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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회에 대한 몇가지 기사

lionet 2014. 11. 25. 15:24

세종 52권, 13년(1431 신해 / 명 선덕(宣德) 6년) 6월 25일(정사) 2번째기사
강원도 감사 고약해가 효자·열녀 등을 천거하다

 

강원도 감사 고약해(高若海)가 아뢰기를,
“부모를 섬기고 상제(喪祭)를 삼가하여 효행이 온전히 갖춘 자와, 남편이 죽었으되 신의를 지키고 정절(貞節)을 굳게 지키며, 시부모 섬기기에 효성을 다한 자를 삼가 아래에 기록하오니, 청컨대, 정문(旌門)을 세워 풍속을 가다듬게 하옵소서. 강릉부에 거주하는 고 판사(判事) 이장밀(李長密)의 아들 전 낭장(郞將) 이성무(李成茂), 전 사직(司直) 이선무(李善茂), 사직 이춘무(李春茂), 사정 이양무(李陽茂) 등은, 아비가 죽고 어미는 나이가 79세인데, 병이 들어 먹지 못하여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잉어회[鯉魚]를 맛보고 싶다. ’고 하니, 여러 아들이 강가에 이르러 얼음을 깨고 구하였더니, 잉어 1마리가 뛰어 나오기에 가지고 가서 어미에게 공궤하여 그 병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 

 

 


 

성종 15권, 3년(1472 임진 / 명 성화(成化) 8년) 2월 18일(을유) 4번째기사
효우와 절의가 특이한 복승정·첩 지지 등 여럿을 포상·정문하게 하다

 

예조(禮曹)에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영유(金永濡)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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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淸州) 사람 종사랑(從仕郞) 경연(慶延)타고난 성품이 정직하여 어버이를 색양(色養)2057) 하며, 반드시 감지(甘旨)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질병이라도 있으면 근심하고 걱정하며 몸소 약을 다리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 아비가 일찍이 병에 걸려 낫지 않았는데 정월에 큰 비가 내려 냇물이 불었습니다. 아비가 신선한 회[鮮]를 맛보고자 하므로, 경연(慶延)이 즉시 냇가에 가서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 그물을 쳤으나 물결이 사납고 급하므로, 경연은 다시 물결이 순하게 흐르는 데로 그물을 옮겨 하루 종일 밤을 새면서 기다리니, 마침내 큰 고기 두어 마리가 그물에 걸렸습니다. 가지고 와서 바치니, 아비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밥을 먹지 못하고 오직 물고기만 먹고 싶었는데 이제 얻어 먹게 되니 매우 입에 맞으며, 내 병이 차도(差度)가 있을 것 같다.’하였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과연 병이 나으니 사람이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뒤에 아비가 죽자 경연은 3일을 물과 장을 입에 넣지 않고 초상의 제도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여 젓[醢]·장(醬)을 먹지 않고 지나치게 슬퍼하며 뼈만 남았으며, 3년 동안 여묘(廬墓)하면서 일찍이 그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가묘(家廟)를 세워 삭망(朔望)에 반드시 제사하고,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고하여 살았을 때와 같이 섬기고, 새 음식물이 생기면 반드시 천신(薦新)하고, 천신하지 않고는 먹지 않았습니다. 어미를 섬기기에 더욱 부지런하여 반드시 주육(酒肉)으로 봉양(奉養)하고, 밤이면 어미가 잠자리에 누워야만 물러났고, 나이가 40이 넘었어도 출세하기를 일삼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혹 벼슬하기를 권하면 말하기를, ‘궁(窮)하고 영달(榮達)하는 것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구한다고 되겠느냐?’ 하였습니다. 아비가 일찍 노비 2구(口)를 주었는데, 아비가 죽은 뒤 경연(慶延)은 아우와 누이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귀신을 믿고 부처를 숭배하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물리치니 향리(鄕里)가 감화(感化)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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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68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6월 12일(계미) 5번째기사
충청도 청주의 효자 경연을 인견하고 이조에 서용을 명하다

 

