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일본 에도시대는 정말 조선시대보다 풍요로왔을까?

lionet 2016. 10. 18. 20:34

인터넷을 보면 일본 에도시대과 비교하면서 헬조선을 씹는 글들이 수두룩하다. (하나님, 제발 인터넷에서 얘네들 좀 안 마주치게 해 주세요!!!) 하지만, 솔직히 나만큼 조선시대과 유학을 혐오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난 신영복 김용옥 교수도 싫어할 정도로 동양학 얘기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뽕들이 조선농민들의 빈곤을 에도시대랑 하도 비교를 하니까 나도 열라 궁금해졌다. 그래 도시는 에도와 오사카가 압도적 윈 맞다. 그럼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에도 시대 일본 농민들은 대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길래? 에도시대도 그래봤자 봉건수탈 사회인데, 에도시대 농민들도 도시에 모여사는 무사와 죠닌(상인) 계급처럼 저렇게 잘 먹고 잘 살았다고?


구글링을 해 보았다. 에도 도시 문화의 화려함을 찬양하는 글은 많다. 또 조선시대의 처참함을 구구절절 고발하는 글들도 많다. 하지만, 에도시대 일본 농민의 생활에 대해서는 좀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된 글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도, 단편적으로 주섬주섬 정보는 모을 수 있었다. 물론 역사문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절대 안 되는 거지만, 에도 시대 농민들의 실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조선과 일본의 평균 키 차이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20131000030


서울대 해부학 교수팀이 조선시대의 유골의 평균 키를 조사한 결과 남성 161.1 cm, 여 148.0cm

에도시대 일본 평균키보다 6cm나 커. 왜(倭)놈이라고 부르는 이유 근거있어.

 

일본인의 이 작은 키는 메이지유신 근대화로 영양상태가 좋아지면서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보통 평균 키는 영양학적으로 결정된다는 게 정설이므로, 위의 결과는 조선인의 영양상태가 일본인보다 좋았다는 증거로 충분히 제시될 만하다. 백번 양보하여 유전적인 요인으로 인해 조선인의 평균 신장이 6센치나 더 크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영양상태 면에서 일본인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조선은 일본에 비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주장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연구결과. (사실 메이지 이전 일본인의 평균신장이 가장 컸던 시기는 야요이 시대였고 그때부터 점점 작아져 에도시대는 일본역사상 가장 신장이 작은 시기였다. 근대화 전까지 일본인의 신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보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의 폭식습관을 기록한 역사기록이 많다. 조선시대 엄청난 밥그릇 사진은 다들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건 기록이 일관되기 때문에 거의 확실해 보인다.


프랑스인 선교사 샤를르 달레는 19세기 후반에 쓴 책에서 "조선사람들의 또 하나의 큰 결점은 폭식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양반과 상민 사이에 조그마한 차이도 없다"고 지적했다. 서양인들은 조선을 "대식국"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어른 남자 7홉, 어른 여자 5홉, 아이 남녀 3홉으로 한끼를 먹었습니다. (18세기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의 기록) 아이들이 먹는 양도 180cc로, 현대 한국인의 일반적인 식사량인 120~150cc보다 많습니다. 근거자료는 17~18세기 이후 나온 수많은 각 가문별 쌀 소모기록들과 성호사설, 그리고 흥부전입니다. -_- 선조 때는 달랐지 않을 수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기근이 있을 때마다 조선 조정 관원들이 개탄하는 지나친 대식 풍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극심한 식량난으로 수군 자체가 와해 직전에 있던 1594년에도 이순신은 "하루 쌀 5홉 이하로 먹이고 있는데도 모자라니 이대로 가면 몇월달 이후로는 식량보급 불가"라고 보고하고 있죠 



에도 말기의 격증하는 민중소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6073&cid=42998&categoryId=42998&expCategoryId=42998


에도시대의 민중소요의 횟수는 거의 3000회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학자들은 이게 농민이 위상이 높아져서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믿어야 할까? 3000회나 된다니 허수들도 많이 끼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링크의 글을 읽어보면 에도 말기 일본 농민들의 고통과 불만은 조선과 비교해 딱히 낮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유아살해 풍습의 성행


