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펌] 역사 뒤집어보기 - 박정희의 경제평가

lionet 2010. 5. 23. 13:02

박정희대통령이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 


양측이 주장하는 자료를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제시하는 통계적인 근거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들, 그리고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제시하는 통계적인 근거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파국행위들을 서로 비교한 후 어느 주장이 옳은지 판단하길 권해드립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의 근거는 지식인 검색을 해보시면 많이 나오나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의 근거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그 이유를 적시하기에는 특정정당 지지자들의 사이버활동과도 관련이 있기에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이하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제시하는 근거와 통계자료를 서술하겠습니다

 

 흔히 박정희시대를 경제발전의 시대라고하나 과연 경제발전의 시대인지 자세히 보기로 합시다 6.25이후 남한이 북한에 비해 못살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계속 못살도록 경제발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경제발전을 위한 계획은 이승만 시절부터 48%수출증가와 더불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박정희시대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건설비보다 도로유지비가 더 높았다는 반론도 있으나 이는 일단 논외로 합니다) 포항제철을 건설(대일청구권행사에 대한 비판은 논외로 합니다)하는 등 업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버섯에서는 독버섯밖에 안나오고 사기꾼에게서는 사기행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20년 가까이 민주주의를 유린한 사람이 과연 경제를 발전시켰을까요?

 

 

-박정희시대 경제의 전체적인 개관

 

 박정희가 추진한 경제발전계획은 장면정부가 이미 민주적인 논의를통해 세운 것으로서 5.16구데타이전에는 정치는 논외로 하고 경제는 대체적으로 안정적 성장하고 있었음 이를박정희가 복사해서 추진했으나 그 과정이 민주적이거나 투명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음

 

모달리아니 박사의 차입경제론에 의해 박통 경제발전추진  : 외국의 직접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서 경제발전추진

 

대외채무 180억달러(몇 % 증가했는지는 기록에 없음 다만 사상최고로 추정) 외환보유고의 잦은 고갈, 각종 특혜 비리로 한국중공업등 기업들 줄도산, 자동차회사 통폐합, 정경유착으로 기업체질의 부실초래, 저임금저곡가정책,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노동에 (저임금보충위해 잔업과 특근으로 노동시간증가했음에도) 최저생계비의 5분의 1만 받았으며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시달림(전태일자살로 결국 그 치부노출), 집권말기에 마이너스가까운 경제성장률, 해운통폐합으로 범양상선 회장이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촌극발생하고 물류산업쇠락 (결국 85년 전두환정권에 의해 박정희시대 경제계발계획 전부 폐기)

 

66년 외자도입법을 개정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재벌기업들한테 정부 명의로 지급보증을 해줬다가 기업들이 무리하게 외채를 빌려다 썼고, 기업 부실로 인해 70년대 초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 정부와 은행의 무분별한 재벌기업 지급보증으로 인해 기업 부실이 골칫거리로 등장하자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72년 8·3 사채동결 긴급명령 조치를 취함.모든 기업의 사채 지급을 동결하고 월리 1.35%에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전환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전환하도록 강제

 

특히 IMF사태 버금 갈 정도로 심각한 경제위기였던 1979∼80년의 공황은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과잉 중복 투자의 모순이 폭발하여 상위 10대 재벌의 평균 계열사 수는 1972년 7.5개에서 1979년 25.4개로 대폭 늘었는데, 재벌의 팽창 속도만 봐도 당시 중화학공업 과열이 극심했음. 이러한 과열 중복 투자는 1979년부터 대규모 기업부실을 초래함


박정희 정권은 사업 인허가, 외자 조달, 특혜 정책금융, 공업단지 조성, 등 전방위적 지원으로 재벌을 육성. 그 결과 재벌은 급격히 성장하여 국민경제 전체 속에서 20대재벌의 부가가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73년 7.1%에서 78년 14%로, 46대 재벌의 부가가치의 비중은 73년 9.8%에서 81년 24.0%로 상승했다. 제조업에서 46대 재벌의 부가가치 비중은 73년 31.8%에서 78년 43.0%로 상승했다. 이런 속에서 중소기업의 종속성은 전차 심해짐(대만의 중소기업이 상당한 자생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

 


-국민소득의 증가와 수출에 가려진 만성적인 무역적자

박정희는 1인당 국민소득이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82불로 시작하여 죽을 때인 79년 1636불을 기록하여 외형상 연평균 18%의 엄청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환율도 엄청난 상승. 60년 12월까지 달러 당 65원이었던 환율이 집권시기인 61년 130원으로 두 배 상승.  박정희가 죽을 때 환율이 485원까지 상승.

