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고대사이야기

[스크랩] 비밀의 왕국 고조선

lionet 2014. 1. 6. 02:02

제1편 비밀의 왕국 고조선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역사스페셜 홈페이지입니다. 이 홈페이지에는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게시판이 마련돼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게시판에 시청 소감을 적어주시기도 하고 또 우리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나 의견을 써주시기도 하셨는데요. 우리 역사에 대한 시청자 여러분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이 게시판의 내용을 쭉 검색하면서 유독 자주 만나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단군과 고조선입니다.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의견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검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 옆에 단군과 고조선의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 검색됐는데요, 총 524건이나 됩니다. 지난 2월 21부터 지금까지 역사스페셜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총 2300여건, 그 중의 5분에 1이 단군과 고조선에 관련된 내용인 셈입니다. 정말 대단한 관심인데요. 아마 우리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관심이 집중된 시대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단군과 고조선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고조선은 확인된 사실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훨씬 더 많은 미지의 왕국입니다.


단군신화는 단순한 신화일까요 아니면 역사일까요?

고조선은 작은 도시국가였을까요 아니면 완성된 국가체제를 갖춘 나라였을까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실체규명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리의 역사를 찾는 일입니다. 그 소중한 우리 역사를 찾기 위해 역사스페셜은 모두 2회에 걸쳐 비밀의 왕국, 고조선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그런데 고조선을 들어가려면 우선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단군인데요. 단군, 과연 그는 누구일까요?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서있는 단군릉. 돌로 쌓아 올린 고구려 양식의 무덤이지만 이곳은 오래 전부터 단군릉이라 불려져 왔다. 무덤의 내부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지난 93년. 무덤 안에서는 두 사람 분의 인골이 발견됐다. 북한 학자들의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이 인골의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5011년 전 즉 기원전 3천 년경의 인골이라고 한다. 북한학자들은 이들을 단군부부라 주장하고 있다.

 


인골과 함께 화려한 금동 장신구들도 출토됐다. 하지만 이 무덤의 주인이 실제로 단군부부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현재 단군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단군신화가 유일하다. 이 단군신화를 고대의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까?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 장천 1 호분, 이 무덤의 앞방 북쪽 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희미해진 그림의 형태를 되살려 보았다. 신단수로 보이는 나무 중간에 굴속에는 곰이 있고 굴밖에는 호랑이가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는다. 곰과 호랑이 이는 단군신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용만 박사 ‘고구려 발견’ 저자

인터뷰) 고구려 고분벽화에 특히 장천 1호분의 벽화와 각저총에 단군신화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각저총에는 신단수 아래에 곰과 호랑이가 등을 맞대고 있는 그림이 있고요, 장천 1호 분에는 신단수 아래 굴속에서 고행하는 곰과 그것을 참지 못하고 나온 호랑이가 화살에 맞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에서도 단군신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군신화가 알려진 곳은 또 있었다. 중국 산동성 가상현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에 오래된 사당이 하나 있다. 무씨사당, 즉 무씨 집안의 사당이다. 2세기 중반에 지어진 이 무씨사당에는 특이한 석실이 있다. 석실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화상석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그림은 모두 서로 다른 설화나 신화를 담고 있다고 한다. 


장조걸 무씨 사당 관리인

인터뷰) 중국 동한 시대 무씨 집안의 사람으로 사당의 주인은 무량, 무개명, 무방 등 4대이다. 그들은 기원 17년부터 168년까지의 사람들인데 이 사당은 20여 년에 걸쳐 지어졌다.

 

 

그런데 무씨사당의 석실에는 단군신화와 거의 비슷한 내용의 그림이 있다. 이것은 환웅이 지상에 내려오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환웅과 함께 지상에 내려온 인물로는 나팔을 입에 대고 바람을 만드는 풍백(風伯), 망치를 들고 벼락을 일으키는 뇌공 그리고 비를 만드는 우사의 모습도 보인다. 모두 네 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이제 환웅이 다스리는 지상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곰과 호랑이가 등장한다. 2세기 무렵 이 중국 산동성 지역에서도 단군신화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만 박사

