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펌] 조작된 기억, 그때 그시절[경부고속도로]반대의 진실을 아십니까

lionet 2010. 7. 31. 17:56
조작된 기억 ‘경부고속도로 반대’ 야당 시위 사진은 조작..

 

사진을 보고 말하자면..

첫째 얼굴이 없다는것.. 
둘째 몇군데 피켓의 글들이 지워진것.
셋째 '고속도로 반대'란 피켓글은 새로 쓰여졌다는 것이 그 옆 피켓글과 대조해보면 확연하다는것.


실제 크기로 보시려면 클릭해 주세요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이후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 인사들이 건설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며 인터넷에 유포된 사진. 사진은 일부 내용 변조 등으로 미뤄볼 때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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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인식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야당은 ‘목숨을 건 반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을까. ‘국민과의 대화’ 전후로 인터넷에는 한 장의 사진이 돌았다. 굴삭기 앞에 두 남자가 누워 있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밑에는 다음과 같은 사진 설명이 붙어 있다. 

“공사현장에 몸소 드러누워 진보, 개혁, 민주화운동을 몸으로 실천하신 ‘움직이는 양심’ 슨상님.” 굴삭기 앞에 누워 있는 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던 1960년대 후반부터 완공되던 1970년,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국회의원이었다. 그러나 출처 불명의 이 사진 속 인물은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야당 인사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뒤에 도열한 사람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의 ‘끝까지 결사반대’라는 글씨는 원래 글씨로 보이지만 이것이 경부고속도로와 관련된 사진이라고 주장이 가능한 ‘고속도로 반대’라는 글씨는 누군가가 사진에 가필(加筆)한 것이다. 사진을 살펴본 장신기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은 “실제 누워 있는 사람의 옷차림이나 체형 등은 김대중 당시 신민당 의원과는 다르다”면서 “일부에서는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이 김 전 대통령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002041139461&code=114

위에 글은 경향신문 기사의 글이며..기사 하단에 보면 윗 기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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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시절[경부고속도로]반대의 진실을 아십니까.
 
2009년 이다.그런데 툭하면 아니 걸핏하면 여기저기서,그것도 아주 오래된 20세기,1960년대 후반,햇수로는 42년이나 지난 케케묵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반대했다'는 예를 들며 정당한 논리마저'반대를 위한 반대'라며 못을 박고,그때와 똑같은 논리라며 치부하는 현실을 보고,그렇게 논쟁을 묵살하는 그런 현실을 맞닥들였기에 여기서 출발했다.심지어 그것도 MB와 여당인 한나라당의 대표 뿐만 아니라 여당의원,심지어 수구논객들 조차도 매번,그러한 예를 입에 달고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 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희한하게도 그들이 내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반대'란 용어를 들이대면,순간 잠재 되었던 어떠한 이미지가 와 닿아 결합된다는 사실을 주목했다.이는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다른 이들도 공통적으로 느꼈으리란 짐작이다.그렇게 건설 당시'반대'했던 예를 제시하게 되면,순간 이성의 작동이 잠시 멈춘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이를 염두 했으면 좋겠다.달리 얘기하면,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를 뜻하는가.결국 궁극적으론 '반대를 위한 반대'란 말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알게 모르게 내재되었던 어떠한 이미지가 연관되어 설득할 수 있는 뿌리란 사실이다.그래서 근본적으로 힘을 받는다는 점.이러한 점을 주목하고 고민해 봐야 한다.뭘까.아마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지나온 세월,해서 지독히 '꽉'뿌리 잡은 그 이미지일 것이란 생각이다.지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정관념의 근원.이를 주목하고 여기서 출발해야 그나마 해결,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이것이 조그만 단초일 듯 싶다.