 

다시 말해 박정희는 집권 직전 2배의 환율 상승으로 저평가 된 국민소득액(82$)에서 출발하여 환율상승 전(80년대 중반에 700원으로 상승)에 죽는 바람에(79년 485원의 환율이 그이후6년간 유지됨) 고평가된 국민소득액(1,636$)을 유지한 상태에서 사망하여 국민소득은 형식적으로 상승하였으나 실질적인 상승의 폭은 의외로 크지않았음. 김영삼대통령 재임기간 중 집권당시인 93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7,811불이었는데 퇴임시기인 98년에는 7,355불로 오히려 400불 이상 감소. 그러나 불변가격을 기준으로 한 실질성장률은 연평균 4% 이상을 기록하여 재임기간 중 실제로 23%의 성장.

 

우리나라는 1970년대 초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고 7년 후인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 명목상 높은 경제성장률을 동인하지만 수출을 위해 자본과 원료 그리고 중간재까지 일본 등 외국에 의존해야만 하는 높은 수출증가는  무역수지적자를 의미했고, 우리가 수출을 하면 하는 만큼 수입도 늘어나 경상수지를 크게 악화시켰다.

 

1950년대까지 우리의 무역적자는 원조로 메웠다. 62년도 무역적자 5천 5백만불였는데 71년에는 5억8천2백만불, 74년에는 20억불, 79년에는 30억불로 상승(다만 77년도에만 중동건설붐으로 1200만불흑자)-- 차관으로 무역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돌려막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됨. * 그 결과 1974년 현재 한국 차관 총액의 65.4%가 일본 차관이었는데, 결국 외국차관을 들여오는 것은 대기업체들이며, 일본의 큰 재벌이 한국대기업체에 막대한 차관을 해줌으로써 경영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

 

독일이 1952년에 이미 무역수지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이 1960년대 중반부터 경상수지가 흑자 기조로 된 것과는 대조적. 미국, 유럽, 일본 등 자본주의 제1세계는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약 20여 년간 전설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런데 그 공을 특정한 대통령(혹은 수상)에게 돌리는 행위는 없었음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 기간 매년 38%의 수출증가율을 기록. 그리고 전두환 때 16%, DJ 때는 6%정도로 수출증가율이 둔화. 이승만 정권 때는 자료입수 가능기간인 57년 이후부터 61년까지 연평균 15%의 수출증가율.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 보면 57년 2천3백만불이었던 수출액이 58년에는 천4백만불로 감소하다가 이후 집권종료 전 1년간 3천7백만불을 기록하여 연평균 48%의 수출 증가율. 이는 박정희의 38%를 능가하는 수치로서 박정희 집권이전부터 경제발전계획의 수립등으로 인해 이미 급격한 수출증가의 기미가 있었음.


 수출에 관한한 전두환씨가 지금도 큰소리 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집권기간 중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로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는 것.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총 638억불을 수출하고 871억불을 수입하여 수출이 급격히 늘었지만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증가.

 

집권기간 중 무려 233억불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고 집권종료시기인 79년는 150억불 수출에 203억불을 수입하여 한 해에만 53억불 적자를 기록.(70년대 후반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지금도의 1/10수준임을 감안하면 79년 한해의 무역적자만 지금의 500억불 적자규모) 박정희 집권기간 무역적자 233억불은 지금의 2000억불 이상의 무역적자 규모에 해당.


후임 집권자 중 노태우씨가 132억불의 적자, YS가 366억불의 적자를 기록했고 DJ는 불과 5년 동안에 846억불의 흑자를 기록하여 지금까지 흑자 기조를 유지. 정리하여 보면 이승만 정권 때는 수출신장의 싹이 보였고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높은 수출증가를 이룩했으나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늘어나 당시 경제규모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큰 규모의 무역적자를 기록. 이를 메우려고 대일청구권 자금, 월남특수, 중동특수 등으로 무역에서 펑크 나는 것을 메웠고 이것도 부족하여 매년 많은 차관을 도입해야 했으며 이 빚은 결국 후임정권이 짊어져야 했다

 

박정희시절;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저곡가 정책으로 인한 농업기반약화와 새마을운동의 결과
 
1960-92년간 쌀 수매가는 한계생산비는 물론이고, 일반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칠 때가 많은 저위, 불안정상태. 농가구입가격지수로 디플레이트한 수매가의 인상률은 마이너스인 해가 15번이나 되었고(황연수, “농산물가격정책의 방향”, <한국의 농업정책>, 미래사, 1995) 그래서 농업경제학계에서는 1968년 이후 도입된 이중곡가제와 1970년대 중반의 일반벼와 차별 없는 통일벼 수매 등에 대해 ‘상대적’ 고미가라고 함.