충청도(忠淸道) 청주(淸州) 사람인 효자(孝子) 경연(慶延)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오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네가 벼슬을 구(求)하는 뜻이 없다 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성현(聖賢)의 훈계(訓戒)를 믿는데,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있지만,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없다고 들었으므로, 스스로 나서기가 어려웠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같은 효성(孝誠)은 옛사람에게서 찾으려 해도 쉽사리 얻을 수가 없다. 옛 말에 이르기를, ‘두 마리의 잉어가 얼음에서 뛰어나왔다.’고 하였는데, 지금 너에게 그와 같은 일이 있었으니, 천도(天道)가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증험(證驗)할 수가 있었다. 내가 그것을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하고, 곧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에게 이르기를,
경연(慶延)이 일찍이 벼슬한 적이 있는가?”
하니, 현석규가 대답하기를,
“본래 문달(聞達)6310) 을 구하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계사년6311) 에 효성이 알려져 특별히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어미의 상(喪)을 당하여 나아가지 아니하였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충(忠)과 효(孝)는 둘을 갖추기가 실로 어려운 법이다. 이제 내가 너를 쓴다면, 너는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경연이 말하기를,
“만약 쓰인다면 죽음으로써 기약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책은 얼마나 읽었는가?”
하니, 현석규가 아뢰기를,
“이 사람은 경오년6312) 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는데, 오늘 아침에 신이 물어 보니, 스스로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읽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경연이 말하기를,
“신은 사서(四書)《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요순(堯舜)의 군민(君民)이 되는 것으로 마음먹지 아니하면 인신(人臣)이 아니고, 순(舜)임금증자(曾子)가 어버이를 봉양(奉養)하는 것을 본받아 어버이를 봉양하지 아니하면 자식이 아니라고 스스로 여겼는데, 비록 신이 뜻은 있었지만, 그것을 어찌 시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물고기를 구하였으니, 너의 효심(孝心)이 실로 지극하다. 그러나, 물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옷을 벗고 들어갔다가 빠져서 나오지 못한다면 어버이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너는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을 것이 아닌가?”
하니, 경연이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는 병이 나서 들어누운 지 1년 남짓 되었는데, 죽[飦粥]조차 거의 먹지 못하니, 지쳐서 여윈 나머지 뼈가 드러나게 되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하늘에서 비가 내려 물이 앞 개울에 넘쳐 흐르는데, 신의 아비가 갑자기 말하기를, ‘생선회[魚]를 맛보고 싶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서 물이 얼어 붙었으니 그것을 어떻게 구하겠느냐?’ 하였는데, 그때가 정월 6일이었습니다. 신은 곧 이웃에 사는 어부와 함께 그물을 들고 개울에 나가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는데, 물이 깊은데다가 물살이 세어서 그물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어부가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의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지금은 물고기를 구할 때가 아니니,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겠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아닐세 이 무슨 말인가? 병든 아버지가 거의 죽게 되어 물고기를 맛보고 싶어 하니, 나는 마땅히 힘을 다할 뿐인데, 이 무슨 말인가? 하고, 다시 완류(緩流)에 그물을 설치하였으나, 하루 낮 하룻밤이 지나도 끝내 소득(所得)이 없었습니다. 신이 해를 쳐다보고 목놓아 울면서 말하기를, ‘옛사람은 능히 얼음을 깨뜨리고 뛰어나오는 물고기를 얻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니, 나는 실로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구나!’ 하였는데, 잠시 후에 까만 물고기가 걸렸으므로, 너무 기뻐서 잡아 살펴보니, 산 것 같지가 아니하여 신은 다시 슬픔이 북받쳐 울면서, ‘본래 산 물고기를 잡아 아비에게 드리려고 하였던 것인데, 지금 이 죽은 물고기를 얻었구나!’ 하자, 갑자기 물고기가 가느다랗게 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마리의 큰 붕어가 걸렸으므로, 신이 또 잡아서 살펴보니, 죽은 것 같은 데도 또한 까만 물고기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비늘이 많이 상했으므로, 신은 금새 죽을 것이 두려워 옷으로 싸가지고 돌아와서 동이에 넣고 손으로 어루만지니, 물고기는 곧 헤엄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곧 까만 물고기로 회를 만들어 드렸더니, 아비가 먹고 말하기를, ‘내가 언제나 먹던 것들은 그 맛을 알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것으로 그 맛을 알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그물을 설치한 지 오래 되었으므로, 물고기가 우연히 이른 것뿐인데, 이것이 무슨 성감(誠感)이라 하겠습니까? 뜻하지 않게 헛된 예성(譽聲)이 성상(聖上)께 들리어 번거롭게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황구(惶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였다. 경연의 말이 해를 쳐다보고 목놓아 울던 일에 이르러 울음을 참느라고 스스로 말을 잇지 못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다. 지극한 정성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가 있었겠는가.”
하고, 인하여 이조(吏曹)에 명하여 서용(敍用)하도록 하였다. 현석규가 이르기를,
“멀리서 와서 여관에 묵고 있었으니, 반드시 양식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쌀과 고기를 내려 주소서.”
하였다.

 

 

( 가물치가 매운탕꺼리로도 맛있고 회로도 맛있다는 얘기 들은적 있는데...

경연씨의 아버지가 '언제나 먹던 회는 맛을 잘 모르겠던데, 오늘 먹은 회로 그 맛을 알게 되었구나'는 그 까만 물고기는 아마도 가물치인것 같죠? )


 

 