달리 해석하면,틀림없이 감정에 호소하는 측면이 된다는 뜻도 될 듯 하다.결과를 두고 보면 즉,당연하고 정당한 논리마저 무너질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고정관념과 이미지,종교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여기서 종교는 빼고,그렇다면 남는 것은 고정관념과 이미지,그 사실에 주목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왜냐하면,지금 이시각도 이 사회는 그러한 이미지에 의해 점령되어 있어,거의 이성들이 멈추고 상실 되어가며,또 상식과 정의마저 무시 당하고 철저히 외면받는 현실을 보며 느낀 점이기 때문이다.이것일 게다.분명히 그것이 점령하고 있어,사회가 상식이 맞지 않게 되고,해서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따르는 작동하는,그 무엇.그러니 상식적으로 좀처럼 받아 들일 수가 없게 되는 이유.그게 원인인 듯,맞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그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정확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한다.경부고속도로로 한정해 접근해 봐야 겠다.정말로,과연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 당시 '반대' 그랬을까.기본적으로 생각해봐도 그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반대'.어떻게 '반대'.그것이 시대적으로 가능한지,상상이 되는지 의문이 든다.다들 아시다시피 강력한 반공과 공포를 조장한 독재시대 였다.그것을 기본으로 철저히 인권유린 시대 였는데,앞뒤가 맞지 않는,안되는 까닭이 그것인 게다.이러하니 그혹독한 시절에 '반대'를 했다는 전제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 될듯 싶다.무엇보다도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명분이 맞지 않다.그렇다면 당연히 당시 상황이 그들이 말하는 사실과 다르다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도 될 듯도 하다.

또,부수적으로 이러한 사유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그세력들의 이력 면면히 살펴보면 군사독재에 의한 잔악무도한 과거 전력이 속속 베어 있는 이유가 근본적이지 않을까 한다.그들이 주장하는 말과 행동은 항상 반대로 움직였었던 결과를 그간 많이도 보아 왔고 경험 했다.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영혼없는 세력이라 느꼈다는 점에서다.불신의 벽.크다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충분히 물,심증이 있기 때문이다.이 또한 크게 한 몫하고 있기 때문이고,현실도 변함없이 똑같다는 생각이다.그러니깐 지금도 역시,저들이 무시하는 의도와 저의가 따로 있을 것이란 의구심.이것일 것이다.강한 의구심이 드는 마음 한 구석에 이와같은 이유가 자리잡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한 까닭에,그래서 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진실과 정보를 찾아갔으며,그래야 그나마 합리적인 논리 반박의 자료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그시대 기록물들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당연히 그 무엇에 대한 의문이 앞선 까닭이라 먼저 밝혔다.당시 자료,각종 학술지,논문,신문,언론매체등을 종합적으로 찾아 정리해 본 것이다.자료를 수집,검토한 결과,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한마디로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관련하여 '반대 자체가 없었다'는 표현을 해야 정확한 표현이라는 사실이다.결과를 보면 그렇다.어떻게 95%이상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찬성을 했었는데,왜 지금에 와서,반대 했다는 근거를 대는지 모르겠다.살펴보면,다만 시기와 재정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을 뿐,건설 자체에 대해 반대는 희박하다는 것이다.이러한 결과를 찾다보니 지금,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기본적인 사실 조차도 호도하고 교묘한 술수 의중을 반영했다는 짐작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시각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왜곡,시작해서 떠벌리는 발언이,선동에 가까운,그래서 시중에 떠도는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덮어씌운 표현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았으면 좋겠다.그러니까 건설당시 반대의 예 자체는 기본적인 진실 접근에서 틀렸다는 것이고,완전히 어긋났으며,논리적으로도 맞지않는 어불성설이며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결국 현재 진행중인 MB와 여당인 한나라당은 밀어붙이기를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한마디로 치졸한 언론플레이라 할 것이다.정확히 표현하자면 혹세무민을 하기 위한 기만 발언이라 지적할 수 있을듯 하다.

당시 간행물에 기록된 내용이 있어 그대로 옮겨 인용한다.

"경부고속도로 계획이 발표된 직후 월간 [세대]1968년1월호에서 각계인사 100명에게 찬반 여부를 조사한 결과,68%가 무조건 찬성,27%가 조건부 찬성,5%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가 고속도로 건설이 옳다는 점에 비추어,이와같은 압도적인 찬성 분위기는 근대화와 개발주의의 세례를 받기 시작한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한편,조건부 찬성을 포함하여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유보적인 32명의 의견은 무리한 재정지출에 대한 우려가 12명,투자우선순위상 시급하지 않다는 주장이 8명,제외된 지방의 발전 지체4명,기타8명의 분포를 보였다.이가운데 재정부담이나 투자순서에 대한 지적은 개발국가의 근대화 대세를 거스르는 비판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다.그대신 계획 초기에 가장 적은 수가 응답한 지역간 불균형 문제는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완공 때까지 학계나 국회에서 점차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갔다."  (역사비평 중에서)