에도시대에는 태어난 아이를 엄마가 목졸라 죽이는 일이 성행했다. 이를 마비키, 일본어로 솎아내기라고 한다. 에도말기에는 그래서 평균 자녀수가 3명을 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상 태어나는 아이는 부모가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비키를 금지하는 방이 붙기도 하였다. 에도 말기의 농학자 佐藤信淵는, 出羽奥州와 奥州(현재의 동북지방)에서 매년 1만 6, 7천명, 上総(현재의 지바현)에서는 3, 4만명의 갓난아기가 솎아냄 되고 있다, 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일본을 방문했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즈는 "일본의 여성은 기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두 아기 목을 다리로 눌러 죽여버린다"라고 기록했다. 이 마비키의 전통이 얼마나 강했는지, 20세기 들어서까지도 일본정부는 이를 근절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기후변화로 조선이나 일본이나 비슷한 시기에 기근을 겪었다. 하지만,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해도 이런 끔찍한 풍습은 헬조선조차 납득하기 힘든 수준이다. 


마비키에 대하여 인구학적으로 연구한 미국 캘리포니아대 역사학자의 책. 이 책에 대한 추천글을 보면 일본학자들이 이 흑역사를 감추는데 급급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조선통신사 일본 여행기의 기록 

조선통신사 원중거(1719~1790)은 [승사록]에서 일본 백성들의 고초를 걱정하고 있다.


10월 17일 경자
동북풍이 밤에 크게 불어 그로 인해 대포(大浦)에 머물렀다...........(일본)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格卒)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 또한 수저질 몇번에 나무 그릇 바닥에 닿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같이 앉아서 먹는 사람이 (밥이) 없다고 해도 양식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우리) 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번창하는데 (숫자는 많아지는데) 살아가는 형편이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스러우니, 만일 그들의 배를 만드는 능력이 우리의 열배가 된다면 우리 앞날에 닥칠 근심이 또한 적지 않으리라 저어된다.


12월 21일 계묘
마을은 가히 백 호쯤 되는데 모두 초가집이었고 사는 것이 궁핍했으며 모두 남루했고 빗질도 안 했으며 씻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나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의복이 깨끗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널로 덮은 3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사(神舍)와 승사(僧舍)라고 한다.
 


조선통신사 신유한 (1681~?)의 해유록은 오사카나 교토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내용 일색이다. 


이렇게 이 나라의 번화함과 풍부함, 지리의 이로움과 풍경의 기이함은 아마 천하에 드물 것이니, 옛날 문헌에 기록된 인도 계빈국이나 페르시아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본의 번영을 칭송한 그도 그러한 번영의 원인을 살인적인 세금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본) 시골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아로 들어가고 풍년이 들어도 콩 반쪽도 잇기 어려워 스스로 처자를 팔아먹기까지 하니 ....빈부가 균등치 않음이 다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살인적인 세금


이 시대에는 〈무명이외는 입어서는 안 된다〉·〈아침부터 밤까지 일할 것〉·〈술이나 차는 마시지 말 것〉 등의 엄격한 룰로 막부는 농민을 심하게 통제했다. 심지어는 〈농민과 깨는 짜면 짤수록 나온다〉는 막부관리의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농민은 막부를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존재이기에 농민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는 법까지 등장했다. 한마디로 〈살리지 않고 죽이지도 않는 정책〉으로 일관한 것이다. 당시의 농민은 수확의 40~50%를 세금으로 착취당했다. 이 시대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생산성이 무로마치 시대의 3배까지 급상승했지만 농민들의 생활은 가렴주구로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도 시대의 정치 [江戶時代の政治] (키워드로 여는 일본의 향, 2009. 3. 26., 제이앤씨)


에도시대의 수취제도는 조선보다, 아니 중국 등 여타 국가와 비교해 보아도 훨씬 가혹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역사학자 이헌창은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2010)]이라는 논문에서 일본의 1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높았지만 조세부담률은 세계최고 수준으로 조선보다 월등히 높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헌창은 뉴라이트의 본산 낙성대 연구소 출신이다.) 일본학자들조차 에도시대는 농민들의 암흑기였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이 어두운 면을 애써 외면하고 에도 상류계급의 번영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역시나 국뽕하면 일본이다. 천황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고분 발굴도 맘대로 못 하는 나라가 현대 일본이다.)


