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펌] '쇠말뚝' 일제가 아닌 명나라가 최초

lionet 2010. 5. 23. 17:25

이 땅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사건은 명(明)나라 초기부터 시작되었음이 사서 기록에 의해 확인된다. 

이같은 사실은 1797년 정조 6월 정조가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우리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 산천에 쇠말뚝을 박은 것 때문이 아니냐는 물음에서 “이는 명나라의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가 우리나라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고 여겨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나면서 북관(北關)에 인재가 없는 것”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 일제가 박은 쇠말뚝(혈침) 상단부의 다양한 모습 (자료:한배달)     ©플러스코리아

▲ 일제가 박은 쇠말뚝 하단부의 다양한 모습 (자료:한배달)     ©플러스코리아

위치는 단천(端川)의 현덕산(懸德山)이라고 했으니, 단천은 오늘날 함경남도 단천군에 있는 읍. 군청 소재지이다. 1370년 7월 홍무(洪武) 연호를 시행한 명 황제는 조천궁(朝天宮)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를 보내어 우리나라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돌을 세워 기록하였다고 조경남(趙慶男 1569- 1641)은 역대요람(歷代要覽)에서 밝혔다. 이 시기를 고려 공민왕(恭愍王) 19년 여름 4월이라고 했다. 

명황제는 “요사이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고 신하로 일컬으므로, 짐이 이미 그 왕을 봉하여 고려 국왕을 삼은 만큼, 그 나라의 경내 산천이 이미 같은 직방(職方)에 귀속된 것이다. 옛 법전을 상고하면, 천자(天子)의 망제(望祭)는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나, 아직도 실지 예를 행하여 그 공경을 다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 마땅히 희생과 폐백을 갖추어 조천궁 도사 서사호를 보내어 앞서 가서 신령에 보답해야 하겠다”라는 취지에서 비를 세운다고 했다. 

고황제(高皇帝)가 친히 지었다는 비문에는 또 “짐은 포의(布衣)로 일어나 이제 천하를 통일하여 정통을 계승하였는데, 근자에 고려가 표(表)를 받들어 신하로 자칭하므로 짐은 그 정성을 기쁘게 여겨 이미 왕작(王爵)을 봉하였다”고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조사(詔使) 편에 썼다. 

그러나 공민왕은 도사가 압승(壓勝)의 술법(術法)을 행하리라 의심하여 병을 칭탁하여 나가지 않고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맞이하도록 하였다고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동사강목 (제15하)에 밝혔다. 

이로 보아 명은 개국 초기 고려의 반기를 염려, 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들어와 의도적으로 쇠말뚝을 박아 그 맥을 누르려 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쇠말뚝에 이어 소금을 쌓고 이를 태워 지맥을 억누르는 행태 또한 자행되었음이 보인다. 정조는 “서울에 내려온 맥(脈)은 삼각산(三角山)이 주장이 되는데, 들으니 수십 년 전에 북한산성(北漢山城) 아래에다 소금을 쌓고 그 위를 덮어서 태워 마침내 염산(鹽山)이 되어 내려온 맥을 진주(鎭住)시켰으니, 현재 서울에 인재가 없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이라 말하고, 염산을 헐어 버리기 위해 위치를 확인 하고자 했으나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여 정지되었다고 실록은 밝히고 있다. 

이 문제는 조선 개국과 동시에 제후국으로 전락되고, 공자(孔子)의 논리와 홍무(洪武)의 예제(禮制)에 의해 하늘제사(天祭儀式)를 폐지한 군주(君主)의 안위가 500년 한(恨)으로 지속된 계기가 되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