 

수매가가 생산비와 소득을 충분히 보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의 현저하게 불리한 수매가에 비해 좀 나았다는 것으로 그 이전의 공업화 집중지원으로 도시농촌간의 격차가 커진 것이 사회정치 불안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역점을 두어 시행한 대표적인 농업농촌 정책도 70년대 중반의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 재배와 새마을운동.
 
저농산물가격의 결과 도농간의 격차가 커졌고, 이에 농민들은 대규모로 농촌을 탈출. 배진한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약 68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밀려들었고, 그중 가구유출이 68.2%인 468만명, 단신유출이 31.8%인 218만명이었다. 이러한 농촌 과잉인구의 도시 유입이 바로 저임금으로 연결되고 저임금이 구매력감소로이어져 내수는 기대촉진은 불가능해짐. 
 
그리고 일부 교수는 개방농정시대 구조조정을 위한 막대한 투자가 낭비된 것이 농민단체의 정치적 힘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농민단체들은 오히려 직접지불제의 확대를 주장했음. 정부 관료들이 생산요소 구입 보조를 하여 농민들을 과잉생산과 가격폭락, 부채 누적으로 몰아넣어 탈농촌화촉친.

 

박정희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1960년 농업인구가 58.3%였는데 박정희의 저곡가.공업화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워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 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 떠났는데, 이는한국전쟁동안의 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충남대 박진도교수의 말)

 

 

-저임금 정책으로 인한 양극화및 그로인한 복지부실과 내수경제 침체

 

‘경제성장의 역군’인 전태일이 산업현장에서 매일매일 경험하고 목격해야만 했던 야만적 실상들을담은  편지를 보자.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 …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 저는 …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1개월에 …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 숙련여공들은 … 대부분 …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 2명이나 3명 정도를 …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 …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알지를 못합니다. …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한시 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

 

 이처럼 다수 노동자 가족들은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열악한 생활을 해야 했고, 또 여러 명이 불완전 취업을 해서 생계비를 확보. 70년대에 과도한 인플래이션으로인해 임금몫은 7.8% 포인트 감소했으며, 1971년과 1979년을 제외한 나머지 연도에 실질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상승률보다 낮았고 도시로 몰려든 농촌인구의 대부분은 낮은 소득과 도시의 부족한 주택사정 때문에 도시 주변에 판자집을 짓고 생활. 
 
판잣집은 서울의 경우 1961년 8만4440호에서 매년 10-15% 씩 증가하여 1966년에는 13만6600호, 1970년에는 18만7500호에 이르렀고 도시주민의 약 1/3이 판자촌에 살았다.(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명이 판자 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단신으로 도시에 온 노동자들은 공장 주변에 밀집된 닭장집, 벌통집 이라 불리던 불량주택이나 기숙사에서 생활(오늘날에는 저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러한 불량주택에서 살고 있다). 정부는 청계천변 판자집 주민을 강제로 경기도 광주대단지(현재의 성남시)로 이주. 일자리를 얻기 어려워진 광주대단지 주민 3만여명은 1971년 8월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킴.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것)

 

추가 취업희망자와 전직 희망자를 포함한 불완전 취업률은 1963년 21%에서 1971년 31%로 상승.  윤진호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노동빈민층이라 할 수 있는 도시비공식 부문의 종사자 수는 1970년 약 230만명, 1975년 330만명, 1980년 약 450만명에 이름

 


-경제발전 '기적'에 대한 외국과 비교 및 후임정권과의 비교

어떤 이들은 1960년 우리는 아프리카의 가나보다도 못 사는 세계 최저의 빈국이었는데 박정희 덕택에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한국(조선)은 문명국가로서 500년을 지속하며 온갖 물질적 생산력을 축적한 나라였고 개성 상인으로 불리는 상업자본과 호남 평야를 바탕으로 한 농업 생산 기반과 대장장이, 도공과 같은 수공업 분야의 기술력 등으로 물질적 생산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는 나라였음.  오랜 동안 독자적인 물적 생산 기반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고 문맹률로 고통받고있던 아프리카의 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임

 

60년대 경제발전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거침없는 이 주장은 과연 편협한 정치적 이념 등이 섞이지 않은 과학적 타당성을 확보한 것일까? 그는 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가 궁금하다. 독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동아시아 네 마리 용도 결코 우리나라에 뒤지지 않는 높은 경제성장을 하고 있음.

