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이규봉에 미안해요 배트남 반론글

lionet 2016. 4. 8. 09:41

이글은 월남전 당시 파월한국군이 월남양민을 대량학살했다는 내용의 책을 펴낸데 대한

반박의 글로 배재대학교 이규봉 교수의 불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푸른 역사"의 '미안해요 베트남'에 대한 월남전 참전자의 반론글-

 

이규봉 선생.

 

나는 이선생이 썼다는 월남전에 참전 했던 32만명을 폄훼하고 전장에서 앞서 전사했거나 전쟁 후 고엽제 같은 전쟁 후유증이나 고령으로 사망한 전쟁영웅들을 욕되고 화나게 했다는 책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전쟁이 지난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에 현지를 답사하고 현지 주민들(특히 주월 한국군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을 상대로 대담도 가진 근거를 가지고 책을 쓴걸로 압니다.

전쟁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수는 있습니다.

 

전후에 미국이나 자유진영에서 발간된 책들,언론들 그리고 월남전을 이야기로 엮은 많은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의 대다수는 월남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일부 독자들을 늘리고자 하는 상업적인 장사꾼 심리에서 호도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대다수가 합당한 평가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 시작 되었던간에 전쟁 자체는 찬양할수 없는 인류 최대의 비극인것입니다.
전쟁은 진정한 진실 보다는 힘에 의한 답을 얻고자하는 무리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 많은 인명의 손실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가운데는 본의아니게 양민의 인명피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양민 못지 않게 주둔군이나 진격하는 군대의 인명 피해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인에 의한 의도적인 대학살은 없었습니다.
있을수가 없었습니다.

전쟁포로(월남양민 혹은 베트남공산군)들 재판 과정에서 낱낱히 밝혀졌고 무리한 양민살해가 밝혀지면 한국군 본인은 물론 지휘관이 큰 문책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규봉 선생은 1958년생이면 금년 53세 입니다.


내가 월남전쟁터로 떠나던 1967년 이선생은 당시 9세의 초등 2년생 이였습니다.
월남참전군인들에 대한 전송마당에도 나올 나이가 되질 못했습니다.

현지를 답사하고 당시 피해가족을 면담했던 이야기를 주로 적은 책이라 전해들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샅샅히 현지를 답사하고 인터뷰를 했다고 해도 월남전에 참전한 실재 경험자들 만큼 월남전쟁 현장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안다고는 말할수 없을것입니다.

만약 끝까지 월남전을 모두 알고 꿰차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이선생 본인과 양심을 속이는 죄인이 됩니다.

 

본인은 1967년 파월되어 1970년에 귀국 했던 월남전 참전자 입니다.
나는 월남전 참전 기간 상당기간 작전 전후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 후 현장에서 작전결과를 조사하고 분석해서 보고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월남인들과 함께하며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월남전쟁과 우리한국군, 그리고 월남민간인들에 대해 비교적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선생이 이번의 말썽 많은 책을 쓰기전에 나를 만났더라면 아주 훌륭한 많은 자료들을 얻어서 더알차고 훌륭한 책을 꾸밀수도 있었을 겁니다.

 

월남전쟁중 우리 한국 군인들이 월남 양민들을 위해서 얼마나 지극 정성을 쏟았는지 직접 대민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릅니다.

 

저는 1970년 월남에서 귀국해서 (당시 학생신분으로) 산사에서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봄날 어느날 산사로 배달된 일간지 신문 앞면에 "신춘문예 현상모집"이라는 "사고"를 접했습니다.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는게 있었습니다.


내가 오랜기간 참전하면서 보고 체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을 쓰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시공부를 하던 책을 덮고 원고지 채우기에 삼매경을 했습니다.
물론 함께 공부하던 4촌 동생이 죽기살기 말렸습니다.
지금은 한국사회 지도급 인사로 성장한 4촌 동생의 심각한 지경에 이르도록 심한 만류도 뿌리치고 나날이 원고의 두께를 더해갔습니다.

 

책의 주 내용은 전쟁의 비참함과 양민도, 주둔군도 적군도 모두가 피해자라는데 촛점이 맞추어졌고 전쟁을 통해 생존의 존엄과 가치가 쓰고버린 휴지처럼 땅바닥으로 추락한 전쟁속의 슬픈인간들의 아픈곳을 글로 나열하는 참전수기와 같은 내용이였습니다.

