 있는 일본인 마에다 세이지[前田政二]와 의논한 끝에 일본 황제의 즉위식에 가기로 했다.
이들 3명은 모두 돈을 꾸어 여비를 마련하고 11월 6일 밤 아마가자키를 떠나 오사카에서 전차로 교토에 도착하여 고조[五條]의 가라스마토오리 번화가에서 밤을 지새우고 7일 아침 6시경 이 거리의 마쓰비시 은행 앞에 마련된 일본 황제 행렬 참판석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경찰관이 나타나 참관자에 대한 몸수색을 시작했다. 이봉창은 맨 나중에 수색을 받았는데 앞의 두명은 아무 일 없이 통과됐다. 이봉창의 양복저고리에서 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꺼낸 경찰관은 잠시 읽어보다가 그에게 돌려주었다. 한글과 한문이 섞인 편지의 내용은 별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 있는 친구가 착실하게 일해서 빨리 출세하라고 써 보낸 격려의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에 한글이 씌여진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일본 경찰관은 다시 와서 잠깐 조사할 것이 있다면 이봉창을 고조 경찰서 임시출장소로 데려가 그 편지를 조사하였다. 이봉창은 별 것이 아니므로 곧 끝내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번에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도 없이 바로 유치장에 유치됐다. 이봉창은 이때 멀리 아마가자키에서 일본 황제의 즉위식 행렬을 참관하기 위해 일부러 왔으니 시간에 맞추어 참관할 수 있게 내보내달라고 경찰관에게 부탁했고 경찰관도 시간 안에 나가게 해 주겠다고 말하였으나 결국 9일 동안이나 유치됐던 것이다.
이봉창 열사는 이때 유치장 속에서 느꼈던 참담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부러 돈까지 써가며 교토의 유치장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일본 국민의 자격으로 천황(天皇) 폐하(陛下)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 그렇게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봉창은 자신에 대한 검속에서 다시 한 번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압박과 차별을 통절하게 느꼈다.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봉창은 고조 경찰서에 검속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인이 차별대우를 받는 데 대해 조선총독부가 선전한 그대로 조선인이 차별대우를 받는 데 대해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의 문화 정도가 낮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믿으며 체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빨리 일본인의 습관을 배워 무엇이든 일본인과 꼭 같이 되어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기 위해 연구도 하고 수양도 하여 어떤 일에서든 일본인에게 지지 않을 만큼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았고 이봉창은 조선인은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또 역량이 뛰어나더라도 도저히 일본인과 같은 대우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차에 고조 경찰서의 검속이 있었던 것이다.
차별과 수모를 받을 대마다 느끼는 비애와 자조(自嘲)와 함께 이봉창의 가슴 속에는 반일 감정과 민족의식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누군가 이끌어 주는 인연만 있었다면, 더불어 뜻을 같이라는 동지가 있고 실제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연줄만 있었더라면 이봉창의 반일 감정과 민족의식은 곧장 항일투쟁으로 활활 타올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봉창의 운명은 아직 그러한 기회가 올만큼 무르익지 못했다.
스미토모 신동소 아마가자키 출장소를 그만둔 이봉창은 잠시 오사카와 고베에서 인부 노릇을 했으나 노동이 너무 격심해 그곳도 사직하고 함께 일하던 혼마 시게가즈의 도움으로 1929년 2월 말경 오사카 시 히가시나리 쓰루하시쵸에 있는 야마노 가노스케 비누 도매상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쓰루하시 일대는 오사카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었지만 이봉창은 이곳에서 철저하게 일본인 점원으로 위장했다. 그전에 알고 지내던 한국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고 심지어는 그때 히가시요 토카와구[東定川區]에 살고 있던 조카 은임에게조차 왕래하지 않으며 일본인 행세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으로 위장하면 얼마간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이봉창은 소매점에서 일본인이 조선인 구매자에게 욕을 하고 호토을 치는 모습을 목도하고 크게 실망하면서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봉창은 일본인으로 변신한 것에 크게 후회하면서 조선인은 조선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거짓된 삶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야마노라는 일본인 도매상 주인은 처음에 이봉창이 일본인인줄 알고 신용해 주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이봉창이 조선인인 것을 눈치채고 그의 일당을 깎기 시작했다. 결국 그해 9월 말경 수금한 돈 100원을 갖고 도쿄로 도망친 이봉창은 스미타구, 긴시보리, 우시고메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을 했다. 그가 도쿄에서 마지막으로 일한 곳은 간다[神田]에 있는 구세군 소개소의 도움으로 얻은 혼초구[本所區] 모리가와초[林川玎]에 있는 오오키[大本] 가방점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 외판원을 했는데 그해 11월 오코쓰카에 출장 가 그곳에서 회사 돈 50~60원을 유용했다. 이봉창은 이 돈을 충당할 길이 없어 다시 판매대금 50~60원을 가지고 오사카로 도망쳤다.
상해로 가서 김구를 만나다.
오사카에 도착하여 하숙집에 투숙하면서 취직자리를 찾던 이봉창은 구조토오리에서 박태산(朴泰山)을 만나게 된다. 박태산은 중국 상해(上海)에 영국인이 운영하는 전차회사가 있는데 조선인을 아주 우대한다고 말했고, 상해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임시정부가 있어 여러 가지로 조선인들을 도와준다면서 상해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였다. 이봉창은 박태산의 말에 따라 앞으로 떳떳하게 조선인으로 살고자하는 생각에서 상해야말로 자신이 가야 할 최고의 적지(適地)라고 생각했다.
1930년 12월 6일 쓰이코에서 일본 여객선을 타고 중국으로 출발해 10일 상해에 도착한 이봉창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2, 3일 가량 묵은 뒤 어느 중국인 여인숙으로 옮겨 1개월 넘게 취직자리를 찾았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상해에 상륙했을 때 갖고 있던 18원 가량의 돈도 다 떨어진 이봉창은 양복점 주인이 운영하는 무료 숙박소 이치키앙[一樹組]에서 신세를 지면서 이번에는 일자리 대신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찾아나섰다. 임시정부를 찾아가면 영국 전차회사 취직을 도와줄 것이며 또 임시정부의 활약상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임시정부의 위치를 찾아낸 이봉창은 이듬해 1월 상하이 마아랑루우 보우겡리이 4호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민단사무소(民團事務所)를 찾아갔다. 민단 사무원 김동호(金東浩)에게 자신의 경력을 대강 밝히고 영국 전차회사에 취직을 알선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김동호는 영어와 중국어 양쪽을 알지 못하면 채용해 주지 않으므로 먼저 양 국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2~3개월 배우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봉창에게는 영어와 중국어를 2~3개월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이봉창은 할 수 없이 일본인을 상대로 일자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기독교 청년회관(YMCA)이 알려준 명화 철공소에 대장장이로 취직했는데, 그 곳에서 처음 2개월은 용돈 정도의 급료를 받았으나 그 후에는 하루 2원의 임금을 받았다.