 

일본은 1955년부터 15년간 연평균 15.1%라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함으로서 당시 세계가 놀랐으며, 이후 세계경제대국 2위에 도약, 서구에서 일본을 벤치마킹하자는 열기가 일어난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동경의 기적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음. 2000년 아시아 개발은행 자료에 의하면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동아시아 주요국의 연평균 GNP 증가율은 싱가포르가 10.1%로 가장 높았고 대만이 9.8%, 한국 9.5% 그리고 홍콩 8.6%의 순서로 되어 있다. 같은 기간 동안 위 국가들의 실질경제성장률은 일본 10.4%이고 싱가포르는 8.5%, 대만 7.5%, 한국 6.8%, 홍콩은 6.2%로 되어 있다.


미국의 지원 하에 불안정한 정치 환경 속에서도 경제성장을 위해 꾸준히 선진기술체화를 통한 기술개발로 조기에 무역수지를 개선하고 세계 2, 3위의 경제대국이 된 독일이나 일본에 비하면 일본 따라하기식 박정희의 19년 모방경제는 오로지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눈앞의 수치에만 매달린 껍데기뿐인 졸속경제의 상징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C일보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들이 말레이지아가 박정희의 모델을 철저하게 따랐고 마하티르 총리를 마치 박정희의 신봉자인양 이야기 하곤 한다. 그 예로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마하티르의 New Economic Policy를 이야기 한다.  
 

1997년 우리나라와 같이 말레이지아도 엄청난 재정환란을 맞게 된다. 그렇지만 말레이지아의 환란은 IMF까지 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IMF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안될 만큼 훨씬 충격적인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차이점이 말레이지아와 한국의 상황을 다르게 만들 수 있었을까?


1997년 현재 말레이시아는 세계 17위의 수출대국으로 성장해 있었고, 우리나라와 같은 수출주도형 모델로 변신을 꾀해 1980년대 이후 연평균 8%이상의 성적을 20여 년 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의 고성장 모델과 말레이시아의 그것과는 대동소이하다.


우리나라에 비해서 말레이지아는 영국의 식민지로 독립할 당시부터 어느 정도의 정당정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박정희보다 20년 늦게 정권을 잡은 마하티르 총리 역시 일종의 독재자로서 이후 20년간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방식과 마하티르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가 차관과 차입을 통한 수출주도형 경제를 일으킨 반면, 말레이시아는 해외의 다국적 기업의 직접 투자를 유치해서 그 외국인 직접 투자를 통한 수출주도형 경제를 일으킨다. 우리의 차입 액수는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적게는 2.5배에서 많게는 3배까지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서 총 채무에서 급하게 변통한 단기 채무(사실상 사채)의 비율이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으며 이를 외환 보유고와 비교할 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수준에 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외국인 직접 투자액수에 있어서 한국은 말레이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1993년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5억 8천 8만에 불과해서, 이미 50억 달러를 돌파한 말레이시아의 10분의1에 겨우 달하는 수준이다


한국으로 돌어와서 전두환.노태우 정권시기에도 10% 넘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박정희 정권 때보다 1%이상 초과달성했다. 그럼 전두환과 노태우도 기적을 이룬 것인가? 김대중도《6.25 이후 최대국난》이라는 IMF를 극복하고 그 이듬해 10.9%, 그 다음해 8.8%, 2001년에는 전 세계적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성장을 한 몇몇 안 되는 국가군 속에 올려 놓았다.  그럼 이것은《3전4기의 기적》인가

 


-높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투기로인한 집값 상승

1960년대 중반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도 수출기업에 제공할 차관을 빌리기 위해 보내졌다. 정부는 당시 간호사와 광부의 봉급을 담보로 잡고 차관을 얻어왔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수출경쟁력 확보의 원천이었지만, 수출 증대의 명분 아래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한 건 ‘물가 폭등’에서도 한눈에 나타난다. 물건을 나라 밖으로 보내고 그 대신 돈을 들여오는 수출 중심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됐다.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통화량 증대로 이어져 물가가 계속 오른 것이다.

