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서울의 각 동네들 지명 유래

lionet 2010. 12. 8. 02:38

1. 강남구

개포동

옛날 이 지역에 갯벌이 있어 개펄이라 하던 것이 변해 개패 또는 한자명으로 개포라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반포리로 불리웠으나 국립묘지일대 먼저 불리우던 반포가 있어 1914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개포동이로 개칭되었다.

논현동

논고개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는 지금의 논현성당 근처이며 특히 강남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 벌판이 논밭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대치동

 

대치동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자연부락 7,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가장 큰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도곡동

 

마을 뒤 매봉산 아래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골이 되어 도곡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 마을에는 김의신이라는 소문난 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김창순이 병상에 눕게 되었으나 백약이 소용없어 뒷산에 올라 백일기도를 하던 중 산신령이 나타나 허벅지살을 고아드리라는 처방을 그대로 실천하여 완쾌되었다고 하여 이곳 유지들이 효자비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삼성동

 

삼성동은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무동도 닥점지역이었는데 당시 자연마을인 봉은사, 무동도, 닥점의 세마을을 병합하여 일제 때인 1914년 3월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경기도 구역획정때 삼성리라 명명한데서 연유하였다.

세곡동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옛날의 자연부락 명칭인 세청리의 세자와 은곡동의 곡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수서동

 

이 동네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하여 수서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날 궁말, 궁촌이라고 불리웠는데, 그것은 조선 태조의 아들 무안대군과 광명대군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였다.

신사동

 

신사동 동명의 유래는 한강변에 있던 이 지역 부락 새말과 사평리의 이름에서 각각 따와 신사리라 한데서 연유한다.

 

압구정동

 

이곳에 조선 세조때 한명회의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불여진 이름이다. 원래 압구는 한명회의 호로서 일찍이 이름을 "압구정"이라고 했던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세상일 다 버리고 강가에서 살며 갈매기와 아주 친하게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역삼동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상방하교, 하방하교 등 역촌의 세 마을을 합친데서 붙인 이름이다.

율현동

 

세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밤나무가 많아 밤고개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고개, 방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율현이라 한 데서 유래한다.

일원동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이 있어 일원동으로 불리웠다. 일설에는 사방이 대모산으로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편안한 마을이라는 한데서 연유 되었다고도 한다.

자곡동

 

자곡동 이 곳의 자연부락 명칭인 자양골, 못골로 칭하던 것이 일제시대 행정구역 조정시 자양동, 자곡동으로 불리었고,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자(자)와 곡(곡)자를 따서 자곡동으로 명명되었다.

청담동

 

현재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 맑은 못이 있었으며, 또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2. 강동구

강일동

 

한강 여울가에 있던 마을로서 2000년 동명을 하일동에서 강일동으로 변경. 법정동명은 하일동이고 행정동명은 강일동이다. 서울특별시의 마지막 씨족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일대의 평촌, 능곡마을 수십 세대가 청송심씨(靑松沈氏)이며, 약 400년 전부터 매년 음력 7월 3일 동네의 평안을 위한 치성제를 올리고 있다.

고덕동

 

고려 말기 형조참의를 지낸 이양중이 태조 이성계의 건국을 반대하여 이곳에 숨어 살면서 벼슬도 거절하고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받은 데에서 동 이름이 유래한다.

길 동

 

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길(吉)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형이 나뭇가지처럼 길다 하여 ‘기리울’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둔촌동

 

고려말 공민왕 때 충신 이집이 당시의 세도가 신돈의 모함으로 지금의 일자산 서남쪽에 토굴을 파고 숨어 살며, 쓰라린 고난을 자손후세까지 영원히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호를 둔촌으로 바꾸었고 한다. 현재의 둔촌동 동명은 이집이 이곳에 은거생활을 하였다하여 이 집의 호 둔촌에서 따온 이름이다.

명일동

 

고려 성종11년(994년)에 현재의 명일동 지역에 다니는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 명일원을 두어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와주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이름 지어 졌다.

상일동

 

하일동과 상일동 사이에 흐르는 게내(현재는 고덕천)의 위쪽에 위치한다 하여 '상일리'라고 유래된 지명이다.

성내동

 

풍납리 토성 안쪽에 마을이 위치했기 때문에 성안말, 안말, 또는 성내리 등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암사동

 

신라시대에 절이 9개가 있어 구암사 또는 바위절이라 했는데 그 한자이름에서 암사동이 유래되었다.

천호동

 

천호동이라는 동명은 이곳이 인가 수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풍수지리설에서부터 비롯되어 불리워졌다.

 

3. 강북구

가오리

 

현재 수유동 우이초등학교 등이 있는 곳으로 옛날 미아리 고개에서 장사를 지내는 소리가 임금에게까지 들리자 번잡스러우니 오리(五里)를 더 가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아동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돈암현)를 일명 미아리고개라고 불렀기 때문에 고개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미아 7동에 있는 불당골에 미아사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빨래골

 

물이 많아 자연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인근 주민들의 쉼터와 빨래터로 이용되었고, 당시 대궐의 궁중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면서 빨래골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번 동

 

고려 시대에 씌여진 [운관비기]라는 책에 "李氏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는 비기설이 있어, 고려 말기의 왕과 중신들이 이 설에 의거 경계를 하던 중, 한양 삼각산 아래 이곳에 오얏나무(李)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李氏가 흥할 징조라 여겨 오얏나무를 베기 위해 벌리사를 보냈는데 이로부터 이곳을 벌리(伐里)라 칭하다가 번리(樊里)가 되었다고 한다.

수유동

 

북한산 골짜기에서 물이 이 마을로 넘쳤기 때문에 물 수(水)자와 넘칠 유(踰)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우이동

 

동래 뒤에 있는 삼각산 봉우리 중에 소 귀 같이 보이는 봉우리가 있으므로 소귀봉 즉 우이봉 아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전해진다.