단기간에 완성한 원고를 신문사에 제출했습니다.
제출한지 며칠만에 어느 노신사가 내가 머무는 산사를 찾아왔습니다.
손에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그 노신사의 손에 든것은 내가 제출했던 현상모집 원고였습니다.
그분은 먼저 제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습니다.

심사위원장이였던 그분의 말씀인즉, 내가 제출한 원고는 반전작품이라는게 첫번째 이야기였습니다.
그 작품이 서방세계나 자유진영 국가에서면 큰 호응과 함께 사회적으로 크나큰 반응을 일으킬 작품이지만 우리나라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는 말씀이였습니다.

 

좋은 작품이 세상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유산되는 아픔을 나눈 우리는 훗날 좋은 날을 만나면 책으로 발표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헤어졌습니다.
아마 지금쯤 발표 되었다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젊은 패기는 내 원고를 산사의 뒷마당에서 한장한장 불에 태우며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나 스스로의 맹세를 굳혔습니다.
"내가 다시 글을 쓰면 사람의 새끼가 아니다"고.
그 후로 문필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백정이 버들을 물고 죽는다"는 이야기 같이 저의 평생 대다수 시간을 종이에 먹칠하는 일(언론인)을 하면서 살와왔습니다.

 

지금 도 그 당시에 내가 섰던 글의 일부를 기억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 우리 한국군 병사가 죽으면 전사후 48시간 안으로 유가족에게 전사통지서가 전달이 됩니다.
그리고 전사위로금 미화 $200 이 전달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군이 작전 중에서 운전병이 실수로 월남인들 소유의 소 한마리를 죽이면 당시 미화 $700 을 물어주었고, 닭 한마리를 죽이면 $200 상당의 돈이나 물품으로 보상을 하고 월남 양민의 상한 마음을 달래느라 별의별 짓들을 다 했습니다.

 

월남전 당시 우리 한국군은 월남 양민들에 대한 대민사업에 많은 예산과 시간,정성을 쏟았습니다.
물론 작전중 일부 양민의 인명피해는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이니까.
그 피해는 우리 한국군인이 입은 인명 피해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양민집단 학살이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의 막무가내의 참혹한 행위는 절대 없었다고 맹세코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서울을 가본 사람 보다 가보지 않은 사람이 남대문을 더 잘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 안다는 서울 이야기는 일반적인 구전을 통한 무책임한 이야기일수 있습니다.

 

이규봉 선생.

 

모처럼 한권의 히트 작품을 남기고팠던 마음은 충분히 이해 합니다.
그러나 꼭 전쟁후의 이야기를 쓰려하셨다면 우리의 동포들인 32만 전쟁영웅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공적을 치하하고 승화시키는 글을 써야만 했었습니다.

분명한것은 한국인은 어느 누구도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의 공을 폄훼하거나 헛되게 해서는 않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전장에서 보낸 32만명의 숭고함을 나무라고 폄훼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적이요, 배신자요 비민족적 비양심적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꼭 책을 남기고팠으면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책의 서두에 참전자 32만명의 공적을 치하하고 희생자들의 영령을 기리면서 "이책은 월남전을 바로 보지 못하는 일부의 사람들과 가진 인터뷰를 나열한 글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양해를 구하는 말로 시작되었어야 했습니다.

 

이규봉 선생.

 

53세 이면 우리 참전자 세대가 보면 아직 한창 어린사람 입니다.
젊은 오기나 소영웅적 발상에서 그런 책을 썼다면 지금이라도 그 오기와 소영웅적 작은 영웅심리를 접어주시기를 간곡히 호소 드립니다.

 

휼륭하고 좋은 존경받는 학자로 남기를 기도 드리겠습니다.

 

1967년~70년 월남전 참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황금박쥐-
jounnara1004@hotmail.com
x4season@naver.com



루리웹 유저가 쓴 한국군 배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진실


1999년에 한국에서는 국제민주연대.민변 등 1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 가 모여,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의 진실에 대해 조사합니다. 참고로 이 조사가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닌 이유는, 이 조사과정을 주도한 인물들이

바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학살을 열심히 보도하고 알린 한겨레신문 기자 및 강정구교수,한홍구교수 등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문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나옵니다.


그리고 발견한 세건의 사건이


69명의 사상자를 낸 퐁니퐁넛 사건, 

22명의 사상자를 낸 푹미사건

4명의 사상자를 낸 홍차우사건입니다.