성종 215권, 19년(1488 무신 / 명 홍치(弘治) 1년) 4월 11일(갑진) 2번째기사
지평 성세명·정언 유인유가 중국 사신 접대의 소홀함을 들어 도감 관리의 국문을 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성세명(成世明)·정언(正言) 유인유(柳仁濡)가 아뢰기를,
명나라 사신(天使)유관(遊觀:두루 돌아다니며 구경)19534) 할 때에 영접 도감(迎接都監: 조선의 사신영접을 담당한 임시관서)에서 지공(支供:음식물을 대접)하는 모든 일이 기명(器皿:음식 그릇)회구(灸:회와 구이)19535) 의 종류에 등한히 하고 신경을 쓰지 않아서, 고기를 벨 때에는 날이 무딘 칼과 누추한 그릇을 썼으므로 중국 사신의 〈말에〉 금도(金刀:금으로 만든 작은 칼)19536) 옥완(玉椀: 옥으로 만든 주발)19537) 의 귀절이 있었으니, 이는 반드시 기롱(譏弄)을 한 것입니다. 하마연(下馬宴)19538) 때에는 중국 사신이 밥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도감(都監)에서 찬밥을 올리자 중국 사신이 서로 돌아보고 먹지 않았습니다. 관반(館伴)19539) 이 재차 청한 다음에야 수저[匙筯]에 손을 대었습니다. 청컨대, 도감(都監)의 관리를 국문(鞫問)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때에 승지(承旨)도 가서 참여하였으나, 단지 중국 사신이 유관(遊觀)함을 탐한 일만 아뢰고서 말았을 뿐, 여기에 미쳐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어째서인가?”
하므로, 우승지(右承旨) 이계남(李季男)이 아뢰기를,
“그 때에 신이 또한 가서 참여해 이를 보았는데, 도감(都監:영접도감)에서 중국 사신(天使)의 식성(食性)이 회() 먹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곧 고기를 지져서 대접하였습니다.”
하였다. 성세명 등이 아뢰기를,
“그 때에 자리에 참여한 재상(宰相)이 함께 그 그릇됨을 말하여 아뢰려다가 중지하였는데,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도 자리에 있으면서 알고서도 아뢰지 않았습니다. 무릇 중국 사신의 지공(支供)은 예조에서 마땅히 규검(糾檢)하여야 할 바이니, 청컨대, 아울러 국문(鞫問)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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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34권, 5년(1499 기미 / 명 홍치(弘治) 12년) 8월 20일(정미) 5번째기사
경연에서 모시고 있던 채수도 아울러 제술하게 하다

 

이날2458) 채수가 경연에 모시고 있으므로, 아울러 제술(시나 글을 짓다)하도록 명하였다. 채수가 즉석에서 제술하여 올리므로 승지들이 보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바로 승전내관(承傳內官)에게 주었다. 어떤 사관(史官)이 엿보니, 근래의 문사들을 지극히 비방하였는데, ‘이목(李穆)이 더욱 심하여 앞을 다투어 사모하여 본받는다……’고까지 하였다.
 채수는 젊어서 문명(文名:글을 잘하여 드러난 명성)이 있고 의논이 풍생(風生:빨라서 당할수 없음)2459) 하였으나 부화무실(浮華無實:실속없이 겉만 화려)하였다. 그가 상중에 있으면서도 또한 행검이 없고, 항상 처가집에 있으면서 언소(言笑)가 평일과 다름이 없으며, 항상 냇가에서 손을 대해 술을 마시고 고기를 잡아 회를 쳐서 손을 접대하였으니 그 삼가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제상(除喪)하고 관직을 제수받게 되어서는 누차 탄핵을 당하였으므로 항상 일을 말하는 사람에게 분을 품고 또 왕의 뜻을 맞추고자 하여 그 의논이 이과 같았던 것이다. 그 벼슬길에 나오지 않은 것은 스스로 말한 바가 간사함을 알고 엄폐하고자 한 것이다.

 

 


 

연산 42권, 8년(1502 임술 / 명 홍치(弘治) 15년) 1월 29일(임인) 2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김응기가 효자 박시명 등의 일과 이를 권장할 것을 치계하다

 

경상도 관찰사 김응기(金應箕)가 치계(馳啓)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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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靑松)에 거주하는 민세정(閔世貞), 그의 형 세경(世卿)이 병을 얻어 사경(死境)에 이르니, 67세의 홀어미가 상심한 끝에 또한 병이 났습니다. 의원이 말하기를 ‘오사(烏蛇: 먹구렁이)3200) 를 혹은 찌거나 혹은 회를 쳐서 먹으면 나을 것이다.’ 하니, 세정(世貞)은 자신이 큰 뱀을 잡아서 찜과 더불어 회를 만들어 먼저 맛본 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형에게 먹기를 권했습니다. 병든 형은 감동해서 이를 먹었는데, 병이 즉시 나아 어머니와 아들이 마침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시명(始明)세정(世貞)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거하여 권장하소서.
하니,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호역(戶役)을 면제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회에 대한 몇군데 기록을 보면,

민간 뿐 아니라, 궁중에서도 관리들이 회를 먹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실록에는 주로 민물회(잉어회,가물치?회)가 나오고, 약용으로 뱀 회가 나오는군요.

죽은 고기를 회로 쓰는게 아니라 신선한 산 생선을 회로 쳐서 먹었음도 엿볼수 있습니다.

 

실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닷가에선 육지보다 더 회를 많이 먹었겠지요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삼족오가나는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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