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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러시아 비밀문서로 밝혀진 명성황후 최후의날

lionet 2014. 9. 11. 02:50

 

 

 

 

 

 

 

 

 

 

 역사스페셜 을 토대로 재구성

러시아 비밀문서로 밝혀진 명성황후 최후의 날

 

 

1895년 10월 8일 새벽.일단의 일본인에 의해 조선왕궁이 습격당한다.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고 명성황후는 잔인하게 시해된다.

조선왕궁에서 벌어진 이 참극을 기록한 보고서가 최근 러시아 에서 발견됐다.

백여년전에 작성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다.

이 보고서엔 실로 놀라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 있다.

 

▲웨베르보고서와 싸인(KBS 역사스페셜 캡쳐)

 


러시아에서 찾아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


백여년전 러시아에서는 명성황후의 최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러시아 대외정책 문서
보관소에는 재정러시아 시대의 외교 문서들이 총망라돼 있다.이곳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가 발견됐다.외교 관련문서가 소장돼 있는 이곳은 출입 통제가 엄격하다. 취재진은
촬영 요청 한달만에 취재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17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외교 문서가
시대별 국가별로 분류돼 있다. 문서를 채운 선반을 모두 합치면 8킬로미터, 수백만장의
외교 문서가 문서고를 가득 메우고있다.이중 한국 관련 문건은 3천여건, 그 속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가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틀만에 사건은 러시아로 보고됐다.그뒤 6
개월에 걸쳐 보고된 문서는 3백여쪽에 이른다.문서작성자는 웨베르.당시 주한 러시아공사다.
한러 관계를 연구자인 보리스 박교수와 이곳의 발레리 쿠시펠 소장과 함께 웨베르 보고서를
분석해 보기로했다.보고서는 현장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주한 외교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자료등 다각도의 정보와 증거 자료도 첨부됐다.웨베르는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명확한 상황을 신속하게 그려냈다.


소장 인터뷰 "러시아 지도부는 당시 극동지역 및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이점을 입증해주는 사실은 당시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보고서에 대한 니콜라이
2세의 반응이다"


웨베르의 모든 보고서는 러시아황제 니콜라이가 직접 검토했다.보고서에 그려진 사선이 바로
그 증거다.니콜라이 황제는 중요한 대목에 사선을 표시해 놓았다.여기에 황제가 남긴 표시가
또 있다.보고서를 다 읽은 뒤 황제가 직접 쓴 친필이다.황제가 표시한 부분은 지워지지 않게
도포 처리가 돼 있다.당시 러시아황제까지 격분했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보고서에는 명성
황후 시해상황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명성황후의 최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왕비 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 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
했다' 이 보고서에는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인 사바틴의 증언도 수록돼있다.그는 시해 직전의
상황을 증언했다. 보고서에서 흥미로운 문서가 또 눈에 띄었다.보고서 작성자인 웨베르가
자신의 견해를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의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보고서 내용 중간에 표시돼
있는 숫자 - 이것은 암호다. 웨베르는 숫자 암호로 비밀 내용을 전달했다.


-박보리스 교수 인터뷰 "당시 왕비가 시해되지 않고 구출되어 도주한 것처럼 소문이
서울에 퍼졌다.그런 소문속에 왕비 신변에 대한 보고에 비밀을 유지해야 하무로 암호문으로
작성한 것이다"


웨베르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말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박보리스 교수 인터뷰 "웨베르는 ..사건 전개 상황 보고...진범 밝히기 위해 노력...
일본인에 의한 것 입증했다"


그런데 보고서에 한장의 신문이 발견됐다.1895년 발행되던 성 페테르부르그 신문이다.여기에
사바틴의 보고서를 전면에 그대로 싣고있다.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당시 러시아에서도 파장이
컸다.그렇다면 당시 여론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을까? 당시 신문들이
보관돼 있는 러시아 국립 역사 도서관. 당시 러시아에서 발행되던 3대 일간지 신문 모음을
찾았다.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1895년 10월8일 이후의 신문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 부르크의 최대 일간지인 루스코에 슬로보 신문이다.

