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펌]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일본 근대화와 조선침략

lionet 2020. 8. 20. 16:44

원글은 디브디프라임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9286652&sca=&sfl=mb_id%2C1&stx=gandhika&spt=-811232&page=5

 

퍼온 글은 한류열풍사랑 입니다.

http://cafe.daum.net/hanryulove/8pfm/93114?svc=cafeapi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하고 널리 잘못 알려져 있는 역사 상식중에 하나가,

일본이 근대화를 먼저 성공하였기에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합병하였다 입니다. 

 

침략 결심 시점을 놓고 보면, 이것은 단언코 틀린 이야기입니다.

침략 완수 시점을 놓고 보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본은 내전에서 사쓰마번-조슈번 연합군이 막부군을 패퇴시킨 시점을 근대화 시작인 메이지 유신으로 봅니다. 이게 1868년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사쓰마 vs 조슈의 내전이 계속되었으므로(서남전쟁), 이게 끝난 1877년을 메이지유신 완성시점으로 보기도 합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언제 결심하였는가.

1873년입니다. 메이지 유신 끝나고 혼란기 상황에서도, 태정관 회의에서 사쓰마와 조슈 양쪽이 모두 조선침략에 동의하였고, 그 시기를 놓고 지금 당장 침략하자는 사쓰마 (사이고 다카모리)와 지금 내전 막 끝났으니 조금 더 힘을 기른 후 침략하자는 조슈번으로 갈렸습니다. 이 갈등이 유명한 '정한론' 논쟁으로, 이 갈등이 몇년 뒤 사쓰마-조슈 간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계기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조선 침략엔 동의한 상태였습니다. 

 

이게 얼마나 골때리는 일이냐하면,

 

당시 일본에 아직 헌법도 없고, 근대 국민교육 교육시스템도 없고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근대 행정기관도 없었습니다. 폐번치현령이 발표된게 불과 2년전 1871년인가 그럴껍니다. 근대적 통신 시스템, 근대적 교통 시스템도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에 철도 노선이 단 한개로, 1년전에 시범으로 설치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조선 침략 시기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일본 최초의 헌법 제정이 이보다 16년뒤인 1889년입니다. 

  

자기 몸도 못추스리는 상태에서 왜 옆나라 침략부터 결심하는가.

조선을 침략해서 그 돈으로 근대화하자는 겁니다. 

이걸 놓고, 경제적으로 침략해가며 종자돈을 마련하는 한편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가자는 이토 히로부미 및 조슈번 의견이 있었고, 그럴 것 없이 바로 무력으로 침략하자. 내가 조선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조선 국왕앞에서 고의로 전쟁의 빌미가 될 만한 엄청난 불경을 저지르겠다. 내 한 목숨 던질테니, 이를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다오 라는 사이고 다카모리 (사쓰마번)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후 내전에서 사쓰마번이 패함에 따라, 일본은 시간을 두고 조선을 침략하자는 조슈번측에 권력이 넘어갑니다만, 그래봤자 십년쯤 뒤인 1883년 근방을 기약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조선이 일본에 보낸 신문물견학단이 술만 먹고 유학이나 논할 뿐, 서구문명을 배우는 데 관심이 없다고 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롱은, 아마도 당시 조선관리들의 정신상태를 보았을 떄 다분히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사신단이 정말로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서 공부를 하자고 하였을 때, 일본국이 가르쳐줬을 확률은 없었습니다. 이미 침략하자고 국론이 정해진 상태였으니까요. 

 

조선은 이후 갑신정변 사건을 통해 일본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청나라 끌어들이고(청일전쟁 1894년), 러시아 끌어들이는 바람에 (러일전쟁 1904년), 10년이 더 걸려서 조선 침략이 1905년에 완성됩니다. 이 발버둥이 없었으면 조선은 일본 계획대로 더 일찍 침략당했을 겁니다.

 

우리가 1905년을 기점으로 생각하니까,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해 있는 상태이고,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여 침략당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일본이 조선침략을 마음 굳힌 것은 자신이 근대화되기 이전입니다 (1873년). 