이봉창이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주석인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만난 것은 자신이 명화 철공소에 취직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임시정부 민단사무소를 다시 찾아간 3월 때일 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봉창이 김구를 처음 만났을 때에 김구는 자신을 백정선(白貞善)이라고 소개했다. 이봉창은 수일 전에 상해에 와 처음 민단을 방문했으며 독립운동이 하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주의와 민단의 강령,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백정선이라는 가명을 쓴 김구는 "임시정부 민단사무소는 상해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의 직업소개와 상호친목을 도모하는 것을 사업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매월 각자에게서 1원 정도의 회비를 모아 부인회, 어린이회와 그 밖의 한국인이 개최하는 여러 회합을 뒷바라지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김구는 이봉창이 일본어를 조금 섞은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으며 동작이나 태도가 일본인과 흡사해 경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구는 이봉창을 두번째 만났을 때에 일본 내 사정을 두루 물었다. 일본 내에서 한국인에 대한 대우와 생활상태 등을 묻고 도쿄에서는 얼마 동안이나 살았는지 등을 물었으며 일본 황제가 나들이를 갈 때 경계가 엄중한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등을 물었다. 이봉창은 폭탄이든 권총이든 적당한 무기가 입수되면 일본으로 가 큰 사건을 일으켜도 좋다고 제의했다. 김구와 이러한 대면이 있은 후 이봉창은 자주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임시정부 민단사무소에 들러 사무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당시 임시정부의 살림은 몹시 궁금했으므로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이봉창은 수중에 돈이 생기면 곧잘 임시정부 민단사무소에서 이같은 주연을 베풀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봉창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대단한 발언을 했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따르면 이봉창이 임시정부 관계자들에게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황제를 암살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일본 황제를 쉽게 죽일 수 있다면 왜 아직까지 못 죽였겠소?"라고 반문하자 이봉창은 "내가 연 전에 동경에 있을 때 일본 황제가 하야마에 간도가 하기에 길가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일본 황제가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 때에 나에게 총기(銃器)나 작탄(炸彈)이 있었으면 어찌할까' 하는 감촉(感觸)이 얼른 생겼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봉창과 김구의 관계는 비록 그 기간은 짧았지만 매우 신뢰감이 두터웠고 돈독했다. 이봉창은 김구를 그렇게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거나 인격자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봉창은 민단의 직원들이 식사를 제대로 못 하고 있음에도 김구가 거사자금으로 거금을 꺼내 선뜻 내어주는 모습에서 그의 관대한 도량과 엄정한 공심(公心)에 탄복하고 감격하여 깊은 존경의 염(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봉창은 민단의 단장이며 다른 한국인들이 그와 만나면 인사하는 것을 보면서 김구를 상해에 있는 한국인의 총대표자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과 관계없이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깊이 신뢰하는, 서로가 상대를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의식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거사(擧事)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들어가다.
5월에 김구를 다시 만난 이봉창은 김구에게서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반드시 입수해서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8월 말경 명화 철공소를 그만두었다. 9월 중순쯤에 다시 민단사무소로 찾아가 김구에게 "거사에 필요할 폭탄을 입수할 수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김구는 "폭탄은 입수할 수 있고 당신이 일본에 가는 여비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이 거사를 결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고 싶소."라고 말했다. 이봉창은 "5~10년을 더 사는 것도 내게는 흥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폭탄이 손에 들어온다면 반드시 책임지고 거사를 결행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는 어떤 일이든 중도에 흐지부지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폭탄이 틀림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효력이 어떠한지를 확인한 다음 일본으로 갈 생각이니 폭탄이 입수되면 즉시 알려주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폭탄은 자기에게 경험이 있다면서 6~7칸 거리 내의 물건을 모두 파괴하는 위력이 있으므로 시험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니 믿어달라고 말하고 폭탄과 여비가 준비되면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義擧)에는 모두 중국 돈 3백불과 일본 돈 1백원(圓)이 소요됐다. 모두 김구 주석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3백불은 상해에서 김구 주석이 직접 준 것이고 1백원은 은행환으로 도쿄의 이봉창 열사에게 송금된 것이다. 중국 돈 3백불은 일본 돈으로 환산하면 약 150원이며 도쿄에서 송금 받은 1백원과 합해 모두 250원이 이봉창 열사에게 제공된 거사 자금이다. 이 자금은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에서 사는 한국 교민들이 반드시 일본 황제가 처단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김구에게 보내준 성금이었다. 이 자금을 얻기까지 하와이에 있는 안창호(安昌鎬), 임성우(林成雨) 등의 도움이 컸다. 김구가 이봉창에게 준 거사 자금은 바로 재미동포들이 보내준 성금이었던 것이다.
이봉창이 거사를 위해 중국 상해에서 일본 동경으로 갖고 간 수류탄은 김구가 중국군 고창묘(高昌廟)의 병공창에서 근무하는 왕웅(王雄)에게 지시하여 그 병공창에서 1개, 김현(金鉉)을 시켜 하남성의 유치(劉峙) 방면에서 1개 등 모두 2개를 마련한 것이었다. 왕웅(王雄)은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사령관을 지냈던 김홍일(金弘壹)의 중국식 이름이었다. 이봉창은 사전에 이 수류탄의 성능을 시험해 보자고 요청했으나, 김구는 이 수류탄이 폭발하면 사방 7~8칸 주위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으니 자기를 믿어달라면서 이봉창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구가 이봉창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수류탄의 추가입수가 어렵고 마땅한 시험장소도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12월 10일, 김구와 이봉창은 프랑스 공원 근처의 어느 러시아인이 하는 식당에서 만났다. 김구는 거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했고, 이에 이봉창은 "오는 17일 고베로 가는 배편을 이용해 일본으로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때에 김구는 이봉창에게 중국 지폐로 3백불을 꺼내 이봉창에게 주며 여비와 그 밖에 일본에 갈 준비에 써달라고 했다. 이봉창은 김구가 폭탄과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확실한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너무나 갑작스럽게 거사를 실행하려 하는 데다 예상보다 많은 거사 자금을 주는 데 놀랐다.