물론 이건 단편적인 정보들이고 부족한 사료를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취합하여 일본 농민의 삶의 수준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건 일본 역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일뽕들의 집요한 헬조선론에 의문을 갖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에도시대도 결국 조선과 마찬가지로 봉건수탈의 시대였고 농민의 생활 면에서 일본이 조선보다 나았다는 증거는 딱히 없어 보인다. 아니 가장 핵심적인 지표로 판단되는 세금부담과 평균신장만 놓고 보면 오히려 조선농민이 더 살만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정에 힘이 실리는 게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이 살기 좋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단지 조선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수탈적 체제였기 때문에 지옥이었다는 논리는 매우 의심스럽다는 거다. 오히려 역으로 일본은 귀족이 농민을 더욱 철저히 수탈해서 그것을 흥청망청 소비했기에 상업이 번영했다는 논리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핵심은 바로 에도, 오사카, 교토 같은 도시의 발달일 것이다. 통신사 신유한이 해유록에서 감탄하였듯 대도시의 무사와 죠닌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에도는 인구가 거의 100만을 찍으면서 런던 파리를 능가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경제적 잠재력이 메이지 유신을 통한 성공적 근대화의 기초가 된 건 물론이고.


하지만, 알아보면 거기에도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에도시대 극장의 화려함



참근교대 제도



산킨코타이(일본어: 参勤交代さんきんこうたい)는 각 의 다이묘를 정기적으로 에도를 오고 가게 함으로써 각 번에 재정적 부담을 가하고, 볼모를 잡아두기 위한 에도 막부의 제도이다. 이 제도에 따라 각 번은 도쿠가와 가(家)에 반기를 들기가 매우 힘들어졌고, 도쿠가와 가가 15대에 걸쳐 번영을 누리는 요인이 되었다. 산킨(参勤, 참근)은 일정 기간 주군(이 경우는 쇼군)의 슬하에 오고 가는 것, 코타이(交代, 교대)는 여가를 제공 받아 영지에 돌아가 행정 사무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간에이 12년(1635년) 산킨코타이 제도의 기원에서는, 모든 다이묘는 1년마다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왕래했고, 처자식은 볼모로 에도에 상주해야 했으며, 그 여정 비용이나 에도에서의 체류비는 모두 그들의 부담이었다. 산킨코타이 제도의 목적은 모든 다이묘들의 자본의 지출을 강요함으로써 세력을 약화시켜 모반 등을 행하는 것을 억지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여겨진다.[5] 단, 막부로서도 본래의 취지는 군역 봉사에 있었기 때문에 번의 재정이 파탄나 군역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산킨코타이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다이묘 행렬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렇지만 모든 다이묘는 겉치레를 좋아하여 위엄을 보이기 위해 종종 제한을 어기는 경우도 있었다. 재정이 풍족하지 않은 영세한 다이묘들도 비용을 아끼지 않고 다이묘 행렬을 화려하게 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한 경우도 있었다.


산킨코타이 제도로 인해, 가도와 역참이 정비되었고 다이묘 행렬이 소비하는 방대한 비용에 의해 번영하였다. 동시에 다수의 다이묘 수행원이 지방과 에도를 왕래했기 때문에, 그들을 거쳐 에도의 문화가 전국에 퍼지는 효과를 달성했다.[7] 예를 들면, 덴포 12년(1841년)기슈 도쿠가와가(紀州徳川家) 11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유키(徳川斉順)의 산킨코타이에서는, 부시 1639명, 인부 2337명, 말 103필을 거느렸다. 여정 중 들리는 히라카타 주쿠(枚方宿)에서는, 준비를 위해 히캬쿠나 기슈 번 번사가 번주가 도착하기 수 개월 전부터 주쿠에 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준비까지 거액의 지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산케인 기슈 번의 다이묘 행렬 등은 격식과 권위를 실감하게 하는 대행렬이었기 때문에, 수 많은 농민이 구경하러 찾아 올 정도였다. 이 제도에 의한 경제적 효과나 문화적 효과는 대단히 커, 에도 시대 사회 질서의 안정과 문화의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또한, 산킨코타이로 인해 에도에 단신 부임하는 각 번의 가신은 상당한 수에 이르러, 이 결과 에도 인구의 약 절반을 부시가 차지하게 되었고, 유곽이 번성하게 되었다. 에도의 인구가 여성에 비해 남성이 극히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wiki)