심지어 조선을 먹겠다고 청일전쟁을 벌이던 시점까지도, 일본은 헌법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제가 일본을 우리나라에게 있어서는 아주 위험한 나라. 침략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유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능력이 되든 안되든, 일단 조선부터 잡아먹고 보자는 게 반사신경처럼 튀어나오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언제 이룩된 것이냐. 조선침략을 위해 벌인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전쟁배상금으로 일본은 근대화에 큰 도움을 받으며 근대국가가 됩니다. 애초 계획대로 조선침략하여 그 돈으로 근대화하자는 게 빙 둘러가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는 맞아떨어진 거지요.

 

더불어 경제적으론, 처음엔 영국제 모직물을 조선에 팔아먹는 중간상인을 하다가, 영국으로부터 중고방적기를 사들여와서 면직물을 만들어다가 조선에 팔아서 돈을 모아 근대화에 보태지요. 조선은 아직 가정주부가 물레질로 천 만들던 시기이니까, 영국제 기계 방적기에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 이외의 국가는 영국이 더 좋은 신형 방적기로 천을 만들어 직접 팔아먹고 있었기때문에(중국, 인도, 유럽, 아메리카 대륙 등), 영국이 처분한 구형 중고 방적기를 일본이 사들여 오긴 했지만 제품의 품질도, 가격 경쟁력도 영국산보다 처졌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운요호 사건으로 조약맺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약점을 잡은 나라 조선에 달라붙어 팔아먹는 수밖에요. 나중엔 그마저도 일제 국산기계로 생산시설을 대체하는 데, 역시 물품을 팔 데가 조선밖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피 빨아서 근대화가 된 케이스가 일본입니다. 

 

간혹 보면, 일본애들이 자신들 정당화를 위해, 1873년 조선 침략 논의는 초기 정한론이었을 뿐, 이후 1880년대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진심으로 조선의 개화를 도왔다, 김옥균을 지원했다 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부 바깥에 있었던 자유주의 사상가인 거고, 일본국 정부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침략 노선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걔네들은 자신들의 침략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자기네 태정관 회의록에 나와있는 침략 논의들을, 그건 그냥 공상이었어 라고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침략의 전단계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열강에 겁먹어서 힘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벌인 자기방어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대한제국이 병합된 것은 스스로 병합되고 싶다고 찾아와서 부탁하기에 받아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태정관 회의-청일전쟁-러일전쟁-조선합병까지 명확하게 일관된 노선을 걸었고, 조선을 식민지 만들려고 30년(1873-1905)에 걸쳐 일본이 노력했다 라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2015년 현재의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대한제국 합병은 합법적이었다 가 주류 이론이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자기방어적 전쟁이었다가 주류 이론입니다.

 

일본이 조선 침략을 결심하던 메이지 시기는 역사책을 찾아서 보시면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골때리는 혼란기였습니다. 해마다 민란이 곳곳에서 수백건씩 일어났고 (거의 우리나라 동학난 시기에 버금갑니다), 일본이 망할 거라고 예상하고 집도 절도 팔아먹고 밤마다 술마시고 혼음 난교를 벌이는 촌락들이 생기고... 각종 사교도 횡행하였습니다. 

 

(바람의 검심 등에 나오는 것처럼 희망찬 새 나라 꿈을 꾸는... 주장은 헛소리고, 일본 역사책 찾아서 읽어보시면 저 시기 혼란은 아주 환타스틱합니다). 다카하시 츠토무의 만화 Sado(士道)가 이 시기 혼란을 그린 겁니다. 

 

그 와중에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각 마을의 신사들을 때려부수고, 그 신사에서 받들던 신체를 버리고 천황가의 조상신인 천조대신 예하로 재배열합니다. 불교 사찰도 많이 때려부쉈습니다. 억불정책을 쓰고 신도를 권장하였습니다. 본래 일본의 신도는 우리의 서낭당처럼 향토 토속신을 모시는 개념이었는 데, 천황가 조상신인 천조대신을 모시는 이세신궁 예하로 편입시키며 신사 조직도를 만들었고, 여기서 걸리적 거리는 신사나 신체들은 때려 부쉈습니다. 이게 민란을 부추기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일본 신사의 신도는 근대화 이후에 급조되거나 변조된 것들이 꽤 있습니다. 그게 벌써 백년이 지났으니, 이제와서는 자기가 방문하는 신사의 역사를 캐들어가보지 않으면, 이게 진짜 신인지, 근대화이후에 급조된 것인지 알기 어렵지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쪽 관련 내용은 일본 불교사 뒤져보시면 튀어 나옵니다.