저녁을 먹은 뒤 김구는 이봉창을 어느 사진관인 듯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밤 10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집에는 23~24세 가량의 조선인인지 중국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식 옷을 입은 청년이 있었다. 거기에는 폭탄 두 개와 조선독립선서문, 태극기가 놓여 있었다. 조선독립선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선서문(宣誓文)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宣誓人) 이봉창(李奉昌)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앞
김구는 이봉창에게 폭탄을 들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그러나 이봉창은 거사를 결행하면 자신도 죽을 것이기 대문에 조선에 있는 자신의 형 범태에게 기념으로 보낼 사진을 먼저 찍어달라고 청했다. 중국 옷의 청년은 먼저 이봉창의 독사진을 촬영한 후 김구가 말한 대로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폭탄을 양손에 1개씩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여 이봉창을 찍었다. 이로써 이봉창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가입절차는 끝났다.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전위 조직체로서 일제(日帝)의 고위직 군인이나 주요 정치인 암살, 한반도 통치 기관 파괴 등 대일공작투쟁(對日工作鬪爭)을 담당하는 비밀 특공단체이다. 한인애국단은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이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난관에 봉착하자 그 타개책의 일환으로 조직됐으며,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는 이 조직의 구체적 운영과 시행사항 등을 단장인 김구에게 전권을 위임해 한인애국단은 사실상 김구의 개인조직이나 다름없었다.
한인애국단은 극비의 점조직으로 운영돼 단원수 등 그 규모와 구성 등에 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한인애국단이 김구의 책임아래 처음 발족할 때 80여명의 결사대원으로 조직됐으며 그 가운데 핵심 단원은 10여명이었던 것 같다.
마침내 12월 17일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나게 됐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폭탄을 줄로 감아 숨긴 뒤 양복을 입고 중국 요리집에서 김구와 만나 최후의 축배를 들었고 내세에서의 재견(再見)을 기약했다. 김구는 조선인의 자주권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일본의 침략에 경고하기 위해 이봉창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는 현실이 못내 슬퍼 울었지만 오히려 이봉창은 "우리가 대사(大事)를 성취할 터인데 기쁜 낯으로 헤어집시다."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이봉창은 김구와 최후의 악수로 이별하고 택시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도라야로 가 그 곳에서 점심 대접을 받고 전날 맡겨 두었던 빨간 가죽트렁크 한 개와 중국산 등나무로 만들어진 바스캣 한 개를 찾아들고 도라야를 운영하는 일본인 아주머니가 도쿄에 있는 자기 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 선물을 받아 가지고 부두로 나갔다. 부두에는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철공소의 일본인 직원들이 나와 그의 귀국길이 평안하기를 축원했다. 이 전송객 가운데는 일본 경찰관도 있었다.
일본 잠입과 거사 준비
일본 우편선에 타고 고베에 상륙한 이봉창은 폭탄을 비단 주머니에 넣어 사타구니 사이에 숨겨놓고 곧바로 한신[限神]행 열차에 올라 오사카에 가서 미나토구 야구초모 여관에 들어가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20일에는 도라야 잡화점 아주머니가 딸에게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나라[奈良]에 있는 여자사범고등학교 기숙사로 오다기리 미치코[小田切美智子]양을 찾아가 선물을 전해주고 나라를 관광했다.
12월 28일 이봉창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서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觀兵式)이 거행되며 이 식전에 일본 황제가 참석한다는 기사를 읽고 1월 8일을 거사 날짜로 잡았다. 1932년의 육군 관병식은 특별한 의의가 있었다. 그것은 만주를 삼키려는 의욕으로 가득 찬 일본 군국주의가 유조구사건(柳條溝事件)을 빌미로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후 처음으로 여는 이 관병식을 통해 일본 육군의 사기를 높여주고 육군은 이에 대해 소임완수를 다함으로써 만주 침략을 기정사실화 했던 것이다.
이봉창은 김구가 송금한 돈을 받은 후 바로 김구에게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 고 전보를 쳐 1월 8일 일본 황제 살해를 결행하겠다고 일렀다. 오와리야 여관에서 수류탄을 손질해 수류탄 주둥이에서 나무마개를 뽑고 쇠로 된 기계를 끼워 넣은 다음 안전핀을 뽑아내어 언제 어디서든 바로 던질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6일 아침 8시에 요요기 연병장을 거사 장소로 예정하고 현장을 답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열차와 승합차를 이용해 요요기 연병장을 살펴보고 7일에는 오와리야 여관 뒤쪽에 있는 베이비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기도 했다.
운명의 1월 8일, 이봉창은 오전 7시에 일어나 8시에 검은색 오버를 입고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질한 머리에 헌팅캡을 눌러 쓰고 검은 가죽구두 위에 천으로 된 구두 커버를 두르고 폭탄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들고 다마키로를 나섰다. 그리고 가와자키역에서 국철을 타고 히라주쿠로 향했다.
안타까운 거사 실패.
이봉창은 요요기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 관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행차하는 일본 황제를 이곳 히라주쿠에서 수류탄을 던져 살해할 작정이었다. 행차 때까지는 시간이 있어 이봉창은 역앞 중국 음식점으로 들어가 닭고기 계란덮밥을 주문,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형사로 보이는 두명의 남자가 들어와 이봉창은 자신의 꼬리가 잡혀 미행당하는 것으로 짐작, 위협을 느꼈다. 그런데 형사는 음식점 안주인에게 "누군가 보러 갈 사람이 있으면 주라." 면서 관병식 초대권 같은 것을 주며 "이것으로는 남쪽 출입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봉창은 이 형사들로 인해 기분이 언짢았으나 오히려 기선을 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우연히 승합차 운전수에게서 얻었던 일본 육군 헌병대 조장 오바 켄게이[大陽全奎]의 명함을 꺼내 안주인에게 보이며 "나는 이런 사람의 초대를 받았는데 어느 곳으로 들어가면 될까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주인은 명함을 형사에게 보이며 묻자, 형사는 "그 명함으로는 헌병이 지키는 곳이면 어느 출입구로든 들어갈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한 후 이봉창이 그러한 명함을 갖고 있는 것에 안심한 듯 음식점을 나가는 것이었다.
