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고대사이야기

[스크랩] 무덤 속 역사 코드, 고려 묘지명

lionet 2013. 12. 25. 11:10

 

 

 

정형화한 묘지명

묘지명墓誌銘은 무덤이 주인공을 기리고, 그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지은 글을 말하며, 때로는 그 글을 기록하여 무덤에 넣는 물건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묘지명은 고구려의 안악 3호분 묵서명墨書銘(357년, 고국원왕 27), 백제의 무령왕릉 지석(525년)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에서 이미 그 원초적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형화된 묘지명, 말하자면 죽은 이의 이름과 가계家系, 관직 이력과 인품을 비롯한 여러 행적, 혼인 등 가족관계, 장례 절차, 그리고 죽은 이를 기리는 운문의 명銘을 갖춘 묘지명은 고려 때부터 확인된다. 실물이 현존하는 고려 묘지명으로는 1024년(현종 15)에 만들어진 중국 출신 귀화인 채인범蔡仁範(934∼998)의 것이 가장 이르다. 다만 『경주김씨족보』에 968년경 추정의 김은설金殷說의 묘지명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10세기부터 고려 묘지명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왜 고려 때에 와서야 정형화된 묘지명이 제작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렵 쌍기를 비롯한 중국인 출신 귀화인들이 많이 활약한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발달한 묘지명 문화도 이들 귀화인들에 의한 문물 도입의 결과일 개연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묘지명의 가치성과 계층성

묘지명廟誌銘, 묘지墓誌, 묘표墓表, 묘명墓銘, 광명壙銘 등 실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고려 묘지명은 대부분 점판암 계열의 검은 석재로 그 지석을 만들었는데, 이는 분청사기나 백자, 전돌, 도기, 토기 등 다양한 재질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묘지명과 다른 점이다. 형태는 반듯한 방형方形이 가장 많고, 여기에 윗부분을 둥글거나 모나게 가공한 이른바 원수형圓首形, 규수형圭首形 등 변형도 더러 있었다. 또 드물기는 하지만 무덤 밖에 세우는 묘비墓碑처럼 받침대까지 끼워 놓은 것도 있었다.


 

한편 고려 묘지명의 크기는 그 제작의 계층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가로×세로로 나타나는 평면적을 정방형으로 처리하여 살피는 것이 효율적인데, 이에 따르면 배우자를 포함하여 하급 관인층(정7품~종9품)의 경우는 가로×세로 각 39cm, 중급 관인층(정4품~종6품)은 각 47cm, 고급 관인층(정1품~종3품) 각 57cm 가량이다. 물론 개별적으로는 이보다 훨씬 작거나 큰 것들이 있지만 평균적인 크기는 이런 정도이다. 이처럼 관품에 따라 묘지명의 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은 역시 경제력의 차이와 깊이 관련이 있을 터이다. 묘지명 제작을 위해서는 원석을 캐어 석장石匠으로 하여금 가공토록 해야 하고, 여기에 묘지명의 글을 새겨 넣은 후, 다시 땅 속에 매장하는 일련의 기본 과정에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시과 및 녹봉 지급체제의 파행으로 중·하급 관인층의 처지가 크게 열악해진 13~14세기에 중·하급 관인층의 묘지명 제작 빈도가 고급 관인층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묘지명 크기를 통해 확인되는 묘지명 문화의 계층성은 주로 경제적인 측면과 연결되어 있지만, 이보다 명확하고 엄격한 계층성은 바로 사회적·신분적인 측면에 있다. 천인이나 일반 평민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리던 향리의 경우에도 현재 그 묘지명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묘지명 문화는 철저하게 관인층 이상의 지배층만이 누린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미술적인 요소와 기록 자료로서의 가치