 

사이고가 조선에 외교사절을 보내고자 한 이유는 전쟁의 빌미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이고의 정한론은 이타가키 다이스테를 설득하고자 핑계를 댄 것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라고 말할려면, 그렇다면 외교사절을 보내서 구체적으로 조선과 어떤 길을 걷겠다는 것이냐 가 있어야 합니다. 근데 그게 사이고에게는 없었습니다. "부디 친분을 두터이 한 후 우리의 취지를 관철하는 형태로 진행하고 싶다"가 일본수뇌부에서 한일합방을 돌려 말한 게 아니고, 다른 무엇이 또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키노 님의 이론이 맞을려면 사이고가 외교사절을 보내서 조선과 어떻게 협동을 해서 무슨 일을 할려 했다 라는 백업이 될 만한 내용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근데 백사십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런 내용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애시당초 조선과 화합하며 근대화 하는 방안이 일본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근대화과정을 돌이켜보면 , 조선을 수탈하지 않으면 근대화를 할 돈 자체가 마련이 되지 않습니다. 이게 군사적 측면이든, 식량 측면이든, 산업 경제적 측면이든, 조선외에 돈 나올 곳이 일본에게는 달리 없었습니다. 사실 사이고의 정한론이라고 말하지만, 어차피 사쓰, 조 모두 정한론자였고 방법론 차이만 있었을 뿐이므로, 사이고 다까모리만 정한론이라고 말하는 것도 뻘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 정한론자였습니다.

 

정한론은 추측이 아니라 기록물로 남은 사이고 다까모리의 주장이죠. 그리고 대화도 시작 못해본 처지라서 어쩔 수 없었던.. 이라고 할 이유 자체가 없는 게,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의 의도는 명확히 드러나잖습니까. 1873년 태정관 회의, 1875년 운요호 사건, 1877년 서남전쟁. 즉 사쓰마 번이 아직 축출되지 않고 중앙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시점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불공정협약을 강요했습니다. 제 기억으론 이 시기면 일본 해군은 사쓰마번 관할일텐데요. 이것을 보면서도, 일본측이 외교사절을 보내 정중히 대화할려고 했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본애들이 입발린 소리 하는 것을 말 그대로 애써 믿을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당시에 조선 외에 돈 나올 길이 있었습니까? 일본은 당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리고 이제 근대화를 해야 하는 데, 메이지유신까지 오면서 나라 내의 광산이나 각종 이권은 이미 유럽열강에 상당수 팔아먹고 빚을 진 상태였었고,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는 이미 서구 열강에 장악되어 시장 침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이 돈 벌 수 있는 데가 조선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옷감 팔아 쌀 퍼가다가 방곡령 나오니까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식량을 가져가려 할 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동남아나 중국으로부터 쌀을 가져올 수 있었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습니다. 동남아산 길다란 쌀은 일본 사람들이 싫어해서, 조선 쌀이어야만 했습니다. 돈 가져가고 싶고, 식량 가져가고 싶다고 하는 데 그걸 허락할 나라가 어디있겠습니까. 사이고가 내가 사절이 되어 말을 하여 교섭해 보겠다 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내가 가서 전쟁의 꼬투리가 될 만한 일을 벌이기 위함이다 라고 기록을 남겼는 데, 전자의 기록 '사절로 가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만을 믿는 것이 더 이상하죠. 흥선대원군이 친부 묘 도굴당해서 빡 돈게 1868년이었고, 쇄국정책 들어갔는 데, 사이고 자신부터가 존왕양이 외치다가 전쟁 패하니까 개화파로 급변한 얼치기인 상황에서, 빡돈 흥선대원군을 설득할 카드를 정한론 나오던 시점에서 단 한개라도 사이고가 갖고 있었습니까. 한 개도 없었죠. 참고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내려온 것은 정한론 후의 일입니다. 정한론이 9월인가 그렇고, 12월인가 쯤에 흥선대원군이 내려올 겁니다.