 

‘수출입국’이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가능했는데, 오히려 수출 증대가 노동자들에게는 또다시 ‘높은 물가’로 보복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1974년 24%, 1975년 25%를 기록하는 등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다. ‘독재’뿐 아니라 ‘성장’의 뒤편에서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이다.

 

저임금·저곡가에 기초한 ‘내수 억압적 불균형 산업전략’에서는 내부 소비구조가 형성되지 못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그 뒤 대외여건이 어려워져 수출 증가율이 둔화됐을 때 내수를 확대해 불황을 넘어가기 어려워졌다 특히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기업 지급보증 등 각종 지원·특혜로 자금을 풀면서 총통화 관리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물가 폭등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그때부터 ‘투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대출받은 돈으로 비업무용 부동산을 사들여 앉아서 떼돈을 버는 등 투기를 부추겼다.


 

-그외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비리들 :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사건, 워커힐사건, 슬롯머신사건(너무 길어서 생략함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지식인검색을 참조)
 

-일본의회에서 폭로된 한국의 경제비리들 :

*한국 알루미늄회사의 경우, 박정권은 일본에서 현지가격으로 7백만 달러인 공장을 1천 3백만 달러에 사도록 허용. 여기서 차액인 6백만 달러는 정치자금으로 분배됨.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의 기업체들은 히다치, 도멘, 쇼와전기 등의 큰 기업체.


* 서울지하철 차량 매입사건. 일본 회사는 한국에 엔진 하나당 6,400엔에 판매. 그러나 그 엔진의 일본 현지 가격은 3천 엔. 차액은 정치자금으로 조성됨. 이때 한국정부는 186개의 엔진을 매입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기업체들은 마루베니, 미쯔비시 상사, 이와이, 고큐 등.

 

* 대한항공 리베이트 사건. 일본 항공기 구매시 일정비율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키로 일본 우익인물들과 배후 약정


-유가상승으로 기업도산 속출

1979년 OPEC의 2차 석유류 감산이 시작. 이른바 2차 오일쇼크다. 여기에 한국은 70년대 내내 추구하던 중화학 공업정책이 발목을 잡히면서 엄청난 공황 직면. 1 배럴에 36달러까지 유가가 치솟자, 일본 및 선진국의 유휴설비를 차관을 통해 들여왔던 한국 중화학 공업계는 파산직전의 상태. 이들 중화학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유류소비가 불가피한데, 2차 오일쇼크로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었음. 산업생산성은 급속히 추락했고 공장 가동율은 한 때 50%밑으로 추락. (IMF때도 50%에는 이르지 않았음). 성장율은 마이너스 5%를 기록.

 

이 때문에 수많은 기업이 일거에 도산. 살아남은 기업 역시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끌어들인 자금을 갚기 위해 필사적.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시 한국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 1979년말 180억달러 였던 외채는 결국 1985년 500억달러 수준으로까지 급격히 증가. (이 당시 수출액이 300억달러 수준, 지금으로 치면 약 2000억달러 정도의 수준).

 

말이 좋아 중화학 공업 구조 조정이었지, 사실상 박정희가 계획한 모든 계획의 총체적 폐기가 불가피. 1982년부터1985년까지 한국은 중화학 공업 구조조정을 시작. 당시 한국최대의 중공업 회사였던 한국 중공업은 몇 개의 회사로 분할되어 오늘날의 현대중공업, 대우 중공업의 모태가 되었으며 자동차 업체도 통폐합 정리되어 오늘날의 대우자동차등이 태어나게 되었음.

 

-경제학자의 박정희시대 경제 평가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고려대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겸하고 있는 이필상 교수)
 
이하 이필상교수의 박정희 경제평가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큰 문제는 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 형성입니다. 정통성 없는 독재권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보겠다는 재벌과 불법공생관계를 형성한 것이죠. 권력은 재벌에 각종 인·허가상 특혜를 비롯해 금융·차관·세제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권력과 재벌의 유착이라는 불법구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 정당성 없는 지배계층이 지금까지 사회·경제·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지배구조라는, 역사발전의 큰 걸림돌을 만든 거죠.