묘지명은 돌 위에 글을 새겨 놓은 기록 유물이지만, 그 자체로 미술품이기도 하였다. 돌에 음각된 글씨는 경우에 따라 매우 소박한 서체로 쓰여 진 것들도 적지 않으나, 많은 경우 단정한 해서체로 쓰여 있다. 특히 그 중에는 단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글씨들도 적지 않은데, 여기에 더하여 글씨 위에 붉은 색 안료를 칠함으로써 글씨를 잘 보이게 하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더한 것들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일부 전서체로 쓰여진 전액題額들과 함께 고려 서예사 연구에서 가지는 고려 묘지명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묘지명에는 글씨 외에 아무런 문양이 없는 것들이 많지만, 테두리에 돌아가면서 당초 문양을 베푼 것들도 적지 않다. 또 드물기는 하지만 호랑이 같은 동물 그림을 지석 뒷면에 새기기도 하고(「염경애 묘지명」), 거꾸로 뒤집힌 천인상天人像을 크게 본문 위쪽에 새겨 넣은 경우도 있다(「김유규 묘지명」).
고려시대의 묘지명은 역시 역사 기록 자료로서의 가치가 가장 크다. 고려시대의 경우 문집류나 다른 여러 금석문류에 비해 묘지명이 그 정보의 질에서 훨씬 뛰어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묘지명은 그 속성상 죽은 이의 삶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의 삶을 잘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속에서 묘지명을 통해 없는 사실을 터무니없이 날조하거나 왜곡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조선시대와 달리 문헌기록 자체가 크게 부족한 고려시대인 만큼, 『고려사』 열전에 입전되지 않은 인물의 묘지명이 현존 묘지명의 약 2/3 정도 된다는 점은 묘지명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나아가 고려 묘지명은 어디까지나 그 주인공이 살았던 고려 당대의 사실을 전하는 1차 사료로서, 조선 건국 이후에 편찬된 『고려사』와 달리 어떤 이념이나 사상, 종교적 잣대에 의해 기록을 자제하거나,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소략하게 처리할 이유가 훨씬 적었다.

 

『고려사』가 외면한 인물들의 묘지명

묘지명에서 11세기의 명신 문열공文烈公 박인량 朴寅亮(?∼1096)의 아들로 기록된 광제승통廣濟僧統 총서聰(1054~1139)는 『고려사』 박인량 전傳에서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존재 자체가 기록되지 않았다. 반면 묘지명에서는 박인량의 둘째 아들로 자字가 범진梵眞이며 홍원사의 7대 주지를 지내며 승통에 올랐다가 승랍 75세로 1139년(인종 17) 5월 17일에 흥왕사 감덕원感德院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채 입적하였다는 것과, 입적 6일 후에 홍원사 남쪽의 언덕에서 화장되고 26일 후에 영수산靈秀山 홍호사 서쪽 산에 안장되었음을 아름다운 문양을 곁들인 오각형의 돌에다 유려한 서체로 아로새기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에 입전된 인물이라 하더라도 『고려사』보다 묘지명의 내용이 훨씬 풍부한 경우 또한 많다. 여진 정벌로 유명한 윤관의 아들로서, 도가·불가에 두루 조예가 깊던 윤언민尹彦旼(1095~1154)은 『고려사』 윤관 전 끄트머리에 그의 아들 중 하나로서 「총명하고 영오함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인종 조에 상식봉어가 되었다」라는 짤막한 기록으로만 남았다. 반면 묘지명에는 그의 상세한 벼슬 이력과 자녀들의 이름 및 그들의 혼인 관계, 의술을 공부하여 많은 이를 치료한 일, 지방 재직 시 노자老子의 고사를 따라 푸른 소를 타고 출퇴근한 일, 이를 전해들은 인종 임금이 그의 출퇴근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그림의 제목까지 붙여준 일, 얽매임 없이 「신선 세상에 노닐」 던 정신세계와 사망 후에 도가와 불교계의 거물들이 모두 조문했다는 일 등이 지석의 앞뒷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생활사 자료의 보고

고려 묘지명의 가치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의 모습을 전해주는 면에서도 소중하다. 『고려사』에 전하지 않는 이승장李勝章(1138~1192)이란 관리의 묘지명은 그 좋은 사례의 하나이다.

「의붓아버지가 가난을 이유로 (이승장을) 공부시키지 않고 자기 친아들과 동업同業하게 하자, (이승장의) 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며 고집하기를, “유복자[이승장]가 다행히 잘 자라 학문에 뜻을 둘 나이[15세]이니, 그 친아버지가 다니던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뒤를 잇게 해야 해요. 안 그러면 죽은 뒤에 내가 무슨 낯으로 전 남편을 보겠어요?”라고 하였다. 마침내 (새 남편이) 결단하여 (이승장을) 솔성재率性齋1)에서 공부하게 하니…」


 

비협조적인 새 남편을 상대로 감히 전 남편에 대한 의리까지 들먹이며 전 남편 유복자의 최고급 사교육을 관철해내는, 조선시대와 사뭇 다른 고려 재혼녀의 당당한 모습을 다른 어떤 자료에서 이렇게 생생히 볼 수 있을까? 고려 묘지명에는 이러한 여성·혼인·교육 관계의 실상 외에도 임종과 빈소, 유골 안장 등의 장례 풍습, 가족 제도, 신앙생활 등 다양한 분야의 생활사 관련 자료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고려 묘지명이 한갓 장제葬制의 부산물에 그치지 않음은 이런 몇 가지 예를 보더라도 명확한 것이다.   

1) ‘해동공자’ 최충崔(984∼1068)이 창시한 고급 사립 교육 기구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아홉 공부방 중 하나. 
글·서성호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사진제공·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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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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