인터뷰) 거기에 굳이 단군신화를 그린 것은 고조선의 문화가 전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상석 의 내용은 첫째단에는 환웅의 지상강림. 둘째 단에는 환웅이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 셋째단에는 곰족과 호랑이족이 단군을 태어나게 하는 장면, 넷째단에는 단군이 세상을 다스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고조선의 문화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한반도에서도 단군의 전설을 간직한 곳이 있다. 강화도 정족산에 있는 삼랑성도 그 중의 하나다. 고려사 지리지1)에 의하면 단군이 그의 세 아들을 시켜 이 삼랑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단군은 신화나 전설의 형태로 아주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 기록 속에서도 단군신화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는데 요와 같은 시대였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역사서 중에서 단군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 외에도 삼국사기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등 그 내용은 간단하지만 수많은 역사서적들이 단군신화를 전하고 있다. 단군신화가 담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서영수 교수 단국대학교 사학과

인터뷰) 결국 곰을 숭배하던 이런 ?습은 신석기 당시의 풍습인데 바로 환웅이라고 하는 우수한 문물을 가지고 이주하지 않습니까? 환웅이 가져온 문화들이 청동기라든지 발전된 농업문화라든지 이런거 가져오죠. 이 두 세력이 결합해서 이뤄지는 것이 바로 고조선의 초기 모습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학교

인터뷰) 단군은 고조선 시대의 최고통치자에 대한 칭호거든요. 오늘날 같으면 대통령 그런 의미도 될 수 있겠고 중국의 천자와 같은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해를 하늘의 상징으로 보고 해의 아들이란 뜻으로서 소위 해머슴애 단군, 단군이 바로 해의 아들이란 뜻인데 하느님의 아들이란 뜻이죠. 우리 조상들은 고조선 시대에 최고 통치자를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런 뜻으로 단군이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10:31)


신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단군, 단군은 바로 고조선의 최고통치자였던 것이다.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고 그 시조는 단군왕검이다. 여기에서 단군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고조선의 최고 통치자의 명칭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단군은 왕이나 대통령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단군이 통치했던 고조선은 어떤 국가였을까요? 고조선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청동기시대의 국가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습니다. 그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청동으로 잘 다듬어진 단검입니다. 검의 날 모양이 아주 독특하게 생겼는데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비파형 동검이라고 부릅니다. 손잡이는 주로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요, 특이하게도 이 손잡이 끝에 돌로만든 장식이 달려 있습니다. 모양으로 봐서 단순한 장식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 그 누군가에 의해 사용됐을 이 비파형 동검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요?

 


지난 1974년, 부여 송국리의 야트막한 산언덕에 자리 잡은 밭 터에서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청동기시대 마을이 드러난 것이다. 마을에서는 모두 39기의 집터가 발굴됐다. 여기 저기 탄 흔적으로 보아 마을엔 불이 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엇보다 고고학계를 흥분시킨 것은 돌널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었다. 현재 송국리에서 출토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유물 중에서 눈길을 끄는 청동기가 있다. 바로 이 비파형 청동검. 손잡이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몸체 부분의 특이한 모양은 잘 남아 있다. 청동검과 함께 나온 유물들로 보아서 이 검을 사용한 사람은 꽤 높은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이 발견된 곳이 또 있었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동검은 광주 신창동에서 출토됐다. 동검의 조각은 비파형 동검의 것이 분명했다. 부여 송국리와 광주 신창동에서 나온 비파형 동검은 모두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비파형 동검의 완형은 어떤 모습인지 알기 위해 청동기 전문가인 이용문교수를 찾았다.


(비파형 동검의 구조는 어떻게 돼 있습니까?)

(구조는 전체적으로 검몸하고 그에따른 검을 쓰기위한 손잡이가 붙어있죠. 손잡이 끝에 검

파두식 한글로 풀어쓰면 검자루 끝자루 장식으로 구성이 돼 있습니다.)