이봉창도 곧 음식값을 치르고 음식점을 나왔는데 바로 앞에 그 형사들이 있어 이봉창은 히라주쿠에서의 거사 결행을 포기하고 전철에 올랐다. 이봉창이 내린 곳은 요쓰야미쓰역으로 이곳에서 의거를 결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신문팔이 소년 오바네 요시[大翌吉]에게 물었더니 일본 황제는 이곳으로는 지나가지 않고 아카사카미쓰케를 통과할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봉창은 아카사카미쓰케로 가기에 앞서 파출소 뒤 공중변소로 들어가 수류탄을 꺼내 바지 주머니 양쪽에 1개씩을 넣었다. 이봉창이 아카사카미쓰케에 도착한 시간은 벌써 오전 9시 40분경. 이봉창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황제는 이미 이곳을 지나 요요기 연병장으로 간 뒤였고 정오경 환궁할 때 다시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이봉창은 일본 황제가 환궁할 때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시간여유가 있어 근처의 잇키 식당에 들어가 술 한 잔을 시켜 마시며 관병식을 중계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관병식이 끝났다는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나가면 너무 이를 것 같아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식당을 나와 아카사카미쓰케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황제의 행차는 벌써 이곳을 지나 맨끝 의장대 마차조차 저만치 다마치의 길모퉁이를 막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봉창은 행렬이 지나간 뒤를 보며 '오늘은 틀렸나 보다' 며 거사는 실패했다고 생각, 낙담과 허탈감이 휩싸였다. 그러나 이봉창은 마침 옆에 있던 선로인부 사쿠라이 긴타로에게 별생각 없이 일본 황제의 행차행렬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뜻밖에도 "행렬은 다메이케 쪽으로 우회하여 가기 때문에 지름길로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바로 그곳으로 빈 택시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이봉창은 재빨리 택시를 잡아타고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행렬을 봐야 하니 빨리 갑시다."라고 독촉했다. 운전기사가 시간에 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도 서둘러 택시는 아카사카미쓰케 언덕을 올라 새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육군 참모본부 앞을 거쳐 내리막길을 달렸다. 택시는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 경찰관의 제지로 멈췄고 이봉창은 할 수 없이 택시에서 내렸다. 그곳 경찰관은 한쪽 길로 가는 통행인은 제지하고 있었으나 그 반대편에는 경찰관이 없어 그쪽 길의 통행은 자유로웠다. 이봉창은 서둘러 그쪽 길로 달려갔다. 그 길은 경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경시청 현관 앞에 다다르자 정복 경찰관이 가로막았다. 이봉창은 예의 헌병대 조장의 명함을 꺼내 보이며 "이 분의 초대를 받고 요요기 연병장으로 관병식을 보러 가려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여기에서 행렬만이라도 잠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경찰관은 처음에는 안 된다고 막앗으나 잠시 후 명함을 다시 보자고 해 보여주자 통과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봉창은 단숨에 경시청 현관 앞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일본 황제의 행렬을 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7~8겹으로 모여있었다. 이봉창은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두세겹 앞으로 나가 일본 황제의 행렬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행렬의 맨 앞 마차가 이봉창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마차에는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봉창은 흥분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래서인지 이봉창의 눈에는 첫번째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일본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봉창이 알고 있는 천황의 얼굴은 아니었다. 첫번째 마차는 이내 이봉창 앞을 지나 곧 멀어졌고 이어 의장병이 뒤따르는 두번째 마차가 앞으로 다가왔다. 이봉창은 첫번째가 아니라면 두번째 마차야말로 일본 황제가 탄 마차임에 틀림없다고 순간적으로 확신했다.
이봉창은 재빨리 오른쪽 바지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들었다. 이봉창은 두번째 마차까지의 거리가 18m로 약간 멀다고 생각하며 있는 힘을 다해 수류탄을 던졌다. 이때가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45분경.
수류탄은 두번째 마차 뒤쪽 마부가 서는 받침대 아래로 떨어졌고 곧 귀청을 째는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내가 범인이다." 스스로 밝히고 체포되다.
폭음소리는 굉장히 요란했다. 주변에 있던 행렬 참관자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고 이봉창도 웬일인지 머리가 띵해져 두번째 수류탄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잊고 왼쪽으로 5~6보쯤 물러섰다. 이봉창은 수류탄이 폭발하면 주변 6~8칸 내의 물건들이 모두 엉망이 되는 위력을 갖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두번째 마차는 물론 그 주변이 모두 박살이 났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러선 뒤 살펴보니 마차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 그대로 달려가고 있었고 뒤따르는 의장병 등도 역시 말을 탄 채 달려가고 있었다.
이봉창은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류탄은 폭음만 요란했을 뿐 위력은 약했다. 이봉창은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 황제를 죽이려고 거사를 결행했는데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폭탄을 시험해 보자고 했으나 거사를 함께 논의한 김구가 대단히 위력이 있는 폭탄이라고 설명하면서 시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것을 믿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 김구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봉창의 판단 실수도 일본 황제 암살 미수에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본 황제 마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는 이봉창이 생각했던 대로 두번째 마차에 타고 있던 게 아니라 이미 지나간 첫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폭음소리의 소용돌이가 멎은 뒤 이봉창은 자기 뒤에서 "나는 아니야. 저 사람이야." 라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뒤돌아 봤다. 그 소리는 정복 순사 혼다 쓰네요시[本田桓義]에게 체포된 50세 가량의 무명옷을 입은 남자가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주장하는 항변이었다. 이봉창은 순사가 그 사람을 엉뚱하게 거사한 사람으로 잘못 알고 체포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봉창은 혼다에게 "그 사람은 아니야! 나야!"라고 외치며 자신이 거사했음을 스스로 밝히고 혼다에게 체포에 응할 자세를 보였다. 그러자 혼다 외에 경시청 수사 2과장 이시모리 아사오[石森動夫], 순사부장 야마시타 슈헤이[山下宗平], 헌병 상등병 가와이 요시[河合嘉] 등이 이봉창에게 거칠게 달려들었다. 이봉창의 오버단추와 칼라단추들이 떨어져 나갈 만큼 그들은 난폭했다. 이봉창은 "도망치거나 숨지 않을 테니 난폭하게 굴지 말라"고 일갈하고 스스로 체포되어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시종 당당한 자세로 심문에 응해
이봉창을 경시청으로 연행한 이시모리 아사오[石森動夫] 수사 2과장은 이봉창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몸을 수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봉창은 그들의 손실을 뿌리치고 스스로 양복바지 주머니에서 나머지 한 개의 수류탄을 꺼내놓았다. 이어 저고리 주머니에 있던 도쿄 시외지도를 비롯해 거사를 위해 갖고 있던 10여 가지의 물건도 내놓았다. 현금 5원 64전도 꺼내놓았다.