 

그 둘째 병폐는 빈부격차입니다. 무조건 고속성장을 해야 한다, 가난을 탈피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성장제일주의로 나갔거든요. 그것을 위해 정부가 경제를 통제했어요. 통화증발과 관치금융에 의해 인위적으로 돈을 풀어 특정기업에 지원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그러다 보니 특혜를 받는 쪽은 자꾸 발전하고 부가 축적된 반면 일반 기업과 서민 계층은 인플레이션의 피해를 입으며 소득이 자꾸 떨어지고 빈부차이가 계속 벌어졌습니다.

 

빈부격차의 배경이 된 또 하나의 문제는 지하경제입니다. 정경유착 테두리에서 돈을 마구 뿌리고 고속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부동산 값이 폭등했어요. 권력의 특혜를 받은 계층은 부동산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부동산 값은 일반 물가보다 몇 배 상승하는 경향이 있어요. 공급이 제한돼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땅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지배계층은 그걸 이권으로 삼았어요. 증권시장도 비슷한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부동산과 증권시장이 지하경제의 온상이 된 것은 고속성장의 큰 부작용이죠.

 

셋째 문제는 경제력 집중이에요. 재벌을 집중지원해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정책을 펴다보니 일반 중소기업이 빈사상태에 빠진 거죠.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직적 주종관계가 돼버렸습니다. 중소기업이라는 게 산업의 풀뿌리로 상품 개발과 기술력 향상을 통해 경쟁력의 저변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재벌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해 산업발전에 엄청난 불균형이 생겼죠. 각종 인·허가 특혜를 받은 대기업이 조금씩 대주는 걸로 연명하다보니 자생적 기술이나 상품을 가지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죠.

 

가장 큰 문제는 조립수출산업 위주로 산업이 발전된 데 있습니다. 흔히 가마우지 경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마우지라는 새는 훈련을 시키면 고기를 잡아오는데, 그것을 삼키지 못하게 목을 묶어 놓습니다. 고기를 뺏고 나서 풀어주면 다시 고기를 잡아와요. 잡아온 고기를 빼앗기고 날아가는 일을 되풀이하죠. 우리 경제가 그렇다는 거예요. 외국에서 부품과 기계를 사들여 조립해 만든 상품이 주종을 이루다보니 수출로 해외에서 돈을 벌어와 봐야 부품값 갚고 기계값이나 기술료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죠. 진짜 이익인 부가가치는 뺏기고 조금씩 던져주는 먹이나 얻어먹고 사는 가마우지 경제를 만든 겁니다. 자생적 경쟁력의 기반이 처음부터 형성되지 않은 겁니다.

 

넷째 부작용은 지역격차입니다. 대개 동쪽에서 집권세력이 나오다 보니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동서간 경제력 격차가 커지고 그것이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이 됐어요. 지배계층은 그것을 또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경제의 동서분단선을 만든 겁니다. 그에 따른 사회갈등이 선거 때마다 극단의 형태로 표출되면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골이 깊어진 것입니다.”

 

“지역격차의 또 다른 측면은 도시 농촌간 격차입니다. 재벌들에게는 한국은행을 독촉해 돈을 지원해주면서 농촌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지원엔 인색했습니다. 지배자들의 횡포였죠. 그렇지 않아도 산업화과정에는 농촌경제가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인위적으로 육성하고 발전시키지는 못할지언정 거꾸로 황폐화를 가속시켰어요. 농촌 사람들이 안 되겠다 싶어 다 도시권으로 옮겨가면서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는 비대해지고 농촌은 황폐해지는, 기형적이고 비효율적인 국토발전이 이뤄졌습니다.

 

다섯째 폐해는 천민자본주의의 만연입니다. 고속성장을 독재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성장제일주의가 사람들에게 사치와 허영을 부추긴 겁니다. 부동산 투기로 돈 벌어 흥청망청 쓰고 해외에 나가 낭비하고 사치품을 사들이고… 그런 게 소비미덕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이 그걸 부러워하는 사회가 돼버렸어요. 그 과정에 가난한 이웃과 나누며 살던 전통적 가치관과 따뜻한 가족관, 공동운명체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회파괴라고 생각해요. 전통문화가 파괴되면서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됐다고 봅니다.

 

여섯째로 관료주의 확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독재권력을 장기간 유지하려다 보니 입법부 기능을 축소하고 사법부를 마비시켜야 했습니다. 반면 행정부는 굉장히 비대해졌죠. 사회를 지배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기업들을 길들이기 위해 엄청난 규제가 양산됐습니다. 관료주의가 엄청난 힘을 갖고 경제를 지배하다 보니 정부와 유착하지 못한 기업은 아예 발전 대열에 진입도 못하게 됐죠. 말만 시장경제지, 사실은 관치경제였습니다.