 

4. 강서구

가양동

 

가양동이라는 동명은 가마동과 고양리가 합쳐지면서 생겨났다.

개화동

 

꽃이 활짝핀 모양이라는 개화산 아래에 발달한 마을이므로 개화동이라 불리운다.

공항동

 

공항동의 원래 지명은 소나무가 울창한 동네라 해서 붙여진 송정리였는데 김포공항이

들어서면서 공항동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과해동

 

마을모양이 마치 서해바다로 뻗어나가는 오이모양이라고 하여 과해동이라고 하였다.

등촌동

 

꽤 높은 산마루턱이 있고 이 산마루턱을 중심으로 마을이 자리잡았다 하여 등마루골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을 지었다가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등촌동이 되었다.

마곡동

 

이곳에서 삼(麻)이 많이 났기에 마곡동이라 하였다. 원래는 고고마진 나루터가 있었던 어촌이었다고 한다.

발산동

 

수명산(파려산,발산)이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형국이라 하여 발산이라 불리웠으며 산 안쪽마을을 내발산동, 산 바깥마을을 외발산동이라 하였다.

방화동

 

사시사철 꽃향기가 퍼지는 개화산 옆에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방화동이라는 동명이 생겼다.

염창동

 

조선시대에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온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인 이곳에 소금보관창고를 지었기 때문에 염창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곡동

 

옛날 골짜기 5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있다.

오쇠동

 

옛날 이곳에 쇠노를 만들던사람 다섯명이 도망와 숨어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곡동

 

예전부터 땅이 기름져 골짜기 사이마다 벼가 잘 되므로 벼가 익어가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으로 화곡동이라 불리워졌다.

 

 

5. 관악구

남현동

 

원래는 사당동이었지만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할하면서 사당1동의 관악지역을 남현동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남쪽에 있는 고개마을이라는 뜻으로 고개는 남태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봉천동

 

마을이 험하고 높은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어 마치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봉천(奉川)이라 불리워졌다.

신림동

 

근처에 산림이 무성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 광진구

광장동

 

조선시대 자연촌락 광장리(일명 광나루)의 광(廣)자와 장의동(壯義洞)의 장(壯)자를 따서 광장동이 되었다.

구의동

 

아차산 기슭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긴 지형으로 자연촌락 구정동(九井洞)의 九자와 산의동(山宜洞)의 의(宜)자를 따서 구의리라 하던 것이 구의동이 되었다.

노유동

 

제방이 없을 때 잔디밭이었던 이 일대가 가을이면 누렇게 변하여, 누런 잔디 산이라 불리다가 누런산으로 다시 노룬산으로 음이 바뀌었는데 풍류객이 늙어감을 서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곳이라 하여 어느 때부터인가 노유산으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능 동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 순명황후 민씨 유릉이 있었으므로 능말, 능리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모진동

 

조선시대때 말을 기르던 곳으로 가끔 풀어놓은 말이 발을 잘못 디뎌 건국대학교 정문 근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말을 건져내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 여인들을 모진 여인이라 부르던 것이 모진동네로 바뀌었다가 모진동으로 되었다고 한다.

자양동

 

조선시대 국가에서 말 1,000 마리를 기르면 용마(龍馬)가 난다하여 자마(雌馬) 즉, 암말을 길렀기 때문에 자마장이라 칭하였고 동명을 자마장리라 부르다가 자양동으로 음이 바뀌었다.

중곡동

 

중곡동의 위치가 능동과 면목동 중간에 있으므로, 간뎃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리라 하였다.

화양동

 

조선시대 화양정이 세워져 있어서 유래. 일설에는 조선초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송씨 부인과 이별하면서 회행하기를 기원했다 하여 회행리라고 호칭했다는 설도 있으며 화양정을 회행정(回行亭)이라고도 했다.

 

 

7. 구로구

가리봉동

 

가리봉이란 이 지역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또 하나는 그 연원을 고을(谷)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 혹은 '가리'에서 찾고 있는 설이 있는데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지가랭이처럼 갈라져 있는 것

과 연관된 명칭으로 풀이된다.

개봉동

개봉동이란 현재 경인선과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남쪽에 있는 개웅산의 '개' 자와 양천구 신정동과 경계를 이루는 매봉산의 '봉' 자가 합쳐져 생긴 이름이다.

고척동

이 동네의 한 자연 마을인 고좌리(高座里) 즉 높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는 데에서 연유되었다는 설과 경기도 부천·안양·강화 사람들이 서울지역 사람들과 안양천을 경계로 하여 생필품 및 농산물을 교환하여 오던 곳으로서 당시 계량기가 없어 측정이 곤란하자 긴 자(高尺)로 재서 서로 교환 측정하던 것을 고척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구로동

옛날 이곳에 9명의 장수한 노인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궁 동

궁동은 조선 선조의 일곱째 정선옹주가 살던 집이 여기에 있었으므로 궁궐 같은 큰 집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도림동

도림동에서 떨어져 나와 붙은 이름으로 도림동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마을 일 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풀이 많았는데 특히 길옆에 삿자리 종류의 풀이 숲을 이 룬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가 있으며, 또 하나는 산의 형국이 마을 뒤로 산처 럼 둘러싸고 있고 이 마을이 국도에서 돌아앉아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도야미리 (陶也味里)'가 도림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오류동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 오류골에서 비롯되었다.

온수동

온수동이란 동명은 온수골에서 유래하였는데 옛날 이 지역 일대에서 더운 물이 나왔기 때문에 온수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천왕동

동네 뒷산이 골짜기에 천왕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아래 마을이란 뜻에서 천왕골 또는 천왕리로 불려져왔다.