 


비파형 동검은 검의 모양이 악기인 비파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파형 동검은 검의 몸과 손잡이가 따로 만들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검의 몸 부분은 청동에 납과 주석을 섞어 만드는데 칼 중앙부분이 날카롭게 돋아 있다. 손잡이는 티자형으로 끝에 돌장식이 달려 있다. 이 세부분을 조립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손잡이 끝장식은 검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용문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인터뷰) 청동기가 그 당시에 희귀하고 일부 특수 계층만 신분적으로 위에 있던 사람들이 사용했기 때문에 신분을 상징하는 하나의 의기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볼 수 있고 또 일부지역에서는 청동기가 산중턱에 자갈밭이라든지 이런데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매남유적2)이라고 합니다. 그런 곳에서의 청동기를 소유했던 사람들이 집단제의, 제사 활동을 할 때 매납 묻는 풍습이죠. 그 당시에는 청동기를 소유했던 그 당시 상당한 세력가들이 주재했던 제사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대단히 높습니다.

 


무기로 사용한 경우엔 중앙의 돌출부분이 혈조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파형 동검이 사용되던 시기 중국에서는 어떤 동검이 사용됐을까? 중국 산동성 박물관에서 중국식 동검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식 동검이다. 한눈에 차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중국식 동검은 비파형 동검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서요송 교수 (북경대 고고학)

인터뷰) 검의 형태는 검몸과 손잡이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분의 경계에는 두터운 이중테를 두르고 손잡이 끝은 접시모양으로 만들었다. 손잡이엔 몇 가닥의 원형돌출이 있는데 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두 동검의 차이를 비교해 보자. 검몸의 경우 중국식동검은 길쭉하고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손잡이 부분은 중국동검에 비해 비파형 동검이 훨씬 크다. 그리고 중국식 동검에는 가중기가 없다. 두 동검의 차이는 함께 출토된 청동유물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식 동검과 함께 출토된 이 유물들은 전형적인 중국식 청동기다. 비파형 동검과 함께 출토된 청동기 역시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독자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용문 교수

인터뷰) 북방계통의 청동기문화 또는 중국계의 청동검 문화하고 완전히 차이가 납니다. 특히 중국같은 경우는 검뿐만 아니라 제기용 청동들이 많이 제작이 됩니다. 근데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지역에서는 제기형은 거의 없습니다. 북방문화와 중국의 중국식 동검문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의 청동검으로 볼 때는 독자적인 문화세력이 문화가 형성되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 그것은 바로 비파형 동검을 사용했던 고조선 시대의 문화였다.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이 살았음직한 집을 복원한 것입니다. 뭐 좁긴 하지만 살만합니다. 이런 모습이었을 청동기시대 유적 부여 송국리에서 비파형 동검이 나왔습니다. 이 비파형 동검이 사용된 시기는 기원전 9세기, 지금으로부터 2900년 전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청동기 시대 하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청동기를 사용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그 시대에 일반인들은 여전히 석기를 사용했습니다. 청동기는 아주 일부 특수계층, 그 중에서도 지배계층의 독점 소유물이었던 것입니다. 지배계층만이 소유했던 비파형동검, 이 비파형동검은 중국 것과는 구분되는 고조선의 독특한 유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단군이라는 최고지배자가 있었고 또 이런 청동검을 사용했던 지배계층이 존재했던

고조선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고조선의 영역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가설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우선 고조선이 현재의 중국 요하를 중심으로 이 요녕 지방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일면 요녕설입니다. 두 번째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주장이 평양설입니다. 이것은 현재 북한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고조선이 처음에는 요하를 중심으로 요녕지역에 있다가 중국의 침략에 의해 평양지역으로 밀려났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자, 고조선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고조선의 유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물을 추적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비파형 동검입니다.

 


중국 조양시 외곽마을에 있는 청동기 유적을 찾았다. 마침 마을 입구에서 만난 리구안 노인이 청동기가 출토된 장소를 알고 있다고 했다. 배수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이 12대영자 유적은 기원전 8세기경의 청동기 유적지로 밝혀졌다. 옥수수밭 한쪽에는 지금도 오래된 석기가 눈에 띄는데 바로 이곳에서 비파형 동검이 나왔다고 한다.


리구안 (마을주민)

이 부근에서 검이 많이 나왔습니까?

예, 우리 누나가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데 청동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12대영자 유적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함께 잔줄무늬 청동거울 그리고 칼집이 출토됐다. 이번에는 12대영자 인근에 있는 소파적 유적지를 찾았다. 홍수가 나면서 드러난 기원전 8세기경의 청동기 유적. 최근까지도 이곳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류요우 (마을 주민)

고속도로 공사라는 곳에서 유적지 무덤을 몇 개 발견했습니다.