 

그리고 운요호 사건 당시 사이고가 이미 낙향해있었다는 말은 맞지만, 사쓰마 번은 아직 낙향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이고 동생 쓰구미치가 남아서 정부에서 사쓰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제 주장은 이겁니다. 그 일본애들의 주장은 당시 조선 침략의도가 이미 존재했었다 라는 것을 회피해나가기 위한 변통으로 보이며, 1873년 정한론 논의 시점에서 이미 사쓰조 양쪽 다 정한론자였고, 방법론의 차이로 툭탁 거렸을 뿐이다 라는 겁니다. 사쓰조가 서남전쟁에서 싸운 게 정말로 정한론 때문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죠. 둘 사이가 유신 전에 이미 전쟁에서 맞붙었던 만큼 사이가 나빴었고, 그게 결국 터진 거죠. 근본적인 문제는 군제도와 신분문제였죠. 사이고는 사무라이를 남기고 싶어했고, 평민 징병론을 주장해온 조슈번은 사무라이를 없애고 싶어했으니까요. 그래서 사이고가 낙향해서 사숙을 차려 사무라이 정신 함양 어쩌고 한 거였고, 조슈는 징병제로 그걸 짓밟았죠. 사이고 실각의 원인이 조선에 대해 예의를 갖춰 사절을 보내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라는 말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이고 쓰구미치가 남아서 해군을 장악하고, 그래서 사쓰마가 장악했던 일본 해군과 조슈가 장악했던 일본 육군은 뿌리깊은 갈등이 남아 그 이후 70년이 지난 2차대전중에도 서로 엿먹일 정도로 사이가 나빴는데요. 사이고 쓰구미치는 서남전쟁이 터질 당시에도 육군 중장이었고, 그 이후에 해군경으로 자리 옮긴 걸로 아는 데, 서남전쟁 2년전이면서 운요호 사건이 나던 1875년이면 권력이 쌩쌩하던 시점입니다.

 

이와쿠라 토모미의 꼼수 어쩌고는 진짜로 별개의 이야기인 거고요, 본 주제인 일본이 과연 조선 침략 의도를 갖고 있었는가, 사쓰마와 조슈 양 측이 다 침략의도를 갖고 있었는가로 돌아가서, 지금 키노님이 주장하시는 사이고는 예의로 조선과 대화를 하여 일본의 취지를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니 정한론자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시는 데, 그 일본의 "취지"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이걸 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동양평화, 우호관계 이런 붕 뜬 소리 말고, 사이고가 사절로 가서 관철시키려고 했던 일본국의 국익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사쓰마가 조선 점령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태어나 처음 듣습니다. 사이고도 기본적으로 조선 점령에 찬성파였습니다. 사쓰와 조슈는 침략방법론갖고 싸운 거지, 조선 점령 자체에 이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이고가 하지도 않은 주장이라는 것은 키노님이 사이고가 폈던 주장중에서 조선에 시비 걸로 간다는 서한은 삭제하고, 대화로 풀려고 사절로 간다 쪽만 내세워서, 사이고는 정한론 편 적이 없다 하시는 거구요. 사이고는 엄연히 그런 주장을 폈습니다.

 

(추가: 본문에 약간 오류가 있어서 바로잡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 정부의 5년치 예산액인 2억 냥의 막대한 배상금을 챙기고 그 돈으로 군사력 증강 등 근대화를 한 것은 맞으나, 러일전쟁에서는 배상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러일전쟁 강화 회담장에서 러시아측 대표가 일본측한테 우리는 혼란한 국내 사정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지 결코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니 한 푼의 배상금도 줄 수 없다고 윽박질렀고, 일본측 대표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보다 일본군의 사상자가 더 많았고 일본의 정부 재정이 바닥나고 군수 물자도 부족하여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형편이 못 되었던 관계로 러시아한테 배상금을 달라고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일본 국민들이 히비야 공원에서 반 정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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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DP에 좋은 댓글들도 기억하기 위해 스크랩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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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의 정한론은 능력도 없이 나대는 사실 아떻게보면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의 그러한 논의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식민지화 구상은 영국에서 배워 온 것인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 모델을 이집트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18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조선을 어떻게 식민지화 또는 보호국화할지 몰랐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전 일본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메이지 초반이 마지막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대댓글: 일본인들은 그렇게 주장하지요. 걔네들은 자신들의 침략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자기네 태정관 회의록에 나와있는 침략 논의들을, 그건 그냥 공상이었어 라고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침략의 전단계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열강에 겁먹어서 힘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벌인 자기방어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대한제국이 병합된 것은 스스로 병합되고 싶다고 찾아와서 부탁하기에 받아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태정관 회의-청일전쟁-러일전쟁-조선합병까지 명확하게 일관된 노선을 걸었고, 조선을 식민지 만들려고 30년(1873-1905)에 걸쳐 일본이 노력했다 라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2015년 현재의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대한제국 합병은 합법적이었다 가 주류 이론이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자기방어적 전쟁이었다가 주류 이론입니다.