계속 더 살펴 봐야 겠다.자료(논문)에 나타난 사실을 요약해서 당시 상황과 야당의 반대 논리 기록을 정리해서 옮겨 보았다.보다 객관적으로 신중하게 판단해 주었으면 좋겠다.부연하자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언론플레이 인지,아닌지에 대해서.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로'반대를 위한 반대'였는지,아닌지.아니면 타당했는지 아닌지를 판단 했으면 한다.그리고 또 국민여론.글쎄,당시 국민의 반대 여론은 신문이고 보도고 아예,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인데 어디서 확인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편,개인적 생각으론 당시 그시대에 국민의 뜻,의사가 존재 했을까.모두가 다 아는 초강력독재,그리고 그가 지닌'개조해야 할 대상이 국민'이란 사고를 지닌 인물이,그러니 여론,그것은 순진한 기대다.시대를 생각해보면 답이 보인다.답은 없었다고 해야 한다.그저 유일하게 지시와 복종,자칭 엘리트라는 관치.그것만 존재했으리란 짐작이다.그리고 그 당시는 여론조사 기업 자체가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왜,외면하는지 모르겠다.만약 그런 여론조사와 신문보도가 있었으면 정확한 수치와 근거를 제시했으면 좋겠다.그런후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었다는 정확한 근거를 대야 논리적으로,설득의 앞뒤가 맞지 않나 싶다.결과를 보면 그러니까 당시 국민들은 반대가 전혀 없었으니 경부고속도로 여기서는 완전한 찬성했다는 반증일 듯도 하다.이렇게 해야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다는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기록으로 들어가 본다."[고속국가도로]라는, 당시 국민들에게는 낯설고,생소했던 낱말이다.처음 전해 들은 것은 1967년 4월 18일이었다. 그해 5월 3일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현직인 박정희와 야당의 윤보선과 치열한 선거전을 전개하고 있던 때였다. 대전에서의 첫번째 합동유세에서 박정희를 수행했던 한 정부 고위관리가 박후보의 공약사업의 하나로서, 가속적인 경제발전에 따른 수송량 증대에 대응하기 위해 1.서울∼인천,2.서울∼동해안, 3.서울∼목포,4.서울∼부산 사이에 폭 50M 이상의 고속도로를 건설키로 하고 현재 건설부에서 기초조사 중이며 호남선 철도의 복선공사는 1968년 초에 착수할 계획임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어서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5월 2일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가진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박정희의 공약사업으로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의 중간부터 시작하여 제3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에 걸쳐 40억달러를 투자, 대국토 건설사업을 전개 하겠다고 밝혔다.

그 내용으로는 1.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등 4대강 개발, 2.동해안.서해안을 잇는 환상철도 건설,3.부산.인천.군산 등 10대 항만의 보수 등과 더불어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강릉.부산.목포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을 펴 나가겠다고 밝혔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크고 국민들의 관심을 끈 것이 고속도로 건설계획 이였다."

또 다른 논문자료에 나타난 내용도 간략하게 발췌했다.67.11.07 경부고속도로 정부안이 정부에서 국회로 보내진다.제62회,국건위,먼저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첫째가 시기상조고, 둘째가 재정에 무리가 따른다는 이유였다.

그런 상황이면,시기적,시대적으로 힘들더라도 야당의 반대가 당연히 있어야 맞지 않나 싶다.정당한 이유를 근거를 대며 다섯가지 사유로 반대를 했다는 기록이다.(당시도 지금의 MB정부처럼,동문서답과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닮았다)이유를 요약해 옮겨 본다.