이중 푹미사건은 마을 진압과정중 오인사격으로 인해 민간인 피해가 생긴 사건이고, 

홍차우 사건은 지뢰등으로 사망자가 생기자 흥분한 해병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사상자를 낸 퐁니퐁넛 사건은 의혹이 많은 사건입니다.


짧게 설명하자면 해병여단의 1개 중대가 이동중  퐁넛마을에서 사격을 받자 소탕 작전을 수행했는데, 비슷한 시각에 인근의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학살을 저지르는것이 목격되자 학살의 주범으로 이 해병들이 지목된 사건입니다. 


근데 당시 채명신 장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민간인을 구해라' 라는 지침을 전군에 내린 상태라는것과,

퐁니퐁넛 마을 주변이  베트콩들이 매일같이 사람들에게 한국군의 잔학성을 홍보하고, 

한국군의 옷을 입고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자주 목격되던 곳이라는 점 때문에 한.미.월합동 조사를 통해서도 뚜렷한 결론을 내리진 못합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언급하는데 절대 설렁설렁 조사가 아닌, 사진자료와 관련자들을 철저히 심문하고 분석한 조사였습니다)


이런 전쟁범죄들에 대한 한국정부는,


69년 중앙정보부의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 이후 68~73년 사이 구속군인 561명가운데 전쟁수행과 관련된 자를 제외한 

40여명을(상관살해,현지인강간,살인) 미복권 미사면하여 무기징역,종신형,사형등을 집행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대부분이 형집행정지나 15년 정도로 감형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이후에,


김대중대통령, 노무현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이 국빈방문때 정부에 민간인 피해와 베트남 참전에 대해 사과했고

(근데 우리가 이긴 전쟁이고 냉전시대의 어쩔수 없었던 일이었다며 베트남 정부는 사과랑 보상을 받길 거부했습니다)

2004년엔 시민사회들이 모금활동을 벌여 베트남 퐁티에 사망자를 위로하는 위령비를 건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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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여기까지가 베트남전 한국인 학살의 진실입니다.


위키나 신문기사에 존재하는 빈호아, 타이빈, 고자이, 퀴년, 하미 등등의 사건들은 증언만 있고 근거가 없는 사건들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증언들 자체도 너무 허무맹랑해서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자주 나오는 증언의 레파토리가 융단폭격으로 마을을 쓸어버렸다거나 독가스를 썼다는 것인데,

미군의 지원이 있어야만 할수 있는 융단폭격을 일개 한국군 대대가 요청한다고 미군이 들어줄리도 없을 뿐더러,

길을 만들거나 고엽제 살포같은 일에나 쓰이는 전략폭격을 하나의 마을에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리고 독가스를 사용했다는건 한국군이 화학전을 했다는건데, 당시 매우 허름한 장비밖에 없었던 한국군이 화학전을 할 수 있을리가 없지요. 


그밖에 미군이 벌인 미라이 학살까지 한국군이 한게 되버린다던지, 한국군의 열배가 넘는 베트남인과 함께 합동작전을 해도

도중에 나온 민간인피해는 모두 한국군이 저지른게 되버린다던지, 공병대대밖에 안가지고 있던 불도저가 모든 학살사건에 죄다 등장해서

마을과 시체들을 묻어버렸다던지, 이루 말할수 없는 왜곡이 정말 많습니다. 


게다가 이런 학살을 주장하는 글들을 보면 당시 마을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던 구호물자를

 '~학살에 대한 사죄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몰아가고 있고(예외적으로 위의 세사건중 두건에 대해선 여단장이 구호물자와 함께 마을에 가서 사과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세운 위령비는 어쩔땐 빈호아 학살때문에, 어쩔땐 고자이 학살때문에 세운거라며 학살의 근거로 돌려가며 쓰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건들의 신빙성을 따지자면,


고자이 학살 증언의 경우 하늘을 뒤덮는 헬기가 나타나 380명을 1시간만에 죽였다는데, 한국군은 헬기가 하늘을 뒤덮을 만큼 많기는 커녕,

사건이 일어난 66년엔 한대도 없었습니다. 한국군은 68년이 되서야 헬기를 보급받았습니다.


빈호아 학살의 경우 마을운동장에서 사람들을 기관총으로 쏴댔다고 하는데, 사건이 일어난 66년엔 한국군은 카빈이나 개런드 밖에 없었지

M16같은 연발식 소총은 아직 보급도 안된 때 였습니다.