 

이 신문은
며칠에 걸쳐 명성황후 시해 사건 기사를 다루고 있다. 러시아 신문은 조선왕궁에서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이토록 신속하게 보도할 수 있었을까. 모스콥스코에 베도 모스티 신문에 그
단서가 있다. 이 신문은 비밀문서인 웨베르의 보고서를 입수했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
-박보리스교수 인터뷰 "한국의 정세라는 제목의 기사로서 러시아 외무부와 가까운 한
통신원이 웨베르 공사의 보고서를 인용 보도하고 있습니다. 민왕후 시해 후의 한국의 정세와
시해 관련 기사를 다루고 있다"


이 신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저말을 상세하게 풀어쓰고,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 특히 조선의 정세를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이 신문사가 입수한 웨베르 보고서였다.


박보리스교수 인터뷰 "이 신문 내용이 말하고 있는 점은 러시아 정부와 여론이 이
사건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고 일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해현장에 있었던 러시아인 사바틴의 증언과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 보고서를 통해서
일본의 만행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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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베르는 당시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주한 외교 사절들에게 알리고 이들 주한 외교 사절들과

더불어 사건의 진위를 캐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요,웨베르와 주한 외교사절들에 의해 일본의

만행은 세상에 드러나게 된것이죠.그런데 시해현장 목격자 중 한사람인 사바틴은 어떻게 궁궐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경복궁에는 서양식 건물이 하나 있었 습니다.

 

서양관인데요 이곳은 궁궐 수비 책임을 맡았던 몇몇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생활 공간
이었습니다.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의 심한 간섭과 위협을 느껴 궁궐에 서양관을 짓고 외국

인들이 머물게 했는데요,왜냐하면 궁궐에 외국인이 있으면 그들의 눈을 의식해 일본이 함부로
위협을 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그날 숙직이었던
외국인이 없었다면 일본의 만행은 감쪽같이 숨겨졌을 겁니다. 그 증거가 러시아 보고서에
있는데요.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진 뒤 각국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위를 묻는 내용입니다.

 

일본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자 일본은 무관한 일이라며 발뺌을 하며
일본공사 미우라는 이런 말을 합니다.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인들의 말이 더 신임할만하다'.

그러자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의 지적입니다.

'목격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

일본 공사관은 그제서야 당황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끝내버립니다.

아마 목격자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면 일본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겁니다.

러시아 공사관 웨베르는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보고서에 생생 하게

담았습니다.그 러시아 보고서의 내용을 따라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재구성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새벽 무슨일이 있었나?..

(보고서로 본 명성황후 시해사건)


지난 9월까지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에서 한러 외교사를 전공한 박종효 교수.그는 방대한 양

의 러시아 외교 문서들 속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를 발굴해낸 사람이다.
-박종효 교수 인터뷰 "거기에는 제 예상보다 훨씬 많은 한국관련 문서가 있다.그 문서는 수

십만건에 달한다.그 중에서도 특히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새롭고 생생

.
진실 밝혀야 겠다는 심정으로 수집했다"


박교수는 3백여장에 이르는 러시아 보고서 중 사바틴의 증언서에 주목한다.시해 현장의 목격
자인 사바틴은 보고서와 직접 그린 도면을 통해 일본의 궁궐 침입 경로를 밝히고 있다.
-박교수 도면 가리키며 인터뷰 "러시아 말로는/// 광화문이라는...명성황후가 계시던
건청궁까지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린다.이것이 신호탄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일본
군대는 두갈래로 나뉘어 궁궐의 북서문인 추성문과 북동문인 춘생문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궁궐의 전방과 후방에서 예상치 못한 일본의 습격을 받자 궁궐을 방어하던 시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린다.그렇다면 최초의 총성이 울린 광화문의 상황은
어떠했을까.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궁궐 점거와 명성황후 시해까지의 소요시간을
분석한 이민원 교수.그는 당시 광화문의 상황을 조명했다.새벽 5시.광화문에서 궁궐시위대와
일본 군대와의 접전이 벌어지고 광화문은 15분 만에 일본군에 의해 장악된다.