항 동

옛날 이곳 일대가 바다처럼 물이 많을 때 배가 마을에 닿았으므로 항동 이라 했다는 전설적 해석도 있으나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의 형태가 배 모양이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8. 금천구

가산동

 

1963년 1월 1일 시흥군 동면 5개리(가리봉, 독산, 시흥, 신림, 봉천)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가리봉리와 독산리를 합쳐 행정동 명칭을 가산동이라 하였다.

독산동

 

까치머리 독, 대머리 독자를 사용한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강희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시흥 I.C에서 문성초등학교 부근이 산이었으나 한성 외부에 있는 까닭에 도끼로 찍히고 소나 염소 따위에게 먹힘을 당하여 벌거숭이가 된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조 중기 이전부터 독산이라 부른 것이 확인된다.

시흥동

 

고구려때 이 지역의 이름을 '잉벌노(仍伐奴)'라 했는데 그 의미가 '뻗어 나가는 땅'인 글자 그대로의 한자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9. 노원구

공릉동

 

경기도 영주군 노해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에는 서쪽에 공덕리, 동쪽에 태릉, 강릉이 있고 그 안에 능골이라는 큰 마을이 두개 있었다는데 그 유래가 있다.

상계동

 

상계동은 원터, 간촌, 당고개, 온숫골, 갈월, 샛말 등의 마을이 한천(漢川)의 위쪽에 위치하여 윗 상(上)자에 시내 계(溪)자를 붙여 지어진 것이다.

월계동

 

월계라는 동명은 밤에 높은 곳에서 지역을 내려다 보니 맑은 시냇물에 마을이 비치고 중량천과 우이천으로 둘러싸인 모양이 마치 반달모양이므로 달 월(月)에 시내 계(溪)자를 붙여 월계동이라 하였다.

중계동

 

중계동은 한천의 중간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계동

 

하계동은 한천의 제일 아래쪽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 도봉구

도봉동

 

마을이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있어서 얻어진 이름이다.

방학동

 

조선시대 왕이 도봉서원의 터를 정하기 위해 도봉산 중턱에 앉아 중다리를 내려다보니 많은 학들이 앉아서 평화스럽게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을 방학굴(골)이라하였다는 설과 이곳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방학이라 하였다는설이 있다.

쌍문동

 

쌍문동에 살고 있던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이 부모가 살아계실 때 정성껏 모시지 못했다고 후회하면서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살다가 죽자, 마을사람들이 그 아들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 2개를 세워서 쌍문이라 하였다.

창 동

 

창동의 유래는 조선시대에 양곡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1. 동대문구

답십리동

 

천호대로 북쪽과 한천로 서쪽에 위치한 답십리동은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 하여 답심리(踏尋理)로 불리었다는 설이 있고 이곳이 도성, 즉 동대문으로부터 10리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신설동

 

동대문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신설동은 조선시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선계(新設契)라 하던 것을 갑오개혁 때 신설동이라 하였다.

용두동

 

왕산로 남쪽, 정릉천 좌우편에 위치한 용두동은 이곳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용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하여 용두리라고 불리었다가 용두동이 되었다.

이문동

 

조선시대 세조 때에 도적을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설치하였던 일종의 방범초소였던 이문(里門)이 있었기 때문에 이문골, 이문안으로 호칭하던 것을 한자로 고쳐져 붙여진 동명이다.

장안동

 

조선시대에 장안벌, 또는 장안평이라 불렀는데 장안평은 조선시대 국가에서 운영하던 말을 기르던 목마장의 일부로서 목장 안쪽의 벌판이라 하여 마장안벌로 부르던 것이 장안벌로 다시 한자 음으로 바뀌어 장안동이 되었다.

전농동

 

청량리역 뒤쪽에 위치한 전농동은 조선시대 초부터 농업을 중시하여 국왕의 직접농사를 지었던 적전(籍田) (일명 전농(典農) )이 있었기 때문에 전농리(典農里)라 불리었다가 전농동이 되었다.

제기동

 

이곳 남쪽에 있는 선농단에서 조선시대 국왕이 매년 춘분과 추분에 풍년을 기원하던 제사를 지내던 제터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청량리동

 

청량리동이란 동명은 이곳에 청량사라는 절이 있어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예전에 청량사가 위치한 바리산이 수목이 울창하고 맑은 샘물이 흐르는데다가 남 서쪽이 트여서 늘 시원하므로 청량한 곳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회기동

 

조선시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소인 회기(懷墓)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휘경동

 

배봉산 아래에 조선 제22대 순조의 생모 순빈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이 있었기 때문에 휘경동이 되었다.

 

 

12. 동작구

노량진동

 

원래는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란 뜻으로 조선시대에 지금의 용산에서 수원 방면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는데 이곳에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량진'이 설치되어 마을 이름을 노량진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작동

 

지금의 국립현충원 부근에 동작진 근처 이남 지역을 연결하는 동재기 나루터가 있어 '동재기마을'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대방동

 

지금부터 약 350년 전 조선시대에 높은절이와 번댕이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졌었는데 일제시대때 이 두 마을을 번대방동이라고 일컫다가 광복 후 대방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본 동

 

'노량진의 원래 마을'이라는 뜻으로 1914년 일제가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의 3개 마을을 통합하여 본동리라고 하면서 본동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사당동

 

큰 사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1914년 당시 능마을·동산마을·양짓말 등을 병합하여 사당리라고 부르다가 사당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도동

 

조선시대에 성도화리(成道化里)로 불리다가 상도리·상도정이란 이름을 거쳐 상도동으로 바뀌었다.

신대방동

 

대방동 접경의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흑석동

 

흑석1동 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 색을 띠므로 '검은돌 마을'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13. 마포구

공덕동

 

본래 이곳 일대가 만리현과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 간 언덕길 지대로 옛날 우리말로 '큰 더기' 또는 '큰 덕'으로 전해지던 것이 것이 한자음 '공덕'으로 옮겨진 데서 비롯된 것이다.