    대댓글: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쓰마 번은, 이미 17세기부터 류큐를 식민지화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경험이 있는 곳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전에 보였던 사쓰마의 활약은 류큐로부터 수세기 동안 뽑아 내 쌓아왔던 경제적 부유함 없이는 단언코 불가능한 것이어지요. 식민지화 모델을 구지 서양 열강에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일전쟁 이전의 정한론이 실력으로 뒷바침 되지 않았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습니다만, 그 의지를 의심할 여지가 있을까요?

 

댓글: 일본의 근대화는 네덜란드로 부터 난학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면서 이미 시작된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동남아 식민지 지배하는걸 보구서 식민지를 어떤식으로 다루는지지도 일본은 배웠구요 체계적인 시스템만 구축이 안되었을뿐이지 이미 근대화는 일본이 아시아국가들중에서는 제일먼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청나라나 조선이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모르고 자기네들만의 세상에서 허송세월 시간허비한거죠 근대화를 못해서 먹힌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고있는데도 그걸 거부하고 변화를 두려워한 정치인들과 일부 기득권자들의 잘못된 판단이 결국 크나큰 상처만 국민들에게 준거죠

   

   대댓글: 난학의 도입을 보고서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특히 현대 일본학계에서는 이걸 아주 필사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리 말하자면 난학 최초 도입시기에 일본은 총기도 도입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었고, 하지만 사무라이 신분 구조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총기를 폐지하고 칼의 시대로 되돌아가 300년을 보낸 유일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일본이야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자주적 근대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난학 도입을 강조하지요. 총기를 발달시키지 못하고, 칼의 시대로 돌아간 것은 묻어두고요. 역사에는 양면이 모두 있습니다. 자국의 역사에서 잘한 것은 부각시키고, 잘못한 것은 감추려하죠. 근데 일본이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그걸 보고 자괴감에 빠지는 것은, 그게 우리가 살짝 속아넘어가는 면이 있을 경우에는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그걸 거부하고 변화를 두려워한 정치인들과 일부 기득권자들의 잘못된 판단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일본에 점령당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결론 말씀에는 100% 동의합니다.

 

댓글: 평소 궁금했던 것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일본의 조선 강제합병은 대동아전쟁 훨씬 이전에 이뤄진 것이라 1945년 일본의 패망과는 직접적으론 관계가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국제적으론 어떻게 일본의 패전과 거의 동시에 조선의 해방 &독립이 즉시 인정될 수 있었던 것 인가요? 역사 문외한이 질문 드립니다.

 

   대댓글: 별개라고 안보니까 그렇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 시작된 류큐합병(1879), 홋가이도 정벌, 대만정벌(1895), 조선 합병(1905), 만주 침략(1931), 중국 본토 침략, 태평양 전쟁까지 연결된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이 중에서 류큐(오키나와)는 이미 인종이 멸절되었고 (류큐 순혈은 이제 없습니다. 일본인과의 혼혈만 소수 남아있습니다), 홋가이도의 아이누족도 멸절되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이 잡아먹은 상태 그대로 인정되고 있는 거고, 대만, 한반도, 중국 땅은 토해낸 거지요. 일본내에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반도 합병 까지는 정당화 하는 시각이 크고, 만주 침략부터는 침략이 맞다고 인정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내에서는 만주사변부터 2차대전 종건까지를 묶어서 15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5년 전쟁과 그 이전의 전쟁들은 묶어서 생각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조선 합병까지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거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물론 국제사회에서는 한 덩어리인 침략노선이었다고 보기 때문에 일본더러 토해내라고 시킨 거였구요. 민족 자결주의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승전국인 영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식민지를 토해내고 독립시켜야 했으니까요.

 

PS) 우리나라의 경우 지속적인 독립운동 독립항쟁 및 대 일본 선전포고등으로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피침국 지위를 얻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