첫째,교통집중투자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서울-부산간에는 이미 복선철도가 있는데 굳이 중복투자하여 수도권과 영남권등 일부지역에 편중적인 발전과 특혜를 부여하였다는 지역편중 우려를 들었다.(이러한 차원의 논쟁은 이농민의 서울집중이 정점에 이르고 있던 60년대 후반의 상황에서 열띠게 전개될 만했으나,대중매체나 학술잡지 등에서 뚜렷이 공론화되지 못했다.그보다는 영남으로의 직접 효과를 둘러싼 둘째 쟁점이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었다)

둘째,고속도로에 예산편중 제기했다.경제성장에 있어 수송 수요가 늘것이고 이에 도로의 건설은 당연히 필요한 것임을 인정 하지만, 왜,일반도로 증설하기 보다 고속도로에 더 많은 예산을 책정하느냐의 비판이였다.(도로 건설 예산이 131억 인데,고속도로70%,일반도로30%배정 문제를 제기 했다)

셋째,고속도로 건설은 1965년 10개년계획으로 착수되었다.그 이전으로 보면 국토개발종합계획이 앞서 있다.본격적인 것은 1965년 11월부터 1966년 6월까지 교통부의 의뢰를 받아,한국 교통상황을 조사한 IBRD(세계개발은행)의 보고서는 철도 중심의 수송체계를 도로 중심으로 전환시켜야 함을 강조하면서도,유료 고속도로의 건설보다는 국도.지방도의 포장에 치중할 것을 주문했다는 보고서다.이러한 권고에 따른 우선순위 문제제기를 야당이 한다는 것이다.고속도로 건설의 문제 제기다.1965.09.20 IBRD(세계개발은행)에 용역의뢰한 결과에 따르면 화물10.2%,여객11.5%씩 매년 수송수요의 증가가 예상되어 도로건설의 필요성에 동의 하였으나,우선 순위를 권고한 내용이 있다.그러니까 남북횡단이 아니라 동서횡단을 제시한다는 것이다.(IBRD(세계개발은행)권고 사항이다.우선순위다. 1.서울-강릉,2.포항-부산-순천-여수-광주,3.삼척-속초,4.대전-목포등 4개선의 건설이 더 시급하다고 권고한 내용인 것이다)

넷째,건설사무소 즉 관리감독기관의 직급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고속도로 건설사무소의 소장을 1급 공무원으로 임명했는데 이들을 감독하는 건설부의 국토보전국장은 2급 이어서 건설사무소에 대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는 비판 이였다.

다섯째,더불어 법률적 절차 하자 제기를 했다.서울-오산(수원)간의 공사는 예산에 없는 공사였고,이를 국회에 보고하지 않고 착공하였다는 것이다.이 도로의 초기공사는 설계도 제대로 끝나기 전, 즉 설계와 공사가 병행되었기 때문이다.특이한 것은 고속도로의 노선 결정이나 건설 공정계획도 박정희가 직접 독단적으로 결정하였다는 점이다.

이상 다섯가지 문제점을 지적,제기했다.

이것이 당시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하는 이유인 것이다.과연 이러한 야당의 지적이 틀리다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과연 이러한 야당의 지적을 앞뒤가 맞지 않는 문제로 폄하되어야 하는지,시대에 맞지 않았는지 되레 묻고 싶다.또한 국민의 반대는 무엇에 근거하여 반대 했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당시 언론은 고속도로 건설에 있어 매우 신중하고,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그래도 여섯가지 문제제기를 언급했다)
첫째,중소도시가 퇴보할 가능성을 들었다.
둘째,서울,부산의 2대도시의 대자본가가 중소도시에 침투함으로서 중소도시의 경제가 대도시 자본에 의존하게 되어 2대도시에 자본이 집중되고 중소도시에 경제가 위축될 가능성을 제시 했다.
셋째,농어촌의 지나친 도시화를 우려했다.
넷째,수송난 해결의 본래의 목적에 부응되고 철도의 지나친 사양화를 막도록 고속도로는 화물의 수송에 주력하여야 하는데 반대 결과가 되기 쉽다.
다섯째,이상과 같은 마찰은 지역간의 불균형 성장을 가져 올 수 있다.
여섯째,향토적인 민속성의 보존이 어렵다.

당시 이런 상황이였던 것이다.결국 야당의 시기와 재정,지역불평등을 고려한 반대 문제를 제기한 것이 반대의 전부인 것이다.반대의 끝이였다.