이 소파적 유적지에서도 비파형 청동검이 나왔다. 조양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의 대부분은 조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청동유물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그 유물 중에서 비파형 청동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양에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유적지는 무려 60여 곳. 한마디로 조양은 비파형 동검의 집중출토지역이다. 기원전 2800년전 ,바로 이곳에 고조선이 있었던 것일까?


복기대 박사 당시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연구원

인터뷰) 비피형 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 대륙까지에서도 골고루 찾아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찾아진 지역은 요녕성 조양지구인데 여기에서는 초기의 검부터 시작해서 후기 검까지 골고루 찾아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매우 중요한 유물로서 이것이 많이 찾아지는 지역을 볼 때 그 지역이 고조선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중국 길림시로 향했다. 비파형 동검이 북쪽으로 어디까지 나왔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중국 길림시 인근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적지를 수소문해 보았다. 서단산 유적은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에 걸친 청동기유적으로 중국 동북부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한다. 서단산 문화권이라 불리는 이 지역에서도 비파형 동검이 나왔다고 한다. 발굴자료에 의하면 비파형 창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가장 북쪽지역은 내몽고 자치구 이민하 지역으로 밝혀졌다.

 


이번엔 비파형 동검의 서쪽 경계를 찾아 내몽고 자치주 적봉시로 향했다. 적봉시 영성현 남산근 마을, 이 마을 뒤 밭터에 대규모의 청동기 유적이 발굴됐다. 발굴된 유적의 크기는 3천여 평. 지금도 밭 터에 흩어져 있는 유물들이 이곳이 3천년전 청동기 시대 유적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남산근 유적에서는 여러 자루의 비파형 동검이 나왔는데 이는 고조선의 문화가 여기까지 온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기록은 진 제국의 영토가 동쪽으로는 발해만에 이르고 조선과 경계였음을 알려주고 있다.3) 중국의 진나라는 이민족을 막기위해 국경지역에 장성을 쌓는다. 그렇다면 그 동쪽경계가 바로 고조선인 것이다. <회남자> 성을 쌓았는데 서쪽으로는 유사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요수와 만나며 동쪽은 조선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기록에서 고조선과 연결된 장성이 시작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갈석산이었다.

 


다행히 갈석산이라는 지명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중국 산동성 지역의 갈석산, 난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바로 이곳까지 고조선의 힘이 미친것일까!


윤내현 교수

인터뷰) 중국이나 저 북방지역에서는 고조선의 비파형동검 그런 동검이 안나오건드요. 그러니까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지역은 고조선의 통치영역이었다고 볼 수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북경근처에 있는 난하 지금 요서지역이죠. 그곳까지 비파형동검이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까지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 너머에 북경 서남쪽에 망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비파형 동검이 한 점이 출토됐습니다.

 

 

조양지역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이민하, 서쪽으로는 북경까지 간 비파형 동검. 이것이 고조선의 세력권이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청동검이 출토된 지역으로 봤을 때 고조선은 북쪽으로는 길림지역, 서쪽으로는 난하 유역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조선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중국의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지> 한전에는 보면, 秦開攻西方取地二千餘里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고조선을 침략하고 그 서부 2천리를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조선의 서부지역을 빼앗았는데 그 영역이 2천리가 됐다! 2천리면 무려 800킬로미터의 거리입니다. 고조선이 한때 무척이나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비파형 청동검을 통해서 고조선의 서북세력권을 살펴봤는데요, 그러면 이제 고조선이 남쪽으로는 어디까지 세력을 미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31:08)

 


중국 심양시, 비파형동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알려진 정가와자 유적을 찾았다. 유적의 건물외벽엔 비파형 동검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그나마 발굴사진을 통해 구체적인 유물의 출토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 눈길을 끄는 모습이 있다. 인골의 발부분에 수많은 청동단추가 놓여있는 것이다. 왜 하필 청동단추가 발 부분에 놓여 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상명대학교 박선희 교수를 찾았다. 박선희 교수는 이 청동단추가 인골의 신발에 달려있던 장식이라고 한다. 가죽신발은 썩고 청동단추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동단추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박선희 교수 상명대 사학과

인터뷰) 청동단추의 크기와 수량을 통한 실험결과 가죽 장화의 겉면을 장식하기보다 거의 다 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이같은 복장은 청동의 빛나는 색상으로 인해서 적에게 위엄을 보여주었을 수도 있고 칼이나 창, 화살과 같은 그러한 예리한 무기로부터 충분히 방어될 수 있기 때문에......