#이민원교수 인터뷰 "일본이 광화문을 통해 공격해 들어가면서 최초의 총성이 울린
것은 5시.일을 저지르고 사태 마무리하는데 총성이 울린 시각으로부터 마무리 되는 시간까지
불과 사십오분 정도였다"


궁궐문을 뚫고 들어온 일본군대가 찾은 곳은 건청궁.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경복궁 관계자 인터뷰 "이 자리가 건청궁자리입니다 지금 빈터로 남아 있지만은 고종
께서 거처 하시던 장안당 자리가 바로 이 자리가 되겠고 명성황후가 거처하시던 곳이 옥호루
자리가 바로 이 자리가 되겠습니다"

 

 

곤령합 옆의 옥호루


건청궁은 경복궁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일본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고종과 명성
황후는 궁궐의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서 생활했다. 건청궁의 서편엔 왕의 침전인 장안당이,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는 그 동쪽에 있다.명성황후가 시해 된 장소가 바로 이 옥호루다.시해
현장에서 명성황후 시해 행동대를 막닥뜨린 사바틴은 보고서와 도면을 통해 그들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옥호루로 통하는 두 개의 문들을 일본 보초들이 봉쇄했다.제복 차림의 일본
장교들이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뜰 가운데엔 무기를 내린 40명의 조선 병사가 정렬해
있었다.일본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 당한 명성황후 - 시해범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건청궁 동쪽 숲속에 묻어 버린다.

 

보고서 작성을 마치며 웨베르는 이렇게 적었다.

'전쟁도 아닌 평황시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 한 사상 유래없는 만행' 러시아 보고서는 그것을 밝히고 있다

 
향원정 뒤의 복원 된 건청궁

 

고종과 명성황후가 따로 거처하던 경복궁 내의 건청궁입니다. 노란색원이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입니다. 이 곳 건청 궁 내에서 명성황후는 최후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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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 현장 목격자인 사바틴이 그린 도면과 증언서에 따라 복원한 시해 사건 현장입니다.

옥호루로 통하는 문들은 일본보초들이 지키고 섰구요,옥호루 안팍은 일본군 장교와 양복과 기모

노 차림의 일본 무리들이 명성황후를 찾아서 살기 등등하게 휘젓고 다녔습니다.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그 어떤 저항도 못한채 명성황후는 이렇게 무장한 일본무리들에게 잔인하게 시

해 당해 버렸던 것입니다.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뜰 가운데 총을 내린채
정렬하고 있는 이 군사들입니다.현장 목격자인 사바틴의 보고에 의하면 이들 군인은
조선군이라고 했습 니다.조선군이 조선의 국모를 잔인하게 시해하는 이 현장에 
어떻게 조선군이 있었던걸까요. 조선군이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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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군대는 왜 그곳에 있었나


러시아 보고서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현장에 있던 조선 병사의 정체를 밝혀 놓고 있다.조선
병사란 훈련대 소속의 군인을 말한다. 훈련대는 1895년 일본의 건의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
군대다.


-강창일 교수 인터뷰 "첫번째 손을 덴게 조선 군대를 일본화 친일화 시키는 게 첫째
과제였죠 이때에 훈련대에 일본인 교관들을 집어 놓고..훈련대는 일본에 의해 조정받는

군대 라고 할 수 있죠"


조선 강탈을 국가 목적으로 삼았던 일본은 그들의 목적과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 확보가 필요
했다.일본은 훈련대를 통해 그것을 충족시키려 했다.조선 군사를 일본의 지휘 아래 둠으로써
군사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했던 것이다.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고 훈련대를 해산 시키고자 했다.시해사건하루 전 마침내 훈련

대 해산 명령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에 불만을 품은 훈련대가 명성황후를 시해할
목적으로 현장으로 간 것일까. 보고서는 훈련대가 전투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들은 실제로 사격하지 않았을까?

-강창일 교수 "당시 진압이라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동원이 돼가지고 가담
이사람들 총 쏠때.명성황후 시해 사건 모르고 있었다..만일 사태 대비...일본에 가담한다 
이정도의 역할이 부여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훈련대에게 책임을 전가할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훈련대가 동원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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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경복궁의 대전인 강녕전입니다.새벽 5시 궁궐습격의 신호탄인 총성이 광화문에서 울

리고 경복궁은 삽시간에 일본군에 의해 점령 당합니다.그리고 새벽 6시를 전후한 시각.
명성황후는 옥호루에서 시해되는데요 바로 그 시각.이곳 강녕전에는 의외의 인물이
나타납니다.바로 대원군입니다.대원군이라면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명성황후와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는데요. 그렇다면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요.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바로 시각. 대원군은 왜 궁궐에 온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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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왜 그곳에 있었나(대원군과 훈련대 주모 위장용)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아소정자리에는 지금은 동도 중 공업고등학교가 대신하고 있다. 건물의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은 당시 우물가에 놓였던 디딤돌만 운동장에 쓸쓸히 남아 있다.
-교장 인터뷰 "여기가 아소정터인데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나오신 이후에 돌아
가실 때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돌아 가셨어 건물은 아흔아홉칸짜리 묘소가 있어서 국태공원
이라고 불리었던 적이 있다"