더 결정적인건 당시 증언에 의해 만들어진 위령비 인데, 한국군이라고 묘사된 군인의 부대마크가 증오비에 써진 가해자인 맹호부대 마크가 아닌

흑표무늬의 마크 입니다. 그런데 흑표무늬는 당시 베트남 레인저부대의 마크였습니다. 위의 채명신 장군의 증언과 연결해 생각하면 

진짜 학살의 가해자가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증언의 신빙성 이외에도 베트남전 당시의 한국군의 학살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되는 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전과를 평가하는 방법은 노획한 무기의 수량이었지, 귀나 코를 잘라와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평가방법은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위한 방책이기도 했습니다.


또 전시에 군인에 의한 강간은 매우 중한 군법위반으로 엄격히 다스렸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군대에서 그런 행위를 용서할리가 없지요.

게다가 하물며 민간인 살해는 더 위중하게 다스렸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군은


1. 죽여봤자 아무런 성과가 없는 민간인을

2.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3. 살인충동과 성욕을 채우기 위해 학살했다

4. 그리고 이런 학살은 상부의 명령으로 불도저와 비행기를 동원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5. 또한 미군의 기록에 남지 않을 만큼 철저한 기밀속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건데... 솔직히 납득이 안갑니다. 인터넷에선 이런식으로 무려 9000여명의 민간인 피해가 났다고 주장하는 글이 떠도네요.

게다가 베트남에서 사업차 온 한국사람들이 베트남여자와 결혼한 다음 전쟁이 끝나 귀국해서 생긴 라이따이한문제까지

 한국군이 강간을 저질러 일어났다는 글도 보이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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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학살 이야기의 문제점은, 오로지 피해자 숫자가 적다는 이유로 위의 푹미나 홍차우 사건같은 진짜 민간인 피해에 여론의 관심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사실 한국군의 학살이 퍼진건 국내의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일본 혐한들의 주요 떡밥으로 퍼뜨려서 이기도 합니다

한국군의 학살 이야긴 한국어 위키보다 일본어 위키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요. 

귀목걸이, 코목걸이 이야기하면서 너희도 똑같으니 우리가 학살한거에 대해 떠들지 말라는 거죠. 몇몇 한국사람들은 거기게 동조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런 과장때문에 정작 우리가 사과해야할 명백한 잘못은 무시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그네 들이 보기에 푹미나 홍커우사건의 피해는

 언급하기엔 너무 피해자 숫자가 너무 적으니까요. 이런 사건은 위키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또 우파쪽 반박하는 사람들은, 이런 적은 피해는 의도한게 아니라 그저 오인사격일뿐이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아무도 '진짜' 피해자에 대해선 아무도 언급을 안하는 거죠. 

다시말하지만 베트남 정부는 보상받길 거부했으니보상을 위해선 베트남 정부를 통해서가 아닌 남아있는 피해자들을 직접 조사하는

수 밖엔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진짜 피해자에겐 관심도 없으면서, 막무가내로 정부에다 보상하라고 우기면 정부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다른 문제점은 안그래도 아무도 신경안쓰는 한국참전군인들의 PTSD를 더 이야기하지 않게 됬다는 점이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PTSD가 다른전쟁보다 심각했다는 사실은 다들 아실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한국군의 PTSD에 심각하게 생각해 보신적있나요?


한국의 참전군인들은 당시 미군보다 훨씬 딸리는 장비에 독재정권시의 심각한 비리로 보급조차 부족했던 시기입니다.

전두환이 자기 전과세울려고 군수품을 빼돌린 돈으로 블랙마켓에서 베트콩 무기를 잔뜩 사들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그렇게 힘든 전쟁을 치뤄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한 군인들을, 한쪽에선 학살자취급을 하고, 한쪽에선 나약한 군인 취급을 했죠.

예전에 하얀전쟁이라는 베트남 참전군인의 PTSD를 다룬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자신들을 나약하게 표현한다며 극장앞에서 시위한 참전군인들만 보더라도 국내에서 PTSD가 얼마나 사소한 문제로 다뤄지는지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몇몇 군인들의 되도않는 군인정신 때문에, 정말 힘든 군인들 조차 사회에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기 힘든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젠 이런 학살이야기들이 참전군인들을 싸이코패스로 만들고 있구요. 


미국은 7월4일생, 플래툰, 풀메탈자켓, 그리고 바로아래 람보등 참전군인들의 PTSD에 대해 진지하게 다룬 미디어가 많이 있는 편입니다.