도화동

 

도화동은 일대에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복사골'이라고 불리어진데서 유래되었다.

동교동

 

동교동의 동명은 지형상 서교동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동쪽잔다리' 곧 '윗잔다리'라고 불러진 데서 연유되었는데 지명을 '마루터기 마을'이라고도 했으며 연희궁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하여 '궁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흥동

 

대흥동의 동명은 동막하리를 대흥정이라 하여 1936년 서울의 구역을 확장할 때 편입되면서 비롯되었다.

망원동

 

망원동의 동명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에서 비롯되었다.

상암동

 

상암동의 동명은 수색동 앞 넓은 들 건너 마을로 장마 때면 한강물이 이곳까지 넘쳐왔다고 하여 비롯된 곳으로 상수리와 휴암이라는 지명이 혼합되어 지어진데서 유래된 것이다.

서강동

서교동

 

서교동은 옛날 골짜기에서 흘러내렸던 개울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던 지역으로

로 주변에 작은 다리들이 많이 놓여져 있어 마을 이름을 '서쪽잔다리 (아랫잔다리)' 라고 하였으며 한강으로 가기 위해서 건너야 하는 작은 다리가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산동

 

성산동은 부근에 산들이 성처럼 둘러져 있어 우리말로 '성메' 또는 '성미'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신공덕동

 

신공덕동은 이곳의 옛이름이 신공덕리이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신수동

 

신수동의 동명은 신수철리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는데 '수철'이란 무쇠를 뜻하는 것으로 신수동 109, 110번지 일대는 무쇠막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아현동

 

아현의 지명은 우리말로 애우개 또는 애고개로 불리던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아이고개', '작은고개'라는 뜻으로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작은 고개를 '애고개' 즉 '애현'으로 부르던 것이 '아현'으로 된 것이다. 이밖에도 서소문을 통해 나오는 어린아이 무덤(아총)이 많아서 지어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연남동

 

연남동은 197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새로 생긴 동으로 연희동 일부를 떼어 마포에 편입시키면서 동명을 연희동의 남쪽이라 하여 '연남'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염리동

 

염리동은 옛날 염전머리골에 소금배가 드나들면서 일대에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용강동

 

용강동은 일대 지형 중 마포강이 마치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하여 불리어진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합정동

 

동 이름의 유래가 되는 조개 우물은 지금의 절두산순교기념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처형장이던 이곳에서 망나니들이 칼을 갈기 위해 쓰기도 했다고 한다.

 

 

 

14. 서대문구

남가좌동

 

맑은 물에서만 사는 가재가 많이 잡히는 지역으로 가재의 앞발과 같이 조그마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불리워졌다는 '가재울'의 음이 변하여 가좌동이 되었다고 한다.

대신동

 

1962년에 동명을 지을 때 대현동의 "대"자와 신촌동의 "신"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대현동

 

대현이란, 아이고개(아현고개,애오개)에 비하여 높은 고개, 큰 고개라는 뜻으로 불리워져 생긴 이름이다.

미근동

 

옛날에 경찰청 북쪽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은 항상 물이 넘쳐 흘렀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우물에 꼬리가 있는 것 같다하여 초리우물, 미정이라 하였고 미근동은 미정의 앞 한자인 '미'와, 옛날에 이곳에 미나리가 많다하여 미나리의 한자말인 '근'을 합쳐 미근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봉원동

 

불교 태고종의 본산인 봉원사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붙여진 것이다.

북가좌동

 

맑은 물에서만 사는 가재가 많이 잡히는 지역으로 가재의 앞발과 같이 조그마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불리워졌다는 '가재울'의 음이 변하여 가좌동이 되었다고 한다.

북아현동

 

종근당 빌딩에서 아현 지하철역으로 넘어가는 곳에 만리현과 대현이라는 두 고개가 있었는데 중간에 작은 고개가 있어 아기고개 즉 한자어로 아현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성냉천동

 

금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냉천동은 경기대학교 북쪽지역 부근에 맑고 찬우물이 있다하여 "찬 우물골"로 불리워지다 해방과 더불어 냉천동으로 개칭되었다.

신촌동

 

신촌동은 조선초기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터를 물색할 때, 여러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고 그때부터 새 도읍의 터라하여 '새터말'이라한 것이 한자어로 번역되어 신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터가 좁아 도읍으로 정해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연희동

 

연희동이란 동명은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로 추정되는 연희궁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 아우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살았던 궁궐이다.

영천동

 

영천동이라는 이름은 금화산 중턱에 '영천'이라고 부르던 약수가 유명하여 그 이름을 따서 유래된 명칭이다.

옥천동

 

옥천동이라는 이름은 인왕산 밖의 안산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영천시장을 지나 마포를 거쳐 한강을 흘러가는 개울이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 물이 모여 맑은 폭포가 되어 옥같이 맑은 물이 흘렀다 하여 일제시대에 옥천정이라 불리워진것이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없애기 위해 옥천동으로 바뀌어졌다.

창천동

 

신라시대에 절이 9개가 있어 구암사 또는 바위절이라 했는데 그 한자이름에서 암사동이 유래되었다.

천연동

 

지금의 천연동은 1914년 지역의 구획을 새로 정할 때 구한말까지 불리워오던 이판동 일부와 석교동 일부를 각각 합친 동으로 당시 옛부터 내려오던 천연정

이라는 정자가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충정로동

 

충정로라는 조선말의 순국열사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을 본따와서 지은 것 이다.