생각을 해보자. 일본 전역에서 살인적인 세율로 호주머니를 채운 250명이 넘는 다이묘들이 1년마다 때로는 6개월마다 에도에 와서는 장기체류한다. 그것도 혼자 오는 것도 아니고 수백 많게는 수천에 이르는 많은 식솔과 수하들을 화려하게 대동하고서. 에도 시대 300년 내내. 이들 다이묘들은 식솔과 수하들이 머무를 대저택을 에도에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출신지가 자기 번(영지)가 아닌 에도였다. 참근교대로 올라와 있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이 서울을 떠나려 하지 않듯 이들도 그냥 에도에 죽치고 머물러 사는 경우가 많았다.


시바 료타로의 [료마를 간다]를 보면, 료마의 출신지인 도사 번이 에도에 가진 번저수가 6채인데, 이 곳은 번주, 번주의 친지, 무사, 그리고 지역 무사 지망생들이 모여 머무르는 장소가 된다. 이 산킨코타이에 들어가는 비용은 다이묘 재정수입의 약 25%에 달하여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이 부담이 전국의 농민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영지에서는 물자를 자체징발하여 소비하는 다이묘들이다. 하지만, 영지를 떠나 에도나 오사카에 와서는 비용을 직접 지불하고 생활해야 한다. 농민에게서 수탈한 그 많은 부가 에도, 교코, 오사카 같은 대도시와 거기로 가는 길 위에 뿌려진 것. 이렇게 전국적인 도로망도 건설되고 역참도 건설되고 중간도시도 건설되고 그렇게 상업적인 교류도 확산된다. 그리고 도시에서 머무는 각 지역 귀족과 무사들 간의 교류도 촉진되며 비교경쟁도 활발해진다. 이들의 여흥을 위한 놀거리 문화가 발달하는 건 물론이다. 이러고도 상업이 융성하지 않고 문화가 번영하지 않고 화려한 도시건축물이 생겨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1862년 이 산킨코타이는 메이지혁명 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자, 약 36만명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에도인구가 6개월 만에 반이나 줄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기가 살던 저택을 분해하여 고향으로 가져가는 귀족들도 있었다고. (Takashi Fujitani, Splendid Monarch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산킨코타이가 끼친 엄청난 경제적 임팩트를 짐작할 수가 있다.


한 술 더 떠서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사무라이들 역시 각 지역 도시(조카마치)에만 머물러야 했다. 소위 말하는 병농분리다. 농민에게 수탈한 물자를 이렇게 도시에만 몰아주니 도시문화가 발달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도쿠가와 막부는 이런 경제적 문화적 효과를 예견하고 이런 제도를 실시한 것일까? 당근 아닐 것이다. 이는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를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을 견제하려 했던 막부의 권력강화 조치였을 뿐이다. 중국이나 조선같은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성립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 세력들을 통제하기 위해 실시한 철저히 정치적 목적의 조치였던 것. 그런데, 이것이 예상치 못 하게 긍정적인 경제적 문화적 효과를 가져왔다.



초고속! 참근교대

감독
모토키 가츠히데
출연
이하라 츠요시, 후카다 쿄코, 이시바시 렌지, 니시무라 마사히코, 사사키 쿠라노스케
개봉
2014 일본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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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거리를 5일만에 주파해야 하는 가난한 번주의 해프닝을 그린 코미디 영화. 특이한 역사를 엿보는 걸 빼면 재미는 없는 영화다. 




 

재미를 위한 상상이겠지만, 앞 사람이 마을 뒤로 돌아가 꽁무니에 붙음으로서 행렬의 규모를 부풀린다. 산킨코타이는 이렇게 귀족들의 과시를 위한 소비를 부추켰다.