 


청동단추의 용도가 밝혀지면서 정가와자 무덤의 발굴 상태도 설명이 가능해졌다. 인골이 묻혔을 당시 청동단추는 이렇게 신발겉면에 빼곡하게 달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가와자 유적 이외에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12대 영자에서도 청동단추가 나왔다. 또 비파형 동검 출토지인 적봉시 남산근 유적도 예외는 아니다. 청동단추는 비파형 동검과 함께 비교적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청동단추가 소장돼 있다고 하는 경주 박물관을 찾았다. 청동단추의 한반도 출토상황을 파악하면 고조선 한반도 세력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북 영천 어은동에서 다수의 청동단추가 나왔다. 그런데 영천 어은동보다 더 남쪽지역이 있었다. 경주 죽동리에서 출토된 청동단추다. 청동단추가 출토된 경주 죽동리 마을.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버린 이곳에 오래전 청동기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고조선의 문화가 있었다. 청동단추는 내몽고 자치주 적봉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 청동단추와 비파형 동검이 공통적으로 출토되는 지역이 바로 고조선의 전체 세력권이라 할 수 있다. 


고조선의 유적에서 비파형 동검과 함께 공통적으로 나오는 유물이 바로 이 청동단추입니다.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청동단추도 고조선 지배계층의 소유물로 보이는데요. 주로 이렇게 장식용이나 방어용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자,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청동단추를 통해서 우리는 고조선이 현재 중국의 동북부에서 한반도 중부까지 그 세력을 미쳤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지도에 나타난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가 아닌 세력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고대의 영역은 오늘날의 영토개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고대에는 군사적 요새나 농경지역 같이 가치 있는 땅만 중요시했기 때문에 중요한 지역만을 직접 지배하고 나머지 지역은 그냥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역이 모두 고조선이 지배한 땅이라기보다는 고조선의 문화가 전파된 세력권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지도에 나타난 이 지역이 고조선의 세력권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됩니다. 과연 이렇게 광대한 영역을 가질 정도로 고조선은 아주 강력한 그런 나라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국력을 가늠하는 잣대중의 하나는 바로 군사력일 것입니다. 고조선의 군사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진주 남강. 그곳엔 4500년 전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려 110만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청동기 유적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당시의 발굴기록은 흥미로운 사실을 전한다. 무덤 안에 있는 이 인골은 특이한 형태로 매장되어 있다. 목 위의 머리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머리가 없는 인골, 이것은 당시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과연 당시에 전쟁이 있었는지 인골과 함께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았다. 유물중의 상당수가 칼과 도끼 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것은 화살촉이다. 종류도 다양해 전쟁용 화살과 사냥을 위한 화살이 구분되어 있다. 사다리꼴 모양의 이 능형 화살촉은 이전의 화살촉에 비해 크고 두꺼울 뿐만 아니라 양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당시로서는 무척 위력적인 무기였을 것이다. 또한 화살과 화살촉은 조립식으로 만들었는데 이 고조선화살의 우수성은 중국의 기록속에서도 나타난다. 고조선의 일부였던 숙신은 서주 무왕에게 화살과 화살촉을 선물로 졌는데 무왕은 그의 딸에게 이것들을 결혼 기념물로 주었다. 그만큼 숙신의 화살을 중요시 여겼다. 고조선의 무기중에는 쇠뇌도 보이는데 이것은 화살을 멀리 보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또 중국의 고조선 유적에서는 장방형의 청동갑옷 조각과 함께 심장을 보호하는 엄심갑도 출토됐다. 갑옷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고조선의 갑옷을 복원해 보기로 했다. 고조선의 갑옷은 이렇게 가죽옷 위에 크고 작은 청동단추를 빈틈없이 매달았을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 청동갑옷의 초기형태일 것이다. 고조선 유적에서는 청동단추로 장식한 청동투구도 발굴됐다. 이것이 고조선 군인들이 사용했던 청동투구다. 