이에 건설을 강행하고자 하는 정부측 반대논리로 설득에 들어 간다는 것이다.(당시 조사단 발족67.12.15,단장,안경모),

야당과 언론의 견제에 대해 -경제적 타당성조사(인구 및 산업의 대도시 집중을 방지하며 중소도시의 균형있는 발전과 농공업의 병진을 촉진시킬 뿐 아니라,유통과정의 신속화로 시장권을 확대시키고 농어촌 소득증대를 기할 수 있는 기회라고 규정,그래서 도시와 농촌의 거리가 단축됨으로써 공장이나 산업단지가 한 지점에만 집중되지 않고 분산되며 이에 따라 인구도 분산 될 것으로 보아,고속도로가 대도시와 중소도시.농촌간 균형발전을 낳을 것으로 전망)-고속도로 필요성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한다.여기서는 네가지 논리를 편다.

1.고속도로의 특징 2.철도건설보다 도로의 건설을 우선해야 하는 이유 3.남북종단도로 건설의 이유 4.국방상의 이익인 무기이동을 중심으로 한 안보면을 강조한다는 것이다.이러한 내용을 언론을 통해 67.12.05 백년대계로서 필요 불가결한 타당성을 언론에 게재한다.(62~68년 경제 성장율 8.3%,교통수송의 증가율은 13.5%로서 매년 10억원의 손실을 보고 있다는 주내용이다)

그러면서 비교 예를 일본에서 찾았다는 것이다.당시 일본에선 건설중인 동명(도쿄-나고야)고속도로를 만들고 있었는데(69년 개통) 총비용이 3,500억원(용지 보상비가 14% 차지)으로 Km당 8억원 소요된다.그렇다면 비교한 예시에 대입하면 서울-부산간 450Km이면 약 3,600억원 정도의 비용이 나왔어야 맞는데,결과적으론 331억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참고:일본은 63년에 완공에서 64년에 개통한 아이치현~효고현 194Km 메이신고속도로가 일본1호, 고속도로)

왜냐하면 당시 67년 국가 총예산이 1,643억원 이였기 때문이다.그래서 건설할 수 있는 기관에 소요될 비용,즉 건설비용산출을 지시하게 된다.일종의 견적,공사내역과 비용을 제출하게 하였는데 건설부650,서울특별시150,재무부330,육군공병감실490,현대건설280억이 나왔다.설계기준과,노선,물량,공법이 각각 달랐다는 사실이고 거의 주먹구구식 이였다는 기록이다.그래도 당시 건설부가 제시한 금액은 국제규격에 가까웠으며 최소한 금액이였다는 사실은 기록된다.그러나 건설부와 서울시의 중간인 금액인 재무부330억으로 건설비용을 책정하고 실행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과감히 실행할 수 있는 자신감의 정서는 무엇일까도 한번 생각해 보았다.훗날 대일청구권자금이 27억 투입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이것이 무엇보다도 큰 자신감의 원천이리라 본다.개인적 사견이다.하물며 그 후유증은 나중 준공후 90년대 까지 유지보수비만 1527억이나 들어간다는 사실이 있다,'선 개통 후 보완' 내세웠던 구호.이것의 산물 이였다.아무튼 옛날신문을 찾다보면 경부고속도로와 관련한 용어중 '누더기' '땜질'이란 용어가 가히 엄청나 차마 셀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얻은 결과다.67.12.12 결정내용이다.331억(휘발류세 도입139,통행세60,차관도입양곡판매84,대일양곡청구권27,통행료도입15,기타예산6)총 331억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처음 예산 편성을 했을 당시에는 IBRD(세계개발은행)에 차관등으로 27%요구 하려 했으나 권고사항과 맞지 않으므로 거절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또한 정치적인 흐름에 앞선 선점 판단을 고려, 시대상황과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 있다.결국 저의가 있었음이 읽혀진다.그리고 여론 수렴과정이나 절차,순서 이러한 과정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봐야 한다.독단 결정에 미리 착공하고,결과가 그렇다.결국 여론수렴과정은 없다.일사천리는 외부적으로 나타낸 것이지만 속을 보면 속칭 무대뽀 그 자체가 맞을 듯 하다.화려한 결과물은 보여지고 있지만 뒤에 숨겨놓은 내막은 아무튼 말 그대로 밀어붙이기의 대표적 사례로 뽑을 수 있을듯 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예산은 최종 371억으로 정산을 하나 정부발표에 따른 신문에 나타난 수치 결과를 보면 429억원(68.02.01.~70.07.07 2년 5개월 428Km)이란 수치가 있다.내막은 자세히 안나온다.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더 내막을 들여 봤으면 한다.용지(토지,분묘,과수등)보상금과 관련한 내용이다.고속도로 건설과 구간 확정과 관련하여 발표전에 앞서,대충 노선을 정한후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미리 불러 청와대에서 얘기가 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이어서 전 지자체로 이어진다는 내용이다.뭐냐하면 용지확보 내용이다.군사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기록들이 있다.그후 관권인 각 지자체를 동원하여 각종 소유주들에게 기습적으로 그것도 일사천리로 '반대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각서를 먼저 확보하고,받는다는 사실이다.또한 기만에 해당하는 기록들도 있다.그렇게 속속들이 들어나는 내막도 있다.결국 토지등의 사용승낙 즉,기공승낙서를 1주일만에 받아낸다는 사실이 나타난다.군대작전이 연상되는 시기가 맞다는 논문 내용이다.그렇게 이루어 졌다.