누군가는 정조의 화성행차를 언급하더니 그 화려한 배후에는 피눈물 흘리는 농민들이 있었다면서 헬조선을 냅다 까더라.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기 위해 40일 동안 나룻배들을 차출한 예를 들먹이며 민초들의 피눈물 운운하더라. 헛웃음이 나왔다. 얘네들이 이렇다. 존재 자체가 편향인 놈들이다.


40일 동안 나룻배 차출한 것도 그것도 잔혹한 수탈 맞다고 인정하자. 하지만, 만약 조선도 이런 화성행차 같은 토목산업과 퍼레이드를 주기적으로 시행했다면 어땠을까? "죽지도 살지도 않을 정도로" 농민을 수탈한 물자를 들고 팔도각지에서 양반들이 모여들어 한양에서 월마다 잔치를 벌이면 어땠을까? 이러면 농민들은 힘들었겠지만, 한양 역시 상업과 문화가 번창하는 대도시가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화성행차 당시에는 한몫 잡으려는 상인들과 구경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정조가 어쩌다 한번 한 토목산업과 퍼레이드도 농민들을 수탈한 거라며 헬조선이라고 씹어대는 일뽕들, 얘네들이 바로 그런 토목산업과 과 비싼 퍼레이드를 밥먹듯이 했던 덕분에 가능했던 에도와 오사카의 번영을 빨고 앉아있다. 



에도시대의 번영이 산킨코타이 때문에만 가능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 외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유교적 명분론 때문에 상업을 경시하는 건 철저히 조선의 잘못이다.하지만, 일본이 누렸던 유럽과의 무역, 그에 따른 은광 개발붐과 화폐경제의 발달, 산킨코타이 같은 우발적인 제도요인... 이런 것들은 조선에서도 어찌하기 힘든 부분 아닌가?  이런 건 일본이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17세기 이미 기독교인이 5%에 달할 정도로 유럽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일본이다. 하지만, 에도 말기에는 쇄국정책으로 인해 무사가 총 쓰는 법도 잊어버릴 정도로 서구문명과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반면 조선은 서구문명과의 접촉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서양 선교사가 없이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퍼져서 교황에게 선교사 좀 보내주십사 애원하는 편지를 보낸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서학도 누가 와서 가르쳐 주었나? 다 실학자들이 해외직구로 알아서 구입해다가 혼자 공부했다. 이렇게 우물 안 개구리로 세상물정 모르고 살다가 코쟁이들의 난입에 화들짝 놀라 허둥거린 조선을 까대는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 서구문명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계속 정보를 얻으면서도 200년간 기술적 답보상태를 면치 못해 왔던 일본에는 왜 그렇게 관대한 걸까? 페리 제독이 미시시피호를 몰고와 개항을 요구하기 전까지 막부 일본은 단 한번도 서양에 사절단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냥 앉아서 서양애들이 열심히 찾아오는 것만 받아주었을 뿐이다.    


이런 것을 면밀하게 따져서 종합적인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 자세한 사정을 살펴보고 조선에게 부족한 게 뭐였나 따져봐야 뭔가 배울 게 나오지, 그냥 "조선은 왜 그렇게 못 했는데? 너는 왜 SKY대 못 갔는데?"라는 식으로 따지면 뭐가 나온다는 거냐. 나는 역덕이 아니라서 피곤하게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히 다 찾아보고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안다. 그냥 단편적인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쏙쏙 골라서 한국을 까는데에 혈안이 되어있는 뉴라이트나 일뽕 쓰레기들이 인터넷에다가 똥싸듯이 퍼지를 내용은 아니라는거.




P.S>


또 하나 일뽕들이 끊임없이 퍼뜨리는 미신이 있다.