이어 이봉창은 경시청형사부장실에서 일절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된 가운데 도쿄 지방재판소의 미야기 나가고로[宮城長五浪] 검사정의 취조를 받았다. 이 취조는 검찰이 대심원에 예심을 청구하는데 필요한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검찰은 사건보고서가 작성되자마자 이봉창을 형법 제73조에 규정된 '황실에 대한 범죄자', 즉 '대역죄인'으로서 대심원에 예심을 청구했다.
대역죄는 이른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일본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 지키기 위해 제정한 법제도로서 1880년 7월 17일 공포된 형법 제73조에 명문화되어 있다. '일본 황제나 황후 및 황자 등 황실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행위'가 대역죄에 포함되었으며, 대역죄는 일반 범죄의 3심 제도와는 달리 대심원의 단심에 의해 형이 확정되며 그 형벌은 사형과 무기형인 존속살인죄보다 더 무거운 사형으로 규정되어 있다. 용의자에 대한 심문도 대심원의 특별권한에 속해 경찰이나 검찰은 담당할 수 없으며 대심원이 지명하는 판사만이 심문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검찰은 단지 사건보고서를 작성하여 대심원에 의해 범죄사실에 관한 예심을 청구하고 대심원의 의견요구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을 뿐이다.
거사 당일인 1월 8일에 경시청 형사부장실에서 대심원이 지명한 도쿄 지방재판소의 아키야마 다카히코[秋山高彦] 예심 담당판사로부터 첫 심문을 받았는데, 도쿄 지방재판소 서기 아라이 유타카[新井豊]는 이봉창 의사의 심문 태도에 대해 "이와 같은 중대한 범행을 감히 저지른 데 대해 자책의 관념이 추호도 없는 듯했다."라고 기록했다. 이봉창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몹시 당당한 자세로 심문에 답변했다.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던 이봉창은 1월 9일 오후 2시 아키야마 판사의 구류장(拘留壯)에 의해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됐다.
두번째 심문은 1월 11일 이봉창 열사가 수감된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역시 아키야마 판사에 의해 아라이 서기 입회로 41개 문항에 걸쳐 진행됐다. 세번째 심문은 이튿날인 12일에 52문항에 걸쳐 진행됐다. 이봉창은 이 문항의 마지막 답변에서 "내가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죽을 각오로 천황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인상 깊은 진술을 했다. 네번째 심문은 역시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아키야마 판사의 요청에 따라 나가사토 류[中里龍] 도툐 지방재판소 판사에 의해 진행됐다. 문항은 32개 5쪽 분량이었다. 다섯번째 심문은 2월 9일에, 여섯번째 심문은 12일에 각각 아키야마 판사에 의해 진행되었고, 13일 일곱번째 심문과 3월 11일의 여덟번째 심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민단사무국장 김구(金九)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마지막 예심심문인 아홉번째 심문은 6월 27일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아키야마 판사에 의해 이봉창이 기도했던 일본 황제 암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선의 독립에 대한 문제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그러나 판사의 질문은 예전 여덟 차례의 심문과 같은 것이었지만 이봉창의 진술은 지금가지의 확신에 찬 답변과는 정반대되는 심약한 것으로 예심조서에 기록돼 있다. 이봉창은 지금까지 백정선(白貞善)이라고 불러왔던 인물을 김구(金龜)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의거(義擧)를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본 황제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 "조선의 독립은 전혀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봉창의 진술이 갑자기 바뀐 원인은 무엇일까?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학연구원 원장은 이 조서가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역죄는 천황(天皇)의 성덕(聖德)을 증거하기 위해 경관, 검사, 판사들이 범인이 후회의 뜻을 표명시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고 대역죄 연구학자의 결론을 인용,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없다 하더라도 아홉번째 심문조서를 보면 누구나 이봉창의 돌연한 진술에 의심을 품고 조작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김구 체포에 실패한 일본 수사관들
일본 수사당국은 이봉창이 말한 백정선(白貞善)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추궁했으나 이봉창은 "민단 간부인 백정선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한결같은 답변만 했다. 그러나 거사 다음날인 9일의 검사 취조에서 백정선의 정체가 곧 김구임이 드러났다. 검사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작성한 요주의 요시찰인 카드 가운데 상해 체류자 사진만을 추려 본적 이름 등을 가리우고 이봉창에게 보이며 백정선의 얼굴을 지적하라고 했다. 이봉창은 사진이 현명하지도 않은데도 카드번호 제586호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백정선이다."라고 말했는데 실은 그 사진은 김구의 얼굴이었다.
한편 상해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장은 거사 당일인 1월 8일 밤 경시청 형사부장이 보낸 백정선 수사지시 전보를 통해 백정선의 인상착의를 통보받고 즉각 백정선을 김구라고 판단했다. 그 인상착의는 키가 5척 5촌 정도, 둥근 얼굴에 통통한 편이며 머리는 짧게 깎았고 체격은 보통, 복장은 주로 중국 옷이나 때로 양복도 입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총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상해 일본 총영사관은 경찰서를 통해 김구의 소재수사를 벌이는 한편 김구의 주거지가 프랑스 조계임에 따라 프랑스 총영사관에 그의 체포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무라이 꾸라마쓰[村井食松]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는 프랑스의 게쿠랑 총영사에세 협조를 요청했고, 이에 따라 아카기 사무관과 스기무라 경부가 프랑스 총영사관 정치부장 사라레이와 수사방침에 대해 협의했다. 그러나 양측이 합의한 것은 '강경한 활동'은 피하고 우선 김구의 거처를 찾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신중하게 내정(內偵)을 벌인다는 것으로 프랑스 총영사관은 일본 측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앞서 일본 총영사관은 의거가 있기 직전인 1월 5일 김구가 프랑스 조계 자래미 마랑로 보경리 4호 한국 임시정부 청사 내에 있음을 밝혀내고 프랑스 측의 양해 아래 체포에 나섰으나 조선인의 내통으로 미리 행방을 감추어 검거에 실패한 바 있다. 일본 총영사관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김구를 추적했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보면 김구는 프랑스 조계내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 소재조차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김구에 대한 수사가 이처럼 지지부진하자 일본 사법성은 도쿄 지방재판소 검사 가메야마 신이치를 상해에 파견했다. 가메야마 검사는 23일에 상해에 도착해 총영사관 경찰서의 수사를 지휘, 김구가 프랑스 조계내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사무에 종사하고 있음을 2월 23일에 확인했다. 2월 26일 오전 11시 반경 서문로 226호 고창묘 병기창 근무원 왕웅(王雄)의 집에 들러 점심을 먹은 사실도 확인함에 따라 김구 체포의 기회포착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 체포는 가메야마 검사의 뜻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당초 1개월 예정의 체류기간을 연장하며 수사를 벌였으나 김구의 체포는 커녕 소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일본 사법성은 3월에 들어서자 대심원 검사국의 고다 마사타케[古田正武]와 앞서 파견했던 가메야마 검사를 파견하면서 서기 에가와 니로쿠[江川二六]을 대동시켰다. 3월 18일에 상해에 도착한 이들 두명의 검사들은 이봉창의 일본 황제 암살 미수 의거(義擧)에 관한 여러 가지 실정을 정밀히 조사하는 한편 공범자의 체포에 전력을 경주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이들이 상해에 파견된 후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김구는 체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 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했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자 일본 측의 김구 체포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프랑스 조계의 경찰은 4월 30일 이 의거와 관련한 검색을 벌여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한국인 11명을 체포, 일본 경찰에 인도했다. 일본 경찰은 이 가운데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집행위원 김철(金撤)의 조카 김덕근(金德根)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김구의 소재를 진술받았다.