합 동

 

합동은 마포강으로부터 온 어물이 서소문밖 시장에 집결되어 소비되었던 곳으로 각종 건어와 조개가 항상 끊이지 않게 공급되었기 때문에 이곳 일대를 '조갯골'이라 하던 것이 한자말로 번역되어 합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저동

 

무악재 고개밑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고개 밑의 마을' 이라는 뜻으로 불리워진 현저동은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이 머물렀던 마을이라해서 모화현이라 부르다가 일제 때 현저정으로 바뀌었으며 광복과 함께 현저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홍은동

 

홍은동이란 이름은 1950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예전의 경기도 은평면 홍제외리의 '홍'자와 은평면의 '은'자를 따와 붙인 이름이다.

홍제동

 

홍제동은 일찍부터 중국 사신이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국 사신 및 여행객들이 머물렀던 '홍제원'이라는 현재의 국립여관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15. 서초구

내곡동

 

마을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고하여 '안골', '안말'로 불리던 것이 한자명으로 내곡동(內谷洞)이 된 것입니다.

반포동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라는 이름을 한자로 쓰게 된 것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방배동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래라는 뜻으로 '방배'라 한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서초동

 

서초동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하여 붙여진 것으로 일명 '상초리','서리풀' 이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양재동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하여 지어진 동명입니다.

잠원동

 

뽕나무가 많이 있어 조선시대때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가 이곳에 설치되어 비단을 만들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16. 성동구

금호동

 

응봉산 서쪽에 위치한 금호동은 무수막, 즉 수철리(水鐵里)가 한자음화해서 금호동이 되었는데 이곳을 무수막, 무쇠막, 무시막, 수철리로 칭한 것은 조선시대에 무쇠솥, 농기구 등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선동

 

통일신라때 도선대사가 무학봉에서 수도했다는 전설과 조선초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지로 물색하던 중, 서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는 지시를 한 노인이 도선대사라는 전설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마장동

 

청계천을 끼고 있는 마장동은 조선초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있어 유래된 동명이다.

 

사근동

 

청계천을 끼고 있는 사근동의 동명은 신라때 세워진 매우 낡은 사근절(사근사)이 있었던 데서 불려진 이름이다.

성수동

 

옛날에 성덕정이라는 정자(亭子)와 뚝도 수원지(水源地)가 있던 곳이라 하여 각각 첫머리를 따서 성수(聖水)라 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한강을 끼고 있는 물가 마을로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할 만큼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성수라는 동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송정동

 

중랑천 하류 남북으로 걸쳐있는 송정동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숫말을 기르던 목장이 이 일대에 있으므로 숫마장이 변음되어 솔마장벌이라 하던 것이 한자어로 바뀐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왕십리동

 

왕십리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이곳이 도성으로부터 십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저십리; 城底十里) 답십리와 같이 왕십리라는 동명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옥수동

 

일제 때 옥정수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어 옥정숫골이라고 불리었던 마을을 옥수정이라고 하다가 광복 후에 옥수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용답동

 

청계천 하류지점의 동쪽에 위치한 용답동의 동명은 용두동 지역과 답십리 지역의 일부를 통합하여 새로운 동을 만들면서 용두동의 '용'자와 답십리동의 '답'자의 머릿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응봉동

 

응봉산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응봉동의 동명은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으로 응봉의 산 이름은 산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도 하며, 조선시대의 역대 왕이 이곳에서 매사냥을 하였기 때문에 매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행당동

 

응봉산 북쪽 일대에 위치한 행당동의 동명은 행당초등학교 동쪽 산 일대, 즉 '아기씨당'이 위치한 곳에 옛부터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행당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17. 성북구

길음동

 

길음동은 기리묵골을 한자음으로 고쳐쓴 데서 연유되었는데 기리묵골은 의정부 방면에서 도성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미아리고개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의정부쪽에서 도성쪽으로 넘어오는 이 고개는 경사가 완만하고 또 정릉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골짜기가 길게 형성되었고 골짜기가 길게 놓여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기리묵골 또는 기레미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또한 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아주 맑고 고와서 물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기분이 맑아지므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길음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돈암동

 

돈암동은 되너미고개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고개는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병자호란 때 오랑캐가 이 고개를 넘어 서울을 침입했다 하여 되너미재, 되너미고개, 적유령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옮기어 돈암현이 되었고 이것은 다시금 돈암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동선동

 

인접해 있는 동소문동과 삼선동에서 각각 한 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소문동

 

서울의 4소문의 하나인 동소문의 이름을 딴 동명이다.

보문동

 

보문동3가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선동

 

혜화문 밖의 평평한 들판인 삼선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삼선평이란 이름은 삼선동 남쪽의 옥녀봉에서 하늘에 내려온 세 신선이 옥녀와 더불어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상월곡동

 

상월곡동은 천장산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다하여 그 산에 접해있는 마을을 "다릿굴(골)"이라 부르는데서 유래, 이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골(上月谷里),아래지역을 아랫다릿골(下月谷里)"이라 불렀는데 1894년 갑오개혁때 월곡상리로 명명. 이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상월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석관동

 

마을 동쪽에 있는 청장산의 줄기가 검정돌을 꽂아 놓은 듯,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꽂이에 꿰어 놓은 것 같이 생겼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르다가 이돌곶이란 이름을 한자로 표기기하여 석관이라고 하였다.

성북동

 

성북동이란 지명을 갖게 된 것은 이 지역의 산수가 매우 아름답고 조선시대의 도성 수비를 위한 어영청을 북쪽에 두었기 때문에 불리워진 이름이다.

안암동

 

안암동 3가에 있는 대광 아파트단지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어 20여명이 앉아 편히 쉴만한 바위 이름이 앉을 바위라 하였는데 한자로 안암으로 옮겨 쓴

것이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월곡동

 

하월곡 3ㆍ4동의 산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월곡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조선 후기 미아삼거리에 신근솔이라는 솔밭에 주막이 밀집하여 있었는데 장위동 주변 도살장에 소를 팔러 오는 소장사들이 이곳에 달밤에 도착하여 묵었다가 잔월(殘月) 아침에 흥정을 했기 때문에 월곡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장위동

 

고려시대에 유명한 신하가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며 마을 뒤에 장위산이 있으므로 이 산 이름을 따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말도 있다.