상담 시스템이 훨씬 잘되있는 곳이기도 하구요. 그런데도 PTSD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진 못했습니다. 


람보가 겪는 PTSD는 불쌍한데, 한국의 참전군인이 겪는 PTSD는 괜찮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왜 일본의 혐한이나 정치적 이유때문에 한국의 참전군인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요?


뭔가 베트남전 이야기가 자주 나오면서 또 물타기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써봤습니다. 에휴..


밑에는 마지막으로 네이버에서 펌자료입니다

6.5.2. 과장된 학살 사례에 대한 반론[편집]

이전까지 학살문제는 북베트남의 공식문서 정도에서 언급이 있었고[24] 윌프레드 버쳇 등의 언론인들의 증언[25],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부 증언[26]으로 남아있었다. 민간인 학살 사건은 부정할 수 없는 한국군의 흑역사로 그런 것은 없었다는 일부 주장도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베트남을 방문하는 대통령은 사과를 통해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현장 부대에서의 우발적인 학살은 확실히 존재하였다. 베트남전의 특성은 게릴라전이 중심이었는데, 이러한 게릴라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해 민간인 구역에 기지를 만들거나 숨어서 총이나 수류탄 공격 등을 퍼붓는 식의 공격이 주류인 전쟁이었다. 상대가 지속적으로 이런 게릴라전을 겪다보면 민간인을 의심하게 되고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어 신경이 날카로워지게 된다. 평시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민간인과 게릴라를 구별해서 대응할 수 있겠지만 전투 중에서 그러한 대응이 시행되지 못하여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선 69년 4월 15일 저격총과 부비트랩으로 공격받은 한국 해병 2대대는 이에 통제를 잃고, 민간인 살해를 일으킨 사건이 있다. 채명신 장군의 인터뷰에서도 이를 어느정도 감안한 듯한 언급이 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자, 베트남에서의 대규모 작전에서는 미리 몇 차례에 걸쳐 전단지를 뿌려 "지정 일자까지 그 구역에서 소개하지 않으면 베트콩으로 오인받아 사살당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그런 대규모 작전에서는 전단지를 보고 게릴라들이 전투 지역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부비트랩에 의한 사상자가 주였고 교전이 없는 경우 역시 존재하였다. 주의할 것은 학살의 경우에도 전범재판에서 순간적으로 저지른 것과 명령에 의해 저지른 것은 죄의 측정 정도와 형벌의 정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 그리고 민간인인 줄 모르고 사살했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학살 주장 지역과 주월 한국군 주둔지역간의 관련성이다. 한국군은 초창기에는 남베트남의 동해안에서도 가장 남쪽 지역에 주둔했다가 서서히 북상해서 전쟁 절정기에는 베트남 중동부, 당시 남베트남 공화국에서는 상당히 북쪽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예로 맹호부대가 벌였다는 고자이 양민 학살 사건 같은 경우 그 당시 한국군은 다른 지역에 주둔하고 남베트남군의 관할이었는데 학살이 일어났다던가..

주월 한국군이 동해안 최남단 지역일대에 주둔하던 당시 그 지역에서는 민간인 학살 같은 사고 이야기도 없고 민간인들의 칭송기사가 나타난다. 그러다가 부대가 북상해 중동부 해안지역에 위치하면서 민간인 학살 기록이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주장되는 학살지역들은 "쾅나이 성" 과 "쾅남성". 특히 쾅나이 성의 경우 게릴라가 매우 많고 주민들도 게릴라에 협조하는 친게릴라 성향이라서 작전지도에 핑크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래서 미군들이 "핑크빌(공산주의자 마을, 해방구)" 이라고 불렀던 곳이다.[27] 유명한 "미라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도 쾅나이 성으로 미라이 사건을 벌인 켈리의 소대가 포함된 중대는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부비트랩만으로도 부대원의 상당수가 전사 피해를 입은 후,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쾅나이, 쾅남을 비롯한 베트남의 중부 동해안은 베트남 공화국(당시 북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인정하듯 혁명가(공산주의자)들의 산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산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지역 장악도가 심했다. 게다가 쾅나이 성은 라오스를 타고 내려오는 호치민 루트가 처음으로 남베트남의 내륙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게릴라는 많았고 게릴라에 협조하는 주민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쾅남, 쾅나이 성 그리고 그 위쪽으로 비무장지대 쾅트리 성까지는 베트콩이나 베트콩 협조자를 뺀 순수 민간인은 없다고 평가받는 지역이었다. 파월 한국군이 초창기 주둔했던 베트남 동해안의 최남단 지역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한국군을 칭송하고 이동하자 이동반대 시위를 할 정도였는데[28], 이후 이동한 중동부 베트남 지역에서는 한국군 증오비가 설치되었던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 이것이다. 이들 지역 주민들은 한국군이 만행을 저질러 증오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북베트남에 충성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적인 한국군을 증오한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군 증오비의 일부는 한국군 증오비로 추정되기 힘든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국군 증오비라고 올라온 사진의 왼쪽 하단의 병사 팔을 보면 부대 패치가 한국군의 파병부대중 어느 부대와도 일치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제일 비슷한 부대 패치가 남베트남군의 레인져 패치. 그리고 한국군은 부대패치를 오른쪽이아닌 왼쪽에붙인다.