대원군은 자신의 일생이 너무나 덧없음을 뒤돌아보고 스스로 조소한다는 뜻에 거처하는 집을
아소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당시 대원군의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말해 주고 있다.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당시 대원군은 사실상 이 아소정에서 외부와 차단된채 은둔 생활을 하며 말년을 보
내고 있었다.그런데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터지자 세상은 다시 대원군을 주목한다.당시 프랑

스 신문 일러스트라시옹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주범으로 대원군을 지목 하고 있다.정치적 대립
관계인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들은 정치적 갈등 관계였을까.


-최문형 교수 인터뷰 "왕후와 대원군 계속 갈등 빚은 것처럼 이해를 하는데 그건 사실
아니다. 68년 처음 갈등 시작 73년 10월달에 대원군 실각 당하니까 4,5년간만 대립. 대원군

은 어떤 존재인가 결국 민황후가 청나라 거부 일본 거부하려는데 청나라와 일본에 의해 차례로
민황후를 견제하기 위한 견제용으로 이용 당했을 뿐이다"
러시아 보고서 중 뮤텔의 증언서에는 대원군이 일본에 의해 이용 당했음을 알게하는 단서가
있다.1895년 10월 8일 새벽 2시. 일본군대는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에 침입한다.대원군이
방에서 나오지 않자 강제로 끌어내 가마에 태운다.그들의 목적지는 경복궁이었다.일본은
강제로 대원군을 궁궐로 호위해 온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대원군을 데려다 놓는 것

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그 책임을
대원군에게 전가시키기 위해서 대원군과 훈련대에다가
전가시키기 위해 끌고 갔죠.직접살해는 낭인들이 하고
대원군과 훈련 대는 끌고가서 앉혀놓고 나중에 시해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던 겁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노스차이나 헤럴드지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밝혔다.이 신문은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무관함을 보도하고 있다.대원군은 강제로 궁궐로 끌려가
죄수처럼 감금된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민원 교수 인터뷰 "이 자료로 볼 때 대원군은
이 사건의 주모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 일본측에 의해 강제로 경복궁에
끌려들어가 나중에 이 사건의 주범으로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로 대원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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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일,고종도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 무리들에게 습격을 당합니다.

왕비 를 찾아 왕의 침전에 쳐들어 온 일본 무리들은 고종과 세자에게 심한
폭행을 가합니다. 고종은 옷이 찢겨지고 세자는 칼등에 맞아 의식을 잃습니다.
.이 상황에서 고종은 중요한 목격을 합니다
러시아 보고서에 고종이 목격한 증언서 있는데요 한번 볼까요.'짐의 눈앞에서
일본인들,오카모토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끼,와타나베가 칼을 빼 들고

궁궐로 쳐들어 왔고 오카모토와 스즈끼가 왕비를 붙잡았다' 현장 목격자 중
고종은 유일하게 범인의 이름을 거명했습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 시해범들은 일본인이었습니다. 고종이 거명한 오카모토와

스즈키 와타나베 이들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임무를 맡은 행동대는 이십여명이

더 있었습니다.그들은 군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라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양복과 기모노 입고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낭인이라고 하는데요,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사복을 입은 이사람들 - 직접 살해를 담당한 이 낭인들의 정체는 뭘까요

 


 

낭인들은 누구인가?