그 결과로 총582만7천평,매수금액이 13억8천만원,평당 금액이 평균 236원.약42년전 일이다.그러니까 당시 헐값으로 매수했다는 사실이 정확히 기록 되어 있다.거의 무상 아니 기부 수준이였다는 것이다.그들이 앞장서 국민들의 무지를 교묘히 이용한 측면이 있다는 내용도 정확히 적시되어 있다.공사금액의 4.3%란다.일본의 14%와 비교되는 내용이다.거기다가 공사비기 1/10 이였으니까,결과적으로 보면 0.4%의 결과다.이를 뭐라 설명할지 모르겠다.상상하기 힘든 시기다.논문들을 찾다보니 당시 고속도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부족이 그것이였다.그런 시대 였다.

그런데 그당시 이러한 자료들을 보다보면,과연 '반대'를 운운하는 국민,세력이 존재 했을까.기가찬 혹세무민일 따름이다.당시로 들어가 보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하여 야당의 반론을 제외하곤,언론은 뭐라 해야 할지.반대여론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유일하게 야당과 언론이 제기했던 문제점이 그것이 반대의 전부다.그런데 지금 그 제기했던 문제점들은 엄연한 현실로 나타났다.그렇다면 당시 제기했던 '반대'란 문제점 제기,과연 이것이 틀렸다고 생각되나.지금 42년전에 제시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고,지금도 여전히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옳지 않나 싶다.옳바른 지적이고,목숨가지 내걸은 견제,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국회의원의 본분이라 생각한다.지나간 역사다.'만약에'라는 역사가 역시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지나온 역사라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그러나 더우기 왜곡되지 않고 객관적이고,올바르게 정확한 진실을 알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꼭 든다.


주변부 포드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고속도로는 대단위 수출공단의 집적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수단이자 그 자체로 자동차의 생상과 소비를 대중화시키는 계기가 된다.실제로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된 68년11월에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정식으로 가동되었다.그런데 고속도로는 물자만 나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드나드는 통로이기 깨문에 수도권 집중과 동남임해공단의 집적을 눈에 띄게 만드는 그것은 정치적,사회적 효과가 논란거리로 될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63년 5대 대통령선거 때까지 우리나라에는 지역주의 투표형태가 없었다.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윤보선이 서울,경기,강원,충청지역에서 많이 득표한 데 반해,박정희는 영남 외에 호남과 제주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았었다.
 
그러나 1차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울산공업센터가 조성되고 67년부터 시행된 2차 경제개발계획에서는 포항의 제철소 입지가 결정되면서, 67년의 6대 대통령선거 때는 호남주민들의 소외감이 투표성향으로 감지되기 시작했다.영남과 충북,강원에서는 박정희가 압승한 반면,서울.경기.충남과 함게 호남에서도 4년 전과 달리 윤보선이 이겼던 것이다.하지만 이때까지는 다른 지방에 비해 영남에 개발이 집중된다는 가시적인 증거가 크게 없었다.
 