박선희 교수

인터뷰) 고조선은 다양한 갑옷을 생산했는데 뼈나 가죽, 청동 철로 된 갑옷을 생산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갑옷은 모두 중국보다 생산개시연대가 이릅니다. 그리고 고조선의 갑옷의 특징은 뼈든 청동이나 철 모두가 갑쳔의 형태에 있어서 장방형을 고유 형제로 하고 있습니다. 갑편의 연결부위를 중국의 경우는 비단이나 가죽 끈으로 연결한 반면 고조선은 철징이나 청동 징으로 연결부분을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고조선의 것이 훨씬 떠 강하고 활동성이 컸다고 그렇게 생각됩니다.

 


갑옷으로 무장한 고조선의 군사력은 과연 고조선 갑옷 복원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의 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거왕은 태자로 하여금 말 5천필과 함께 군량미를 가져가게 했다. 그때 무리 만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뒤를 따랐다. 또한 이런 기록4)도 있다. 한나라가 육군 5만, 수군 7천명 동원 고조선 공격했다. 고조선은 이 병력에 맞서 1년 동안 싸웠다.


김용만 박사

인터뷰 실제로 한나라가 109년에 쳐들어왔을 때 좌장군 5만의 군대하고 7천의 군대를 해군으로 보냅니다. 고조선의 군대는 7천의 군대가 왕검성을 포위한 것을 보고 적의 군대가 매우 적다라고 보고 기습을 해서 그들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5만의 군대가 왕검성을 포위했는데도 불구하고 수개월동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 한나라 군대가 철수를 하고 다시 108년에 또 쳐들어옵니다. 당시 최강이었던 한나라와 1년 이상을 맞서서 싸웠다는 것은 고조선의 군대의 역량이라든가 규모가 3-4세기 고구려보다도 우월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아집니다.


성능 좋은 무기와 갑옷, 그리고 많은 수의 병력, 고조선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고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고조선에 대해서 더욱 많은 가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자 고조선의 그 많은 이 군사들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거대한 성이 있지는 않았을까? 수많은 병사들을 통제하려면 강력한 통치력이 필요한데 그렇다면 법이나 관료체제가 잘 정비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방비가 필요했을 텐데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고조선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였을까? 이런 의문들은 모두 고조선의 국가체제가 어떠했는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조선에 대해서 고대국가의 초기국가 형태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어느 정도 고대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고조선은 과연 어떤 국가였을까요?


고조선의 성과 국가체제

 


중국 내몽고 자치주 적봉시. 지난 74년 이곳에서 기원전 20세기의 고조선 유적이 발견됐다.  지금은 해바라기 밭으로 변했지만 발굴당시 이 터에는 무려 1100여기의 무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고 한다. 무덤은 흙으로 지은 작은 토광묘로 무덤 안에는 현대 한국인과 형질이 비슷한 인골이 있었다. 인골과 함께 각종 토기들이 출토됐는데 화려한 색깔의 이 채색토기는 초기 고조선의 독창적인 유물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무덤 떼의 안쪽에 성벽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높이가 2미터. 무너진 벽의 단면에는 는 줄무늬가 나타나 있었다. 판축한 흔적이었다. 토성을 쌓을 때는 먼저 얇게 흙을 깔고 충분히 다진 후에 다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이렇게 얇은 층의 흙을 꼭꼭 눌러서 쌓은 성을 판축성이라 하는데 성벽엔 가늘 줄무늬가 나있는 것이 특징이다. 판축토성은 돌처럼 단단하여 오랜세월이 흘러도 잘 무너지지 않는다.


대전자 성은 아랫부분에 넓은 둔덕을 만든 후 그 위에 성벽을 세웠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로 보아 원래 성벽은 이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4천년 전의 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벽은 견고했다. 성벽의 한쪽에는 안으로 깊게 패인 성문자리도 보였다.  수많은 무덤 떼의 주인공들은 바로 이성에 살던 주민이었던 것이다.


