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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 최강의 고구려 개마무사의 위엄2(가야 중기병과의 대결)

lionet 2011. 10. 19. 17:06

 

 

 

 

 앞서 언급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선보인 개마무사의 활약 이전,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 개마무사의 활약도 있었으며

당시 우수한 철기문화를 영위한 가야의 철기갑기병(동일한 가야 개마무사)과 고구려군과의 전투가 있었슴.

서기 399년, 여러 해에 걸쳐 만만한 신라를 괴롭히던 가야는 결국 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에 나섬

가야의 동맹인 왜군은 울산 남구의 태화강 하구에 상륙해 막강한 가야의 중기병과 함께 신라군을 거의 몰살 단계까지 몰아감.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5만의 정예병을 급파,

고구려의 남쪽 전진기지인 남평양에서 경주까지 직선거리로 약 530km인데 고구려군이 경주에 도착했을 당시 왜군은 신라를 약탈

하느라 여념이 없었슴.


고구려군은 곧바로 이들을 격파, 왜군은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도망쳤고 가야군은 패잔병을 수습해 급히 퇴각.

이때 가야도 개마무사를 운용하고 있었으며 가야 병력의 대부분을 우수한 철제 무기와 보후구로 무장.

고구려가 가야의 강력한 개마무사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가 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지만 전투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적으로 대응 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전투 노하우를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에 반해 가야는 이러한 노하우가 없었던 것.

가야의 중기병인 개마무사는 큰 철갑을 앞뒤로 이어 몸을 둘러싼 판갑을 채용.

고구려 개마무사는 가죽에 쇠를 덧씌운 피갑, 즉 찰갑으로 무장. 찰갑이 창검에 대한 방어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쇳덩이들이

분리 되어 있어 착용하고도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었지만 판갑은 무기에 대한 방어력은 뛰어나지만 기동력에 한계가

있었던 것.

이때문에 당시 가야군은 주력을 자신의 기마병으로, 보병은 왜군을 활용하는 전술을 채택.

결국 고구려와 가야의 동일한 중기병들이 격돌.

고구려군을 발견한 가야 수천의 개마무사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돌격을 감행.

하지만 여기에 맞선것은 고구려의 역전용사 개마무사가 아닌, 맥궁으로 무장한 고구려의 궁수들!

가야의 개마무사들은 이미 감행된 돌격에 쉽게 방향을 바꾸지 못했고 자신들이 입은 판갑옷을 화살이 뚫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대로 돌격을 멈추지 않음.

하지만....당시 고구려 궁사들이 갖고 있던 맥궁은 가야의 판갑옷을 뚫을 정도로 위력이 대단할 정도로 무시무시했슴.

돌격해 오던 가야의 개마무사들은 하나 둘씩 쓰러졌고 결국 무방비 상태가 되버림.

이런 상황에서 비로서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뛰쳐나와 가야군을 공격. 전투결과 가야군은 중기병과 보병등 거의 모든 병력을

잃게 된다. (남해안 대전)

이 전투로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세력이 약해져 지금의 부산지역에 해당하는 영토를 신라에 뺘앗겼고 금관가야의

패배는 멸망직전의 위기까지 몰린 신라로 하여금 기사회생해 영남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결국 후에 삼국 통일하는 원동력을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됨.


결국 고구려의 개마무사의 위력은 중기병 자체의 퀄러티도 뛰어났지만 이러한 중기병의 약점도 헤아려 다양한 전술을 현장에서

융통성 있게 운영하는 실제 전투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발휘한 전략에서 큰 빛을 발휘하게 된 셈.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legi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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