1) 한국인들은 일본을 미개한 나라라고 무시한다


헛소리다. 한국처럼 일본 배우자 열풍이 강렬한 나라가 또 있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는 일본에 관해서라면 무조건 선망의 대상이었다. 서점에는 일본이 왜 강한가 를 가르치는 일본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였고, 아버지 세대의 서가에는 항상 대망 같은 일본영웅들의 이야기가 꽂혀있었으며, 진보적인 젊은이들은 이와이 슌지나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일본문화를 앞다투어 접수하며 트렌드세터 대접을 받았다. 재일동포 작가인 서경석은 [디아스포라의 눈]이라는 책에서 예상과는 달리 한국인들이 일본인에게 호의적인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다. 전여옥이 [일본은 없다]라는 베스트셀러를 내기도 했지만 이 책이 성공했다는 건 그만큼 일본 배우자 열풍이 거셌다는 반증이다. 한국인이 일본을 무시해? 제발 ㅈ까지 좀 마시라고요.  


그런데, 이랬던 한국이 지금은 왜 일본을 미워하고 무시하게 된걸까? 한국의 역사적 반일정서 때문에? 역사적 반일정서는 위에 말한 때에도 강했다. 일본문화가 금지되고 [여명의 눈동자] [장군의 아들] [남벌] 등 반일 역사물이 대히트를 치던 시대였다. 젊은이들이 일본문화를 자유롭게 거부감없이 접하는 지금보다 역사적 반일감정은 더 강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감정과는 별도로 한국인들은 일본을 항상 높이 평가하고 배우려 했다.


그랬던 한국인들이 일본이 틀어진 이유는 뭘까? 이건 순전히 일본이 스스로 자처한 거라고 보면 된다. 첫째, 일본경제가 완전히 망가졌고 둘째, 고이즈미 집권 후 극우성향을 보이며 역사적 감정을 자꾸 자극했으며, 셋째, 일본문화가 망상적으로 퇴보하여 쿰척쿰척들이나 보는게 되어버렸다. 일본 스스로 사랑받을 이유를 자꾸만 삭제해 나간거다. 그런데, 도대체 왜 지금와서 일본을 존경해달라고 ㅈㄹ인지? 아, 거기에 한국에서 암약하는 일뽕들도 큰 한 몫을 했다. 나같은 니폰필마저도 그 놈들 때문에 이런 글을 쓰고 앉아있으니 말이다.


일본이 맛이 갔고, 또 자꾸 한국인 성질 건드리고, 관심이 멀어지는 건 당연한 건 아닌가? 무슨 한국이 역사문제에 집착해서 일본을 무시한다...? 일본이 그렇게 좋으면 그냥 일본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시오. 먼 옛날 조선의 나쁜 점만 까발리고 일본과 비교하면서 일본을 사랑해 달라는 이 골때리는 멘탈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내가 가끔 연락이 없고 술을 마셔도 너는 나만 바라봐" 그 얼토당토않은 바램 자체가 일뽕 인증이라는 거라 이겁니다. 한국이 사랑할 나라는 일본만 있는게 아니라구요. 무슨 스토킹하는 헤어진 애인 마냥 이렇게 구질구질한지 원.


2) 민족주의 교육 때문에 조선의 실상을 모른다.


이것도 헛소리다. 한국처럼 자신의 근세사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배우는 나라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봐. 지나가는 학생들 아무나 잡고 물어보자. 조선시대 어떠냐고. 답은 다 똑같다. 학교에서 너무 잘 배워서 그렇다! 일뽕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좌좀 민족주의 교과서의 대표주자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한번 들춰봐라. 수취제도의 실패 드럽게 재미없게 구구절절히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는 조선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노래한 시가도 심화학습으로 실어놓고 있다.


왜 더 자세히 안 실으냐고요? 왜 우리가 모르는 흑역사들을 더 가르쳐주지 않느냐고요? 왜 더 일본의 위대함을 더 실어주지 않느냐고요? 그래서, 니들 입맛에 맞는 조선까 내용으로 교과서를 꽉꽉 채워달라 이 말이냐? ㅈ까세요! 지금 교과서 400 페이지 밖에 안 돼. 그 안에 수천년 역사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꾹꾹 눌어담은 거야. 한정된 지면 하에 조선후기에 문제많았던 거 그 정도면 서술할 만큼 서술한 거여. 


조선의 흑역사가 정 궁금하면 알아서 구글 가지고 혼자 심화학습혀. 한국은 진짜 역사를 안 가르친다느니 봉창 두들기는 개소리 좀 때려치고. 


http://blog.naver.com/stillrollin/220509783706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모두사랑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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