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조선의 미사일 원천 기술 개발한 박강

lionet 2015. 4. 30. 17:36

조선의 미사일 원천 기술 개발한 박강

  • 채연석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 교수
     
입력 : 2015.04.29 10:04 | 수정 : 2015.04.29 10:19
세종 때 개발한 신기전은 15세기 중엽 이전의 로켓구조를 가장 상세히 알 수 있다. 신기전의 제원을 알 수 있는 조상들의 문헌은 세계 로켓 발달사 연구에 요긴하다. 그러나 신기전의 개발자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누가 신기전을 개발하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큰 아쉬움이었다. 신기전은 당시 군기감에서 주화를 개량해 개발했기에 개발자가 비밀일 수도 있고 일부러 밝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연히 개발자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신기전의 존재를 대학생 때 찾은 필자는 기회가 되면 복원해서 신기전이 비행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1993년 대전 엑스포 때에 삼성항공에서 복원비용을 후원해주었다. 제작설계는 필자가 하고 종이 약통의 제작과 화약 충전은 인천에 있던 ㈜한화의 연화 팀에서 맡았다. 소신기전, 중신기전, 대신기전을 모두 복원해서 발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신기전은 시험 제작 때마다 약통이 폭발했다. 흑색 화약이 3㎏ 정도씩 들어가는 약통이 폭발하면 위력이 대단했다. 대신기전 복원과 공개발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당시에는 소신기전과 중신기전을 화차에서 발사하는 것만 공개했다.

2008년 초부터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지원해 대신기전 복원을 다시 시도했다. 2006년 여름부터 1년 동안 미국의 모교에 방문교수로 있으면서 유럽의 18세기 대형 로켓에 관한 자료도 수집하고 일본의 전통로켓인 용세(龍勢) 혹은 유성(流星)의 자료도 수집했다. 1993년에 신기전의 약통제작과 화약을 충전해주던 ㈜한화는 이 분야 사업을 정리했다. 할 수 없이 전통 흑색 화약 전문가의 도움으로 흑색 화약을 만들고 화약 충전은 병기도설에 기록된 방법대로 필자가 직접 연소시험을 했다. 약통에 화약을 조금 넣었을 때는 문제가 안 되는데 화약을 많이 넣고 시험하면 폭발이 됐다. 신기전 약통에는 화약의 타는 면적을 크게 하기 위해서 분사 구멍 위에 원뿔꼴로 구멍을 만드는데 원뿔꼴 구멍은 타들어 갈수록 면적이 커져서 이 때 압력이 커지며 폭발 것이었다. 다시 병기도설의 기록을 분석해보니 약통의 분사구멍에 화약의 연소 중에 구멍이 커지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황토로 분사구멍을 만든 것이 문제였다. 현대식 고체추진제 로켓은 연소가스의 압력을 높여 배기가스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모두 이러한 구조로 만든다. 그런데 신기전의 약통은 분사구멍에 황토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약통의 분사구멍을 만들 때 황토를 사용하지 않으니 설계대로 화약을 많이 채워도 문제가 없었다. 대신기전은 약통 수십 개를 만들어서 시험하며 2008년 9월 19일 첫 비행에 성공했다.
2010년 전남 고흥에서 실시한 대신기전의 발사 장면. /채연석 박사 제공
2010년 전남 고흥에서 실시한 대신기전의 발사 장면. /채연석 박사 제공
복원하면서 느낀 점은 옛날 총포는 주물로 만들어 일정한 화약을 넣고 사용하는 것이어서 같은 총포의 경우 성능이 비슷하지만, 로켓의 경우 치공구를 이용해서 약통에 화약을 다져 넣으며 각각 만들어서 제작이 어렵다는 것이다.