또한 애초에 한국군이 있지도 않은 장소에서 한국군이 죽였다는 주장이나 한국군이 있지도 않은 독가스, 군견, B-52 폭격기를 몰고 죽여댔다는 주장들도 있어서 황당함을 주고 있다.

여기에 당시 베트남의 전장은 남베트남군, 북베트남군, 미군,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 소수민족군, 민병대들이 얽히고 설킨 전장이었으며 서로의 군복으로 위장하는 일이 잦았다. 부락인으로 가장하여 VC를 생포하는 한국군[29] 학살하는 주체가 누군지 식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30]

또한 월맹과 베트콩들도 양민이나 포로학살에 대해 깨끗하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 볼만한 사항이다. 베트콩 경우는 "공포 정책"을 실행하며 친미/친정부 마을에서 인민재판이나 학살을 벌인적도 있으며 구정공세 당시 월남 고위간부나 군경의 가족들을 몰살하고 다녔다.관련 사진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진[31] 후에(Hue)도시 경우는 베트콩들과 월맹군에게 장악당한후 수천명의 포로들, 민간인들이 고문이나 강간당한후 학살 당했고 또 수천명이 강제 월북 당했다. 현재 베트남 정부는 이 사건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숫자를 축소시키고 있어 해외 망명한 베트남인들에게서 진실규명을 요구받고 있다. [32]

추가적인 근거로 현 베트남 정부의 학살 사건에 대한 태도가 있다. 현 베트남 정부(당시 북베트남)가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못하는 것은 승전의 우월감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북베트남의 공포심 활용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도덕성 역시 훼손되기에 함부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북베트남이 학살을 적극 주도한 북한 같은 급은 아니었다지만 베트콩을 어쨌든 우군으로 활용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33]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학살 사건에 대해 배상을 하고 싶단 뜻을 전달하자 베트남 정부는 즉각 과거의 일은 관심없으니 투자나 해달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베트남의 전쟁박물관에는 왜곡된 사진들이 걸려 있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베트콩 포로를 압송하는 사진을 (이것은 명백히 종군기자가 찍으면서 설명한 사진에다가 어디서 찍혔는지, 무슨 부대 소속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다.) 몬타크나드족들을 수용소에 압송한다고 왜곡시키거나

베트콩 여자를 심문하는 사진을 "후옹 디엔 학살"이라는 거짓말을 짤막하게 적어 놓은 경우도 있으니 

베트남측 자료는 상당히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어떤 베트남 자료에는 한국군 700여명(!)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예 말이 안되는 소리다.[34]

지금도 언플로 추정되는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한국어 위키백과를 살펴보면 십수개에 달하는 한국군의 베트남인 '학살'사건에 대해 적혀 있으며 총합 학살 카운트가 무려 수천명 단위에 이른다. 

네이버 캐스트 "그 시절 그 이야기"에서도 한국학살이 언급된 적이 있다. 동아일보 출신에 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닌 민병욱 기자에 따르면, 1966년 12월 6일 빈 호아사 꺼우 마을에서 131명을 살해한 것이 83년 외국 언론의 보도로 밝혀졌다고 하는데, 정작 그 외국 언론 보도의 기사 원문이나 링크는 없다.링크

이 문서들을 다 믿기 힘든 이유는 일단 영문 위키백과등에 올라와 있는 한국군의 학살 관련 항목과 숫자의 근거가 베트남이나 미국측 자료도 아니고 한국군이 학살을 했다고 주장하는 꾸준글 쓰는 한국인들 출처다. 그것도 원문 출처 상당수가 구수정과 한겨례 신문이고, 아닌 것들도 대부분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한인 단체 사람들이 쓴 책이거나, 심지어 마을에 조성된 증오비관광비 따위인 식이다. 이 증오비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되는대로 해당 지역이 베트콩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단 지역이라는 배경을 깔고 봐야한다. 게다가 위키피디아의 이 문제 관련 문서들은 누구나 항목을 수정하고 작성한다는 점에서 저 사람들이 자기 글을 퍼나르는 식으로 쓴 가능성이 큰 글들이다. 