근대 제국주의와 열강에 관해 연구해 온 최문형 교수.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을
수년째 추적하고 있다. 최교수는 시해범들의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던 중 중요한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명성황후의 살해를 담당했던 행동대의 단체사진이다.시해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대로 양복과 기모노를 차려입은 이들이 바로 낭인인 것이다.그런데 이 사진에 주목할 것이 있다.
사진의 뒷배경,바로 한성신보사다.한국 신문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신문 박물관.이곳에
백여년전의 신문인 한성신보가 소장돼 있다.한성신보는 구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신문이다.4쪽 가운데 3쪽은 국한문혼용기사고 한쪽은 일본어로 기사를 썼다.발행
인이 일본사람인 한성신보사는 어떤 성격의 신문인가 낭인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걸까
-최문형 교수 인터뷰 "한성신보사라는 것은 창립부터 공사관에서 모든 운영비를 대고
뿐 아니라 창립기금까지...우리나라에 기자로 가장한 자들이 들어와서 정보 수집을 한 기관
입니다"


한성 신보사의 기자들은 대부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로 가담했다.한성 신보사의 사장
아다치 겐조.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다.낭인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이 낭인들 중에서 이 사람이 바로 시바 시로우 하바드 나왔다는
시바 시로우입니다"


낭인 지휘의 총책임자인 시바 시로우.일본공사 미우라가 계획한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작전
참모로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이외에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들은 당시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낭인은 대륙침략을 위해
현지를 돌며 정보를 수집하고 행동하는 재야 정치인이었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일반적으로 이들을 깡패나 무뢰한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사실과
전혀 다르다.이들중에는 하버드출신도 있고 불어를 회화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영어

를 하는 사람도 여러사람 있었습니다.심지어 한선신보사 주필 구미모도 같은 사람은 아주 유명

한 한학자였습니다.이들은 지성을 갗춘 사람들이었습니다.다만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를 침략하고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조선낭인, 대륙낭인들이라 불리는 극우분자들이었습니다.


강창일 교수는 최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원된 낭인들의 명단을 입수했다.40대전후의 조선
에서 거주하던 지식인들.그들은 조선의 현지 사정과 언어 역사에 정통한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대륙침략을 주장하는 극우분자인 이들 낭인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범이라고 했을까.


#강창일 교수 인터뷰 "낭인의 역할 근대 일본의 대륙침략의 낭인의 역할을 축소하고
왜곡시켜 놓는부분이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낭인들이 했다는 측면에서 일본의 책임을
오히려 희석시키는 부분이죠"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롤드신문에 실린 보도는 낭인 역할을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일본을 비판하고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자 일본정부는 범인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한다. 사건을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기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범죄자들을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한다.
-강창일 교수 인터뷰-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석방되자 마자 전 일본에서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 연출 기차로 동경까지 오는데 모든 연변에서 이 사람들에게 박수 치고

환호하고 그랬다 도쿄 도착했을 때 천황이 시종 대신을 보내 수고했다고

노고를 치하했다고 하죠"


일본정부는 애처에 시해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일본 정부의 합작으로 저질러진 만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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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해범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석방되고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립니다.낭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시바 시로우는 정치 소설가로 더큰

명성을 얻고 국회의원에 수차례 당선됩니다.낭인 동원책이었던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일본 내각의 내상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범 대부분은 정치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사람은 주한 일본 공사관 미우라입니다.

 

일본 군대와 공사관 및 영사관 직원은 물론 일본 순사와 일본 낭인 들을 총동원하고 작전을 지시한

총지위자인데요, 역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주목하시죠. 미우라 바로 전의 주한일본 공사관이었던 이노우에입니다.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 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이던

사람입니다.그는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문제에 관한 전결권을 위임

받고 조선에 왔는데요, 조선에 있으면서 그는 갖은 내정 간섭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던 이노우에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 한달전 돌연 사임을 합니다.

대신 외교경험이 전혀 없는 무장 출신의 미우라를 천거해 그에게 명성황후 시해 총 지휘 임무를

맡깁니다.그를 앞세우고 이노우에는 배후 조정을 한 것이죠.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이렇게

일본 정부의 결정권자였던 이노우에가 조작한 사건이었습니다.다시 말해 일본정부가 조작한

사건이었다고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요,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왜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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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명성황후를 노렸나(대외 정책의 실권자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 일본행동대와 맞닥뜨린 사바틴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내말은 듣지도 않고 왕비가 어디 있는지 왕비가 누구인지만 물었다' 시해범들은

왕비를 찾기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시해범들은 왜 그토록 왕비를 노렸던 걸까.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그는 명성황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규장각 관장으로 있을 당시 명성황후 국장과 관련된 의궤를 찾아내 해제를 붙여 재간행하는

작업을 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명성 황후의 국상은 의궤에 상세하게 기록돼있다.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행록.

이 행록엔 고종이 황후를 정치적 조언자로 평가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고종이 대원군으로부터 권력 이양...황후 독서량 많고 ...