정릉동

 

조선태조 이성계의 둘째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다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종암동

 

고려대학교 뒷산에 종 또는 북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문으로 고암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18. 송파구

가락동

 

응봉산 서쪽에 위치한 금호동은 무수막, 즉 수철리(水鐵里)가 한자음화해서 금호동이 되었는데 이곳을 무수막, 무쇠막, 무시막, 수철리로 칭한 것은 조선시대에 무쇠솥, 농기구 등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여동

 

거여동의 동명은 거암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김리', '겜리'라 하였습니다. 그후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리라 하다가 서울시에 편입된 후 거여동이 되었다.

마천동

 

마천동의 동명은 이 지역에 있는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라 하였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전해오는 조선조 임경업 장군이 백마를 얻어타고 마산을 지나다가 백마물이란 곳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 곳은 아무리 가뭄이 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마천동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문정동

 

문정동 동명 유래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에 많이 사는 문씨(文氏)성을 따서 문정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또 이 마을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동(連化洞)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방이동

 

마을의 자체 병장(방이군)들이 오랑캐 침범을 막았다고 하여. 그후부터 막을 방(防) 오랑캐 이(夷) 자를 써서 방이골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러다가 1914년경 학자분들이 모여서 마을 이름이 글자의 뜻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의논끝에 고쳐진 것이 막을 방(防) 자를 꽃다울 방(芳), 오랑캐 이(夷)자를 흰비름 이(荑)로 고쳐서 방이골이 되었다.

삼전동

 

삼전동 동명 유래는 이 마을에 유일하게 밭이 셋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원래 이곳은 포구로서 다른 곳에는 조수가 올라왔으나, 이 세 곳에는 물이 밀리지 않아 밭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장승을 세웠던 곳이라하여 장승골 또는 장승벌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석촌동

 

이곳에 돌이 많으므로 돌이 많은 마을 곧 돌마리라고 하던 것이 한자음으로 석촌동이 되었다. 돌이 많은 이유는 병자호란때 조선을 침입한 청나라 군인이 이곳에 돌을 옮겨다 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돌이 많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송파동

 

송파동의 동 이름의 유래는 세가지로 추정된다.

첫째로, 문종 때 기록을 보면 삼전도보다 연파곤(淵波昆)이 물살이 빠르지 않으니 나루터로 하겠다는 경기관찰사(지금의 경기도지사)의 요청이 있어, 이때의 연파곤이 소파곤으로 바뀌었다가 소파리(疎波里)로 된 것이 차츰 송파진으로 불리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옛날 한강변에 있던 이 마을의 언덕을 중심으로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차 있어, 소나무언덕 즉, 송파(松坡)라고 칭했다고 한다.

셋째로, 옛날 이곳에 사는 어부가 매일 한강변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는데 하루는 잔잔한 물위에서 고깃배를 타고 낮잠을 자던 중 이곳의 소나무가 서있었던 언덕 한쪽이 패어 떨어지는 바람에 잠이 깨고 난 뒤로 이곳을 송파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신정동

 

정동의 동명은 한성부 성밖 10리가 경제적인 면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인구가 밀집하게 되자 새로운 방이 신설되면서 생겼거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고향을 등진 전국의 실업자들이 한성에 모여들어 발전하는 가운데 신정동도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오금동

 

오금동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전래되었다는 이야기와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지역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이곳을 오금골이라 부른 데서 오금동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잠실동

 

잠실동은 조선초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설치되었던 데서 연유한다.

장지동

 

장지동의 유래는 마을이 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는 잔버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풍납동

 

풍납동은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풍납리로 불려지게 되었다.

 

 

19. 양천구

목 동

 

조선시대에는 갈대가 우거진 침수지대로 무성한 목초가 조성되어 있어 말을 방목하는 목장으로 이용되어 동명이 유래되었고 지금도 마장안이라는 땅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신월동

 

땅모양에서 따온 것으로 밝은 달빛이 비치는 마을로서 나지막한 야산지대라 멀리 떠오르는 달빛이 유난히도 밝게 보였기에 고운달이 비치는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졌다.

신정동

 

신기(新機)와 은행정(銀杏亭) 두 마을 이름을 각각 따서 지은 동명으로 신기(新機)는 짚신을 만들어 팔았다는 마을 신트리의 한자 이름이고 은행정(銀杏亭)은 은행나무 정자가 있었던 데서 연유된 마을의 이름이다.

 

 

20. 영등포구

당산동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 부르고 마을언덕에 당(堂)집이 있어 당산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대림동

 

신대방동(新大方洞)의 '대(大)'자와 신도림동(新道林洞)의 '림(林)'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림동

 

산이 마을 뒤에 성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국도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가 도림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는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래동

 

일제 때 방직공장이 들어서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광복 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이라고 지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학교와 관공서들이 들어서자 '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처음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신길동

 

신길동의 동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길(新吉)'이란 뜻이 새로운 좋은 일이 마을에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양평동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서민들이 한강을 건너는데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楊花津) 근처 벌판의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양화진(楊花津)'의 '양(楊)'자와 벌의 '평(坪)'자를 따서 양평동이 되었다.

양화동

 

한강의 선유도에 인접하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한강을 건너다니던 양화도 나루터 주변지역인 이 일대에 옛부터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혀진 이름이다.

여의도동

 

여의도는 조선시대에 잉화도ㆍ나의주 등으로 불렸는데 홍수로 많은 섬들이 잠길 때도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만은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 사람들이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되어 여의도가 됐다고 한다.

영등포동

 

이 동의 명칭유래는 확실치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영등(靈登)굿과 관계되어 변형표기된 영등(永登)과 물가를 뜻하는 포(浦)가 합쳐진 명칭으로 보고 있다.

