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기타정치역사

[스크랩] 조선-일본의 경제력 비교

lionet 2012. 5. 23. 13:54

자꾸 어떠한 머저리들이 에도시대(임진왜란 직후 , 도쿠가와 막부)
부터 조선이 경제력으로 일본에 밀렸다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기에
진실을 알려 드릴려고 합니다.^^
일단 일전에 머저리 "풍신수길"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요약 했기에
한번 조일간 경제력을 살펴 보겠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일본의 상업적 발달을 말하고 그 중심을 화폐의 발달로 드는데.
미천학 지식으로 기반하여 쓴 글이구요
에로시대 참근교대제를 로 인한 비정상적 발달을 숙지하지 못하고 쓰는 글들임)
또한 조선통신사의 기행담을 이유로 일본의 놀라운 발전상을 이야기 하지만 이또한
미천한 지식에 기반일 따름입니다.
(통신사의 행로는 일본인들이 정한 것으로서 그 의도를 쉬히 짐작할수 있을 것 입니다.)

그당시 동아시아 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이
경제력의 표상은 바로 농업 그중에서 미곡의 생산량이 한나라의 경제력을 말해주는 표준지표 입니다.
시기는 1500~1600년대 전후로 잡고
한번 이야기 해볼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유럽평정도 프랑스의 중농주의 즉 남한의 5배에 달하는 비옥한 토지가 있기에 가능했죠)

1500~1600년을 기준으로 한
조/일 간의 인구수는
조선이:700~800만 내외
일본이:1500만 내외 입니다. <출처>
(john durand-historical estimates of world population)

당시 세종실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50만결에서 세종시기 150만결로 약3배의 비약적 생산량 증가를 이루었는데요.
그 이유는
1.한전의 폐지로 1년2모작이 허용되었고
2.홍건과 왜국의 침입으로 사실상 경작이 불가능 했던 해안가의 토지에 경작이 가능해졌습니다.
(3차례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 왜구의 섬멸)
3.고려말 전래된 농사집요의 전국적 유통과 농기계의 혁혁한 발전
4.물이 가까운 해안지대와 강주변에는 이양법,수전농법의 보급으로 폭발적 증가
5.태종시대 사찰에 귀속된 토지를 국가가 몰수
의 주요한 5가지 이유를 들수 있습니다.

분석을 해보면 평균 1결=240말=1말=8kg=1920kg
로써 19세기초반 조선 숙종때 편찬된 만국요람을 보면
세종때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만국요람 재용편2장,전답에 보면 총 생산량은 144만결로서 계산합니다.
(임진왜란 직후 160만에서->30만으로 대폭축소 해서 재건까지 200년이 걸림을 알수 있습니다.)
숙종당시 전국의 생산량은
한전(논)이 927602결 - 수전(밭)이 528990결로 써
전체 144만결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걸 현재의 무게 단위인 "톤"으로 계산하면 약 303만톤으로
현재 우리나라 농민 130만명이 연간 생산하는 460만톤(2009년 기준) 에 크게 뒤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는 144만결로 계산한 것이구요 세종실록지리지 상에 160만결을 계산하면
약 340만톤 입니다.

일본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 1600년도 기준으로 세력의 단위인 "석"을 대입하면
(도요토미 의 사망후에 일본의 패권을 두고 혈전을 벌인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를 기준으로 당시 유력 다이묘와
(조선은 세종기준이니 1500년전후이고 일본은 임진왜란 후이니 1600년 기준)

그 영지의 석고와 군세를 비례해서 소개드리자면,

도쿠가와 가 / 250여 만 석 / 7만 이상

우에스기 가 / 120만 석 / 3만

모리 가 / 120만 석 / 3만

마에다 가 / 102만 석 / 2만 이상

우키다 가 / 57만 석 / 1만7천

고바야카와 가 / 52만 석 / 1만5천

시마즈 가 / 60만 석 / 1만5천

조소가베 가 / 24만 석 / 6천6백

나베시마 가 / 35만 석 / 7천 이상

다테 가 / 62만 석(공식), 100만 석(비공식) / 2만5천

후쿠시마 가 / 24만 석 / 6천

가토 가 / 25만 석 / 6천

고니시 가 / 24만 석 / 6천 등이 됩니다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보면
당시 200석 규모의 봉토를 하사받은 사무라이가
휘하에 약 5명의 하급사무라이를 두었다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석 에 기준해서 당시 유력 다이묘들의 병력을 계산해 두었습니다.
대략 계산하면 30만명 남짓 하는데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가 조선 공격을 위해 모은 병력이
석성궁(도요토미 주성)에 정확히307,985명 이니 대략 맞다고 할수 있습니다
계산 들어가면
1석=2가마니=탈곡후=순수 쌀의 량은 80kg입니다.
(훗카이도 미개척 상태 입니다.)
즉 80*1천만=8억kg 여기에서 톤을 대입하면 정확히 "80"만톤이 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여기에 감안해 소규모 다이묘를 모두 감안해도 연간 생산량이 100만톤을 넘지 못함을 알수 있습니다.
(왜구의 노략질에는 이유가 명확합니다.)
다시 감안해 신숙주가 15세기 후반 일본을 기행후 분석한 자료를 보면
온난한 기후탓에 1년3모작도 했다는 것을 감안하여
그 면적을 30% 잡아도 200만톤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번스타인의 부의탄생의 문구를 인용 하자면

"일본은 너무나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기술적 진보조차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낳았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거의 모든 쟁기는 사람이 끌었고, 따라서 생산량도 미미했다. 1904년에 소가 끄는 쟁기가 모든 경작지의 절반 이상을 갈았다."
-부의 탄생, p380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선 = 750만명=340만톤
일본 = 1500만명=190만톤
입니다.
한마디로 에도시대의 조선경제력 추월은 개소리라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조선의 면적은 22만km2
일본의 면적은 28만km2
국토의 산지면적은
조선이 70%
일본이 80%
농경업이 발달은 비교할 수준이 아니지요.^^

일본이 무역에 목숨을 건 이유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절대로.
도요토미의 강화조건중 하나도 바로 명과의 조공무역 이었을 정도로 절실 했습니다.

보너스로 조선경제의 지표를 보여 드리면
1냥을 오늘날의 쌀의 가치로 환산하여
2만5천원을 기준으로 잡고

1505~6년 연산군의 진주구매 =8만 7548냥(8천개 .-_- 되진이유가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1615~18 창경국 건축비=72만1천냥
1783년 서울 빙계의 얼음판매액=11만냥(보관량 2440톤)
세종대 전국 소금세=12만7840냥
1505년 남천군 이쟁의 집값=3만1천냥
1665년 숙경공주집 건축비=2만1400냥
1734년 영안공주 혼례비=2만6000냥
1812년 홍경래난  진압비=30만589냥(식비만 계산)
1671년 훈련도감 연간 급료=28만9040냥(6022명)
1716년 경상도 판옥선1년 유지비=6216냥
1681년 하삼도(충청,전라,경상)의 조총생산비=2만5417냥(1525정)
                                          의 화약생산비=2만147냥(6044근,1근=600g=3626kg)
1597년 조총1자루=16냥

1566년 율곡이이의 상속재산=426냥(논8 밭0.19결,노비 15구)
1407년 정승 연봉=432냥
1687년 인삼1근=60냥
....등등 입니다.
재밌으셧죠.?
^0^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리오넬몇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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