그런 와중에 건설에 들어간 경부고속도로는 차츰 싹트고 있던 지역불균등 발전에 대한 심증을 물증으로 바꾸어 놓을 만 한 것이었다.(지역불균등 발전의 두차원-서울 집중과 영남의 집적)그 이후에는 이를 이용하여 박정희 개발독재의 수혜를 독점했던 기득권층의 발언권이 되살아나면서 강화되고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결국 현재 정치균열의 가장 일차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지역감정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더 지속적인 뿌리를 갖게 된다.이러한 기득권이 우리 사회에 강건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원인이자 그 배경이라 할 수 있다.결국 그 속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유지시키고자 했던 보수 기득권세력의 영향력 유지 및 확장 의도에서 강화되고 확대되었던 현상이라 할 수 있다.(역사비평 중에서)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은 경인고속도로다.이것이 대한민국
고속도로 1호다.역사의 기록이다.1968년 12월 12일 서울∼인천 구간의24km, 4차선이 개통되면서 부터 막이 올랐다는 기록이다.그리고 뒤이어 경부고속도로인 것이다.그러면 당연히 경부고속도로가 2호인데 어떻게,여전히,역사 사실마저 왜곡.이상하지 않나.현재 이것이 대한민국이고 현주소이고 정치인 것이다.

자료에 나타난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해 옮겨 본다."최종적인 노선 결정은 서울-대전 구간이 1968년 1월에 확정,대구-부산 구간은 경주-언양 경유로 하느냐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1968년 4월 25일에 현 재노선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착공일도 구간별로 다르게 지정 되었다.4개구간으로 나누어 착공을 하게 되는데, 공사의 난이도에 따라 제1차 착공은 67년 11월부터 시작된 서울-수원-오산 구간,68년 4월 3일에는 오산-천안-대전 구간, 68년 9월 11일에는 대구-경주-부산 구간,대전-대구 구간은 69년 1월 4일에 착공한다.

그리하여 완공된 시기도 각각 다르게 된다.서울-수원간은 68년 12월 21일,수원-오산간은 12월 30일, 오산-천안간은 69년 9월 29일,천안-대전 구간이 12월 10일에 완공되었고, 대구-대전(언양.울산)간은 12월 29일에 개통된다.전구간 개통은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연장 428km, 4차선)의 완공을 보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내용이 있다.1968년 5월 2일 제65회 국회본회의 제13차 회의에서 발언이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겉치레를 위한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것이었다.발언이 더 있다.생략한다.왜냐하면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언인 것이다.그리고 어차피 30분만에 예산집행에 대해 공화당 단독으로 강행 통과된다는 기록이다.이때 발언 갖고 지금도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문제제기를 하는것 같은데 날짜를 생각해보고 오히려 1년후에 터질 사태와,그후 연이어 터질 사태를 생각하면 아마도 선견지명에 가까운, 놀라운 혜안을 갖추고 있었다는 그런 느낌 아닐까 한다.아무튼 여전히 상실의 시대적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주목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여기에 또 있다.도로건설은 자유당과 전 장면의 민주당에서도 검토가 있었다 한다.정부예산이 워낙 궁핍한 관계로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그 시대가 30%가 국고채무공사로 도로개량과 중요 교량공사가 진행되었다 한다.5.16 이후 세계식량기구 지원의 480-2 밀가루 지원사업으로 농공업에 필요한 치수,이수들은 국민적 근로사업으로 큰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건설사업 진행으로 경제가 성장되는 시기라는 사실이다.그어려운 국가재정 형편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을 이용하고 순수내자로 예산집행이 가능하게 되어 고속도로 착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정확한 자료는 IBRD(세계개발은행)의 자금지원으로 경인고속도로 착공 및 전 국토 100%포장을 10년 계획이 입안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시대적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진행하고 있을 당시 발생하는 기막힌 상황이 줄이어 발생한다.당시 상황은 거의 한달에 한번 대한 늬우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 사진,영상과 더불어 정부가 의도하는 발언이 불도저와 함께 극장과 영상매체,TV,라디오,신문을 통해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전달 되었다는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다.달리보면 심각한 세뇌일 수도 있다.그렇게 계속,반복적으로 방영 되었다는 사실도 꼭 염두해 두고 시대상황을 판단 했으면 좋겠다.그들이 알고 있는 어떠한 효과가 나타날지는 ,언론의 역할을 조금만 아는,독일의 괴벨스를 떠올리면 충분히 내용이 보인다.이미 역사에 기록되었고 경험도 했다.이면이 있는 것이다.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 진행중에 총독체제를 굳히기 전초인 1969년 9월에 3선 개헌안이 전격적으로 변칙 통과된다는 사실이 있고,또한 이듬해 1971년의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과 또 당선되고,72년 시월 유신이라는 시기라는 점이다.