 

 

21. 용산구

갈월동

 

마을 부근에 옛날 칡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갈월도사가 살았던 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남영동

 

서울 남쪽에 군영(軍營)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도원동

 

기슭 일대에 복숭아 나무가 많이 있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도산(桃山)'이라고도 하였다.

동빙고동

 

조선 태조 때 설치한 궁중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해 두는 창고인 빙고의 동쪽과 서쪽에 있어 유래된 이름으로 그 터는 지금의 서빙고 초등학교에서 서빙고동 파출소 부근 일대이다.

동자동

 

동 이름의 유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마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서계동과 연관지어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 간주된다.

문배동

 

현재 신계동에 있는 '문배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광동

 

신라 진흥왕 때 보광국사가 세운 사찰이 있었으므로 보광국사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천동

 

일제식 명칭이던 '산수정(山手町)'을 고친 것으로 추측되나 이 이름에 대한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습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산천동으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계동

 

서계란 이름은 일제강점 이후 1914년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 제정된 것으로 옛날에는 작작굴, 배다리로 불렸다.

서빙고동

 

조선 태조때 설치한 궁중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해 두는 창고인 빙고의 동쪽과 서쪽에 있어 유래된 이름으로 그 터는 지금의 서빙고 초등학교에서 서빙고동 파출소 부근 일대이다.

신계동

 

구한말부터 이 곳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새로 생긴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신창동

 

조선시대에 국가의 주요 국무를 처리하는 육조(六曹) 중 하나인 호조의 특별한 창고인 신창(선창)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문동

 

용산의 지형이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하여 '용(龍)'자와 옛날 이 마을을 동문리(東門里)라고 불렀다고 하여, 동문(東門)의 '문(門)'자를 따서 동명이 지어졌다.

용산동

 

'용산(龍山)'이란 글자 그대로 용(龍)같은 형체의 산을 의미하는 말로, 용의 모양 같은 산이 있는 데서 연유된 동명이다.

이태원동

 

조선시대때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의 명칭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촌동

 

조선시대 고종 때만 해도 이촌동 부근의 한강 주변 일대는 막막한 모래벌판이 었기 때문에 여름에 큰 장마가 지면 강 가운데 섬마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홍수를 피해 강 안으로 옮겨와 이곳이 '이촌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효로

 

통일신라시대 고승인 원효대사(617~686)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주성동

 

옛날 이곳에서 쇠를 녹여 무쇠솥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청암동

 

일제 때 만든 암근정이라는 이름을 바꾼 것으로 마을에 큰 바위가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파동

 

푸른 야산의 언덕이 많았다 하여 청파(靑坡)가 연유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강로가

 

이곳은 한강으로 지나는 주요한 길목이라 하여 일제 때 한강통(漢江通)이라 칭하던 것을 1946년에 현재와 같이 바뀌었는데 한강로는 동명이자 도로명이 기도하다.

한남동

 

남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서북쪽으로는 남산이 있어 한강의 '한(漢)'과 남산의' 남(南)'을 따서 한남동이라 하였다.

효창동

 

효창동은 조선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 그 장녀 영온옹주의 묘가 모셔져 있는 효창원이 있는 곳이라는 데서 연유된것이다.

후암동

 

마을에 후암, 즉 '두텁바위'라 불리우는 둥글고 두터운 큰 바위가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22. 은평구

갈현동

 

갈현의 이름은 옛날의 갈고개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전하여 오는 말로는 이 일대에는 칡뿌리가 많아서 갓을 만드는 원료가 되었기 때문에 칡고개 또는 칡넝쿨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구산동

 

구산이라는 지명은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뒷산의 모양에서 얻어진 것으로서 산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옛부터 그 아랫마을을 구산동이라고 불러왔다고 전해온다.

녹번동

 

녹번동이란 이름은 녹번현에서 연유되었으며 이는 무악재고개에 자연동(속칭 산골)이 나는데 이를 녹번이라 한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대조동

 

옛날의 큰 대추나무골에서 유래되었으며, 당시 이곳은 산골이었고 특히 대추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여 오는 곳이다.

불광동

 

이 근처에 바위와 크고 작은 절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곳이다.

수색동

 

수색이라는 지명은 이 일대가 한강 하류로서 옛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수생리계, 수색계, 수암리계, 학암리계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지다 수색리라고 불리워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신사동

 

신사라는 지명은 언제 어느 지점에 절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근처에 새로운 절이 있어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역촌동

 

역촌이라는 지명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 이 부근에 역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응암동

 

응암이라는 지명은 옛날 왕의 일행이 궁중에서 나와 사냥터로 삼았던 큰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관내동

 

진관이라는 지명은 진관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97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진관동 하나를 두었으나 인구의 증가로 진관내·외동으로 분리되었다.

진관외동

 

진관이라는 지명은 진관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97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진관동 하나를 두었으나 인구의 증가로 진관내·외동으로 분리되었다.

증산동

 

증산이라는 지명은 등에 업고 있는 북한산의 줄기인 산모양을 일컫는 것으로 비단산, 시루산 등 여러가지 뜻으로 통하고 있다.

 

 

 

23. 종로구

가회동

조선초기에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구획을 나누었을 때 북부 10방 중의 하나였던 가회방(嘉會坊)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교남동

 

교남동의 동명은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 북쪽, 곧 교남파출소 앞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하여 다리의 남쪽 동네를 교남동, 북쪽을 교북동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명륜동

 

조선시대 유학 교육기관인 명륜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른 것으로 명륜이란 이름은 성균관내 학생들의 학문연구를 위한 건물로 자리해온 명륜당(明倫堂)에서부터 연유된 것이다.

무악동

 

무악재 명칭의 유래는 여러가지로 전해져 오고 있다.