복기대 박사 당시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연구원

인터뷰) 성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일단 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사회여만 구축할 수 있는 게 성이거든요. 그런데 그 성도 규모에 따라서 얼마나 더 큰 힘을 갖느냐 하는 것이 비교가 되겠죠. 그렇다고 볼 때 하가점 하충문화 때 그 많은 성들이 발견된 서은 그 당시사회의 한 면을 계급구조라든지 아니면 집단의 힘 등 여러 가지가 표출된다고 볼 수 있겠죠.


또 다른 성터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대전자 마을 인근에 위치한 지가영자 마을. 이 한가로운 마을 뒤쪽에 대규모 성이 있다고 했다. 마을뒷산을 오르자 놀랍게도 눈앞에는 넓은 평지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성벽이 빙 둘러쳐져 있었다. 기원전 20세기의 성으로 밝혀진 이 지가영자 성은 지금까지 발굴된 고조선 성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백룬봉(마을주민) 

여기가 옛 성터다.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우리가 젊었을 때 발굴했다

 


남아 있는 성벽을 둘러보았다. 성벽의 겉면엔 돌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다. 그러나 완전한 석성은 아니다. 돌과 돌 사이의 틈은 흙으로 메꿔 놓았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폭은 4-5미터. 성벽 위에서 농사를 지을 정도로 폭이 넓은 편이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에 이른다. 성벽의 구조는 양옆에 돌을 쌓고 가운데 흙을 쌓아 올린 형태다. 이렇게 지가영자 성은 폭이 5미터나 되는 성벽을 빙 둘러 세운 원형의 성터였다. 성의 면적은 총 3만평, 성안에는 당시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터다. 이렇게 성안에서 발견된 집자리는 모두 200개에 이른다. 집자리의 흔적을 토대로 청동기 시대의 집을 복원해 보았다. 집의 모양은 모서리가 둥근 장방형으로 네귀퉁이에 주기둥을 세우고 보조기둥으로 지붕을 받쳤을 것이다. 성의 규모로 보안 성안에는 모두 600자리의 집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성의 주민은 적어도 천명이상이었을 것이다.


복기대 박사

인터뷰) 한 성안에 6백 자리 정도 집터가 발견됐다고 본다면 과연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뿐만아니라 지가영자 성을 중심으로 해서 한나절 거리의 걸어서 위성으로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성들을 볼 수 있거든요. 일단 학자들이 추측을 할 때 지가영자 성을 주위로 분포해 있는 작은 성들은 지가영자성의 통제를 받고 있는 성이 아닌가하는 그런 것으로 해석이 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하면 그 지가영자 성을 포함하여 작은 성들 이런 성들을 볼 때 당시에 지가영자 성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자가 있었지 않았느냐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중국의 기록 속에 고조선의 국가체제를 알려주는 단서가 있다. 한서지리지가 전하는 고조선의 범금8조. 현재 3개항만 남아있는데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고 남에게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배상하고 도적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 것이 그 내용이다.


노태돈 교수 서울대 사학과

인터뷰) 우선 노비제도는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이 법체계 일부로 들어가 있으니, 그리고 남을 다치게 한자는 곡물로 배상케 한다는 조항은 개인간 복수나 사적인 응징과 보복을 금지시키고 국가의 공권력을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케 했다는 측면을 보인다. 그것은 국가 즉 공권력이 어느 정도 성숙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득히 먼 옛날 고조선엔 대규모의 성과 법이 존재 했다. 고대국가 고조선은 완성된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조선의 성터는 모두 60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중국지역에 있는 고조선유적에 대해서 우리가 자유롭게 접근하고 또 발굴작업을 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성터가 드러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고조선이 간직하고 있는 더 많은 비밀들이 풀릴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고대는 알려지지 않은 미래와 같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듯이 밝혀지지 않은 과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에 대해서 하나의 커다란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고조선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이고 우수한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그 기반 위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넓은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완성된 국가체제를 갖춘 고대국가였다는 것입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치 마시기를.......


1) ‘전등산은 삼랑성이라고 하는바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그의 세아들을 시켜 이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2) 죽은이와 함께 매장하는 유물.

3) ‘地東至海○朝鮮’ - 사기 진시황본기.

4) 사기 조선열전.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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