김구는 약 한달 전부터 프랑스 조계 환용로의 러시아인 아스타호프(Mrs. Astahoff) 부인의 집 안쪽 2층의 한 방에서 엄항섭(嚴恒燮)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김덕근은 때대로 우편물 신문 등을 김구에게 전하는 역할을 해 여러번 그 곳을 출입했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 후 김구는 자신의 거처를 감추는 데에 극히 부심하여 임시정부 간부들조차 아는 자가 없고 다만 안공근(安恭根; 安重根 義士의 사촌동생), 엄항섭, 김철 등 3명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김철은 김덕근에게 김구의 거처를 절대로 발설하지 않도록 엄중히 지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18세의 소년 김덕근은 불에 달군 인두와 전기의자를 이용한 일본 경찰의 잔인하고 가혹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김구의 거처를 진술했던 것이다.
일본 총영사관은 헌병대장과 협의해 30여명으로 조직된 김구 채포 행동대를 급파, 다음날 6일 새벽 4시 환용로 118의 19호 김구 거처를 완전 포위했다. 그리고 프랑스 경찰본부에 통보하여 프랑스 형사 파견을 요청하고 그들과 함께 즉각 수색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김구는 벌써 그곳을 떠난 뒤여서 김구 체포는 완전히 실패했다.
일본 총영사관의 김구 체포 노력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결과는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일본 수사당국은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 체포에 2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자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와 상해 주둔 일본군 사령부의 3자 합작으로 현상금을 60만원으로 3배 올렸다. 그럼에도 김구의 체포에는 끝내 실패했다. 김구 체포 실패의 이유는 정보의 불확실성도 그 중의 하나였으나 그것보다는 프랑스 조계의 비협조가 가장 큰 이유였다.
김구 체포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상해의 일본 총영사관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김구 체포에 대한 협조에는 극히 비관적 견해를 갖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요직 인사들 중 대부분이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고, 베트남의 독립을 주장하는 콘테 왕자를 비호하는 일파가 일본 국내에 있는 한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력은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무라이 일본 총영사는 프랑스 정부가 상해의 한국 독립운동을 일본에 대한 베트남 독립운동의 단속요구의 책략으로 이용할 속셈이 있으며, 따라서 프랑스 당국은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탄압을 방해까지는 안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사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에서 무라이 총영사는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주모자의 체포와 한국 독립운동의 근절은 프랑스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기대하기 어려우며 심하게 말하자면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고 비관했다. 그는 또한 상해 총영사관 경찰서에 특고과(特高課)를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희망해왔고 그것이 제대로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야겠지만 프랑스 정부가 태도를 바꿔 적극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단속하려는 의향을 갖지 않는 한 프랑스 조계내의 한국 독립운동 주모자 체포는 그다지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사료된다고 보고했다.
사형선고와 순국
이봉창 열사에 대한 공판은 단 두 번으로 끝났다. 첫번째는 구형 공판이고 두번째는 선고 공판이었다. 1932년 9월 16일 오전 9시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법정에서 열렸다. 재판장을 맡은 와니 데이키치[和仁貞吉] 대법원장은 배석판사들과 의논한 끝에 이봉창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그런데 공판조서에는 이봉창이 일본 황제 암살을 기도한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처음 심문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 황제를 죽이려 했다."고 자신에 찬 진술을 한 것과는 대조된다. 이것은 대역죄인에 대한 사법관계자들의 불문율(피고인이 사후에 뉘우치고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함으로써 일본 황제의 권위를 높이려는 경찰, 검찰, 법관들의 불문율) 때문에 이같이 조작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이봉창은 9월 30일 두번째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선고되는 순간 이봉창의 태도나 얼굴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법관들이 퇴청하자 이봉창은 변호인석에 아무말 없이 인사한 뒤 양손을 간수에게 내밀어 수갑을 차고 조용히 법정을 뒤로했다. 이봉창의 공판기록은 바로 하야시 라이사부로 검사총장에게 보내졌고 하야시 검사총장은 이를 근거로 하여 오야마 사법상에게 사형집행 명령을 요청했다.
일본 사법성이 발표한 이봉창 열사의 일본 황제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개요 보고서는 이봉창을 파렴치한으로 폄하하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봉창의 의거(義擧)를 '숭고한 의거'가 아니라 '저질의 범죄'로 절하하여 이 의거의 의의를 희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봉창은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도쿄 서북쪽으로 멀지 않은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의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됐다.
한국독립당 선언 내용
이봉창(李奉昌) 열사가 일본 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된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 진영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여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이봉창의 의거(義擧)에 대해 민첩하게 대응했다. 김구(金九), 안창호(安昌浩),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의 핵심요원이기도 한 한국독립당의 주요 당직자들은 이봉창의 의거가 일본 황제를 살해한다는 당초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으나 그것이 일으킨 반향과 파장이 예상보다 큰 데에 매우 고무됐다.