수기 '전투감각'으로 유명한 서경석 장군의 경우에는 적을 크게 무찔러서 훈장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사로잡은 포로들을 구타한 것이 드러나서 훈장 서훈이 취소될 정도였다. 포로 구타 정도로도 상부의 반응이 민감했는데 구수정이나 증오비 주장처럼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죽이고 사지를 절단했니 어쩌니를 밥먹듯이 했다는 말은 신빙성이 더욱 떨어진다.

하물며 관련된 증언과 문서들은 일관되게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을 '최대한 잔혹하게 살해'나 '여자들을 강간하고 어린아이 배를 가르는' 같이 패턴화 된 문장들이 등장하는 구도이다. 잔인무도한 귀축 한국군 VS 무고하고 선량한 베트남인들의 희생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듯 한 주장들이 대부분이며 그나마도 시신이나 학살 현장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도 시신이고 당시 잔해고 아무것도 없이 오직 추모비 뿐이다. 명분에 대해서도 미군과 한국군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침략자"로 소개하니 조심히 읽을 것.

여기에 저 글들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주장을 사실처럼 왜곡해서 속칭 감성팔이와 선전선동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쓰인 자료를 무조건 믿을 이유도 근거도 없다. 교차검증이 되지도 않는 증언같은 것을 진실인 것 마냥 쓴 것을 둘째치고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주장과 자료만 올리고 다른 한쪽은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 애시당초 그들이 제시하는 미군의 자료가 쓰인 시기는 대부분 미라이 사건으로 부터 얼마되지 않은 시기, 즉 가장 날이 선 시기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은 동양의 이름 없는 나라이니, 한국군이 학살을 벌여도 잘 안알려졌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당시 베트남 파병군 숫자 제 2순위가 한국군으로, 5만 명이 주둔했다. 그러니깐 미군 10명 당 한 명 꼴 숫자로 많았다는 것인데, 그런 한국군이 학살을 벌였으면 누군지 몰랐을리가 있나?기록도 안 찾아보고 헛소리를 주장하려니 앞 뒤가 안 맞는게 당연

참고로 월남전 기간 동안 최고로 유명한 학살 사건인 미라이 사건 당시 사망자 수가 300~500명 추산인데, 학살을 실제로 한국군이 수도 없이 벌였다면 선전거리 수집과 심리전에 필사적이던 당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 그리고 현 베트남 정부가 자초지종과 학살 규모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대형 사건이 여럿 터졌다면 베트남전쟁 당시에 남베트남 전역에서 한국군 몰아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대 사건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반전여론을 지지하며 베트남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던 미국 언론부터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라이 학살을 예로 들자면 미라이 학살 이후로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이미지는 완벽히 쓰레기로 전락해서 전쟁지속의 의지와 여론마저 바닥으로 끌고 갔다. 학살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런 거대한 사건이 벌어졌으면 기밀로 남기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이미 예전에 다 알려져서 이제와서 발견될 것도 없다.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한국군이 그런 악행을 베트남 전역에서 시도때도 없이 벌이고 다녔다면 이미 진작에 미라이 학살 사건의 여파 뺨치는 대 특종이 되었을 것이란 말.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몇 명의 생존자들과 기념비 혹은 추모비 이외에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한 학살의 흔적은 하다 못해 유골과 전투 흔적 하나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학살이 벌어졌다는 마을 이름들은 심지어 지도에서 지명조차 찾을 수 없는 마을들이거나 미국 정부의 극비문서라는 자료 역시 원본이 진짜 존재는 하는 것인지조차 입증하지 못한다. 

따라서 여러 정황을 참고하여 한국군과 파병군인들 측의 의견도 들어야 하며 각각의 글을 그대로 믿는 우를 범하지 말고 자신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해야 한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아쿠아마린마고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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