하나는 고개가 너무 험악해서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모아재'라 했던 것이 무악현이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무악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조선왕조를 세울 때 무학대사가 도읍터를 물 색하기 위해 고개 마루턱에 올라 도성 쪽을 살폈다고 하여 '무학현'이라 하던것이 음이 변하여 무악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삼각산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상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이 고개가 있는 산을 어머니의 산이란 뜻으로 모악(毋岳)이라하고, 서쪽을 떡고개, 남쪽을 벌아령이라 하여 나가려는 아이를 떡을 주어 달래거나 또는 때리겠다고 얼러서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뜻으로 각각 이름을 붙였는데, 이 모악이 변하여 무악이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부암동

 

부침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된 동명으로 부침바위라는 이름은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수대로 문질러 붙이면 손을 떼는 순간 암벽에 돌이 붙고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로 인해 생긴 것이다.

사직동

 

원래 사직의 연원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사(社)는 토신(土神), 직(稷) 은 곡신(穀神)을 의미한 것인데 토신은 곧 국토를 주재하여 관리하는 신으로, 이 마을에 사직단이 있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삼청동

 

옛날 이곳에 도교의 태청(太淸)ㆍ상청(上淸)ㆍ옥청(玉淸) 3위를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이 곳에 들어오면 산도 맑고, 물고 맑고, 사람의 마음마저 맑아지기 때문에, 세가지가 맑다는 뜻에서 삼청(三淸)이라 했다고도 한다.

이화동

 

지금 이화동 2번지에 있던 정자의 이름인 이화정에서 따온 것인데 이화정은 봄이면 정자 주위가 배꽃으로 둘러 싸여서 붙인 이름이다.

종 로

 

태조 7년(1398) 지금의 탑골공원 앞길에 당시 치안 유지를 위해 새벽 3시와 밤 10시에 종을 치던 종루가 세워지면서 종로라 불려졌다고 한다.

창신동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의 마을 이름에서 각각 '창(昌)'자와 '신(信)'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청운동

 

조선시대부터 이 곳에 있던 마을인 청풍계(淸風契)와 백운동(白雲洞)에서 각각 '청(淸)'자와 '운(雲)'자를 따서 붙인 이름인데 청풍계와 백운동의 마을 명칭은 인왕산의 맑은 바람 맑은 물, 흰 구름이 감싸고 있는 깊고 그윽한 자연환경에 서 연유되었다.

평창동

 

선혜청의 평창(平倉)과 총융청의 평창(平倉) 등 2개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선혜청은 대동법의 실시에 따라 대동미와 포전의 출납을 맡았던 관청이며, 평창(平倉)은 이 선혜청의 여러 창고 중의 하나로 대동미를 보관하였던 곳이다.

혜화동

 

지금의 성북구 삼선동과의 경계지점이 되는 고개에 도성의 4소문(小門)의 하나인 혜화문(동소문)이 있었던 데서 연유되었다.

 

 

 

24. 중구

광희동

 

서울성곽 8문 가운데 하나인 광희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명 동

 

조선초 한성부의 행정구역 설정 당시 남부 명례방의 명(明)자를 딴 것으로 원래 '명례방' 또는 '명례방골' 이라고 하다가 줄여서 명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공동

 

조선 태종의 둘째딸인 경정공주의 궁이 있었으므로 속칭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곳을 한자로 소공주동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 소공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당동

 

1910년부터 당산제를 올렸는데 이때부터 신당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을지로동

 

1946년 10월1일 서울의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세종로, 충무로 등과 같이 우리나라 위인 가운데 한 분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충동

 

1946년 10월1일에 일본식 동명변경에 의하여 이 부근에 있던 장충단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중림동

 

약전중동과 한림동의 글자를 각각 한자씩 따온 데서 비롯되며, 옛날에는 가운뎃말, 한림골, 형제우물골을 등으로 불리웠다.

필 동

 

조선시대 한성부 5부중의 하나인 남부의 부사무소가 이 곳에 있었으므로 부동이라 하였는데 이와 발음이 같은 붓이라는 음을 빌려와 붓골이라 하였으나, 그 후 부의 음과 필의 뜻이 서로 같기 때문에 붓골을 필동으로 표기하였다.

황학동

 

황학동이란 동명이 생긴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1936년에 만든 「대경성정도」에 의하면 이곳이 대부분 논밭 이였는데 황학이 날아왔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에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회현동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25. 중랑구

망우동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되는 곳에 망우고개가 있기 때문에 붙여

진 이름이다.

면목동

 

면목이라는 지명은 말목장 또는 목문이 있는 곳을 의미 하는 지명으로 마목 또는 목문·문목의 의미와 유사하고 또 목장을 앞에 두었다는 의미로도 통할 수 있어 면목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묵 동

 

옛날 이곳에서 먹을 제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국립여관인 송계원이 있었기 때문에 송계동이라고도 했었다.

상봉동

 

조선시대부터 유래하는 상리, 봉황동 등의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상리의 ‘상’ 자와 봉황동 등의 ‘봉’자를 따서 상봉리라고 붙인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내동

 

신내동(新內洞)의 동명은 일제때 봉화산 동쪽아래 여러개의 자연부락중에서 신현마을의 '신'자와 내곡마을의 '내' 자를 각각 따서 신내리라고 한 데서 비

롯되었다.

중화동

 

옛부터 봉화산 아래 시골에 자연스럽게 생긴 마을인데 가운데 마을(중리)과 아랫 마을(하리)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로 칭하였는데 1963년에 서울특별시

로 편입될 당시 동민들의 의견이 '하' 자 대신 화목을 도모하는 의미로 '화'

자를 넣어 중화동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건의하였기 때문에 중화동으로 되

었다고 한다.

 

 

출처 : 네블

 

우왕ㅋ굳ㅋ 신기하네요..

출처 : 엽기 혹은 진실..(연예인 과거사진)
글쓴이 : 부대찌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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