최무선이 처음 만든 로켓화기 주화(走火)는 처음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는지 실록에도 가끔 사용기록이 보인다. 이런 주화가 대량으로 사용되는 것은 세종 29년(1447년) 가을부터이다. 종류도 소, 중, 대주화로 늘어나고 이해 연말까지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모두 3만 3000발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한양의 군기감에서 주화를 제작해서 수천 발씩 보내주었는데 갑자기 수효가 늘어나자 재료를 현지로 보내 그곳에서 제작하게 된다. <②편에서 계속>


 

  • 조선의 미사일 원천 기술 개발한 박강

  •  
    채연석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 교수
     
입력 : 2015.04.29 10:04 | 수정 : 2015.04.29 10:21
<①편에서 계속>
중요한 점은 평안도에서 주화를 제작할 때 감독관으로 박강(朴薑)을 임시로 파견한 사실이다. 박강은 세종 27년(1445년) 3월부터 주화가 대량으로 사용되기 직전인 세종 29년(1447년) 6월까지 2년 3개월간 정부의 천거로 군기감에서 두 번째로 높은 책임자인 군기감 정(正)으로 임명돼 화약무기를 개발한 경험을 갖고 있는 세종의 대표적인 과학기술자였다. 그런 박강이 주화제작의 감독관으로 현지로 파견을 간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신기전을 제작해본 결과 신기전은 제작이 어려워서 실제로 제작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신기전의 제작을 감독할 수 없다. 박강이 현지에 주화 제작의 감독관으로 파견 간 것은 실제로 박강이 주화를 제작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박강이 군기감에 화기 개발 책임자로 있으면서 주화를 개량할 때나 대형주화를 개발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박강이 군기감정에 임명되었을 때 조선의 총포분야 기술수준은 이미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최무선 때 중국의 총포를 모방해서 만들었지만, 세종 때 많은 연구로 총포에 화약을 넣는 약통 앞에 격목을 박아 화약의 폭발력을 최대화 시킬 수 있도록 하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구조의 총포를 개발했다. 이 결과 천자화포(天字火砲)는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지 못했는데, 개량형 천자화포는 화약이 극히 적게 들고도 화살은 1300여 보를 가고, 한번에 화살 4개를 쏘매 다 1000보까지 날아가는 무기로 탈바꿈했다.
대신기전 약통. /채연석 박사 제공
대신기전 약통. /채연석 박사 제공
세종은 많은 관심과 지원으로 총포의 성능을 최상으로 발전시켰지만, 2%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27년(1445년) 3월 30일, 군기감에서 화기 개발을 지휘할 군기감 정을 추천하라고 지시했다. 세종은 추천 받은 박강을 임명했고, 새로운 화약무기 개발을 지휘하게 해 대주화를 개발을 지시했다.

박강이 군기감에서 주화를 개량한 사안은
1) 중주화에 소발화라는 폭탄을 부착해 사용했다.
2) 대형의 대주화를 새롭게 개발했다.
박강의 수결(手決). 예전에는 도장 대신 직접 붓글씨로 써서 결재했는데, 이를 수결이라 한다. /채연석 박사 제공
박강의 수결(手決). 예전에는 도장 대신 직접 붓글씨로 써서 결재했는데, 이를 수결이라 한다. /채연석 박사 제공
대주화는 직경 7.8㎝, 길이 23㎝에 2냥5전(69g)의 화약이 들어 있는 대신기전발화통을 400~500m 까지 날려 보내 자동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당시로는 위력적인 최신형 미사일이었다.

세조 6년(1460년) 11월 7일 박강이 사망하였을 때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강은 성품이 정교(精巧)하고 기능(技能)이 많아서 처음에 벼슬하면서부터 항상 군기감(軍器監)을 맡아 판사(判事)에 이르렀고…(중략)…젊었을 때에 호협하여 모양을 잘 내고 명기(名技)를 많이 통했다.”
박강은 군기감에서 창의적인 발상과 노력으로 세계 최대의 종이 약통 로켓화기인 대신기전을 개발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의 우리 땅을 되찾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조선의 멋쟁이 로켓과학자였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27/2015042701997.html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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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나무12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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