이봉창의 의거가 결행된 이후 한국독립당은 1월 10일에 장문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이번에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황제를 저격한 사건에 대하여 한국 민족과 여러 독립운동가의 입장에서 저 포악한 일본의 죄상을 파헤쳐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뒤이어 있게 될 결과를 밝혀 두고자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흉악한 저 섬나라 도적의 무리는 이미 한국을 병합하고 우리 동포를 어육(魚肉)으로 삼았으며 만몽(滿蒙)까지도 남김없이 병탄하려고 우리의 우방을 쓸모 없는 집신 버리듯 하고 있다. 저들은 혈족끼리 서로 결혼한 괴수를 내세워 스스로 만세일계(萬世一系)라 부르며 자랑삼고 있으며, 저들은 온갖 나쁜 짓을 횡행하는 우두머리로 앉아 인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천황(天皇)이라 일컫고 가장 높은 자리에 걸터앉아 있다. 저들은 악덕으로써 한국과 중국을 겸병(兼倂)하고자 못된 짓을 더해가고 있으면서도 뉘우치는 바 없으니 천인을 공노하게 했다.
어찌 한국인에게만 머리에 옷칠을 하려고 할 뿐이랴. 중국인도 쪼개서 물그릇을 만들고 있으나 저 일본 황제는 본래 죽일 만한 가치도 없다. 그의 지력(智力)은 시세를 가늠하기에 모자라고 그의 위엄은 원로와 정당 당수를 거느리기에 모자란다. 물론 명치제(明治帝)와 대정제(大正帝)와 소화제(昭和帝) 할 것 없이 저들은 모두가 같은 소굴의 한패거리요 괴뢰일 뿐이다. 한국인은 본래 그를 죽일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가 원수(元首)의 자리에 있으며 온갖 죄악이 모이는 자리에 있는 것이 그 첫째요, 그 적도(賊徒)를 무찌르려면 먼저 그의 왕을 죽여야 하는 것이 그 둘째요, 우리 조국을 위해 원수를 갚는 것이 그 셋째요, 천벌을 내리고 인권을 신장하는 것이 그 넷재요, 우방을 위해 치욕을 풀어주기 위함이 그 다섯째요, 백성들이 참을 길이 없으면 무도(無道)한 임금을 주(誅)하는 것이 그 여섯째요, 그들의 국체(國體)를 고쳐 우리 주권을 회복하기 위함이 그 일곱째요, 못된 오랑캐에게는 그 응당한 벌을 내리고 온누리 사람에게는 뉘우침을 주기 위함이 그 여덟째요, 하늘에 순(順)하고 사람에 응(應)하며 천하를 고동(鼓動)케하여 인류를 해방시키려 함이 그 아홉째이다.
이번 이봉창의 저격은 그 동기를 살펴보면 바로 이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오직 일본 군별과 원로와 제국주의자들의 선봉자가 밤낮으로 그 원인을 만들었다.
한국인도 이에 자극을 받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분을 크게 느껴온 터이라, 30년 동안의 의인(義人)과 열사(烈士)가 전에 없이 뒤를 이어 나타나고 있으니, 즉 장인환(長仁煥)에게 있어서의 스티븐스, 안중근(安重根)에게 있어서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재명(李在明)에게 있어서의 이완용(李完用), 신민회(新民會)에게 있어서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강우규(姜宇奎)에게 있어서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양근환(梁槿煥)에게 있어서의 민원식(閔元植), 김익상(金益湘)에게 있어서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김지섭(金祉燮)에게 있어서의 니주바시[二重橋], 송학선(宋學先)에게 있어서의 깅고몽[金虎門], 조명하(趙明河)에게 있어서의 구니신노[久邇親王]와 같은 예가 모두 그러하다.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가운데 제국주의자들이 그렇게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살펴보건대 저들은 표리가 상응하는 이리떼처럼 간교하여 관백(關白)의 여풍을 이어받아 천자(天子)인양 권세를 농락하며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의 나라 황제와 황후를 시해하며 이웃 나라의 강토를 빼앗고 거리낌없이 마구 죽이면서 그 독사와 같은 짓을 다하고 표범과 이리와도 같은 잔학한 횡포를 거듭하였던 바, 한반도의 온 들녘에는 뼈가 쌓여 산이 되고 동쪽의 먼바다 밖에는 피가 흘러 붉게 물들어 있으니 이는 모두가 일본 군벌의 원로들이 서로 더불어서 꾸며낸 것으로 그 제국주의자들의 흉극(兇劇)을 동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삼아 연출하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저들 일본인은 실로 우리 한국인의 손을 빌려서 자신의 황제를 죽이려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오직 이봉창 한 사람만이 이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아니며 2천 3백만의 가슴 속에 다 이봉창과 같은 결의가 깃들어 있어 제2, 제3, 아니 2천만 모두가 이봉창과 같은 사람으로 될 것이다.
대한민국 14년 1월 10일 한국독립당'
중국의 반응과 언론 보도
이봉창(李奉昌) 열사가 일본 황제를 암살하려는 의거(義擧)를 결행했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중국 언론의 보도는 안타까움과 놀라움과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 사실이 중국에 전해지자 그렇지 않아도 만주사변(滿洲事變) 이래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하여 평소에도 대대적으로 반일(反日) 보도를 실어온 중국 신문들은 이 의거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중국의 민국일보(民國日報)는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이 정확하게 일본 황제에게 명중되어 그의 목숨을 빼앗아야 했을 것을 그렇게 되지 못하니 안타깝다.'는 기사를 타전했고, 익세보(益世報)라는 신문은 '이 장대한 의거(義擧)를 인구 2천만의 작은 나라 한국인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고 보도했다. 또 남경(南京)의 중앙일보(中央日報)는 '4억 인구의 중국이 이렇다할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벌이지 못한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중국 언론의 보도에 대해 일본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 항의하고 "천황 폐하의 살해에 실패한 것을 애석해 하거나 일본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는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보도를 한 신문사 사장과 기자들의 해고를 원한다."고 요구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와 지방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대해 처음에는 각 신문사에 주의를 주었고 앞으로 더욱 신중히 하도록 계고하겠으나 일본의 언론 보도도 중국을 자극하는 일이 적지 않다고 지적하고 일본 언론에 대한 단속을 요구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하며 일본의 요구를 비켜가려 했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가 워낙 강경하고 집요했고 중국 주둔 일본군의 위협 등으로 중국 측은 할 수 없이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그러나 중국 언론은 이러한 강경조치에도 불구하고 언론 본연이 정신과 자세를 흔들림 없이 지켜 계기가 있을 때마다 이봉창 의거 관련기사를 게재했다.
한편 영국의 로이터통신은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범행동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다시 폭발한 인도의 스와라지 운동이 이봉창에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폭탄을 던지도록 자극한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1월 8일 동경발로 전세계에 일본 황제 암살 미수를 타전했다.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라디오 방송은 1월 10일 이봉창의 의거 사실을 보도하면서 "이 의거(義擧)는 일본 천황의 제위(帝位)와 그 신성(神聖)에 대해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고 있음을 명료하게 증거하고 있다."고 방송했다.