충분히 의도적인 묘한 일치점이 보인다는 것을 반드시 상기 했으면 한다.이렇듯 경부고속도로는 얽혀 있는 내막이 따로 있었음이 아닐까 싶다.아무튼 실상은 그러했고,결과 또한 그들의 의도대로 착착 진행되어 갔다는 사실이고,지금도 진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당시 대일청구권,베트남전쟁,서독,중동특수 등 외적 변수요인이 없었다면 야당의 지적은 아주 현명한 지적이였음을 알 것 같다.또한 시대적으로 보면 경제의 초석(철강,조선,자동차,화학등)이라 칭하는 산업은 중동의 50억불 선급금이 크게 한몫 한다.여기까지 하고 마쳐야 겠다.비록 간추린 요약분 이지만,그들의 행보와 건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뜻있는 이들의 현명한 판단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같이 더더구나 하물며 합리적이고 정당한 논쟁마저 회피하고 심지어 과학적 근거마저 무시하고,오로지 매번 과거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도 '반대를 위한 반대' 였다는 둥,단순히 이미지로 치부해 버리는,즉 엉뚱한 이미지를 결합해서 감정의 끝을 끄집어 덮어 씌우는,그래서 정당한 주장을 무마시키는 결과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다시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들은,항상 일이 있은 후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의 이익과 부합되는 엄청난 혜택의 결과를 낳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고,경험 했기 때문이다.그러니 발언의 깊은 속에는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저의가 있겠고,국민들 모르게 하려는 혹세무민과 연결 됐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이는 뇌리를 떠나지,지울 수가 없는 이유인 듯 하다.

결국 전혀 사실과 관계가 없는 이미지에 의한,치졸한 근거의 접근방식이란 사실이 아닐까 싶다.한편으로 억지에 불과하다는주장을 감추기 위한,논리의 근거가 박약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는 뜻도 될 듯 싶다.

마무리 해야 겠다.여전히 되풀이,그들은 지난번 청계천 공사할때 여론조사(75%찬성,15%의 반대,15%모르겠다)는 거의 대부분 찬성을 하였다는 사실조차,여전히 대부분 반대했던 것처럼,계속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렇게 반복적으로 뚜렷하게 세뇌하고 있다.사려깊은 이들은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어떠한 의도인지 알것으로 생각되지만,대부분의 순진한 국민들에게는 그것이 전부로 받아들여 질 수 있어 진실로 왜곡될 수 있음이다.이러한 왜곡이 고착화되어 점점 더 이성이 상실되는,더욱 힘든 사회로 만든다는 사실이다.그래서 걱정이다.

끝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신문에 나타난 국민의 반대 여론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만약 있었다면 극소수의 학생 의견,교수 의견이 있었을까 싶다.결국 코끼리 비스킷도 안될 듯 한 내용을 전부로 호도하고 있다.결코 반대는 시대흐름도 맞지 않고 대세도 아니였다는 것이다.꼭 다수가 반대했었다는 근거를 제시해서 그들의 주장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입증되길 바란다.덧붙여 지금 진행중인 4대강은 60년대에도 있었다.내용은 이수와,치수가 전부라 짐작한다.그간 40여년동안 정비한 이것일 듯 하다.

지금의 4대강은 시대적으로도 맞지도 않고 국민의 요청도 없다는 생각이다.이것을 말하고 싶다.한편으론 그 아이디어의 출처도 궁금하다.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빌린것인지,또 무슨의도인지. 아무튼 지금의 누구는 60년대 보여주기식의 토건마인드를 지녔고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이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그게 지배적 아니 전부라 본다.그래서 그런 마인드를 지닌,가지고 21세기 지도자라고 앉아서 주도하는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암울하기 그지없다.힘든 대한민국의 현실이자,시대반영이다.

 
아무쪼록 더이상 무고하고 순진한 국민들에게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해서 퍼뜨리는 사태는 그만 했으면 한다.제발 역사적 사실 마저 왜곡해서 진실을 가리는 비겁한 행동들은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