 

일곱째로 빚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로부터 금융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다들 자기 돈이 아닌 은행돈으로 사업을 벌이다 보니 부채비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죠. 특정 기업이 좀 어려워지면 그때마다 한국은행 돈 풀어 구제해줬습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좋은 기업이란 시장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물건 판 돈으로 스스로 발전하는 기업입니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돼야 하는데, 거꾸로 됐죠. 금융특혜를 받은 부실기업에 자꾸 돈을 대주니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부실이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기업들을 빚 먹고 사는 공룡으로 만든 겁니다. 외국 차관도 끌어다 그런 기업에 대주고. 기업들이 시장에서 평가받고 스스로 자본을 축적해 투자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돈 대줘 발전하는 기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다 보니 산업구조가 매우 취약해졌어요. 위험도도 높아졌고.

 

여덟째. 부패공화국입니다. 경제가 부패공화국의 희생물이 된 거죠. 정경유착에 따라 재벌과 권력층이 경제를 독식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경제가 희생됐습니다. 관료주의가 확대되고 규제가 양산되다 보니 뇌물이 판치는 비리구조가 위에서부터 형성됐고 그 영향이 민간부문에도 미쳤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가 그 씨앗을 뿌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죠.”


-박정희시대 경제지표들

[소비자물가 상승률(cpi)]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1979년에는 18.3%였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도 찬양의 대상인가?-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부동산]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노동시간, 산업재해, 소득상황]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즉 소득세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소득불평등도-지니계수 ]

 속칭 ‘한강의 기적’ 뒤편에서 부의 불균등 분배는 박정희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심화)는 1965년 0.344, 1970년 0.332, 1976년 0.391, 1980년 0.389, 1993년 0.310으로 나타났다. 대개 1960∼70년대를 ‘절대 빈곤의 평등’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위, 박정희 2위, 노태우 3위, 김대중 4위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이에 비해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김대중은 또한 경제성장에서 세계 최고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 5년만에 대한민국을 IT강국, 전자제품강국, 생명공학의 강국으로 올려 놓았고, 수출 최대 그리고 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세계 4위로 올렸고,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2위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한류의 꽃을 피웠지만 신용카드남발을 방치하여 신용대란을 초래함으로써 개인채무증가의 원인을 제공했다


*제주대 강기춘교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
1위: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점, 김영삼정권:10점, 박정희: 6점의 점수를 주었다.

 


-전체적으로 조명하는 박정희시대의 경제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차라리 선조가 임진왜란극복의 국방력기반을 닦았다고 하는 것이..

 

박정희가 경제의 기반을 닦았다는 말은 박정희 이후에 이루어진 엄청난 경제적인 성장은 다 박정희가 밑바탕을 잘 닦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것 또한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박정희경제는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수치로 표현하면 박정희말기에 박정희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그래서 후일 전두환이 일본에 40억달러구걸하기에 이름).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다음은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에서)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


둘째 박정희정권이 들어서고 초기에 박정희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뭔가를 이루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전혀 아니다.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특히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년~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1위이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라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그런데 전투수당마저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음)


(다음의 경제학자 최용식의 글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완벽하게 은폐되고 말았다.

 

================================================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최용식, 《경제역적들아 들어라》의 저자

 

선조때문에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선조가 있었음에도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이다 박정희에게 월남전이 있었듯 선조에게는 이순신을 비롯한 의병들이 있었다 박정희가 도로를 건설하고 포항제철을 짓고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면 선조는 이순신을 임명하고 의병장을 인정하고 권율을 임명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조는 후일 의병장들도 탄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박정희시대는 물가상승, 집값 상승 등 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언론에 내 보낼 수가 없었다. 물가상승도 물가조정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했다.박정희시절처럼 물가가 오르고 은행대출이자가 높으면 김대중. 노무현은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공과를 논한다고해도 박정희의 공적은 과오의 거대함으로 인해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다고 생각됩니다(허구헌날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을 노래하는 박정희지지자들보다 그 두가지를 인정하지만 경제실정이 너무나 큰 점으로 인해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어보입니다)

 

 

 

제2부: 동영상입니다. 아래 링크 추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2454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