의거(義擧)가 일본에 끼친 영향
일본의 식민지 노예인 한국인이 일본 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사실은 일본 정관민(政官民)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일본 수상 이누카이 다카시[犬養毅]는 곧장 황궁에 입궐하여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를 통해 황제 마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에게 문안을 여쭈었다. 이어 낮 12시 35분 수상관저에서 임시 긴급각의를 열어 경시청 보안과장 모리오카 지로[森岡二郞]와 경시총감 초엔렌[長廷連]으로부터 이봉창 의거의 진상보고를 받고 이어 내각이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 논의했다. 논의결과는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내각의 책임이 크므로 총사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 이누카이 수상은 오후 5시에 입궐하여 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경시청 간부 7명과 육군 헌병대 지휘관 6명이 징계처분되었다.
이봉창 의거에 대한 문책은 지방의 관계공무원에 대해서도 단행돼 사이토 무네요시 교토부 지사, 시로네 다이스케 효고켄 지사, 엔도 류사쿠 아이치겐 지사 등 3명의 지사를 비롯해 10명이 견책처분을 받았다. 상해의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村井食松]는 1월 9일 이봉창 의거와 관련, 외무차관 나가이 마쓰죠[永井松三]에게 자신의 진퇴문제를 적절히 조치해달라고 상신했다. 한편 상해 총영사관의 아카기 사무관과 하나사토 경찰서장은 무라이 총영사에게 자신들의 진퇴를 묻는 문서를 냈고 무라이 총영사는 이 사실을 외무성에 보고했다.
한편 국내의 친일파 단체인 동민화(同民會)를 중심으로 한 중추원 참의와 그 밖의 민족반역자 34명은 "불경한 악질 범죄를 저지른 봄안아 한국인인데 대해 대단히 송구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 사건은 광인(狂人)의 치태(痴態)에 불과하며 저희들은 깊이 참회하고 근신하면서 내선일화(內鮮一和)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는 견강부회(牽强附會)적 내용의 낯뜨겁고 부끄러운 추태를 보이는 사죄 성명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다. 박춘금(朴春琴) 등 일부 민족반역자들은 일본 황궁 앞에서 사죄의 망배(望拜)를 하면서 일본 고위인사에게 사죄전보를 타전하는 등 온전한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광태치용(狂態痴容)의 망동(亡動)을 일삼았다.
이봉창(李奉昌) 의거(義擧)의 역사적 의의
이봉창 열사의 의거는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서 1930년대에 다시 재개된 의열투쟁(義烈鬪爭)의 첫 거사였다.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인한 임시정부의 입지조건의 약화를 비롯해 인물난과 재정난, 그리고 사상적 혼란 등으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임시정부는 이의 타개책으로 김구에게 일본 행정기관 파괴와 일본 고관 암살 및 공작투쟁의 전권을 위임했다. 김구는 이를 위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했으며 그 제1호 단원이 이봉창 열사였고 제1호 의거가 이봉창의 동경작안(東京炸案)이었던 것이다.
이봉창 의거는 일본 황제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나 직접 일본 황제를 겨냥한 최초의 폭탄 의거라는 점에서 그것도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도쿄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경시청 현관 앞에서 결행됐다는 점에서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 중국에서도 커다란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국내에서는 내각이 총사직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대대적인 문책인사가 단행됐다. 국제적으로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중국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른바 '1.8 상해 반일운동'이 일어났으며 한인애국단 제2호 단원인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다.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중국인의 반한 감정도 이봉창 열사의 의거와 뒤이어 결행된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모두 불식되어 우호관계가 회복됐다.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속적이고 고겅적인 지원이 이루어진 것도 두 사람의 의거가 계기를 이룬 것이었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를 단순히 물리적 힘과 폭력으로써 사태를 타결하려 하는 테러리즘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온당하지 않다. 다른 국가를 멸망시키고 타민족을 말살하는 식민통치에 맞서 감행하는 피식민지 국민의 폭력은 불의(不義)에 대한 징치(懲治)라는 가치기준에서 당연히 정의(正義)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는 이봉창 개인이 멋대로 일본 황제에게 폭탄을 던진 사적인 폭력행위가 아니었다. 이봉창 열사는 "내가 천황을 죽이려 폭탄을 던진 것은 한국 민족이 전반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되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 민족을 대표하여 제일선의 희생자로서 결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자신의 의거에 대해 명쾌하고도 확고한 사상과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이봉창 열사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평가는 그 실체와 실상에 비해 그리 높은 편이 아닌 것 같다. 해마다 이봉창 열사 의거일을 맞아 열리는 추모행사만 하더라도 다른 의사(義士)의 그것과 견줄 때 상대적으로 초라한 느낌을 어쩔 수 없다. 이봉창 열사에 대한 추모사업도 보잘 것 없는 형편이다.
다른 의사에게는 오래 전에 세워진 동상과 기념비 등이 즐비하지만 이봉창 의사에게는 1995년 11월 6일 효창공원에 세워진 동상이 고작이다. 다른 의사의 생가는 모두 복원되고 성역화됐으나 이봉창 의사의 그것은 2004년에 복원한다는 계획만 세워져 있을 뿐 그 실현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학술회의도 모 대학이 2000년과 2001년에 개최한 것이 제대로 된 것의 전부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이봉창 의사가 남긴 숭고한 독립사상과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의 발현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대략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이봉창 의사 의거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회적 평가다. 이봉창 의사의 표피적이고 사눌적인 성과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파급한 각 분야의 영향을 각론적으로, 그리고 도 총론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상응한 대접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는 이봉창 의사에 관한 자료의 추가수집과 체계적인 정리다. 이봉창 의사 의거에 대한 자료는 현재 일본 최고재판소에 보관돼 있는 이봉창 의사 공판관련 문서들인데 이봉창 의사 의거가 일본에서는 이른바 '대역죄'로 취급되어 문서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다행히 예심조서와 제1회 공판조서 등의 '연구용'으로 공개돼 이봉창 의사 의거에 대한 연구에 도움에 됐으나 이 문서만으로는 이봉창 의사 의거를 소상하고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증인 심문조서와 최종 공판조서 등 관련문서의 추가수집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봉창 의사 의거 관련자료는 일본 외무서 외교사료관에도 상당량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이봉창 의사 의거 후 상해 일본 총영사관이 외무성에 보고한 이봉창 의사 관련문서와 김구 선생에 대한 수사문서 등의 체계적 정리 등도 시급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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