고종이 황후의 지혜...고종을 찬조했다"

여기엔 명성황후의 외교의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 있다.

수원 즉 먼나라와 편하게 지내라는 것이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일본과 서양 세력이 들어오는 상황속에서 어떻게 판단했느냐
하면은 가까운 일본 보다는 먼나라인 서양이 덜 위험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서양과 가까이 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서 서양 중에도 러시아 미국.서방
세계와 친교를 갖고 서방 세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청일전쟁도회 -이것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의 승리를 그린 만화다. 일본이 그린 작품으로
청나라를 무찌르는 일본군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열강이 조선의 이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

던 때,청과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려다 싸운 전투가 바로 청일 전쟁이다.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이것으로 조선진출의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뿐만 아니라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중국 요동반도 차지하게된다.그런데 일본이 요동반도로 진출하

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이에 제동을 건다.

 

러시아는 왜 3국간섭을 일으켰을까?
당시 러시아는 1891년부터 장장 오천오백 마일의 대륙 횡단시베리아 철도를 착공 중이었다.
러시아는 이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하여 대대적으로 남하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요동 반도를 차지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차질을 빚는다.러시아는 그래서 일본의 요동
반도 진출에 제동을 건다.


-이민원 교수 인터뷰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고 있던 러시아가 역시 자국의
방어적 입장에서 프랑스와 독일 끌어 들여 일본을 요동반도에서 군대 철수시키고 조선의 자

주 독립을 존중하라는 의미로 간섭을 하게 된다 이른바 삼국 간섭을 한다"


명성황후는 이런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당시 강국으로 등장한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철저히 견제해나갔다

. 조선의 외교관계에서 철저히 배제당한 일본에게 명성황후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최문형 교수 인터뷰 "정치의 주도 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 좌우 민왕후.특히 일본
거부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거부하겠다는 생각 민왕후...일본은 민왕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기 세력 부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러시아를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명성황후.그것이 바로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
한 이유다. 일본 세력에 의해 황후는 폐위된다.명성황후 시해와 폐위 사실이 알려지자 반일
감정은 극에 달하고 황후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와 복수를 외치는 의병 운동이 전국에서
확산된다


-강창일 교수 인터뷰 "한국내에서는 반일 의병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게 되고 국제적
여론도 일본의 악랄한 만행이 공개됨으로 인해가지고 부득불 일본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아니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되죠.그런 의미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전술적으로 실

패 한 작전이었다"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친일 내각의 핵심인물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고종은 친일세력을 제거해 나간다. 고종은 명성황후 장례를 국가 과제로
삼았다.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고종이 명성황후의 장례를 수차례 연기한다는 것이

다.


2년 2개월을 끌고서야 고종은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치른다.


#한영우 교수 인터뷰 "장레식이 늦어진 이유는 일본의 을미 사변에 대한국민 각계 각
층의 반성과 자각과 국수에 대한 열기 합쳐지면서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세우

는 과정이었다 그런 과정을 완수하기 위해서 장례식을 미뤘다 볼수 있다"


고종은 2년 2개월동안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끌면서 대한제국의 바탕이 되는 조칙들을 만들어
간 것이다.전국민의 요구와 합의에 의해 1897년 10월12일 마침내 대한 제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한달뒤인 1897년 11월22일.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위됐던 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른다.명성황후의 죽음은 나라와 국민의 하나됨을 이끌었다.황후의 죽음

이 최초의 근대국가인 대한 제국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2년2개월 동안 미뤄왔던 장례식을 치르기 며칠전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전에서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는데요,고종은 여기서 명성황후를 잃은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궁전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있어 본 적이없었다.

원수를 갚지 못하고 거상 기간이 지났다.그래서 나의 슬픔은 끝이 없다'

비극의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지 백여년이 지났어도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습니다.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는 용의자만 있을 뿐 지금까지 범죄자에

대한 그 어떤 처벌도 그 어떤 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다시 가리고 규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역사의 왜곡만 일삼는 일본에게 그 진실이 무엇이고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야기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는 문구가 적혀있어,

당시  시해범들이 작전명을 '여우 사냥'이라고 붙였다는
이야기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미우라 고로 공사>

 

 

 

 <시바시로우: 행동대 책임자

 


자료 더보기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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